공적내용 |
평북 선천(宣川)사람이다.1911년 일제가 조작한 소위 사내총독(寺內總督) 암살 음모사건(일명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당시 15세의 신성학교(信聖學校) 학생이던 그도 구금되었으나 무죄로 방면되었다 한다.1919년 8월부터 10월 사이에 상해(上海)임시정부 군무총장 이동휘(李東輝)와 연락,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길림성(吉林省)의 유통화폐 2백만원을 위조할 계획을 세우고 박행원(朴幸源) 등이 서울 종로 6가에서 52,500매의 화폐를 인쇄하였는데 이를 지원하다가 체포되었으나 1920년 4월 증거불충분으로 방면되었다. 1921년부터는 고향에서 신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후진양성에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1927년 6월 10일에는 이 황(李晃)·이병헌(李炳憲) 등과 함께 신간회(新幹會) 서울지회 서기에 임명되어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1929년에는 일경의 감시를 피하여 만주 안동(安東)으로 피신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고 한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註·예심종결결정(1920. 4. 27) ·동아일보(1927. 6. 20) ·매일신보(1919. 11. 22, 1920. 5.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