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스카이(袁世凱)‘황제’를 꿈꾸었던 亂世의 야심가 / 신동준

많은 중국인들이 三國(삼국)시대의 曹操(조조)에 비유하며 ‘亂世(난세)의 奸雄(간웅)’으로 여기고 있는 위안스카이(袁世凱)의 묘는 허난성(河南省) 안양시(安養市) 환강(洹江) 북쪽 강안에 있다. 위안스카이의 묘는 대략 4만평 정도에 달해 皇陵(황릉)을 방불케 할 정도다.
그의 무덤은 틈이 있는 곳마다 쇳물을 부어 만든 까닭에,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의 폭파 시도에도 불구하고 한쪽 귀퉁이만 약간 훼손되었을 정도로 매우 견고하다. 당시 ‘잘 남겨서 反面敎師(반면교사)로 삼으라’는 마오쩌둥(毛澤東)의 지시로 위안스카이의 묘는 간신히 보존될 수 있었다. 소위 ‘袁公林(원공림)’으로 불리는 위안스카이의 묘는 개혁개방 이후 원래의 모습을 어느 정도 회복해 현재는 보존상태가 매우 좋은 편이다.
‘원공림’의 특징은 중국 전래 양식과 서양식이 기묘하게 뒤섞여 있는 데 있다. 6개의 石物 望柱(석물 망주) 중 文人像(문인상)은 祭天(제천)의 예복과 면류관을 착용한 채 손에 笏(홀)을 들고 있다. 武人像(무인상)은 北洋軍閥(북양군벌)의 제복과 군모를 착용한 채 손에 劍(검)을 들고 있다. 이들 석물은 ‘中華民國(중화민국)’의 초대 총통을 거쳐 처음이자 마지막인 ‘中華帝國(중화제국)’의 황제를 지낸 그의 삶을 희화화한 느낌마저 주고 있다.
시련의 세월
위안스카이는 咸豊(함풍) 9년(1859) 9월 허난성 샹청현(項城縣)에서 鄕紳(향신)인 위안바오중(袁保中)의 서자로 태어났다. 영아 때부터 식욕이 왕성했던 위안스카이는 모친의 젖이 모자라 숙부인 위안바오칭(袁保慶)의 부인 뉴씨(牛氏)의 젖을 먹고 자랐다. 아들을 두지 못한 위안바오칭이 조카인 위안스카이를 친자식처럼 귀여워하자 위안바오중은 위안스카이를 동생에게 양자로 내주었다.
위안스카이가 7세 때인 同治(동치) 5년(1866)에 양부 위안바오칭은 산둥성(山東省) 지난부(濟南府) 知府(지부)로 가면서 명망 높은 학자를 그의 스승으로 모셨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건달들과 어울려 말을 타고 명승지를 돌아다니며 紅樓(홍루)를 출입하는 등 공부를 등한시했다. 그는 무예에 남다른 흥미를 보여 나름대로 기마술에 뛰어난 기량을 지니게 됐다.
위안바오칭이 동치 12년(1873) 7월 콜레라로 급사하자 위안스카이는 베이징(北京)으로 올라가 당숙인 위안바오링(袁保齡)에게 맡겨졌다. 당시 당숙 위안바오링은 내각의 中書(중서: 비서관)를 거쳐 侍讀(시독)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위안스카이는 그의 엄한 단속에도 불구하고 계속 베이징의 홍루 근처를 배회했다.
위안스카이는 17세 때인 光緖(광서) 2년(1876)에 향시에 응시했으나 낙방, 이해에 부잣집 딸인 유씨(于氏)를 아내로 맞았다. 3년 뒤 다시 향시에 응시했으나 또 다시 낙방했다. 그는 과거를 공부할 때 모은 글들을 불태우면서 이같이 다짐했다.
“무릇 대장부라면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 나라에 보답해야 한다. 어찌 안이하게 붓과 벼루 속에 묻혀 세월을 헛되이 보낼 것인가.”
당시는 賣官賣職(매관매직)이 공공연히 이뤄지고 있었다. 그는 空名帖(공명첩)을 산 뒤 베이징으로 올라가 돈을 주고 實職(실직)을 얻으려 했으나 돈만 날리고 낙향하기도 했다. 가정도 화목지 못했다. 부인과 금실이 좋았으나 부인이 무심결에 자신을 ‘첩의 자식’으로 언급한 것에 大怒(대로)해 집을 나왔다.
광서 7년(1881) 11월 양부 위안바오칭의 의형제인 우창칭(吳長慶)으로부터 속히 산둥성 덩저우(登州)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리훙장(李鴻章)이 이끄는 淮軍(회군)의 統領(통령: 사단장)으로 있던 우창칭은 태평천국의 난 때 위안바오칭과 함께 싸운 전우였다. ‘慶軍(경군)’으로 불리는 우창칭의 군사는 리훙장의 돈독한 신임을 받고 있었다.
吳長慶 휘하에 들어가다
智將(지장)으로 명성이 높았던 우창칭은 장젠(張)과 주자루(周家祿) 등 당대의 名士(명사)를 참모로 두고 있었다. 그는 위안스카이에게 문서작성을 맡기면서 장젠과 주자루 등으로 하여금 문장을 고쳐 주며 스승 역할을 하게 했다.
그러나 무예에 관심이 많은 위안스카이는 사격을 연마하며 武才(무재)를 과시했다. 이를 눈여겨본 우창칭이 위안스카이를 營務處(영무처)로 보내 軍務(군무)를 돕게 했다. 광서 8년(1882) 6월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領選使(영선사) 및 問議官(문의관) 자격으로 톈진(天津)에 와 있던 조선의 金允植(김윤식)과 魚允中(어윤중)이 북양대신 대리 張樹聲(장수성)에게 구원을 청했다.
청국 조정은 장수성의 건의를 받아들여 북양함대 제독 딩루창(丁汝昌)과 참모 마젠중(馬建忠)에게 군함 3척을 이끌고 가 조선을 정찰케 했다. 딩루창은 리훙장의 주선으로 영국에서 해군학을 공부했고, 마젠중 역시 프랑스로 유학을 가 변호사 자격을 얻어 귀국한 인물이었다. 마젠중의 친형 마젠창(馬建常)은 유럽에서 공법을 공부한 뒤 주일공사 리수창(黎庶昌) 밑에서 일하다가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와 통리교섭아문의 會辦(회판)을 맡았다.
당시 청군의 지휘관으로 조선에 온 우창칭은 敎鍊兵隊(교련병대: 속칭 倭別技)의 훈련장소로 쓰였던 下都監(하도감: 동대문운동장 서쪽 지점)에 본영을 차렸다. 그는 위안스카이에게 군수품 공급과 행군감독을 맡겼다. 總兵(총병: 여단장) 우자오유(吳兆有)는 東別營(동별영: 서울대병원 서쪽 모퉁이), 총병 황스린(黃士林)은 靑坡(청파: 용산고 남쪽), 副將(부장) 장광첸(張光前)은 南小營(남소영: 장충단공원)에 포진했다.
조선주둔 淸軍의 2인자
위안스카이는 조선에 도착하자마자 조선인의 재물을 약탈하고 여인을 겁탈하는 병사를 처단해 우창칭은 물론 조선 조정으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이어 그는 군란 가담자 제거의 명이 떨어지자 兵權(병권)을 쥐고 있던 훈련대장 이재면을 감금한 뒤 김윤식을 불러 고종의 명을 받아 오게 했다. 이는 청군 출병을 합리화하기 위한 조처였다. 우창칭은 군란 진압 직후 위안스카이의 무공을 기리는 상주문을 올렸다.
위안스카이는 정5품인 同知(동지)에 제수되어 營務處(영무처) 산하의 會辦朝鮮防務(회판조선방무: 조선방어업무 참모장이란 뜻) 직책을 맡게 됐다. 조선 주둔군의 야전 지휘는 우자오유(吳兆有)가 맡았지만, 군대이동 등에 대한 정치적 판단은 위안스카이가 맡았다.
당시 우창칭은 조선 조정의 건의를 받아들여 위안스카이에게 신식 군대를 훈련케 했다. 이에 이해 9월에 500명씩 2개 부대로 편성된 ‘新建親軍(신건친군)’이 위안스카이의 주도하에 창설됐다.
당시 세인들은 三軍府(삼군부: 성북구 삼선동) 자리에서 위안스카이의 감독 아래 훈련을 받은 부대를 左營(좌영), 東別營(동별영)서 제독 주센민(朱先民)의 감독하에 훈련을 받은 부대를 右營(우영)으로 불렀다. 세간에서는 그의 지휘를 받는 좌영을 두고 군란 직후에 해체된 ‘倭別技(왜별기)’에 빗대어 ‘淸別技(청별기)’로 부르기도 했다. 이후 박영효의 지휘하에 일본식 군사훈련을 받은 군사가 前營(전영)으로 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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