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의 유명한 향토지 예성춘추(蘂城春秋, 1959년)에서 <삼연정 중수기>를 옮기고 잘못된 한자를 바로 잡았습니다. 소중한 책이지만 예성춘추에는 빠진 글자나 잘못된 글자가 많습니다. 예전에 삼연정(三蓮亭)을 방문하 니 정작 중요한 중수기 부분은 내용이 사라진채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새로 복원하며 예전 중수기를 달았다고 하는데 원문이 어떤지 궁금합니다.
아래 내용을 살펴보면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원래 <삼연정 중수기>에 가까울 것입니다.
동문계서(同門契序)를 쓴 분은 동양 신직균(東陽 申直均)인데 다음과 같이 써 있습니다.
강이대황락소춘지념이일 신직균 제(强圉大荒落小春之念二日 申直均 題)
丁巳年 陰曆 十月 二二日에 申直均이 글을 짓다는 뜻입니다.
처음 삼연정을 세운 것이 1930년이므로 정사년은 1977년으로 봐야 합니다. 그럼 중수기도 같은 시기에 쓰였을 것으로 봅니다.
삼연정은 언제 지었을까요? 예전에 찍은 사진을 올립니다.
<2017년 8월 24일 모습>
오른쪽 바닥에 놓인 것이 중수기가 써 있던 현판.
삼연정 예전 현판.
상량(上梁)에 <檀紀 四三○三 庚戌年 庚辰月 庚辰日 庚辰時 庚座 立柱 上樑>라고 써있다. 양력 1970년 4월 30일이다. 庚辰時는 辰時로 7시 ~ 9시를 가리키고, 庚座는 庚座甲向이며 15° 북쪽으로 틀어서 서쪽을 등지고 동쪽을 바라보는 걸 말한다.
<2019년 7월 21일 삼연정을 새로 중수하는 모습>
<星州李氏 祠堂 胡簡齋, 2017년 8월 24일>
호간재(胡簡齋)가 무슨 뜻인지 궁금한 분들은 아래 내용을 읽으면 알 수 있다. 처음 보았을때 胡자를 왜 썼는지 궁금했었다.
<원문>
三蓮亭 重修記
右作亭者 門人等以同門之諠 彈誠竭力
只設一楔而鳩聚 幾許替議 僉同始建一亭也
而山有德蓮里
有德蓮先生
以山水之樂 寓遊於其間 自號蓮隱
故取三蓮之意 作亭名曰 三蓮亭云而
其實卽 不負吾先生 奬育之厚思也
庚午建立之後 不過十餘年
而因於甲申水害 基址流落 東圯西傾
事必更築 然經費不許 至今未完 慚愧莫甚
且以數行書別紙 行狀文添付
諒察焉
行狀文
先生諱敎勉 字汝直 號蓮隱
其先隴西 己未 九月 十日生
父作子述受授 丁寧必有可紀之行
賦性渾厚 稟姿純粹曲承 庭訓勤學
劬業涵養傑然 而有闇然而日章之實
砥礪 廉隅而無進取 名利之心 親戚信之 鄕堂稱之 遠近人士 多來從受 皆曰 特以大儒 且居常操心 歛容端坐 未嘗 有疾言遽色 樂善好施 未嘗 言人之 遇惡不喜 與人無狎戱謔 與諸宗族 怡然和樂 若有言動 之失引析諷諭 未嘗 加以聲色 宗族亦稱德惠 久而不忘 云其遇親 終日不交睫 當寢終夜 伏枕邊依 其喘息踈 數以驗安否 其丁外艱 哀毁啜粥 幾於滅性 對人語 未嘗見齒 雖降寒盛暑 不脫衰絰 人以爲難也 隱德不仕 而譚笑生文 跬步成章有遺集 數卷藏于家 甲申病極 五月 十三日 考終 享年八十六 閱月 而窆于忠州 周德面 德蓮里 富興山 向庚之原從 其先兆也 後學何敢一毫溢美以累 先生之德性也哉
<교정ㆍ표점>
三蓮亭 重修記
右作亭者,門人等以同門之誼,彈誠竭力,只設一楔,而鳩聚幾許,僉同始經一亭也。
而山有德蓮里,有德蓮先生,以山之樂寓遊於其間,自號蓮隱,故取三蓮之意,作亭名曰三蓮亭云。而其實,卽不負吾先生獎育之厚思也。
庚午建立之後,不過十餘年,而因甲申水害,基址流落,東圮西傾,事必更築。然經費不許,至今未完,慚愧莫甚。
且以數行書別紙,行狀文添付,諒察焉。
行狀文
先生諱敎勉,字汝直,號蓮隱。
其先隴西人。己未九月十日生。父作子述受授,丁寧,必有可紀之行。
賦性渾厚,稟姿純粹,曲承庭訓,勤學劬業,涵養傑然,而有闇然而日章之實。砥礪廉隅,而無進取名利之心。親戚信之,鄕黨稱之,遠近人士,多來從受,皆曰特以大儒。
且居常操心斂容,端坐未嘗有疾言遽色。樂善好施,未嘗言人之過;遇惡不喜,與人無狎戲謔。與諸宗族,怡然和樂;若有言動之失,則引析諷諭,未嘗加以聲色,宗族亦稱德惠,久而不忘。
其遇親疾,終日不交睫;當寢終夜,伏枕邊,依其喘息疏數,以驗安否。其丁外艱,哀毀啜粥,幾於滅性。對人語,未嘗見齒;雖隆寒盛暑,不脫衰絰,人以為難也。
隱德不仕,而譚笑生文,跬步成章。有遺集數卷,藏于家。
甲申病極,五月十三日考終,享年八十六。閱月,而窆于忠州周德面德蓮里富興山向庚之原,從其先兆也。
後學何敢一毫溢美,以累先生之德性也哉。
<번역>
삼연정 중수기
이 정자는 문인(門人)들이 동문(同門)의 뜻을 하나로 모아 성심을 다해 힘쓴 끝에 세워진 것이다. 비록 작은 계(契, 同門契)에서 시작되었지만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의논한 끝에 마침내 정자를 세우게 되었다.
덕련산(德蓮山)에 덕련리(德蓮里)가 있고, 그곳에는 덕련선생이 계셨다. (而山有德蓮里, 有德蓮先生. 조선환여승람 충주목 산천 항목을 보면 黃金山: 在郡西四十里, 德蓮山: 在郡北五十里라고 나온다. 황금산은 주덕읍 사락리에 있고 덕련산은 덕련리에 있다. 德蓮山: 在郡西五十里를 잘못 쓴 것이다. 황금산에서 거리를 측정하면 정확히 일치한다. 충주시 북쪽으로 덕련산은 없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1912년]에는 德面 鳥洞으로,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 1917년]에는 德蓮里 德面 鳥洞 墻內里 倉洞으로 , [필사본 조선지지자료, 1914년]에는 덕련리에 속한 마을로 鳥洞 조골, 倉洞 창말이 보인다. 鳥洞이 쭉 중심마을이었고 삼연정은 조동마을에 있다. 德蓮里라는 法定里는 德蓮山에서 유래했다고 봐야 한다. 덕련리에 덕련산이 있고 덕련선생이 있다가 맞는 표현이다. 德蓮里, 德蓮先生, 蓮隱에서 三蓮을 취한 것이다)
선생은 산수의 즐거움을 벗 삼아 이곳에서 유유히 지내며 스스로 연은(蓮隱)이라 호(號)하였다. 이에 그 뜻을 따라 '세 송이 연꽃(三蓮)'의 의미를 취하여 정자의 이름을 삼연정(三蓮亭)이라 하였다.
이는 실로 우리 선생의 두터운 가르침과 길러주신 은혜를 저버리지 않으려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경오년(1930년)에 정자를 세운 뒤 십여 년이 채 지나지 않아 갑신년(1944년) 큰 수해를 만나 터가 유실되고 건물이 동쪽은 무너지고 서쪽은 기울어 다시 지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재정 형편이 허락하지 않아 지금까지도 공사를 마치지 못하였으니 부끄럽고 송구한 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이에 몇 줄의 글과 함께 별지에 선생의 행장을 덧붙이니 살펴주시기 바란다.
연은선생 행장(蓮隱先生 行狀)
선생의 휘(諱)는 교면(敎勉)이고, 자(字)는 여직(汝直)이며, 호는 연은(蓮隱)이다.
선생은 먼 선조(先祖)가 농서(隴西, 中國 甘肅城의 地名) 사람으로, 기미년(1859년) 9월 10일에 태어났다. 부친은 자손들에게 학문을 전수하며 늘 간곡히 가르쳤으므로 반드시 기록할 만한 행적이 있었다.
선생은 천성이 너그럽고 두터웠으며 자질이 순수하였다. 부모의 가르침을 정성껏 받들고 학문에 힘써 마음과 덕을 닦았으며,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날로 빛나는 참된 학덕을 갖추었다. 절의를 굳게 지키고 명예와 이익을 구하는 마음이 없었으므로 친척들이 신뢰하였고 향리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먼 곳과 가까운 곳의 선비들이 많이 찾아와 배우니 모두가 큰 유학자라고 일컬었다.
평소에는 마음을 단속하고 몸가짐을 엄숙히 하여 앉아 있었으며, 거친 말이나 성급한 얼굴빛을 보인 적이 없었다. 선행을 즐기고 베풀기를 좋아하였으며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았다. 나쁜 일을 만나도 함부로
분노하지 않았고 사람들과 함부로 희롱하거나 농담하지 않았다.
종족들과는 언제나 화목하게 지냈으며, 누군가 언행에 잘못이 있으면 조용히 타일러 깨우쳐 줄 뿐 얼굴빛을 바꾸어 꾸짖는 일이 없었다. 종족들 또한 그 덕과 은혜를 오래도록 잊지 않았다.
부모가 병환을 앓으면 밤낮으로 눈을 붙이지 않았고, 밤에는 베개 곁에 엎드려 부모의 숨소리가 고른지 살피며 편안한지를 확인하였다. 부친상을 당해서는 슬픔으로 몸이 쇠약해질 정도였고 죽으로 연명하여 거의 몸을 잃을 지경에 이르렀다. 사람과 이야기할 때에도 웃어 이를 드러내는 일이 없었고, 한겨울이나 한여름에도 상복을 벗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 효성을 어렵고도 훌륭한 일이라 여겼다.
덕을 숨기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으나, 담소 가운데서도 글이 절로 이루어져 몇 걸음 옮기는 사이에도 문장이 완성될 만큼 문재가 뛰어났다. 유고집 수 권이 지금도 집안에 보존되어 있다.
갑신년(1944년)에 병이 위독해져 5월 13일 세상을 떠났으며, 향년 86세였다. 한 달 뒤 충주 주덕면 덕련리 부흥산 경향(庚向, 正西)의 언덕에 선영(先塋)을 따라 장사(葬事)하였다.
후학(後學)인 우리가 어찌 감히 한 터럭이라도 지나치게 꾸며 선생의 덕성을 손상시키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