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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8. 묵상글 (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 참된 신앙은 어려울 때 드러난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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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참된 신앙은 어려울 때 드러난다
무서운 꿈을 꾸었다며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데 무엇을 무서워하십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님, 꿈을 지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결정적으로 위기 앞에서는 주님을 믿지 못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의 소유자 되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배 안에 있었는데 마침 거센 돌풍이 일었습니다. 배 안으로 물이 들이쳐서 위험에 처해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태평하게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하고 하소연하였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믿음의 수준을 드러내 줍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깨웠지만, 사실은 깨어나야 할 사람은 제자들입니다. 거센 돌풍을 잠재우실 능력의 주님과 함께하면서도 주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는 이 연약한 믿음의 삶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배를 함께 탄 것은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동의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돌풍이라는 환난이 옴으로써 그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결국 처음에 가졌던 순수한 마음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 믿음을 회복해야 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돌풍을 통해서 믿음의 현주소를 보았다는 것이 은총의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돌풍이 이는 바람과 호수를 향해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 졌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나와 함께 죽는 것을 왜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느냐?”는 질문입니다. 나와 함께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 는 물음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인생여정에 맑은 날도 있고, 흐린 날도 있으며 폭풍우가 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거센 돌풍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는 능력을 지니고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따라서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믿음을 간직하고 희망을 키워야 합니다. 베드로의 첫째 서간 5장 7절에는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 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선언하였습니다.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 내가 느끼지 못하는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옆에 계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밤이란 악마가 활동하는 시간이고, 깊은 물과 풍랑은 생명을 위협하는 혼돈의 세력을 상징합니다. 삶의 여정에서 종종 악의 세력이 거센 풍랑처럼 우리를 위협하여 혼란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곤경에 빠졌을 때, 역경이 폭풍처럼 휘몰아칠 때 우리는 혼자라는 생각에 더욱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손희송). 시련과 역경 속에서 주님의 현존이 느껴지지 않는 순간일지라도 주님께서 우리 곁에 함께 계심을 굳게 믿고 그분께 끊임없이 간청하면서 매달립시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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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사랑이 잠자지는 않는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공교롭게도 오늘 독서와 복음은 여정과 믿음에 대한 얘기입니다.
그런데 왜 믿음이 여정에 필요하겠습니까?
자기 좋아서 떠나고 자신감이 있어서 떠나는 여정이었다면
믿음이 굳이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도 그렇고 제자들도 그렇고,
자기들이 원해서 떠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떠나라고 하시니 떠난 것이고,
가야 할 목적지도 자기들이 원하는 곳이 아니라 주님께서 제시한 곳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도 제자들도 떠나기 싫었을 겁니다.
그 늙은 나이에 떠나라시고 그 밤에 떠나라 하시니 말입니다.
그러니 좋아서 떠난 것이 아니라 순종으로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감도 없었을 것이고,
그러니 자신감으로 떠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직도 믿음이 없다고 나무라십니다.
제자들의 경우 아직 믿음이 부족한 것은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한배에 계심에도 겁을 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제자들에게 믿음이 있다면 겁을 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아무리 주무시고 계셔도 주님은 제자들을 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겁을 냈다는 것은, 주님의 구원 의지와
구원 능력을 둘 다 믿지 않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믿지 않은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다면 주님의 의지와 능력을 둘 다 믿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서 우리가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은,
주님의 능력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의지에 대한 불신일 겁니다.
나는 지금 한 고통을 겪고 있는데, 그런데도 주님은 잠자고 계신다고 느낍니다.
오늘 제자들의 표현대로 주님도 나와 같이 깨어 걱정하셔야 하는데
주님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고 천하태평이시다고 느낍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제자들의 느낌도 우리의 느낌도, 틀린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일부러 잠자고 계십니다.
그러나 잠자고 계셔도
사랑이 잠자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도 사랑할 때는 사랑이 잠자지 않는데
주님께서는 더더욱 그러시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잠자고 계시는 것은 우리의 인생길에서
풍랑이 최고조에 달하고 우리의 겁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우리의 구원 갈망도 최고조에 달하기를 기다리시는 것이고,
그리고 기다리시는 그것이 사랑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왜 사랑인지는 지나고 나면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도 우리의 인생길에
주님께서 한배를 타고 계신다는 것만 잊지 않으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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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마르 4,35)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비유들을 통해서 하늘나라에 대해 가르치시고, 저녁이 되자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마르 4,35)
저녁이 되어 어둠이 닥쳐오는데도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도 저녁이었습니다. 그리고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새로운 출애굽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어둠을 가르고 나아가는 이 여행에 거센 돌풍이 일고,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쳤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가지만, 동시에 온갖 환란과 위험과 함께 갑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제자들의 위험에 수수방관으로 그냥 침묵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이 죽게 되었는데도 말입니다.
대체, 예수님의 이 침묵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예수님의 이 침묵은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이지만, 동시에 믿음이 요청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사실 풍랑 속에서 주무신다는 것은 아버지께 대한 전적인 신뢰를 나타냅니다. <시편> 작가는 노래합니다. “자리에 들자마자 단잠이 깊사오니 든든히 살게 하심 홀로 주님 덕이오이다.”(시편 4,9). 그러니 이는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전적으로 아버지께 신뢰를 두고 계시는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실, 잠들어 있는 이는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현존에 깨어있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이 바로 잠들어 있는 이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막상 깨어나야 할 이들은 제자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느님께서 우리의 청에 응답해주지 않으신다고 투덜대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가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바로 그 때가 현존하신 그분께 의탁하고 믿음으로 응답해야 할 때임을 말입니다. 시편작가처럼, 주님께서 “뒤끓는 바다를 호령하시고 솟구치는 물결을 붙잡으시는 분”(시 88,9-10)이심을 믿고 의탁해야 할 때입니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주님께서 ‘함께 계시며 동행하심’에 대한 믿음과 의탁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불신을 깨우쳐주시고,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곧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 4,39)하시며 광풍을 잠재웁니다. 우리의 온갖 두려움과 걱정과 불신을 잠재우시고, 믿음으로 깨우십니다. 새로운 출애굽을 통해 어둠을 건너, 새로운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사실, “예수님의 침묵”은 나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의미합니다. 마치 십자가에서의 “아버지의 침묵”이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였듯이 말입니다. 바로 이 믿음이 예수님께서 그 거센 돌풍 속에서도 간직할 수 있었던 평화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하시며 제자들의 믿음을 일깨우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시편>작가처럼 ‘함께 계시는 주님’께 믿음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주님, “비록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 해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나이다.”(시 22,4).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주님!
잠들어 있는 이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입니다.
깨어나야 할 이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입니다.
당신이 함께 계시건만, 불신으로 제가 두려워합니다.
주님, 풍랑을 맞아 가라않으면서야, 비로소 제가 키잡이가 아님을 봅니다.
풍랑 속에서 잠들어 계셔도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키시는 분,
당신이 저의 주님이십니다.
당신은 주무셔도 주님이시오, 깨어 계셔도 주님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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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지순례를 마치고 뉴욕에서 아침으로 ‘곰탕’을 먹었습니다. 며칠 한국음식을 먹지 못해서인지 곰탕의 구수한 육수와 김치 그리고 깍두기가 입맛을 사로잡았습니다. 민족을 구분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유전학적인 분류가 가장 정확할 것입니다. DNA는 인류의 시작과 지금까지의 여정을 정확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가족을 확인하는 방법으로도 DNA 검사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지정학적인 분류도 타당한 방법이 됩니다. 저는 한반도에서 태어났습니다. 한국에서 왔다는 말을 들으면 동질감을 느낍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좋은 분류방법입니다. 교포 2세들 중에는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같은 한국 사람이지만 어색한 점이 있습니다. 저는 음식도 민족을 분류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이 있습니다. 몸과 땅은 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한국 사람은 한국에서 나는 음식을 먹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외국에서 살지만 입맛은 잘 변하지 않습니다. 저는 뉴욕에서 4년간 살면서 음식 때문에 불편한 적이 없습니다. 조금만 걸어가면 ‘한국음식’을 한국음식보다 더 맛있게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트에서도 한국음식을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먹방’이 인기 있는 것도 ‘미각’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성지순례 중에 ‘사제’이기 때문에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도움을 받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수사님은 무덤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베들레헴 성전에서는 예수님 탄생을 표시하는 곳에서 경배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숙소에서도 사제이기 때문에 경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사제임을 알 수 있는 방법도 몇 가지 있습니다. 교구에서 발급해준 ‘사제신분증’이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사제신분증을 보여주지 않아도 제가 사제임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 세계 모든 사제들이 함께 입는 ‘사제복’입니다. 사제복에는 ‘로만칼라’를 착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작고 하얀 로만칼라는 제가 사제임을 드러내는 표시입니다. 공항에 내려서 이민국 심사를 받을 때도 사제복을 입고 있으면 심사원이 ‘신부님!’이라며 인사하곤 합니다. 예전에는 사제복이 거북할 때도 있었습니다. 사제복이 어울리지 않는 곳에 있을 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사제라는 것을 알아보는 것이 어색할 때도 있었습니다. 32년 사제로 지내보니 사제복이 제게는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의 미각이 쉽게 변하지 않듯이, 사제는 사제복을 입을 때가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종교인과 비종교인을 구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 부활에 대한 믿음,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입니다. 수학과 과학에는 ‘공리’가 있습니다. 공리는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기에 증명하거나, 분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공리라는 터전 위에 수학과 과학이라는 탑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종교인에게 하느님에 대한 믿음, 부활에 대한 믿음,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은 증명과 분석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은총의 표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배움과 탐구의 영역이 아닙니다. 믿음은 관념과 사유의 영역이 아닙니다. 믿음은 실천이며 행동의 여정입니다. 사제라는 직분이 믿음에 도움을 주겠지만 실천과 행동이 없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천과 행동이 따르지 않았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교만을 질책하셨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실천과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호모 사피엔스’에서 인류가 문명과 문화를 발전시킨 원동력에는 ‘믿음’이라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가족, 부족, 민족은 ‘믿음’이 없으면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는 ‘신용’이라는 뿌리를 바탕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장차 상속 재산으로 받을 곳을 향하여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난 것입니다. 믿음으로써, 사라는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여인인 데다 나이까지 지났는데도 임신할 능력을 얻었습니다. 약속해 주신 분을 성실하신 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사악을 바쳤습니다.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까지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사악을 하나의 상징으로 돌려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행동하는 믿음, 실천하는 믿음을 보여주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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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젊었을 때는 행동한 것에 대한 후회가 큽니다. 그러나 50대를 넘어서면서는 행동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가 2배 이상 많다고 합니다.
미국 일리노이주에 있는 켈로그 경영 대학원 양 왕 연구팀은 신참 과학자들이 국립 보건원에 제출한 연구 보조금 신청서를 조사했습니다. 연구팀은 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 기준선에 걸친 신청서 1,000장을 검토했습니다. 15년 동안 지원자의 절반이 보조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깝게 떨어진 이들은 작은 차이로 보조금을 받지 못함에 크게 후회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발견되었습니다. 앞서 미세한 차이로 보조금을 받지 못한 과학자들이 보조금을 받은 과학자들보다 더 나은 성과를 냈다는 것입니다. 주목받는 논문도 보조금을 받지 못한 과학자들이 21%나 더 높았습니다.
후회가 실패를 돌아보게 했던 것입니다. 이 후회의 핵심은 ‘성찰’이며, 후회에는 더 나은 삶을 위한 단서가 숨어있었습니다.
행동한 것에 대한 후회보다 행동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가 훨씬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순간에는 실패의 행동이 되더라도 더 나은 성장의 가능성은 행동하는 것 자체에서 생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후회가 되더라도 우선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후회한 뒤에 포기하고 좌절에 빠진다면, 성장의 가능성도 그 순간에 바로 닫히게 됩니다.
행동할 수 있는 용기는 주님 안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포기하고 좌절에 빠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분이시기에, 또 지금의 자리에서 벗어나 앞으로 힘차게 나아가는 것을 원하시는 분이기에 분명히 행동하는 우리와 함께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십니다. 피곤하셨는지 뱃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십니다. 그런데 거센 돌풍이 일어서 배 안에까지 물이 가득 차게 되지요. 뱃사람이 많았던 제자단이었기에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깨워서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라고 말합니다.
위험한 상황임을 깨닫고 있어서 ‘죽음’까지도 떠올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때 그들이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깨워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냥 걱정만 하면서 우왕좌왕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굳게 믿어야 했습니다. 그 결과 제자들은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걱정하고 포기하고 좌절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깨워 함께해야 합니다. 사랑이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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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않는 것, 그래서 자신의 능력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제대로 일어서 보지도 못하는 사람의 비극이 진짜 비극이다(아널드 베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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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의 은총과 훈련
-두려움에 대한 답은 믿음뿐이다-
“굳건한 믿음으로 간구하오니
당신의 빛으로서 채워주시어
우리가 맞이하는 그모든날을
흠없는 참삶으로 이끄옵소서.”
어제 새벽 성무일도시 마음에 새롭게 와닿은 찬미가 한연입니다. 믿음이 답입니다. 하나를 청한다면 믿음뿐이겠습니다. 믿음의 은총입니다. 은총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믿음 역시 다른 수행처럼 부단한 훈련의 노력이 필수입니다.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바치는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 전례기도 역시 참 좋은 믿음의 훈련입니다. 개인 신앙은 약하고 부족합니다. 공동전례기도를 통해 교회공동체 믿음에 뿌리 내릴 때 건강하고 안전한 신앙입니다.
수도원 십자로 중앙에 위치한 예수 성심상이 찾아오는 모든 이를 언제나 환대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성심상을 떠받치고 있는 바위판에 새겨져 있는 성구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14,27)
두려움에 대한 답은 믿음뿐입니다. 제 행복기도중 하나를 더 추가해야 하겠습니다. 반드시 “참회합니다” 다음 “믿습니다”를 넣어 다음과 같이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참회합니다
믿습니다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아주 예전 왜관 수도원에 저녁기도 전, 어둠이 짙어질 때 노수사님들 모습이 참 초라하고 한생이 덧없어 보였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 순간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그대로 믿음이 걸어다니는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한생을 믿음으로 살아온 분들입니다. 노년에 남는 것은 하느님 믿음과 밥뿐인데 믿음은 없고 밥의 욕망만 남아있다면 얼마나 허무할까 하는 생각을 잊지 못합니다.
믿음없는 탐욕만 남은 삶, 그대로 노추, 노욕의 삶이겠습니다. 참으로 존엄한 품위의 삶에 믿음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날로 깊어가는 “믿음의 여정”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깨달음과 더불어 그동안 자주 인용했던 두 말마디가 새롭게 떠오릅니다.
“노년의 품위유지에 우선순위는 하느님 믿음, 건강, 돈이다. 이 셋의 우선순위가 절대로 바뀌어선 안된다. 하느님 믿음이 있을 때 마음의 평화에 자연스레 따라오는 영육의 건강이요 돈에 대한 탐욕도 절제할 수 있다.”
어찌 노년뿐이겠습니까? 존엄한 인간 품위의 기반이 되는 믿음입니다.
“물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게 하느님 믿음이다. 돈앞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혈연관계는 얼마나 많은가! 하느님 믿음만이 돈의 유혹을 넘어 건실한 인간관계를 맺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믿음은 얼마나 허약한지요! 바로 오늘 복음의 제자들 모습이 그대로 믿음 약한 우리들 모습의 반영입니다. 예수님을 모신 배가 돌풍으로 위기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시자 제자들은 울부짖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그대로 박해와 온갖 어려움으로 곤경에 처한 당시 초대교회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오늘날 역시 인생 항해 여정중 얼마나 많은 공동체나 개인들이 조난과 파선의 위협을 겪고 있는지요? 당시 제자들의 모습은 그대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말그대로 믿음의 시련입니다. 바로 공동체의 중심에, 내 삶의 중심에 자리잡고 계신 살아계신 주님을 잊은 탓입니다. 그대로 믿음 부족의 반영입니다. 위기에 처했을 때 드러나는 허약한 믿음의 실상입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잠에서 깨어나신 주님의 말씀의 위력에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지자 예수님은 재차 이들의 믿음 약함을 책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그대로 우리의 믿음의 현실을 바라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의 다음 물음이 오늘 화두처럼 마음에 자리잡습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바로 오늘 지금 여기 우리 삶의 중심에 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 이름 ‘나다’라는 이름의 임마누엘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나다(I AM)”, 영문으로 하면 이해가 확연해집니다.
“I AM with you”(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I AM for you”(나는 너희를 위해 있다)
얼마나 위로와 격려가 되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인지요! 탓할 것은 주님이 아니라 우리의 약한 믿음입니다. 믿음이 여정입니다. 애당초 타고난 믿음은 없습니다. 이런 시행착오를 통해 믿음의 성장과 성숙이요 오늘 복음의 제자들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육신은 노쇠해가도 주님과 신뢰와 사랑의 관계는 날로 깊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 11장이 참 좋은 믿음의 본보기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사실 옛 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는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며 이어 믿음으로 살다가 떠난 이들을 종합한 다음 말씀이 우리에게는 무한한 위로와 힘을 줍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 속에 죽어 갔습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따름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기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실상 그들은 더 나은 곳, 바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이래서 ‘고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homesick at home) 역설적 존재의 인간입니다. 궁극으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는 믿음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이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의 삶을 살게 합니다. 하늘 향할수록 더욱 깊이 현실에 뿌리내리는 나무를 닮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강한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힘은 그대로 하느님의 힘입니다. 인간 품위의 기초가 믿음이요, 반석같은 믿음 위에 건축되는 인생집입니다. 오늘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입니다. 서방의 4대교부, 예로니모,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노, 대 그레고리오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는 성인학자입니다. 가톨릭 신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아우구스티노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대조도 흥미롭습니다.
“아우구스티노의 <신국론>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을 읽어보면 ‘불꽃의 아우구스티노’와 ‘얼음의 토마스’가 느껴질 것이다.”
참 좋은 대조와 더불어 참 좋은 보완관계를 이루는 성인 학자임을 깨닫게 됩니다. 천사 박사라 칭하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49세 나이로 선종하기 까지 어떻게 그 많은 저술이 가능했는지 불가사의입니다. 성 토마스의 인품에 대한 설명과 그의 깨달음 및 어록도 감동적입니다.
“그는 천품이 유순하고 통찰력이 날카로우며 무엇이든 쉽게 틀림없이 기억했으며, 더할 나위 없이 순결한 삶을 살았고 오직 진리만을 사랑하여, 신적학문과 인간의 학문을 두루 관통하여 통달하고 있었으며, 마치 태양처럼 자신의 성덕으로 세상을 뜨겁게 하고 자기 학문의 광채로 세상을 두루 비추었다.”
그가 신학대전 완성을 조금 남겨 두고 절필한 사유도 인상적입니다. 그가 1273년 12월 성 니콜라오 축일 미사를 끝마친후 절필하였는데, 조수가 그 이유를 묻자 다음같이 대답했다 합니다.
“나는 계속할 수가 없어. 내가 이제껏 쓴 것들을 내가 보았고, 나에게 계시된 것에 비하면 한낱 지푸라기에 불과해”
성인의 깊은 겸손도 이런 하느님 체험에서 기인함을 봅니다. 성 토마스의 시성심사와 관련하여 성인의 격에 어울릴만한 기적을 일으키지 못했다는 지적에 당시 교황 요한 22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를 일축했다고 합니다.
“그가 문제를 해결할 때마다 그만큼의 기적들을 행한 것이다.”
얼마나 통쾌하고 멋진 답변인지요! 이어지는 어록도 인상적입니다.
“성 토마스가 집대성한 철학적, 신학적 종합은 교회와 온 인류의 건실하고 항구한 자산이다.”
“인간 안의 이성은 세상 안의 하느님과 같다.”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설명이 필요없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인간의 구원에는 세가지가 필요하다. 믿을 것을 아는 것, 추구할 것을 아는 것, 해야 할 것을 아는 것이다.”
침대에 누운 채 하늘을 바라보며 말한 임종어도 그가 얼마나 분투의 노고로 가득한 삶이었는지 깨닫게 합니다.
“내 벗인 죽음이여, 어서 오게나. 기다리고 있었네.”
하느님이 교회에 주신 참 좋은 선물, 참으로 믿음의 성인이요 대학자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도와 주시어 믿음의 여정에 항구하게 하십니다.
“주님은 당신 가족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을 세우셨네.”(루카12,4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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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셨습니다. 그리고 거센 돌풍을 만나십니다. 물은 배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배에 물이 거의 가득차게 되었다고 복음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아우성에 주님께서는 바람을 꾸짖고, 호수를 나무라십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떤 것을 전해주는 것일까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오늘 복음과 같은 돌풍을 만납니다. 가끔 만나는 것도 아니고 아주 자주 만납니다.
우리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말과 행동들, 아픔을 주는 말들과 눈빛들, 슬픔에 잠기게 하는 상황들, 이 모든 것들이 우리 삶의 돌풍입니다. 이러한 돌풍은 우리에게 우울과 공포를 가져다주고 동시에 죽음과 같은 두려움을 가져옵니다.
우리는 이 돌풍을 이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의 날들 안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까요? 어떻게 하면 삶의 돌풍으로부터 찾아오는 두려움과 공포를 이겨낼수 있을까요?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마음에 두려움이 찾아온다면, 공포스럽다면, 우울하거나, 막막하다면 우리 마음을 향해 소리쳐보세요.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네가 그런다고 해서 흔들리 내가 아니야,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도 나를 지켜주실 거야. 그러니 잠잠해져라.
맛있어져라
예쁜 것 싫어하는 사람 없고, 맛있는 것 싫어하는 사람 없습니다. 물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맛있는 것을 만드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제는 김치찌개를 만들었습니다. 물론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재료는 있는 것을 그냥 씁니다. 어느 때는 고기를, 어느 때는 참치를, 어느 때는 꽁치를….
그런데 제가 꼭 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김치찌개를 끓이든지 무조건 오래 끓입니다. 김치가 흐물흐물해질 때까지요.
그럼 그 시간 동안 김치도 흐물흐물해지지만 동시에 모든 재료의 맛이 그 김치 안으로 들어갑니다. 김치 한 조각 안에 재료의 모든 맛이 들어가게 되는 것이지요.
기도도, 신앙생활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두 번 짧은 시간, 한두 해 짧은 시간 기도와 신앙생활을 경험하고.
‘기도는 이런 거야, 신앙생활을 이런 거야.’라고 이야기한다면 주님 보시기에 얼마나 부끄러운 일일까요? 또한 기도 안에서 신앙생활 안에서 느낄 수 있는 맛도 아직 모자랄 것입니다.
급하지 않게 천천히 푹 끓여보세요. 모든 것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기도도 신앙생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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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8.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두려움 없는 믿음>
마르코 4,35-41 (풍랑을 가라앉히시다)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두려움 없는 믿음>
거친 세상
한가운데에서
함께하는
나를 믿고
두려움 없이
한걸음 내딛는
벗이 있으니
거친 세상
한가운데에서
함께하는
벗을 믿고
두려움 없이
한걸음 내딛는
내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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