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버리고 선경(仙境)을 얻다
# 남한강에서 가장 빼어난 정자, 구미정에 올라앉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으되 강원 정취에 한몫을 한다.
구미정은 조선 숙종 때 공조참의를 역임했던 이자(李慈)가 사색당파의 싸움에 회의를 느껴 관직을 버리고 내려와 칩거하며 골지천변에 지은 것. 그러나 반들반들 고쳐 지은 정자에서는 시간의 깊이가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정자가 첫손으로 꼽히는 것은 정자에서 둘러보는 주변의 풍광 때문이다. 구미정 앞으로는 골지천이 흘러내린다. 골지천은 태백의 금대봉 자락 검룡소와 삼척의 대덕산과 중봉산에서 발원한 맑은 첫물이 흘러내리는 한강의 최상류다. 물은 희게 반짝이는 너른 바위들을 넘어가며 때로는 포말을 일으키며 때로는 고요하게 흘러내려간다. 그 물을 높은 뼝대(바위벼랑)가 감싸고 있다. 물 건너편에 병풍처럼 펼쳐진 직벽의 바위틈에는 소나무들이 가지를 뒤틀고 있다.
이렇게 켜켜로 쌓인 절벽과 바위구멍을 찾아가면서 아홉가지 아름다움을 다 찾는다면, 그 다음은 18경 차례다. 물가 주변에는 열여덟가지 경치가 숨어 있다니 숨은그림을 찾듯 하나하나 찾아가는 재미도 각별하다. 정자 입구에 정선문화원에서 세워놓은 안내판에 아홉가지 아름다움과 열여덟가지 풍광이 친절하게 사진과 함께 소개돼 있으니 하나하나 짚어가며 찾아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잘게 잘라서 들여다보면, 전체적인 풍광에 취해 미처 들여다보지 못했던 아름다움까지도 속속들이 느껴볼 수 있다. # 사을기 마을의 암봉에 올라서 구미정을 내려다보다
구미정에서는 안에서 밖을 보아도, 밖에서 안을 보아도 멋스럽다. 정자에서 암봉을 올려다보는 경치와 암봉에서 정자를 내려다보는 경치는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다. 정자와 물길을 굽어보는 명소가 강 건너편의 직벽 위에 올라앉은 사을기 마을에 있다. 5년 전까지만 해도 구미정 앞에서 물을 건너 마을로 이어지는 출렁다리 구미정을 내려다볼 수 있는 특급 조망대가 마을 앞쪽 숲길에 숨어 있다. 마을 주민들이 ‘홈병대’라고 부르는 곳인데, 숲속 길로 잠깐 내려서면 길이 끊어지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천길 낭떠러지다. 여기서 절벽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물길과 구미정의 모습은 그야말로 탄성이 터질 정도다.
사을기 마을을 찾은 이들은 홈병대만 돌아보고 내려가지만, 사실 더 빼어난 경치는 마을 뒷산인 단봉산 소특재를 넘어가는 산길의 암봉을 올라야 마주할 수 있다.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소특재 너머 첩첩산중에도 제법 번듯한 마을이 있었다지만, 마을이 없어진 지금은 산길마저 흐릿해졌다. 그 길을 따라 넉넉잡아 20분쯤이면 암봉 위에 서게 된다. 암봉을 딛고 올라서면 멀리 첩첩이 이어진 산들과 발아래를 굽이쳐가는 골지천의 물길, 그리고 그 물길 곁에 앉아 있는 구미정을 내려다볼 수 있다. 여기서 물길과 정자를 내려다보노라면 새삼스러운 것이, 천변에 세워진 정자 하나가 풍경에 적절한 탄력을 준다는 것이다. 이 그림 같은 풍경에서 구미정을 지워버린다면, 아마도 감흥은 절반쯤으로 줄어들리라. 암봉에 올라서면 시야의 폭이 워낙 넓어 경치를 한눈에 다 담지 못한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골지천 상류의 강변을 따라 길게 이어진 길이 눈에 들고 왼쪽으로 돌리면 골지천 물굽이가 휘어감아 돌아가는 뒷모습이 햇살에 반짝거린다. # 미락숲에서 조용한 강변 마을을 지나서 여량까지 가는 길
1만여평에 달하는 초지가 깔려 있는 숲은 그 안에 드는 것만으로도 숨이 편안해질 정도로 우람하고 짙다. 잘 정비돼 있지는 않지만 숲 그늘에서 캠핑을 즐기겠다면 이곳 만한 곳이 없겠다. 굳이 야영을 하지 않더라도 숲 사이에 돗자리 한 장만 깔고 앉는다 해도 청신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미락숲을 돌아나와 암내교에서 시작해 골지천을 따라가는 강변길은 강원도가 ‘산소길 1코스’로 명명한 명품 길이다. 낙천리의 ‘바위안’을 지난 길은 가랭이교를 건너면서 골지천을 오른쪽으로 또 왼쪽으로 끼고 내려간다. 너른 천변에는 간간이 주민들이 이른 물놀이를 하거나, 반두를 들고 고기잡이를 하고 있다. 길을 따라 더 내려가면 구미정이 나오고 길은 물길에 바짝 붙어 내려간다.
노일마을, 두메아리마을, 새치마을, 곰바리마을…. 천변을 끼고 있는 마을들의 이름이 정겹다. 물길은 마을과 마을을 지나면서 급해지기도 느려지기도 하면서 곳곳에 소(沼)를 만들기 도 하고, 여울을 만들기도 한다. 강변에서 우뚝 솟은 반론산의 위용을 올려다보는 맛도 각별하다만들기런 풍경을 찬찬히 보자면 강변을 따라서 한적하게 걷는 것이 좋겠지만, 워낙 이쪽은 오가는 차들이 없어 속도를 늦춰가며 느릿느릿 달리는 것도 나무랄 데 없다. 이렇게 바위안에서 출발한 골지천은 25㎞를 흘러내려 여량에 가서 닿는다.
여량에서 골지천은 도암호와 물안골, 구절리를 거쳐 흘러내려온 송천과 만나서 조양강 가는 길 수도권에서 출발하자면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하진부나들목으로 나가서 59번 국도를 따라 정선방면으로 향한다. 줄곧 오대천을 끼고 달리는 59번 도로를 따라 나전 굴다리 아래를 통과한 뒤 바로 좌회전해 42번 국도로 접어들어 여량방면으로 향한다. 여량면소재지를 지나 42번 국도를 따라 동해방면으로 가다가 송원동에서 우회전하면 임계초교 송원분교 쪽 포장도로가 나온다. 국도변에 구미정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구미정에서 골지천을 따라 내려오면 다시 여량면소재지에 닿는다. 25㎞에 달하는 이 길이 이른바 ‘강원산소길’의 제1구간이다. 묵을 곳 임계면소재지에는 이렇다할 숙소가 없다. 사을기 마을 안쪽에 방성애산장(033-563-6665)이 추천할 만하다. 15년 전에 이곳에 정착한 부부가 투박하게 제 손으로 지어낸 집이다. 고즈넉한 산촌민박에서 호젓한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곳이다. 구미정 인근에는 하늘나리펜션(033-562-1953)이 있다. 임계에서 백봉령 쪽으로 향하다 우회전해 들어가는 직원리와 도전리에도 제법 시설이 좋은 펜션들이 몇곳 있다. 임계에서는 쇠고기가 유명하다. 고기 맛이야 다 등급에 따라가지만, 무엇보다 산지에서 직접 도축한 고기를 내놓으니 저렴하게 맛볼 수 있다.
<출처> 2010. 6. 9 /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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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솔길을 함께 걸어보실까요? 원문보기 글쓴이: hoy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