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포의 새벽 편지-3290
명심보감-074
제5 정기편
동봉
선으로 옮김은 풍속과 같아야 하고
잘못을 고침은 우레와 같아야 한다
허물을 알았으면 필히 고쳐야 하고
능력을 얻었으면 잊지 말아야 한다
--- 근사록 ---
근사록 운
천선당여풍지속
개과당여뇌지열
지과필개
득능막망
近思錄云
遷善當如風之速
改過當如雷之烈
知過必改
得能莫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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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분 명심보감에는 없는 글이다
'지과필개'와 함께 '득능막망'은
<천자문>에도 실려 있는데
범입본 명심보감에는 실려 있다
'지과필개'와 '득능막망'에 관하여
2016년 3월 2일~3월 3일
기포의 새벽 편지에 올린 글이다
경어체를 그대로 가져왔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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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지知
"너, 이게 무슨 잔지 알지?"
"잘 모르겠는데요."
"알지!"
"까먹었습니다."
"이눔아, 그게 아니고 알지."
스승은 답답했습니다.
회초리로 책상을 두드렸습니다.
스승의 회초리 두드리는 모진 소리에
잔뜩 주눅이 들어 있던 제자에게
스승이 다시 일렀습니다.
"얘야!"
"네, 스승님."
"이젠 명심하거라"
"네, 스승님."
"알/지"
"모르겠습니다. 스승님"
"이눔아, 이게 '알 지知'자니라."
제자가 깨달았습니다.
전광석화도 너무 늦습니다.
깨달음은 참으로 찰나 간이었습니다.
한국식 영어로 표현하면 그렇습니다.
유노You know/당신이 알고
아이노I know/내가 알고
히노He know/그가 알고
위노We know/우리가 압니다.
'알고 있다'는 말은 안다니 알겠는데
부림말이 무엇이냐입니다.
격물格物을 하여 사물을 알고
사물의 존재처와 존재시를 압니다.
그러나 사물을 알고
사물의 존재처存在處를 알고
사물의 존재시存在時를 알고 있는
'안다'는 바로 그 녀석은 잘 모릅니다.
그런데 제자는 이를 깨달았습니다.
스승은 '알 지知 자'에 머물러버렸지만
제자는 알 지知자를 알게 되면서
어바웃 노우a-bout know
곧 앎에 관해서는 말할 것도 없이
앎이란 마음의 세계까지도
한꺼번에 다 알아차린 것입니다.
전광석화電光石火가 아니라
빛보다 더 빠르게 알아차렸습니다.
앎이란 언어口 이전의 세계지만
첫째 전달 기구는 말口입니다.
화살矢처럼 빠른 말입니다.
한 번 시위를 떠난 화살은
화살의 방향을 되돌리지 않은 채
그대로 뒷걸음으로 날지는 않습니다.
말口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입술을 떠난 말이란 말口業은
화살矢처럼 빠르게 날고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뜻에서
앎에 대한 대표적인 글자 알 지知자를
이렇게 표기했을지도 모릅니다.
앎. 알 지知, 과연 무엇을 앎인지요?
화살은 대나무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화살 시矢'자는
대나무竹를 얹은 '화살 시笶'에서
슬그머니 건너온 글자입니다.
'화살 전箭'자도 대나무竹가 있지요.
또한 이미 날아간 화살矢은
중간에 방해물이 있지 않는 한
시공간에 관계없이 계속 날아갑니다.
방해물이라면 뭐가 있을까요?
첫째는 중력重力Gravity입니다.
중력은 계속 날고자 하는 힘을
끊임없이 끌어내립니다.
둘째는 항력抗力Reaction/Drag입니다.
마찰력摩擦力일 수도 있습니다.
공기라는 저항력으로 인하여
계속 날아갈 수가 없습니다.
셋째는 간섭干涉Interfere입니다.
질량을 갖고 있는 물체는
반드시 간섭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이와 같은 방해가 없다면
화살은 우주로 계속 날아가겠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지닌 언어口의 세계와
생각의 화살矢도 실로 무한하지만
줄어드는 뇌세포를 비롯하여
신경세포의 감소에 따라
앎이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앎이라면 무엇에 대한 앎입니까?
여기서는 학문적 지식이 아닙니다.
이 《천자문》에서는 지나침입니다.
자기의 지나침에 대한 앎입니다.
도度Degree가 벗어났음을 앎이지요.
허물이란 일부 곤충이나 파충류가
성장을 위해 벗는 허물이 아닙니다.
과도過度가 허물이라면 작은 것일까요?
과도가 다 죄일 수는 없지만
특히 세상을 이끌어가는
교육자, 공무원, 정치인, 종교인 등은
작은 지나침도 허락이 안 됩니다.
허물에는 허물 죄罪辠가 있고
허물 고辜가 있으며
허물 자疵가 있습니다.
허물 비庇疪가 있고
허물 하瑕가 있으며
허물 구咎가 있지요.
허물 건愆䇂諐이 있고
허물 우訧가 있으며
허물 과過가 있고
허물 설辥辪도 있습니다.
이토록 허물과 관련된
매우 다양한 글자들이 있는데
어째서 하필이면 허물 과過입니까?
'허물 과過'자는 '지날 과'로도 새기듯
이미 흘러간 시간이고
이미 거쳐 간 공간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허물입니까?
어려서 천자문을 읽을 때였지요.
어렸다 해도 열댓살 때입니다.
알지知, 지낼과過, 반들필必, 고칠개改
하고 읽었더니 당시 훈장님께서는
"여기서는 '허물 과'로 읽어라"
라고 고쳐 주셨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스승님."
나는 대답은 그러겠다 하고서
지금까지도 '허물 과'로 읽지 않습니다.
'허물을 알면 반드시 고치라.'와
'지남을 알면 반드시 고치라.'할 때
어느 쪽 해석이 어울립니까?
두말할 것 없이 으레 윗글이지요.
'지남을 알면 반드시 고치라'보다
'허물을 알면 반드시 고치라'가
얼핏 보더라도 부드럽고
이해가 빠른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자를 고집하는 건 아니지만
즐겨 읽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지날/허물 과過
움직씨Verb
지나다
지나는 길에 들르다
경과하다
왕래하다/교제하다
지나치다
분수에 넘치다
넘다
나무라다
보다/돌이켜 보다
초과하다
옮기다
이름씨Noun
허물
잘못
괘 이름 =손하태상巽下兌上
예전
그 밖Other than
재앙일 때 '재앙 화'로 발음합니다.
뜻을 나타내는 책받침辶과
소릿값으로 '입 비뚤어질 와/과咼'가
합하여 이루어진 글자입니다.
'입이 비뚤어지다'는
곧 '틀어지다'의 뜻입니다.
'지나치다' '통과하다' '과도' 등
허물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너무나 유명한 속담이지요.
이 말은 불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배울 게 있는 학인은 겸손이 있지만
식광識狂에 빠져 있는 사람은
겸손의 자리에 교만이 넘치니까요.
수행자의 덕은 많이 아는 게 아니라
겸손과 하심下心입니다.
따라서 '과過'가 허물이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혹세무민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앎의 과도에서 비롯됩니다.
앎을 담아둘 그릇은 작고
그 그릇을 넘침이 과도입니다.
사이비 종교도 앎의 과도입니다.
실제 앎에는 과도過度가 없습니다.
중생이 비록 많이 안다 하더라도
부처님을 능가할 수 없고
인간이 비롯 전능하다 하더라도
신을 뛰어넘을 수는 없습니다.
아는 한 문제는 많이 알고
전능한 데 있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모든 것을 아시지만
자비, 지혜, 원력 등으로 가득하실 뿐
지나침이나 교만은 없으십니다.
이는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심은 겸손의 뜻입니다.
마음을 내려놓는 게 아니라
교만을 내려놓음입니다.
마음을 비우는 게 아닙니다.
지나침Transition을 비움입니다.
반드시 필必
과거의 모든 부처님께서
밝히려 하신 게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마음心입니다.
현재와 미래의 부처님들은
무엇을 밝히시겠는지요?
역시 대답은 마음입니다.
역대조사歷代祖師와
천하종사天下宗師들도
오직 이 마음心 하나를 떠나
어디서도 목적어를 찾을 수 없습니다.
마음은 '나누다'입니다.
이름씨로 디비젼Division이 아니라
움직씨로 디바이드Divide입니다.
마음은 나눔의 상태로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나누고 나누는 움직씨입니다.
'반드시 필必'자에 표현되는
대각선으로 내려그은 선丿이 증표지요.
'반드시 필必'자는 '반들 필'이라 하며
표준어를 동원했을 때 '반드시 필'입니다.
이 필必자는 '마음 심心'이 부수며
'마음 심'자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비스듬히 그었습니다.
이 비스듬한 나눔丿은
가로 직선一 세로 직선丨과 달리
기하학幾何學Geometry입니다.
기하학이라니 무슨 기하학입니까?
프렉털 기하학Fractal Geometry입니다.
아무리 잘게 세분한다 하더라도
똑같은 구조가 계속 나타나는 형태
프랙털 지오메트리입니다.
나의 이 '반드시 필必'자 파자는
지금까지의 해석을 따르지 않습니다.
나의 오늘날Present-day의 파자입니다.
아무리 나누고 나누고 또 나누더라도
오리지널 마음은 늘 같은 형태이기에
나는 '반드시 필'자를 볼 때마다.
프랙털 기하학을 떠올리곤 합니다.
내 보기에 프랙털 기하학만큼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세계를
한 마디로 완벽하게 밝힌 것도 드뭅니다.
고칠 개改
'고칠 개改'자를 자세히 살펴보면
회초리를 뜻하는 '등글월문攴자'에
왼쪽에 '몸 기己'자를 떡 붙였습니다.
'고치다'라는 움직씨는
곧 내게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가 고쳐지지 않고
남을 고치려 할 때 쓰는 말이
"너나 잘하세요."입니다.
부처님께서 당신은 정진하지 않고
중생들에게 정진하라 하시던가요?
보살마하살이 스스로의 보살행없이
수행자들에게 바라밀을 권합니까?
고침이란 다른 이가 아닌
자신에게 가하는 회초리입니다.
자신에게 허물이 있고
지나침이 있다면
반드시 고쳐 나갈 일입니다.
오늘부터 새학기가 시작됩니다.
초등학교初等學校는 프라이 머리Primary이니
배움의 기초가 될 것이고
중학교中學校는 미들Middle이고
낮은 세컨드어리Secondary이니
배움의 단계를 뛰어오름입니다.
고등학교高等學校는 높은 세컨드어리며
하이스쿨High School이니
배움의 높은 단계입니다.
대학교大學校라고요?
유니버시티University이니
전우주적이고 또한 전인류적이며
보편화된 진리 탐구의 단계입니다.
어린이들, 학생들, 선생님들과 학부모님들
그리고 이 땅의 교수님들에게
나는 큰 소리로 외칩니다.
여러분, 힘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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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동봉 스님의 천자문 공부 제2권
총 9권 중 제1, 제2, 제3권까지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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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0/2024
곤지암 우리절 선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