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제가 2018년부터 작성해 온 글로써, 매년 조금씩 교정하여 다시 올리고 있습니다.]
전에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더 사랑하고 어떤 사람은 덜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어떠함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 쪽에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 쪽에 달렸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누리느냐, 이것이 관건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내가 받아들이는 것도 대단한 능력입니다.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도 능력이란 말이 조금 의아해하실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이미 그분의 사랑을 확증하셨는데 그 사랑을 받아 누리는 사람들이 많이 없질 않습니까? 먼저 진리를 알아야 하고 그다음에는 믿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사람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 역시 성숙함이 필요합니다.
캐리스 바이블 칼리지 재학시절, 1학년 때는 경계심 때문에 선생님들을 멀리했지만 2학년으로 올라가기 전, 하나님께서 하늘 아버지의 축복(관련 시리즈 영상)을 깨닫게 해 주셔서 그 뒤로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는 것에 아주 능숙해졌습니다. 그 결과 선생님들은 저를 더 많이 사랑해 주실 수 있었습니다.
사랑은 받아 본 사람이 할 수도 있습니다. 이 논리는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 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매일 아침 일어나서 나의 능동성으로 물을 마시듯, 커피를 마시듯, 밥을 먹듯,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십자가에서 그 사랑을 확증하셨기 때문에 할 일을 다 하셨습니다. 우리의 정신 건강, 육신 건강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누리는 데서 나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실 때도 있지만 그런 일이 없어도 믿음으로 우리가 나아갈 때 하나님이 더 기뻐하십니다.
여러분, 또한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서로 사랑하는 관계를 추구하시길 바랍니다. 한쪽으로 기운 사랑이 아닌, 서로 동일하게 사랑하는 것이 인간 사이의 사랑 중에 가장 성숙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주시며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상대는 받아들이지 않는데 내 쪽에서 희생적으로 하는 사랑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를 ‘서로 사랑하라’로 바꿔주셨습니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 15: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그런데 참 신기한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의 기도가 응답된다는 것입니다.
(요일 3: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제가 오늘 말씀드리려는 ‘서로 사랑’은 나도 사랑을 주지만 상대방도 나에게 사랑을 주는 관계를 말합니다. 물론 사랑하기 힘든 상대도 사랑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르는 것이 우리의 목표겠지만 주께서 주신 새 계명은 서로 사랑입니다.
여러분, 제가 사역 10년 차에 들어서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는데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 주인에게 학대받은 강아지가 새 주인의 손길까지 나를 때리려는 손으로 오해하듯이 내 쪽에서 내미는 사랑의 손길을 공격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안타깝게도 그들에게는 내 사랑을 줄 수가 없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으니까요. 내 쪽에서는 기다리면서 계속 사랑하기로 결심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관계는 예수님께서 새 계명으로 주신 ‘서로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요한일서 3장 22절과 23절에 나타나 있는 기도 응답의 놀라운 비밀을 그동안 놓쳐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받는 비결은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인데 그 계명이란 바로 ‘서로 사랑’이었습니다.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하는 희생적인 사랑이 아니라 상대도 나를 동일하게 사랑하는 그러한 관계 말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관계를 갖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나도 사랑해야 하지만 상대도 나를 사랑해야 하니까요. 이것은 일방적인 희생적 사랑보다 더 높은 차원의 사랑입니다. 이러한 관계를 갖게 되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주께 받게 됩니다! 서로 사랑에 감춰 놓으신 놀라운 능력이지요!
이 글을 읽으신 여러분, 이 귀한 관계를 여러분들의 삶에도 허락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구하는 자가 받습니다. 부부가 그럴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것이 없을 것이고 부모, 자식 관계라도 정말 좋습니다. 친형제자매가 서로 사랑한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이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 해도 우리에겐 주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이 있습니다. 주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도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기억하십시오. 나만 희생하고 나만 애쓰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서로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