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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을 부르심
창 12:1-9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창 12:1-9 /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셨다. `너는 어서 고향을 떠나거라. 한데 어울려 사는 네 친척과 네 집안 사람들을 떠나 내가 가르쳐 줄 땅으로 가거라. 2) 나는 네 후손이 엄청나게 불어나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또한 네게 복을 내려 이름을 날리게 하리라. 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을 전해 주는 사람이 될 것이다. 3) 네게 복빌어 주는 사람에게 나는 복을 내리리라. 네게 저주를 퍼붓는 사람에게는 나 역시 저주를 퍼부으리라. 무릇 땅위에 살고 있는 민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으리라' 4) 아브람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아브람을 따라 길을 떠났다. 하란을 떠날 때 아브람의 나이는 75세였다. 5) 아브람은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그리고 하란에서 얻은 모든 재산과 종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향해 떠났다. 아브람 일행은 가나안 땅에 이르러서는 6) 그 땅을 통과하여 상수리나무 곧 거룩한 나무가 있는 모레라고 부르는 곳까지 갔다. 이 상수리나무는 세겜 땅에 있었다. 그때 그곳에는 가나안 사람이 살고 있었다. 7) 이때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바로 이 땅을 내가 네 후손들에게 주겠다.' 그러자 아브람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나타나신 것을 기념하여 그곳에 제단을 쌓아 올렸다. 8) 그 뒤 아브람은 남쪽에 있는 산악지대로 이동하였는데, 이 산악지대는 벧엘 동쪽에 있었다. 그는 그곳에 자리잡고 장막을 쳤다. 아브람 일행이 자리잡은 곳은 서쪽으로는 벧엘이 있었고 동쪽으로는 아이가 있었다. 아브람은 거기에다 또 제단을 쌓고 여호와께 제사 드렸다. 9) 그 뒤 아브람은 조금씩 조금씩 가나안 남부 지역으로 옮겨갔다.
본장은 성경 구속사의 일대 전환을 이루는 부분입니다. 창세기 1-11장까지는 하나님의 우주 창조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죄의 세상 유입과 죄악의 관영, 그리고 노아 대홍수와 바벨탑 사건 등을 말하는 창조시대를 말하고, 본장에서부터는 구속사인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이 될 족장시대(12장-)를 말하고 있습니다.
가라(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라고 하셨습니다. 본토는 갈대아 우르와 하란을 포함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친척은 위 지역에 살던 셈의 후손을, 그리고 아비 집은 아브람의 친 혈육인 일가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말은 우상의 도시에서 죄악 된 관습에 젖어 있던 과거의 모든 인연과 삶을 청산하라는 뜻입니다. 아브람은 거룩한 목표를 향해 나가야만 합니다(19:17, 26; 눅 9:62). 하나님은 구체적인 장소나 방향도 제시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히브리서는 ‘갈 바도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말합니다(히 11:8).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순종의 사람들을 통해 새 역사를 창조하셨고 또 믿음의 가계를 형성해 가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의 3중적 포기에 땅, 민족, 복에 대한 3중적 약속을 주셨습니다. 복의 근원으로 세우려 하셨습니다.
말씀을 따르라(4-5) 아브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자신의 전 의지로 복종했습니다. 신앙이 생명력을 갖는 것은 행위를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롯도 그와 함께 갔습니다. 아브람의 조카 롯의 이름이 거론된 것은 이후 아브람의 생애에서 그의 역할이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13:1-13; 14:13-16; 19:1-28). 아브람이 75세였습니다. 그는 175세까지 삽니다(25:7). 현재 그는 생애 최고 절정기임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에 확실하게 답해야 축복입니다. 마침내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6-9) 아브람은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겜 땅 곧 모레의 상수리나무가 있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은 옛적에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라고 약속을 하셨고 아브람은 거기에서 자기에게 나타나신 주님께 제단을 쌓고 예배했습니다. 벧엘과 아이 사이었습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이며 아이는 황폐해진 작은 산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만나는 신앙의 중요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적용: 아브람의 신앙의 특징은 순종입니다. 그리고 순종은 그분을 높이는 예배로 이어졌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습니까?
믿음은 반드시 신뢰와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믿음을 지적인 동의의 수준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말씀을 따라 분명한 지식과 확신이 주어졌다면 신뢰와 순종이 나타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만일 신뢰와 순종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가짜입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순종이 따라야 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를 위해 헌신, 포기, 희생, 세상으로부터 돌아섬 등의 모습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 설 교 >
너는 너를 위하여 떠나라
창세기 12:1-4
우리의 삶에는 꾸준한 변화가 요구됩니다. 변화가 없으면 도태됩니다. 세상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할 것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지체하면 도태하게 됩니다. 특히 회사들이나 기업들은 변화의 흐름에 기민하게 대처하고 변화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태하게 됩니다. 30년 전에 있었던 100대 기업들 중 오늘까지 살아남아 있는 기업은 30개뿐이라고 합니다. 다 변화에 둔감하게 대처해서 그렇습니다. 현재 300만개가 넘는 중소기업이 있는데 그 평균 수명이 12.3년이라고 합니다. 대기업은 평균수명이 29.1년입니다. 그런데 앞으로 그 수명이 15년까지 떨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국가도 세상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구태의연하면 망하게 됩니다. 우리나라도 변화의 요구가 거셉니다.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이기 때문에 세상 변화에 더 민감해야 합니다. 이것은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치열한 경쟁시대에서 구태의연하거나 나태하면 도태하게 됩니다. 신앙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꾸준한 변화를 요구하고 모험의 삶도 요구합니다. 신앙의 길은 모험의 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은 그에 대해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델로 아브라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창세기 10장에서는 노아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당시 인간은 부패했습니다. 또한 그 부패한 사람들이 살던 세상도 부패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물로 세상을 싹 쓸어버리셨습니다. 그것이 노아의 홍수사건입니다. 그 다음 창세기 11장에는 바벨탑 사건이 나옵니다. 심판을 당했던 인간은 또 부패하 홍수 후 인간은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의도를 가지고 탑을 쌓아 올라갔습니다. 그 의도는 하늘 꼭대기까지 쌓아 올라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의도가 아주 불순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탑을 모두 흩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12장에서아브라함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우상 문화권에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셔서 인류구원을 위한 복의 전달자 삼으셨습니다. 그를 언약의 체결자로 삼으셨습니다. 창세기 12장부터 25장까지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하나님의 계시가 아브라함에게 주어졌습니다. 그 계시의 핵심은 인류 구속을 위해 아브라함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과 인류구원의 대업을 아브라함을 통해 이루시려고 작정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창세기 11장 10절에 아브람의 족보가 나옵니다. 거기 보면 아브람은 셈족이라고 말씀합니다. 셈은 노아의 장자였습니다. 셈의 10대 손이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였습니다. 데라가 70세에 아브람을 낳았습니다. 즉 아브람은 셈의 11대 손이었습니다. 이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라는 우상 도시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아버지 데라가 아브람과 며느리 사라와 손자 롯을 데리고 고향 갈데아 우르를 떠나서 하란에 이르렀습니다. 데라는 거기서 죽게 되었습니다. 하란은 아브람의 고향이 아닙니다. 이미 아버지 데라가 고향 갈데아 우르를 떠나게 해서 하란에 임시 머문 것입니다. 그 사이에 아버지 데라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계시가 아브라함에게 임했습니다. “여기를 떠나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그때 아브람의 나이가 75세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즉시 떠난 것으로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이 쉽게 그곳을 떠나게 된 것은 아버지 데라가 이미 고향을 떠나게 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데라는 도중에 죽었지만 위대한 출발을 시작하게 해 놓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전 제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그냥 떠나라고만 했으면 그는 쉽게 떠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은 살던 곳을 쉽게 떠나지 못합니다. 오래 다니던 직장을 떠나라 하면 어느 사람이 쉽게 떠날 수 있겠습니까? 떠나려면 조건이나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의 직장보다 너 높은 직급으로 대우해 준다든지 지금보다 월급을 더 많이 준다든지 하는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를테면 비전 제시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고향을 떠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그 때 아브람의 나이가 75세 때입니다. 이미 황혼기입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안주의식이 생깁니다. 그래서 떠나려하지 않고 모험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브람도 갈데아 우르를 떠나 하란에서 겨우 안정을 찾았습니다. 나이도 많고 이제 모험하기에는 너무나 평안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또 떠나라고 하십니다. 지금의 상황이나 환경에서는 쉽게 결단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어진 것이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비전을 제시하셨습니다. 그 내용이 창제기 12장 2-3절의 말씀입니다. “너는 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임이라.” 여기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비전을 제시한 내용이 세가지였습니다. 넓은 땅, 많은 자손, 복의 근원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로서는 최고의 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가지를 비전으로 아브라함에게 제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주 구체적으로 그에게 비전을 주신 것입니다. 이런 비전을 받고 거역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비전은 참 중요합니다. 내가 비전을 가지면 꿈을 꾸게 됩니다. 큰 기대를 갖게 되고 장래 희망을 갖게 됩니다. 비전은 어려서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이 때 큰 꿈을 갖게 해야 합니다. “너는 할 수 있을 거야” 이 말 한마디가 아이로 하여금 큰 꿈을 갖게 만듭니다. 그 말 한마디가 상당한 기대와 꿈과 자신감을 갖게 만듭니다. 저는 어렸을 때 그리고 중고교 때 선생님들이 저를 목사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저 녀석은 좋은 목사가 될 꺼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커서 당연히 목사가 될 줄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더 열심히 보았고 기도도 열심히 했습니다. 또 어려서 저희 동네에는 존경받는 한학자 한분이 계셨습니다. 그 집 앞을 지나가면 그 분은 꼭 저를 부르십니다. “저녀석이 조합장의 아들이야” 하시고는 “어디 얼굴 좀 보자, 손 좀 보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장차 자수성가 하겠구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잘 몰랐지만 좋은 말인 줄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의 말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것이 비전입니다. 그런 말을 들은 저는 참 즐거웠습니다. 행복했습니다. 나에게 비전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이 비전을 제시하셨습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이 얼마나 확신 있는 꿈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비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비전이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매사 긍정적이 되고 미래가 기대됩니다. 그래서 오늘 내 자리에서 열심히 땀을 흘리고 수고하게 됩니다.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기쁨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내용이 다 비전이기 때문입니다. 부활, 천국, 구원 모두가 비전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삶이 곤고할지라도 그 가운데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비전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떠나라
그런데 비전, 꿈은 그냥 앉아있으면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떠나야 합니다. 어디로 떠나는가 하면 꿈을 이룰 수 있는 곳으로 떠나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비전을 제시하시고 이곳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이는 땅으로 가라.”(1절) 비전을 이루려면 고향을 떠나야 합니다. 고향은 참 좋은 곳입니다. 평안하고 안식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평안하고 안정된 곳에서는 꿈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 곳에서는 사람이 안주하게 되고 구태의연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에 있어서도 고향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회심률이 가장 저조합니다. 안정된 곳이니까 변화에 대한 의지도 미래에 대한 도전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떠나야 합니다. 그래서 타향에 가면 회심률이 높아집니다. 더 멀리 타국에 가면 회심률은 더 높아집니다. 그래서 위인이나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고향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떠난다는 말은 구세계와 단절한다는 말입니다. 떠나면 안주하지 않고 모험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야 비전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떠날 때는 과감히 떠나야 합니다. 우물쭈물하고 민기적거리면 절대로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어느 가난한 신학생이 부잣집 딸과 연애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자 친구는 장차 목회하는 것을 단배했습니다. 이 신학생이 고민이 깊어갔습니다. 여자 친구를 놓기가 아까웠습니다. 그렇다고 붙잡자니 꿈에 방해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이때 과감하게 떠나지 않으면 불행해 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큰 꿈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리고 고향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결단해야 했습니다. ‘안주할 것이냐? 꿈을 찾아 모험할 것이냐?’. 이 때는 무서운 결단이 필요합니다. 과감한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떠날 때는 과감히 떠나야 합니다. 결단할 때는 무섭게 과감하게 결단해야 합니다. 민기적거리고 우물쭈물하게 되면 기회를 다 놓치게 됩니다.
오늘도 이렇게 고민하고 민기적거리고 우물쭈물하는 상태에 있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떠나라고 하는데도 떠나지 못하고 민기적 거립니다. 주저하고 망설입니다. 의사가 술을 끊으라고 했는데도 주저주저하며 “내일 끊지”하고 숨어서 홀짝홀짝 마십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끊지 못하고 망설이면 큰 화를 당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병원에 갔더니 간암 말기라는 판정이 나왔습니다. 엊그제 어느 화장실에 갔더니 누군가 왝왝거리며 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이제 끊어야지, 이제 끊어야지.”
성경은 아브람이 즉시 떠난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즉시 떠났겠습니까? 내심 얼마나 고민이 많았겠습니까? 그때 아브람의 나이가 75세였습니다. 나갔다가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나이입니다. 막상 떠나려고 하니 그를 붙잡는 것이 많았습니다. 고향을 떠나 하란에 머무는 동안 아버지가 죽었습니다. 이제 마음을 추스르고 겨우 안정을 찾고 정착하려고 하니 하나님이 또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편히 살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조용히 묻혀 살고 싶었을 것입니다. 주위의 사람들도 모두 그를 붙잡습니다. 친척도 친구도 익숙함도 그를 붙잡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깊이 생각해 보니 미래가 불확실하고 두려웠습니다. 하나님은 떠나라고 하셨지만 막상 떠나려니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 생각해 보니 하나님이 제시한 비전이 너무 컸습니다. 버리기는 너무나 아까웠습니다. 그렇다고 감행하자니 미래가 불투명하고 앞날이 다 모험이 기달피고 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럴 때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어부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고향을 떠나라는 말입니다. 지금 들고 있는 그물을 던지고 나를 따르라 그 말입니다. 이것이 쉬운 일입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들이 즉시 예수님을 따라 나섰다고 쉽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많이 주저하고 갈등한 모습은 성경은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심히 고민하고 갈등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그들은 주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들이 그날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 삶은 아무런 의미없는 삶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무런 존재감 없는 삶이었을 것입니다.
맹자는 유학 중에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밤중에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어머니가 맹자를 보고 깜짝 놀라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오늘 밤 당장 떠나라” 고 말했습니다. 당시는 모질고 서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떠나는 것이 그에게는 유익이었습니다. 그날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거기에 안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꿈을 키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비전을 이루려면 떠나야 합니다. 때로 기득권도 포기해야 합니다. 안주의 삶도 반납해야 합니다.
북극 선교에 나선 구루펠 일행은 배를 타고 각고 끝에 북극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도착 즉시 타고 온 배를 불태워버렸습니다. 그것은 북극 선교가 힘들고 어려워도 결코 실패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넜습니다. 창일하던 물이 그치고 물가운데 길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건너자마자 넘실거리던 홍해의 물이 합해져 기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다시는 구세계로 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 물이 다시 합해지지 않고 계속 길이 만들어져 있었더라면 그들은 몇 번이고 구세계로 되돌아갔을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그렇게 떠나서 결국 위대한 신앙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떠나야 할 때 과감히 떠났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제시한 비전을 이룰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메시지
본문은 우리에게 세가지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지 못해 안달하시는 분이십니다. 복도 그냥 복이 아닙니다. 그 복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는 복입니다. 그런데 그 복을 받으려면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떠나는 일입니다. 단절하고 끊어내는 일입니다. 이런 일들은 과감한 용기와 결단력이 없으면 절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복의 근원도 될 수가 없습니다. 우물쭈물하고 갈까말까 주저주저 하면 절대로 큰 일을 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큰 비전이 주어졌다 할지라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떠나야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이것은 누구를 위해서 떠나라는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누구에게 떠나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은 바로 여러분들에게 떠나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야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비전과 뜻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모두에게 비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비전을 이루라고 기대하고 계십니다. 그러려면 과감히 떠나야 합니다. 여러분, 과감히 떠나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단호하게 떠나십시오. 오늘 나태한 자리에서 과감하게 떠나십시오. 잘못된 길에서 빨리 유턴해서 돌아가십시오. 길이 아닌 길에 미련을 가지지 말고 과감하게 그 길을 포기하고 돌아가십시오. 지금 넓은 길을 가면서 재미있어 하는 일들을 다 놓고 빨리 좁은 길로 접어 들으십시오. 그 길을 계속 가면 다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지금 나를 사정없이 얽매고 있는 모든 습관, 버릇, 생활로부터 모두를 벗어던지고 길을 새롭게 들어가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 주어진 비전과 꿈을 반드시 이룰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은혜를 누리를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