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여전히 살아있는 종합공연장, 여의도 KBS홀
220905. 송혜영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어렸을 때 많이 불렀던 노래다. 80년대,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를 다녔던 그 시절에는 영상을 접하는 것이 TV를 통해서였고, 그 영상에 나오는 것이 드물어 자랑거리가 될만한 시대였다. 내가 어린시절을 보낸 창원에는 KBS홀이 있었는데 여기는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다.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어린이동요제는 당시 국딩들의 명예의 전당 같은 곳이라 실력을 떠나 너도 나도 예선전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5학년 때 우리반 희연이는 정말 노래를 잘 불러서 예선을 통과했고 덕분에 나도 피켓을 만들어 응원하러 스튜디오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아니, 내가 주인공인 때도 있었다. 5학년 때 음악계에 인맥이 두터웠던 합창반 선생님 덕분에 우리는 KBS홀 연말 음악회에 한 꼭지를 참여하기도 했다. 조명으로 눈이 부셔 앞이 안 보이는 영광스런 무대 위에서 우리는 비발디의 사계를 '랄랄라라 라라라' 불렀고, 크리스마스 캐롤 메들리로 흥이 났던 기억이 난다. 그 뿐인가, 동요제 프로그램에서 심사하는 시간에 송출되는 합창을 위해 KBS 앞 공원 잔디밭에서 노래 녹화를 하기도 했다. 그 때 '바람이 서늘도 하여~'로 시작되는 '별'을 불렀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군중 속 한 명이긴 했으나 당당히 텔레비전에 나왔고 이는 남이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나만의 자랑거리였다. 아니, 부모님이 그 때 비디오 녹화도 해 두셨던 것 같으니 우리 가족의 자랑거리였던 걸로.
그러고보니 KBS홀에서 하는 음악회에도 몇 번 갔었는데 말이다. 어린 나에게 KBS홀에 간다는 것은 뭔가 고상해지는 것 같고 특별해지는 것 같은 공간이었다. 비록 카르멘을 들으며 반쯤 졸다 나오기도 하고, 남중 다니는 친구가 음악선생님 내주신 감상 숙제 횟수를 채우는 데 동원되어 반강제로 간 것이었을지라도 말이다. 나름 특별했던 장소에의 기억이 마치 합창부 녹화 테이프를 어디 뒀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잊고 있었다. 요새는 크고 작은 공연장에다 넷플릭스, 웨이브 같은 서비스 업체가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유튜브, 블로그 등을 통해서도 나를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 널려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던 차 지난 달에는 서울 여의도에 있는 KBS홀을 무려 두 번이나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한 번은 KBS홀 내부를 견학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것이고 또 한 번은 시청자 감사음악회에 다녀온 것이다. 둘 다 공식홈페이지에서 예약을 했는데 견학프로그램은 개인 예약이 이미 다 차서 지인 10명을 모아 단체로 신청하였다. 시청자 감사음악회는 선착순 신청이 아니라 추첨 방식이다. 신청한 것을 까먹을 때쯤 선정되었다는 문자가 와서 아주 반가웠다. 우리 아이들을 보니 둘 다 다녀온 후 그 여운이 남는 것을 보았기에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려 한다.
KBS홀 견학은 안내해 주시는 분을 따라 4,5층을 다니며 여러 체험을 할 수 있었다. 기상캐스터가 방송을 할 때는 실제 파란색 배경의 가상 스튜디오에서 영상을 찍게 되고 이에 일기도 화면을 입혀서 송출하는데 이를 '크로마키'라고 한다. 두 명 씩 돌아가며 모두가 기상캐스터 체험을 해 보는데 처음이라 그런지 다들 목소리가 조심스럽다. 영상을 찍을 때 다방면에서 찍어 필요한 화면만을 내보내는 일을 하는 'TV부조정실 체험'을 하고 만화영화 더빙존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서 아이들의 자신감이 확 높아진 것 같다. 먼저 구름빵의 한 장면을 본 후, 대본을 읽어 나의 목소리로 더빙을 한다. 그리고 더빙이 된 영상을 확인해 보는데 이게 홍비 홍시의 표정과 묘하게들 어울렸다. 앞 팀이 하는 것을 보고는 뒤로 갈수록 목소리도 커지고 실감나게 읽는 모습들이 보인다. 구름빵 만화에 친구의 목소리가 입혀져 들리는 것이 다들 신기하고 재미가 있나 보다.
마지막 체험인 뉴스앵커를 할 때에는 쭈볏거림은 거의 사라져 있었다. 9시 뉴스 시작을 알리는 시그널음악이 나오면 앵커는 바로 앞 화면에 제시된 방송대본을 읽는다. 그러면 다른 친구들은 녹화현장과 함께 TV에 송출되는 뉴스 영상을 볼 수 있었다. 잘 했다고 박수를 세게 치는데 앵커 자리에서 내려와 앉는 아이들 얼굴에 뿌듯함이 묻어난다. 그 외에도 핀스크린으로 자신의 몸의 형태를 찍어보기도 하고 실제 녹화를 하는 스튜디오를 들여다 보기도 하였다. 수중촬영의 노고를 찍은 다큐의 한 장면을 보고, 복도를 따라 붙여진 판넬들을 보며 장수 프로그램이나 인기 드라마들을 읊어보기도 했다. 키자니아에서 더빙 체험이 한 공간에서 끝났다면 여기는 체험을 해 보며 실제 녹화가 이뤄지는 공간도 함께 보게 되니 더 현장감이 있달까! 그런 면에서 훌륭한 직업교육이 된 것 같다.
방송국을 다녀와 일주일 쯤 뒤에 진주에 있는 어린이농촌테마체험관에 갈 일이 있었다. 체험관에는 앵커가 되어 농산물을 소개해 보는 코너가 있었는데, 실제 방송국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정장 상의도 있고 대본대로 읽으면 멋진 앵커로 화면에 나오게끔 있을 것이 다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꽤 많았음에도 이 곳은 비어 있네. 아무래도 여기서 글을 읽고 앉아있기엔 더 즐거워 보이는 다른 것들이 많은가 보다. 그런데 서은이 가은이는 둘 다 상의를 진지하게 골라 입고는 서로 먼저 하려 한다. 한 번씩 하고는 더 하고 싶다며 다시 한다. 다른 아이들이 뭐하나 기웃대도 주눅들거나 부끄러워 않고 신나게 읽으며 화면에 나오는 자기들 모습을 즐겼다.
그리고 개학을 하고 어느 날, 서은이가 학교에서 역할극을 한단다. 자기는 미용실 사장님을 인터뷰하는 기자와 앵커 역할을 맡았다면서 꽤 긴 지문을 외워 가야 한다고 하였다. 이 아이가 그것을 부담으로 여겼느냐? 전혀 아니다. 어느새 나는 미용실 사장님이 되어 상대역을 하고 있었고 서은이는 눈치껏 대본을 읽더니 얼마 후에는 달달 문맥을 외워 버렸다. 애살은 있다치지만 수줍음도 꽤 많은 아이들이 방송국에 다녀온 후 묘하게 맞닥뜨리는 비슷한 상황에서 아주 적극적인 모습을 보며 엄마는 내심 체험 효과인가 싶어 기분이 좋다.
8월의 마지막날, 아빠와 만나 저녁을 먹고 이번에는 KBS 아트홀로 향했다. 아주 세련되고 깔끔한 공연장을 기대하고 가면 실망한다. 로비며 화장실이 세월의 흐름을 말해주는데다 공연장도 그닥 넓진 않다. 하지만 오늘 '한여름밤의 크로스오버 콘서트' 를 가족같은 분위기에서 즐기기엔 제격이다. 서은이는 뭔가 힘차게 뻗어나가는 듯 하면서도 떨림이 있는 대금의 소리에 반응했고, 라헬님의 '백만송이 장미', 테너가수 류정필 님의 'Quizas Quizas Quizas' 키사스를 박수 치며 즐긴다. 샹숑 가수인 무슈고님의 팬클럽은 응원띠까지 준비하여 한 쪽에 앉았는데 가은이는 그것이 신기한지 힐끔힐끔 보았다. 참 느끼하면서도 웃음을 자아내는 멘트들, 예술가의 몸에서 뿜어 나오는 자신감과 유쾌함이 KBS관현악단의 연주와 어우러져 음악회 입문자인 아이들에게도 흥겨운 시간이었나 보다. 앵콜 곡까지 끝나고 홀의 불이 켜졌는데 서은이는 의자를 붙들고 집에 가기 싫다고 한다.
주말에 라헬님이 불렀던 엘리자벳 뮤지컬 중 '나는 나만의 것'을 찾아 들을 때였다. 아이들이 '백만송이 장미'도 들려달라고 한다. 남성 팝페라 그룹 버전을 듣더니 이건 아니라 해서 다른 가수 버전 듣다가 심수봉님의 백만송이 장미까지 이르렀다. 후렴부분의 리듬과 가사의 반복이 마음에 드는지 여러번 흥얼거리더니 가사를 꽤 외워 부른다.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수백만송이 백만송이 백만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아, 아이들이 클수록 이렇게 공유할 수 있는 문화가 많아진다는 게, 함께 음악회를 갈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감동적이다. 그리고 4인이 음악회를 가려면 주머니사정도 고려해야 하는데 무료로 거의 매달 이런 음악회를 여는 것은 참 잘 하는 일이다.
우리 아이들이 크면 KBS방송국을 어떻게 기억할까? (정성을 다 하는 국민의 방송국으로서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느냐는 문제는 차치하고 말이다.) 일단 뉴스를 제작하는 곳, 일기 예보 안내 영상을 찍는 곳. 라디오와 만화를 포함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이를 위해 출연자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일하는 곳이라는 인식은 심겨졌을 것 같다. 이번 기회를 시작으로, 아빠와 퇴근 후에 만나서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고 아름다운 음악을 누릴 수 있는 곳. 가족이 함께 듣고 보고 나눈 이야기로 인해 풍성하고 따뜻한 공간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그래서 이 아이들이 텔레비전에 나오든 안 나오든 '춤추고 노래하는' 기쁨이로 자라면 좋겠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빛나는 아이,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기는 건강한 자존감의 '이쁜 내 얼굴'로 자라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