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해하기보다는 사랑하기를…
- <흐르는 강물처럼>
가슴에 와 닿는 말도 변한다.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의 ‘평화의 기도’ 중에서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기를’이라는 대목은 처음 접하는 순간부터 나에게 큰 울림이 있었다. 그래서 나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열심히 기도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이제는 나의 생각, 나의 감정을 상대방에게 꼭 이해시키려고 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강요라는 생각이 들어 조심스러워진다. 그런데 요즘에 더 가슴속 깊이 와 닿는 말이 생겼다.
“오롯이 이해할 수는 없지만 오롯이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 누구를 꼭 이해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사랑해야 한다. 내가 최근에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을 다시 본 것이다.
수려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강물이 흐르고 한 노인이 플라이 낚싯줄을 추스르며 가족사를 회상한다. 이렇게 노먼 매클린이 화자(話者)가 되어 이 영화는 전개된다.
미 서북부 몬태나 주 미줄라, 아름다운 강이 가로질러 흐르는 자그마한 시골마을에 매클린 목사는 두 아들 노먼과 폴, 그리고 부인과 함께 교회 사택에 살고 있다. 스코틀랜드 출신 장로교 계통의 목사인 아버지는 보수적이며 매우 엄격한 방법으로 두 아들을 직접 교육시킨다. 그러나 원칙을 고수하고 칭찬에 인색한 아버지이지만 자주 시를 읊는 문학 애호가답게 자식에 대한 마음 깊은 속사랑은 남다르다.
낚시를 마치 종교처럼 여기는 아버지는 수면 위로 햇빛이 반짝반짝 빛나는 강으로 두 아들을 데리고 가 플라이 낚시를 가르치고, 형제는 이렇게 낚시를 하며 자연과 함께 숨 쉬었다.
“낚싯줄 던지기는 예술이며, 네 박자 리듬에 맞추어 10시와 2시 방향 사이로 던져야 한다. 낚시법 모르는 사람이 낚시를 하는 것은 물고기에 대한 모욕이다.”
아버지는 삶도 이와 같이 조이고 늘이는 거라며 낚시하는 법을 전수하는데, 형 노먼은 이러한 아버지의 가르침을 잘 따라 정통파로서 이지적이고 모범적으로 커 갔으며, 동생 폴은 아버지와는 다른 자기만의 낚시 방법을 개발하는 등 기본 틀에서 벗어나 모험을 즐기고 도전적인 모습을 지니게 된다, 노먼은 이렇게 폴의 열정 넘치고 과감한 성격이 한편 부럽기도 하지만 때때로 위험하고 무모한 행동도 서슴지 않기 때문에 형으로서 항상 안심이 안 되는 것도 사실이다.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져 젊은이들이 징집되자 노먼은 산림청 벌목요원으로 차출되어 힘든 일을 하며 열심히 책을 읽고, 폴은 수영장 안전요원으로 일을 하면서 낚시를 부지런히 한다. 어느 날 밤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 겁먹은 다른 친구들을 제쳐놓고 형제만이 작은 보트를 타고 폭포의 급물살에 도전한다. 이때 두려움을 갖고 있었던 노먼과 무서움을 모르는 폴의 성격이 확연히 드러나는데, 결국 둘은 이 일로 인해 처음이자 마지막인 형제간의 싸움까지 벌이게 된다.
이렇게 고향의 자연 속에서 자신만의 삶의 리듬을 찾아 성장한 후, 노먼은 고향을 떠나 동부 아이비리그의 다트머스 대학에 진학하고, 폴은 그곳을 떠나기 싫어 그냥 그 지방의 대학을 다니고 근처 자그마한 지역신문의 기자가 된다.
폴은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고정관념을 깨뜨리며 위험해 보이는 행동을 즐겨한다. 신문사의 근무 시간에 술을 마시는가 하면, 손이 근질근질하다면서 포커 판을 전전하기도 한다.
세월이 흐르고 학업을 마친 형이 6년여 만에 귀향하면서 다시 가족이 모이게 된다. 장래를 묻는 아버지에게 노먼은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대학교수를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노먼은 폴과 함께 빅 블랙풋 강에서 낚시도 하고 옛 친구들을 만나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독립기념일에는 축제에 갔다가 매력 넘치는 제시 번즈라는 여자를 만나 데이트를 몇 번 한다. 한번은 바에서 인디언 원주민 여자 메이벨을 데리고 온 폴과 합석하게 되는데, 거기서 폴은 일부러 메이벨과 격한 춤을 추어 다른 손님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며칠 후 밤중에 집에서 전화 연락을 받은 노먼은 경찰서 유치장으로 가서 주먹질 싸움을 하여 끌려간 폴과 술에 곯아떨어진 메이벨을 데리고 나온다. 노먼이 폴에게 돈이든 뭐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얘기하라고 하나 폴은 그냥 메이벨의 집 위치만 말해준다.
그 후 노먼은 제시의 오빠 닐이 오는 역으로 마중 나가면서 그녀의 가족과도 인사를 나누고, 중간에 천덕꾸러기 닐이 벌인 소동 때문에 제시와 다소 우여곡절을 겪지만 노먼은 그녀에 대한 자신의 진심을 전한다.
시카코 대학으로부터 영문학 강의를 맡아달라는 편지를 받은 노먼은 이 기쁜 소식을 아버지에게 알리러 서재로 가 보니 아버지는 워즈워스의 시를 읊고 있기에 숨을 고르며 이 시를 함께 암송한다. “그 어느 것도 초원의 빛, 꽃의 영광된 시간을 되돌릴 수 없지만, 슬퍼하지 않으리. 차라리 그 속 깊이 남은 것에서 오묘한 힘을 찾으리라. … 나를 향해 나부끼는 가장 연약한 꽃 한 송이조차 눈물로 흘려보내기엔 너무 깊은 사념을 준다.”
제시의 오빠가 기차를 타고 캘리포니아로 돌아가던 날 노먼은 심란해하는 제시에게 시카고 대학에서 온 편지를 보여주며 기쁜 소식이지만 당신을 떠나고 싶지는 않다고 말한다. 이 말을 청혼으로 받아들인 제시는 무척 좋아한다. 그리고는 곧바로 술집으로 폴을 찾아간 노먼은 폭탄주(보일러 메이커)를 시켜 마신 뒤 제시를 정식으로 사귀게 됐다고 말한다. 폴은 축하한다며 형을 롤로 도박장으로 데리고 가는데, 거기서는 폴을 기피하며 판에 끼워주지 않으려 한다. 노먼이 그냥 집으로 돌아오려고 차에 올라타자 폴이 내일 낚시를 가자고 한다.
다음날 이른 아침을 먹는 자리에서 노먼은 가족들에게 정식으로 시카고 대학 영문학 강사로 취업하게 됐다는 것을 알리고, 이렇게 해서 노먼이 시카고로 떠나기 전 세 부자는 예전처럼 다시 플라이 낚시를 하러 강으로 나가게 됐다. 그 순간만큼은 예전의 그 행복이 돌아온 듯했다. 먼저 송어를 두어 마리 잡은 노먼은 폴에게 제시와의 결혼계획을 말하고 시카고에는 신문사가 많으니 그리로 함께 가자고 권유한다. 그러나 폴은 자기는 절대 고향 몬태나를 떠나지 않을 거라고 단호히 거절한다. 그러고 나서 물살 센 깊은 쪽으로 내려갔는데, 그때 자기만의 방법으로 줄을 수면에 길게 드리우는 무지개송어 유인법을 사용하는 폴의 모습을 본 노먼이 “그 순간 나는 완벽을 목격했다!”고 감탄할 정도로 그의 낚시는 예술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거친 급물살의 위험을 무릅쓰고 폴은 마침내 거대한 송어를 잡는다. 그러고는 노먼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고 한다. 삶은 예술작품이 아니며 영원할 수도 없다는 것을.
낚시를 다녀오고 나서 얼마 뒤 노먼은 또 경찰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폴의 시체가 골목에 버려진 채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폴은 도박 중독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꽤 많은 빚을 갚지 않아 건달패들한테 끌려가 맞아 죽은 것이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아버지는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고 죽어간 폴을 그리며 훌륭한 낚시꾼을 넘어 “그는 아름다웠다.”고 회상한다.
폴은 아버지의 마음속에 계속 살아 있었다. 노먼은 한참 지나서 아버지가 교회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설교를 이렇게 기억한다.
“… 사실 우리는 가장 가까운 사람을 거의 돕지 못합니다. 무엇을 해줘야 할지 모를 수도 있고 우리의 도움을 그들이 원치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서로 이해 못하는 사람과 산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완전한 이해 없이도 완벽하게 사랑할 수는 있는 겁니다.”
영화의 마지막은 노인이 된 노먼이 폴과 아버지와의 추억이 있는 빅 블랙풋 강에서 낚시를 하는 장면이 다시 나오면서 다음과 같은 내레이션이 깔린다.
“이해는 못했지만 사랑했던 사람들이 거의 다 죽었다. 제시 역시 …. 그러나 난 아직도 그들과 교감하고 있다. … 어둑해진 계곡에 홀로 있게 되면 모든 것들이 하나로 스며든다. 내 영혼과 기억, 그리고 빅 블랙풋 강의 소리, 낚싯대를 던지는 4박자 리듬, 고기가 튀어 오르길 바라는 희망, 이런 것들과 함께. 그러다가 결국 모두 다 합쳐져 하나로 녹아든다. 그리고 강은 그것을 통하여 흐른다. … 나는 강물에 사로잡혔다.”
이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은 ‘아름다운 자연 풍광과 예술적인 경지에 도달한 플라이 낚시의 환상적인 장면과 더불어 가족 간의 사랑과 아픔을 진솔하게 보여줌으로써 인생의 참 의미를 되새기게 해주는 작품’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정말 그렇다.
그런데 문학 작품도 그렇지만 영화도 그것을 언제 보느냐에 따라 느끼는 감흥이 크게 다르다. 20여 년 만에 다시 본 이 영화가 나에게 던져준 메시지는 처음 보았을 때와는 너무나 달랐다. 내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사랑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깊은 성찰을 하게 해준 이 영화에 대하여 무한한 고마움을 느낀다.
그리고 전에는 그냥 지나쳤을 것 같기도 한 장면 장면들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다가오기도 했다.
매클린 목사의 ‘아버지 교육법’ 같은 것이 그렇다. 낚시를 하나의 예술로, 삶의 철학으로 가르치는 것도 그렇지만 신앙심을 심어주는 방법도 독특하다.
그는 두 아들을 강가로 데리고 가 조약돌을 하나 주워들면서 말한다.
“아주 옛날 비가 진흙에 떨어져 바위가 되었다. 5억 년 전에 말이야. 하지만 그 전에 바위들 밑에는 신의 말씀이 들어 있었다. 들어봐라.”
이렇게 자연 속에서 경건하게 신의 섭리를 깨닫도록 이끌어주는 그의 설교 내지 교육은 매우 인상적이다.
아버지는 노먼에게 작문을 직접 가르친다. 노먼에게 글을 쓰게 하고 다 써 오면 반으로 줄이라고 한다. 그래서 노먼이 머리를 쥐어짜듯 다시 써 가면 또 반으로 줄여 쓰라고 한다. 그렇게 또 간신히 반으로 줄여서 서재로 가지고 들어가면 아버지는 그때서야 비로소 “잘했다. 이제 찢어버려라.”고 한다. 이렇게 삶의 군더더기를 걷어내듯 아들에게 글 작성에서의 절제의 미를 가르치고, 맘에 들 정도가 되면 이제 찢어버리게 했다. 노먼은 아버지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글 쓴 종이를 마구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버린다. 그러고는 기다리고 있던 폴과 함께 낚싯대를 들고 강가를 향해 달려 나간다. 공부를 마치고 나면 자유가 허용됐다. 아버지의 엄격한 훈육에도 균형과 질서가 있었다.
목사인 아버지가 인간은 수천 년 동안 하나님이 주신 귀리를 먹어 왔다면서 식구들에게 귀리죽을 먹자고 한다. 하지만 반항적이고 고집이 센 어린 폴은 싫다고 안 먹고 거부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억지로 먹이려는 강압적 태도를 보이지 않고 그냥 기다려준다. 그러다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폴이 끝내 먹지 않고 버티자 그에게 다가가 기도하자고 하면서 온 가족이 함께 기도한다.
“주님께서 주신 것을 소중히 지키게 하소서….”
이 정도라면 정말 절제와 인내로써 피교육자를 인격적으로 존중해주는 사랑의 교육법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영화에서는 낚시와 관련된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그러면 낚시가 은유하는 바는 무엇일까? 어쩌면 우리는 가까운 이들을 이해하고 사랑하기보다는 낚싯줄 끝에 매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래서 그런지 흔히들 이 영화에서의 낚싯줄은 두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매클린 목사는 노먼과 폴을 극진히 사랑하고 그 나름의 방법으로 사랑을 베푼다. 그런데 두 아들에게는 아버지는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절대적인 권위자로만 보였다. 그래서 아버지를 존경하고 아버지가 자신들을 사랑하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또한 본능적으로 벗어나고도 싶은 것이다. 낚싯줄에 걸린 아들들이 낚싯바늘에서 풀려날 수 있는 길은 낚시꾼 쪽으로 거슬러 가서 팽팽해진 줄을 느슨하게 한 다음 기회를 포착, 순간적으로 미늘(낚시 끝의 안쪽에 있는 작은 갈고리)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노먼은 아버지에게 순종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고 기회가 되자 아버지에게서 벗어나 자유를 얻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폴은 이와 반대로 끊임없이 아버지에게서 벗어나려고 반항적인 행동을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줄은 더 팽팽해지고 미늘의 고리는 더욱 몸 안으로 깊숙이 박혀 지쳐가는 물고기처럼 되고 만 것이다.
폴의 비극의 단초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낚시에 걸린 물고기처럼 아버지에게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 벗어나지 못하는 데에 기인한다. 과음과 도박 등 일탈행위도 그래서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인데, 또 그것을 말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이런 폴을 어느 누구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폴이 죽고 난 후에야 뒤늦게 이것을 깨달은 매클린 목사는 그래서 더욱 가슴 아프다. 그렇기에 폴이 자신을 뛰어넘는 훌륭한 낚시꾼이 된 순간 이미 자기를 벗어난 것이라며 아버지는 폴이 아름다웠다고 애써 강조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가족이 한 명 더 등장하는데 바로 제시의 오빠 닐이다. 축약이 되어서 충분한 설명은 없지만 닐이 허풍쟁이 사고뭉치가 된 데에는 분명히 뭔가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해할 수는 없다. 제시를 포함한 그의 가족들도 닐이 뭔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도울 방법이 없다.
닐이 캘리포니아에서 고향으로 오던 날부터 제시는 노먼에게 자기 오빠와 잘 지내보라고 부탁한다. 노먼과 폴은 닐을 좋아하지 않지만 제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낚시에 그를 초대한다. 그런데 낚시는 않고 술집에서 만난 여자를 데리고 와 맥주를 잔뜩 마시고는 벌거벗은 채로 풀밭에 뻗어버리는 등 볼썽사나운 꼴을 보인다. 이때 어이없어하는 노먼에게 폴이 “글쎄, 누군가 자기를 도와주길 바라는지도 모르지.”라고 말하는데, 닐을 이해하는 눈치다. 그것은 그때 폴 자신이 닐과 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고(다른 사람들은 자기를 이해할 수는 없다는), 또 자신도 어떤 도움이 필요했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하는 것이다.
나중에 캘리포니아로 돌아가는 닐을 배웅한 뒤 제시는 눈물을 흘리며 노먼에게 묻는다. “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오히려 거절할까요?” 이때 노먼은 시카고 대하에서 온 편지를 제시에게 보여주며 자신의 연정을 고백함으로써 제시를 달랜다.
젊었을 때 나는 항상 옳다고 자신만만했었다. 그래서 나의 옳음을 이해시켜 나의 옳음을 내 가까운 사람들도 함께 갖추게 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전도사가 복음을 전파하듯이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무슨 사명인 것처럼 여겼으니 말이다. 물론 반발이나 반항도 있었으나 그것은 초기 기독교도들이 받은 박해와 같이 성스러운 것이고 꼭 거쳐야 할 통과의례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나의 옳음 외에 다른 옳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신앙을 통하여 그리고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겪으면서 포용을 어느 정도 배우게 되었다. 그래서 나를 이해시키려 하기보다는 내가 남을 이해하게 해달라는 ‘평화의 기도’도 자주 올리게 되었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로 남을 적극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다 보니 내가 마치 열린 마음의 인격자가 된 듯하여 기분이 좋기도 했다. 이런 들뜬 상태가 비교적 오래 계속되다가 이번에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깨닫게 된 것이다. ‘이해’란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나를 이해시키기보다는 내가 이해하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이해를 한 많은 사람들을 좋아했고 또 사랑했다. 그러나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 않았었던가. 내가 생각할 수 없는, 내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기 때문에 내 이해력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경우도 있지만, 내 생각과는 너무 다른 또 정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은 좋아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있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도 사랑인가? 이해를 전제로 한 사랑이 사랑인가? 이해하려고 했었기에 나는 오히려 사랑할 수 있었던 많은 사람들을 놓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우리는 이해하려고 해서 사랑하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랑부터 했으면 모두 다 이해했을지도 모르는 그 사람들을….
이 영화의 중반에 제시와 데이트하던 노먼이 인디언 원주민 메이벨을 동행한 폴과 마주쳐 함께 바에 들어가 합석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서 노먼이 생뚱맞게 이런 시의 한 구절을 읊는다.
“내 초가 있는 힘을 다해 빛을 태우니, 비록 이 밤을 다 밝히지는 못해도 내 적과 벗들을 모두 따사롭게 비추리라!”
이 시가 노먼 매클린의 작품인지 다른 사람의 것을 인용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영화가 나에게 주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이해할 수 있는 사람과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모두 사랑하고 그들을 다 함께 따사롭게 비춰주는 그런 사람이 될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지 않을까.
이 영화가 나에게 각별한 감명을 주는 것은 아마도 그 원작 소설이 노먼 매클린이 시카고 대학에서 은퇴한 후 70대에 쓴 작품이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 작품이 발표됐을 때 많은 비평가들은 70대의 노작가가 단 한 번의 시도에서 이런 걸작을 써낸 사실을 놀라워했다고 한다. 하지만 70대야말로 그 동안 살아오면서 겪은 온갖 사랑과 증오에서 얻은 경험이 불과 얼음이 적절한 조화되듯 인생의 심오한 지혜가 되어 비로소 꽃피어나는 때가 아닐까. 로버트 레드포드 감독은 자기가 만들 영화로 미국 서부의 소설가들 중에서 자기가 직접 체험하여 알고 있는 이야기를 서술한 가장 진정성 있는 작가의 작품을 찾았다고 한다.
체험에서 우러난 말은 그 울림이 더 크다. 오롯이 이해할 수는 없어도 오롯이 사랑할 수는 있다고 하는 매클린 목사의 마지막 말씀이 그렇다. 그것은 고통을 지어내기도 했고 고통을 이겨내기도 한 사람의 말이기에 더욱 설득하는 힘이 있어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위로의 힘을 가져다준다. 도움을 뿌리쳤던 동생 폴과 오빠 닐의 아픈 역사를 공유한 노먼과 제시는 결혼 후 자식들과 함께 이러한 매클린 목사의 마지막 설교 말씀을 듣고 큰 위안을 받았으리라. 그리고 그들 나름의 제대로 된 사랑법과 교육법을 배웠을 것으로 본다.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사랑하는 일,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다.
이 영화 마지막에 노먼은 이렇게 독백한다. 떠나간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리고 강과 소리들과도 교감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렇다. 사랑할 수 있다면, 이해할 수 없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명확히 정의할 수 없는 거대한 강이다. 그 강은 오늘도 쉬지 않고 흐른다. 그 속에 이해와 사랑을 품고…. ☼
****
추기(追記): 다 쓰고 나서 읽어 보니까 영화 내용에 관해서만 치중해서 쓰다 보니 부수적인 이야기를 다 빠뜨렸다. 리즈 시절의 브래드 피트가 몇 달 동안 플라이 낚시를 맹연습한 후 오디션에 응하여 멋진 연기를 편 것이며, <500일의 섬머>의 조셉 고든 레빗이 어린 시절의 노먼으로 나와 우리에게 또 다른 즐거움을 준다느니, 노먼과 폴의 어머니로 나온 배우가 바로 <비밀과 거짓말>로 각종 연기상을 휩쓴 명배우 브렌다 블레신이라든가, 노먼이 폴에게 제시와의 관계를 털어놓으면서 마신 술이 바로 ‘한국적인 술’인 폭탄주(보일러 메이커)인데 이에 관한 이야기를 못한 것 등이 좀 아쉽다. 로버트 레드포드 감독이 내레이션을 노먼 역을 맡은 크레이그 셰퍼에게 안 맡기고 굳이 자기 목소리로 내보낸 것도 얘깃거리가 되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