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아시겠지만
봉혜선
낯선 거리에서도 여지없이 간판에 눈이 닿는다. 글자를 읽는 것이 그림이나 화면보다 더 이해가 빠르다. 여지없이 읽어낸다. “읽어 봐.” 한글을 읽기 시작하는 막내가 떠듬떠듬 읽어 내는 것이 신통해 호들갑을 떨며 여기저기를 가리켰다. ‘을찌로’를 “을지로”로 읽고 ‘태능 입꾸’를 “태릉 입구”라 읽는다. 유난히 발음이 정확한 걸까. 거리에 있던 화원 속 꽃 이름과 하늘을 나는 새의 이름까지는 내 상식도 생각도 닿지 않았다.
글자대로 소리 낸 아이에게 놀라야 하나 신통해 해야 하나. 아니면 병원에 가야 하는 건 아닐까, 걱정을 하며 서점으로 들어갔다. 언뜻 눈에 띈 동화책이 『홍길동 전』이다. 읽어보라 하니 제목 그대로 “홍길동 전”이라고 부드럽게 발음하고 자랑스러운 듯 칭찬을 기다리는 눈빛으로 내 눈을 쳐다본다. 피할 수 없었으니 흔들리는 눈빛을 읽었을까. 『홍길동 전』을 한 번도 “홍길동 전”이라 발음해 보지 않았으니 내가 잘못인 건가. 뜻을 몰라도 따라 읽었다던 서당 공부를 새삼 해야 할까.
사물을 보고 이름을 알게 되는 것은 사회가 정한 약속, 규칙과 규정 안으로 들어가 구성원이 되는 까다로운 절차이니 아직 무리가 따를 나이의 아이다. 여기서 잠깐, 짚어볼 필요를 느낀다. 흔히 잘 아시겠지만, 주지하다시피, 유명한, 다들 아시지요? 상식이잖아요, 이건. 이건 기본인데... 이라고들 한다. 성장 환경으로 치자면 시대도 다르지, 공간도 다르지, 그에 따라 주변 환경도 다른 데에 대고 이것도 몰라? 하면 당하는 사람은 추궁한다거나 비난한다고 여기게 마련이다.
막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과학 학원에서 흥분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해부용으로 각자에게 소 눈이 하나씩 배정되었다고 한다. ‘라떼’는 학원은커녕 학교에서 60명 넘는 반원이 선생님이 개구리 한 마리 해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나마도 남자애들이 소리 지르거나 저도 해보고 싶어 하는 북새통 속에서 여자애들은 반 넘어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다섯 살 차이 나는 남편에게 물어보니 논에선가 어디에서 직접 잡아 뒷다리도 구워먹었다 했던가. 학교 다닐 때도 해부용으로 1인 1마리가 나누어졌다 했던가. 잡아오라 해 해부했다던가? 아니면 개구리 해부 정도는 기본이니 다들 해 봤지? 하며 지나 갔으려나.
요즘이라면 동물 보호법에 걸리지 않을까. 아니면 개구리는 멸종되지 않았을까? 그렇게 해부를 당하고도 살아남아 있을까. 시험 치르는 용도 외에는 쓸 일이 없어 기억에 남아 있지도 않은 학교 수업을 운운하면서 상식이라거니 누구나 다 아시겠지만, 이라고 말하면 더는 대거리할 수 없게 된다. 막내는 마치 무공을 세우고 돌아온 개선장군 같았다. 긴장했고 동시에 무사히 마쳤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상식적이라는 말의 위험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지 모르겠다. 잘못된 상식이라는 말은 아니다. 같은 모양을 하고 동시대를 살아가며 한 자리에 모여 앉아 있어도 ‘길은 멀어도 마음만은’이 아니라 ‘한 길 사람 속 모른다’는 속담을 비틀어서라도 내 말이 맞지? 하고 동의를 구할 수 없게 되고 만다. 공유할 수 없는 정서를 강요받는다면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예전에 “에, 우리 옌벤에서는” 하며 과장도 이민 저만한 과장이 아니어서 웃을 수밖에 없는 상식을 떠벌리는 개그 프로가 있었다. “다들 집에 한강만한 수영장 두어 개쯤은 있지요, 네?” 라던.
어린 시절을 농촌에서 ‘시골 살이’를 해보지 않은 사람에게, 즉 쌀 나무에서 쌀이 나는지 모르는 사람더러 무식하다 놀려 버리면 아, 어쩌나, 그 난감함을. 더구나 포장을 뜯으면 바로 나오는 상품처럼 쌀이 마트 매대에서 들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벼가, 낟알이 달린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때의 당혹감은 이해받기 쉽지 않다. 학교에서 뭘 배웠느냐고 따져 물어올 때의 자신만만함에 내어 놓을 카드는 없다. 집 근처나 학교 가까이에 논(쌀밭)이 있지 않았고 현장학습으로 벼를 보여주지 않았을 뿐더러 실험이 흔했던 수업을 하지도 않았다. ‘낫가리’ ‘탈곡’ ‘꼴’ ‘쇠죽’ ‘소가 먹는 여물’까지 나가면 더는 말을 섞을 수 없어진다. 막걸리 심부름을 하며 배가 고파 그걸 먹어보지 않은 상태로서 막걸리는 대학 때 주점에서의 추억이 가장 오래 되었다. 이해하시지요?
상식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좁은 엘리베이터에 타거나 출퇴근 시 만원인 전철에 탄 순간 바깥에서 밀려들어가 그대로 서는 사람은 비상식적인 사람으로 몰리기 마련이다. 재빨리 되돌아서야 낯모르는 사람끼리 얼굴을 충돌하는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잘 아시겠지만.
뒷모습 보는 것이 더 편한 건 남 뿐이 아니다. 남편은 돌아서지 않고 나와 느닷없이 눈이 마주치거나 순간적으로 얼굴을 마주 보게 하는 상황을 만든다. 남편인데도 그 느낌은 고약하다. 상식이란 이럴 때 예의라는 단어와 대체 가능하다. 잘 아시다시피.
그렇다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남이 모른다고 모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지 않은지 생각해 볼 일이다. 경기도 소재 대학에 친구가 원서를 낸다고 해 따라갔을 때 “ㅇ대 가요, ㅇ대”라고 버스 안내양이 소리치는 걸 둘 다 알아듣지 못했다. 당혹감도 잠시, 잔뜩 긴장한 친구가 원서 내려는 학교의 준말임을 알아차리고 급히 올라탔던 기억이 난다. 부산 출신 지인이 “부대(부산대학교) 모리면 촌년이제”라며 나를 몰아갈 때 느낀 당혹감도 마찬가지다. 그런가? 순식간에 ‘서울 촌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또 있다. 12회쯤의 공개강좌에서 장자를 강의하는 교수님의 “재밌습니다. 재밌지 않습니까.” 라는 말에 홀려 소수 정예 반에 들어갔는데 몇 년을 들어도 나는 재미를 찾지 못했다.
평소에도 상식과 예의 어디 께에서 길을 잃기가 일쑤다. 같은 말에도 울거나 웃는 사람이 있으니 내가 가진 상식선을 깨야 세상에 합치하는 것일까. 경험론자들의 이야기가 맞다고 주창하던 시기가 있었다. 보지도 듣지도 먹어보지도 만지거나 해보지도 않고 무엇을 안다고 하는 건 흰 소리로 들렸고 느껴졌다.
어리게만 여겨지는 막내가 어느덧 대학도 졸업했다. 배우지 못한 낯선 프랑스어 이태리어 같은 외계어로 쓰여 그때의 아이처럼 떠듬거리면서도 읽을 수 없는 간판 앞이다. 젊은이 전용 무슨 가게인가. 젊은이들이 이용하는 가게이니 못 읽는 채로도 좋은가. 서툰 영어로나마 을지로로도 홍길동전으로도 읽히지 않으니 다른 세상으로 가는 길은 내게는 막혀 있는가. 호기심조차 허용하지 않는 비상식적인 세상? TV 카메라가 도포 자락 휘날리며 앞만 보고 걷는 초로의 어른을 따른다. 약간은 시대착오적이고 낯설고 신기하다고 여긴 것이리라. 외양이 저러할진대 속은? 상식은 어디서부터이고 어디까지인가. 어려운 세상. 잘 아시겠지만... .
<<수필미학, 2024 봄>>
서울 출생
한국산문 2019.12 <투명함을 그리다> 로 등단
한국 문인 협회 회원
한국산문 편집위원
2022, 2024 선수필, 2023 더수필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