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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12
#칼빈
칼빈선생을 비롯한 신앙개혁가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은 편재할수 없다고 주장하였지만,그리스도의 영광의 인성은 삼차원적인 물질세계의 시공간차원을 초월하시기 때문에 이 땅 뿐만 아니라 전 우주에 인성으로도 편재하실수 있으시다고 보는것이 더 타당하다.재림하실때는 전세계인들이 동시에 주님의 인성을 목격하게 될텐데,편재불가 인성으로 어떻게 설명할수 있는가.
#20171012
#적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 #요한일서 4:2-3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거나 시인하지 않는 ‘영’은, 좁은 의미로는 천사나 마귀 같은 영적인 존재로 볼 수 있다. 이 때 당시에는 그런 영적인 존재들로 말미암은 신비한 영적 체험이 발생하였으므로, 사도 요한께서는 신자들에게 그러한 영적 체험을 분별할 것을 주의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그러나 성경의 기록이 완성된 이후부터 오늘날에는 이러한 신비한 영적 체험을 통한 직접 계시는 중단되었으므로, 이를 두고 그 때와 같은 신비한 영적 체험으로만 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신에 이 ‘영’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 또는 해석이라고 확장해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인간의 ‘영혼’의 작용이며, 인간의 영혼의 작용은 ‘하나님의 영’ 아니면 ‘사탄의 영’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느냐 시인하지 않느냐 하는 것은 말씀에서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시인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갈리는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동정녀에게서 죄없이 출생하셨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하나님이시고 참 사람이신 것을 시인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시인하는 가르침이나 성경 해석은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조명하시는 가르침이다. 반면에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이를 시인하지 않는 모든 신학, 학문, 가르침, 해석들은 그 어떤 미사여구를 쓰고 오묘할지라도 결국 적그리스도의 영에 속한 마귀의 가르침에 불과한 것이다.
#20191012
#창세기 #Genesis
1: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1: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1: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으로 명하셔서 빛을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당연히 인간의 언어가 아니며, 요한복음에 기록된 바와 같이 태초에 계신 말씀, 즉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 자신이시므로 하나님의 본성과 본질을 그대로 동일하게 가지고 계시나, 성부 및 성령 하나님과는 분명히 구분되시는 성자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영광의 인성과 연합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계셨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창조와 섭리에 대한 모든 것을 성자와 성령과 더불어 완벽하게 협의하시고 창조의 역사를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 위임하셨다. 성자 하나님께서는 성부와 성령과 논의한 창조 사역을 당신 자신과 연합하신 인자 예수 그리스도께 공유하셨고,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자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창조 계획을 완벽하게 수용하여 당신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의 능력으로써 세상을 창조하신다. 이 원리는 비단 창조 뿐만 아니라 이후의 모든 섭리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사역의 원리가 된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삼위 중 어느 위격도 배제 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또한 배제 되지 않는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그 혼돈의 물질 얼마를 떼어 빛을 만드신 것 같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만물에는 크건 작건 하나님의 형상이 어느 정도 반영되게 마련이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창조 된 빛은 하나님의 속성과 형상을 너무나 탁월하게 드러낸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빛을 파장의 길이에 따라 크게는 적외선-가시광선-자외선으로 분류한다. 이 세 광선은 모두 빛의 속성과 본질을 가지고 있으나 뚜렷하게 구분된다. 그런 점에서 빛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와 참으로 비슷하다. 적외선은 파장이 길어 비추는 대상을 따뜻하게 하여 생명을 주므로 마치 성부 하나님의 사랑과 같다. 가시광선은 우리 눈에 빛을 주어 대상을 볼 수 있게 하므로 마치 보이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다. 자외선은 파장이 짧아 비추는 대상을 소독하는 성질이 있으므로 마치 우리 죄를 소멸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능력과 같다. 게다가 가시광선은 파장의 길이에 따라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색으로 구분되는데, 이는 마치 한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다양한 은사와도 같다. 지금이야 빛이 '광자(photon)’이라는 파동성을 가진 질량 0의 입자로 이루어진 것임을 밝혀내긴 했지만, 불과 100여 년 전 까지만 해도 도대체 빛이 입자인지 파동인지 정의를 내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빛은 어떨 때는 입자의 속성을 보이기도 하고 다른 때는 파동의 속성을 보이기도 했기 때문에, 인간의 지성으로는 어떻게 한 물질에서 서로 상극인 속성이 드러날 수 있는지 이해하기가 불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 과학이 발전하면서 빛은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이라는 것을 입증하였다. 그러나 이는 그저 빛이 서로 다른 두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지,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하는 것은 여전히 풀지 못한 수수께끼이다. 이렇게 빛이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인 속성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성자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참 사람이신 것과 너무나 비슷하다.
하나님께서는 빛을 지으시고 매우 흡족해 하셨다. 이는 지으신 빛에 아무런 흠결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이 태초의 빛과 지금 우리가 접하는 빛의 속성이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고 있는 빛도 아담의 범죄 이후로 그 속성이 부패하고 타락되어 매우 제한적인 속성만 남아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태초에 지음받은 빛은 지금의 빛과는 비교할 수도 없고 인간이 추측할 수도 없이 완벽하고 온전한 속성을 지녔을 것이다. 그런데도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그런 차이를 염두에 두지 않고 지금의 매우 제한 된 속성만 남은 빛을 가지고 우주의 기원을 밝혀내려는 어리석은 시도를 그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은 여전히 모든 인류와 생물에게 생명을 주고 여러 유익함을 주며 인간이 밝히지 못한 많은 신비가 있다. 하물며 때묻지 않은 태초의 빛은 얼마나 더 현란했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주로 영광 중에 오실 세상의 마지막 이후에 업그레이드 될 빛은 태초의 빛보다 얼마나 더 찬란할 것인가.
하나님께서 빛을 만드시기만 하셨을 때는 아마도 어둠과 혼재되어 있었던 듯 싶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즉 분리 시키시고 낮과 밤으로 칭하셨다. 이에 대해 많은 해석자들은 알레고리(풍유)적인 의미를 부여해서 빛/낮에는 온갖 선한 것을, 어둠/밤에는 온갖 악한 것을 대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런 해석에 지나치게 몰두하게 되면 빛을 지으시기 전의 혼돈의 상태를 악한 것이라고 단정하는 우를 범할 수 있으므로 적당한 선에서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첫째 날, 즉 하루를 기준으로 삼는 저녁부터 아침의 기간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다. 이것이 흔히 우리가 경험하는 하루 24시간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딱히 24시간이 아니더라도 무언가 일정한 시간 단위로 볼 수 있는 기간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일정한 시간 단위가 아니더라도 하나씩 창조 될 때마다 하루라고 지칭하는 것인지 등등 수많은 해석이 존재한다. 믿지 않는 과학자들이야 창조를 부정하는만큼 논외로 하더라도, 유신 진화론이라는 이단사설을 추종하는 과학자들은 우주의 나이가 137억년이라는 가설을 따르므로 이를 하나님의 창조 날 수와 접목하기 위해서 수 억 년을 하루로 해석하기도 한다. 반면에 이를 엄격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은 창조 시간 단위인 하루를 지금의 24시간이라고 본다. 그럼 어떻게 7일 만에 세계가 창조 될 수 있느냐 하는 반문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서는 충분히 그렇게 하실 수 있다고 하며 손을 놓아버린다. 물론 우리는 성경을 과학의 관점이 아니라 믿음으로 읽는 것이므로 우리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겸손히 하나님의 권능으로 두는 것이 차라리 현명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럽게 보충설명을 하자면, 이 때의 창조 시간 단위는 나도 마찬가지로 지금의 24시간이라고 생각하고 믿고 고백하지만, 단지 시간의 속성이 지금과는 다르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지으실 때 시간도 창조하셨을 것인데, 태초의 시간은 아무런 흠결 없는 완벽한 속성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도 피조물이므로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 속성이 상당 부분 부패하고 제한되었고, 지금 우리는 그 부패한 속성의 시간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시간 개념으로 태초의 시간을 적용하면 심각한 왜곡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태초에는 온전한 속성의 시간 안에서 창조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천 년과 같은 하루였을 것이라고 본다.
하나님께서 하루라는 시간을 저녁과 아침으로 표현하신 이유는 우리의 무딘 지성으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그 때에는 해도 없었는데 어떻게 저녁과 아침이 있었느냐고 트집을 잡는 것이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다.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하루의 길이를 이미 정해 놓으셨고 이를 기준으로 천체들을 비롯한 만물의 움직임을 지정하신 것이다.
#에덴동산
어쩌면 에덴동산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시듯이, 에덴동산은 참 하나님 나라이자 참 이 땅이라는 것일지도. 그래서 아담은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동산에서 교제하고 더불어 천사들과도 교제 했을지도. 그러나 아담이 범죄한 후에는, 마치 사람이 죽으면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듯이, 이 땅의 에덴은 더이상 하나님 나라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차단되고 분리되었을 듯. 그래서 이것을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화염검으로 막아놓으셨다고 한 것일수도. 하나님 나라가 떠난 에덴동산은 그저 평범한 이 땅의 한 지역에 불과한 것이고, 그와 더불어 동산의 모든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난 것이나 마찬가지. 게다가 노아의 홍수로 인해 전 지구가 한 번 뒤죽박죽 되었으므로, 에덴동산이 실제로 어디에 있느냐 찾는 것은 의미없는 일.
#20221012
#주기도문 #외식
너희는 이렇게 祈禱하라(마 6:5-15)
5 또 너희는 祈禱할 때에 外飾하는 者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會堂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祈禱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眞實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自己 賞을 이미 받았느니라
And when you pray, you must not be like the hypocrites. For they love to stand and pray in the synagogues and at the street corners, that they may be seen by others. Truly, I say to you, they have received their reward.
Et cum oratis, non eritis sicut hypocritæ qui amant in synagogis et in angulis platearum stantes orare, ut videantur ab hominibus : amen dico vobis, receperunt mercedem suam.
Καὶ ὅταν προσεύχησθε, οὐκ ἔσεσθε ὡς οἱ ὑποκριταί· ὅτι φιλοῦσιν ἐν ταῖς συναγωγαῖς καὶ ἐν ταῖς γωνίαις τῶν πλατειῶν ἑστῶτες προσεύχεσθαι, ὅπως φανῶσιν τοῖς ἀνθρώποις· ἀμὴν λέγω ὑμῖν, ἀπέχουσιν τὸν μισθὸν αὐτῶν.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의 내용을 알려주시기 전에 주의해야 할 태도 두 가지와, 기도의 내용을 알려주신 후에 주의해야 할 사항 한 가지를 알려주시는데 그 첫번째로는 사람에게 드러내보이려는 목적의 외식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소망을 둔 기도는 주님께 대한 신앙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겠다는 것을 내포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외식기도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아닌 사람들을 믿는다는 것과 사람들이 원하는대로 행하겠다는 것을 내포하는 것으로서 그 자체가 하나님 그리스도가 아닌 사람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주님께 드리는 기도가 주님께서 어떠한 형태로든 응답해주실 것을 기대하고 소망한다는 것을 내포하므로 기도한대로 응답을 받건 기도한것과 반대되는 응답을 받건 주님의 선하신 뜻으로 알고 감사하며 내 기도를 주님의 뜻에 맞춰가게 된다. 그러나 사람에게 보이려는 외식기도는 오로지 사람들의 반응과 찬사만을 기대하므로 원하는 반응을 얻으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원하는만큼의 반응이 나오지 않으면 더 요란스럽게 이끌어낸다.
지금은 거의 그러지는 않지만, 십수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교회 내에서 매우 각광받는 분위기였었다. 교회에서 방언 기도를 얼마나 강조했었냐면 방학 중 교회학교 수련회를 가면 무조건 방언을 받아야만이 제대로 수련회를 했다는 기준이 되기도 하였고 더 지나친 교인들은 기독교인이라면 무조건 방언은 기본적으로 받아야 하므로 방언을 받지 못하면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치부하는 것이 당연시되기도 하였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방언기도하는 사람들을 우러르고 방언기도하는 교인들은 모종의 우월감을 가지는 경우가 다반사였었다. 그러다보니 기도모임에서 크게 소리내어 기도하는 시간에는 누구 하나가 방언기도를 하면 이에 질세라 여기저기서 거의 악을 쓰다시피 방언기도를 해대기도 하였고, 차분하고 엄숙하게 치러야 할 신앙모임에서도 무분별하게 방언기도를 하느라 분위기를 해치고 지장을 주는 경우도 빈번하였었다. 통상적으로 기도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의 영이 혼의 판단을 따라 육의 입술로 주님께 간구하는 것인데, 방언기도는 사람이 알 수 없는 모종의 특별한 성령의 감동으로 인해 우리의 영이 혼을 거치지 않고 직접 육의 입술로 터져나오는 것이어서 기도자는 자신이 무슨 기도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단지 주님과 직접적인 소통을 하고 있다는 것만 인지할 뿐이다. 때문에 기도자는 비록 자신의 기도내용을 이해하지는 못할지라도 내주하시는 성령께 온전히 맡겨드리고 자신은 하늘의 주님과 직접적으로 교통한다는 표적을 받았다는 기쁨을 잠잠히 누리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므로, 방언기도는 사람이 많은 장소보다는 골방에서 혼자 기도할 때 가장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즉, 방언기도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가 아니라 사도가 가르친바 자기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이므로 사람이 없는 조용한 곳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는 방언기도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여러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무분별하게 중구난방으로 방언기도를 함으로써 믿지 않는 자들에게 두려움이나 조롱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부득이하게 집회에서 방언기도를 하게 되었을 때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자가 있어서 질서를 따름으로써 믿지 않는 자들이 이를 보면서 하나님의 큰일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외식기도를 금하시고 은밀하게 기도할 것을 명하신 이유는 기도가 성도의 신앙 전반에 영향을 끼치는 것인데다 기도 하나를 보면 그 사람의 전체적인 신앙이 어떠한지를 짐작하게 되기 때문이다. 즉, 사람에게 보이려는 외식기도를 일삼는 교인은 성경을 아는 것이나 봉사나 헌금이나 예배나 구제 등의 모든 신앙활동들도 사람들에게 잘보이려고 하는 것인 반면에, 골방에서 혼자 은밀히 주님께 기도하는 성도들은 성경을 알아가는 것이나 봉사나 헌금이나 예배나 구제 등의 모든 신앙활동들도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주님을 즐거워하기 위해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외식기도하는 교인들이 많은 교회일수록 사회적 평판을 의식하느라 복음사역과 관계없는 외부적인 사회활동에 치중하기 마련이고, 은밀히 기도하는 성도들이 많은 교회일수록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사회의 유익과 안녕을 위해 암암리에 섬기기 마련이다.
6 너는 祈禱할 때에 네 골房에 들어가 門을 닫고 隱密한 中에 계신 네 아버지께 祈禱하라 隱密한 中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But when you pray, go into your room and shut the door and pray to your Father who is in secret. And your Father who sees in secret will reward you.
Tu autem cum oraveris, intra in cubiculum tuum, et clauso ostio, ora Patrem tuum in abscondito : et Pater tuus, qui videt in abscondito, reddet tibi.
σὺ δὲ ὅταν προσεύχῃ, εἴσελθε εἰς τὸ ταμεῖόν σου καὶ κλείσας τὴν θύραν σου πρόσευξαι τῷ Πατρί σου τῷ ἐν τῷ κρυπτῷ· καὶ ὁ Πατήρ σου ὁ βλέπων ἐν τῷ κρυπτῷ ἀποδώσει σοι.
주님께서 은밀한 중에 계시다는 것은 소란스러운 곳에는 계시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기도자의 마음이 외부요인에 번잡스럽게 영향받지 않고 오로지 주님께만 집중할 수 있는 고요한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에녹이 여호와 그리스도와 동행하였고 노아와 욥이 여호와 그리스도께 의인으로 인정받은 것은 그들이 끊임없이 은밀한 중에 계시는 주님께 기도를 드렸기 때문이다. 선지자 엘리야는 폭풍이나 우레나 지진 등의 요란한 광경에서가 아니라 잠잠한 가운데 세미한 음성으로 여호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었다. 성도가 은밀한 중에 계시는 주님께 기도드려야 한다는 것은 신앙여정 가운데 겪게 되는 모든 희로애락의 상황에서도 사람들 앞에서 지나치게 신앙을 빙자한 자기 감정을 표출하지 말고 절제하여 오직 주님께만 나아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의한 방식이 아니면서도 뜻하지 않게 생각지도 않게 부귀영화를 얻게 되었을 때에는 신앙간증을 빌미로 이리저리 자기 신앙을 자랑하고 다니지 말고, 잠잠히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며 자신이 얻은 부귀영화를 가지고 교회와 사회에 선을 행해야 한다. 건강이나 재물이나 사람이나 부귀영화를 갑작스럽게 잃거나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는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되더라도 왜 이런 일이 자기에게만 일어나느냐고 사람들 보는데서 울고불고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비참한 심정을 잠잠히 주님 앞에 가지고 나와 탄식함으로 기도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앙여정이 순적하여 표면적으로 두드러지는 열매를 맺었더라도 교만함으로 과시하지 말고 주님 앞에 잠잠히 홀로 나와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하고, 신앙여정이 좁고 협착하여 사방으로 욱여싸는 고난과 핍박을 당하더라도 자신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남들에게 드러내지 말고 바울과 실라처럼 기도와 찬송으로써 견고히 인내하는 힘을 얻어야 한다.
#20211012
#신명기 #Deuteronomy 33:11
11 여호와여 그의 재산을 풍족하게 하시고 그의 손의 일을 받으소서 그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꺾으사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
레위인들은 다른 지파들처럼 땅을 기업으로 받은 것도 아니었고 경제활동을 통해서 부를 쌓을수도 없었으며 단지 제사를 드리러 나아온 백성들의 제물에만 자기들의 양식을 충당할 수 있었다. 따라서 모세가 여호와께 레위를 위해서 축복하기를 그의 재산이 풍족하게 해달라고 한 것은 그들이 받은 본래의 직무를 통해서 받은 것 이외의 것으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게 해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들의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그들의 소유를 보장해 주십사 하는 것이었다. 이를 다르게 본다면 레위인들의 소유가 부족해지지 않도록 다른 지파들이 좋은 제물들로 제사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레위인들의 풍족함은 다른 모든 지파들의 풍족함이 전제되어야 하므로 결국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축복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사도 시대에 교회 신자들은 복음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기들의 소유를 자발적으로 교회에 내어놓음으로써 가난한 신자들을 구제하는데 힘썼고 그 재물을 나누는 일이 너무 커져서 사도들은 따로 일곱 집사를 두어야 할 정도였었다. 사도 바울은 재물이 풍족한 고린도교회가 곤궁함에 처한 예루살렘 교회를 돕도록 독려하면서 복음 사역자들은 신령한 것으로 성도들을 섬기고 성도들은 물질적인 것으로 복음 사역자들을 섬기는 것이 합당하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가 담임목사가 아닌 부교역자들에게 재정적으로 얼마나 사례하는지는 얼마나 복음을 귀하게 여기는지에 대한 하나의 중요한 척도가 된다고 볼 수 있다.
레위인들이 율법을 가르치는 것과 제사에 전념하면서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 다른 지파의 백성들이 바친 예물들에 의지해서 먹고 살았듯이 오늘날 교회의 목사들을 비롯한 교역자들도 교인들의 헌금에 의지해서 생계에 필요한 것들을 충당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므로 아무리 교회의 재정상태가 어렵고 받는 사례비가 지나치게 부족하다 해도 복음 사역 이외의 경제 활동에 종사해서는 안된다. 경제 활동에 종사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재정이나 사례비가 부족하다면 차라리 굶어죽기를 각오하고 복음 사역에만 전념하거나 아니면 어느 정도 복음 사역을 중단하고 경제 활동에만 전념하는 것이 낫다. 목회에 뜻을 품었다면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경제 형편을 면밀하게 따져서 목회에 지장을 줄만한 비용 지출이 무엇인지를 사전에 면밀히 따져보고 목회의 길에 들어서는 것이 현명하다. 적어도 수년간 별 걱정없이 신학 수업에만 전념할 수 있을 정도의 재정은 확보해야 하며, 가정을 꾸리려거든 목회를 뒷받침 해줄 수 있는 배우자를 만나야 한다. 그렇지 않고 가정이 오로지 사례비에만 의존하게 된다면 목회가 매우 팍팍해질 수 있으므로 그럴바에는 차라리 가정을 꾸리지 않고 목회를 하는 것이 낫다. 반대로 레위인들의 재산을 풍족하게 해달라는 축복을 문자그대로 받아들여서 목사들도 재산이 풍족해야 한다면서 지나치게 재정이나 사례비를 몰아주는 것은 목사들로 시험과 올무에 걸리게 하는 요인이 된다. 이는 주로 교인과 재정 규모가 큰 대형 교회의 담임목사들에게서 볼 수 있는데 아무리 담임목사를 위한 것이라고는 한다쳐도 한 끼에 십여만원이 넘는 식사를 아무렇지 않게 한다거나 최고급 사양의 차량을 제공하는 것은 매우 지나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소위 교회를 어마어마하게 부흥시켰다고 하면서 퇴임할 때 퇴직금 명분으로 십수억원을 지급하는 것도 지나친 것이다. 그렇게 적정 수준을 넘어선 재산을 가지게 될 경우 목사 자신이 그 재물에 연연해 할 가능성이 매우 높고 교회는 결과적으로 그 목사의 목에 연자맷돌을 매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목회에 탁월한 능력을 가진 목사는 자기 자신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기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이 얼마나 되는지를 잘 살펴서 교회로부터 지나치게 많은 사례를 제안 받더라도 스스로 낮출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왕 같은 제사장들이므로 재산을 풍족하게 해달라는 레위인들에 대한 축복 또한 성도들에게 계승된다. 다만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 남들보다 풍족하게 잘먹고 잘살아야만 된다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성도들 뿐만 아니라 빈천한 성도들도 지정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레위인 같은 제사장으로서 세상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살면서 많든지 적든지 정당한 방식으로 소유할 수 있는 만큼의 재산을 누리는 것에 만족하며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세상 사람들처럼 단지 이 땅에서 풍족함을 누리기 위해 재산 증식에 연연해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처럼 어디 한군데 머물러 정착하지 못하고 나그네의 삶을 전전한 것과 같이 소유가 많든지 적든지간에 이 땅은 우리의 정착지가 아니라 본향인 하늘나라로 가는 도중에 잠시 머무는 정도로 여기는 나그네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라오디게아 교회 마냥 신령한 것에는 헐벗고 굶주리면서도 세속적인 것에는 온갖 허영이 가득해서는 안되고 이 땅의 소유를 팔아 신령한 것을 구하고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주인이 아니라 세들어 사는 세입자와 같으므로 주인 행세를 하며 욕심을 내는 것은 온당하지 않으며 이 땅의 주인인 세상 사람들이 대하는대로 그저 묵묵히 받아들여야 한다. 복음의 신령한 것을 위해서 소유나 재산에 손해가 난다면 비록 물질은 줄어들지라도 하늘의 상급에는 더할 나위없이 풍족해진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소유가 풍족한 성도는 일신의 안락에 지나치게 소비하지 말고 구제의 제사를 드리는데 힘써야 하고, 소유가 부족한 성도는 불만이나 한탄이나 원망하지 말고 두 렙돈을 드린 과부처럼 언제나 모든 것을 드릴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주일설교 #누가복음
<2021.10.10.주일> 눅 8:4-8
4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
5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6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9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10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1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12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예수님께서 이미 제자들에게 이 비유를 해석하시면서 뿌린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네 종류의 밭들은 말씀을 들은 자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하셨기 때문에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씨와 밭에 다른 의미를 부여해서 예수님의 해석을 훼손할 수는 없다. 만약에 씨를 하나님의 성도들이라고 할 경우 좋은 밭이 아닌 나머지 세 종류의 밭에 뿌려진 씨들은 열매를 맺지 못하므로 이는 성도들의 구원이 취소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어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성도들의 구원의 절대불변성이 훼손되게 된다. 게다가 밭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씨의 뿌리가 열매를 맺는데 중요하다고 한다면 사람이 성령의 은혜없이 자기 자신의 의지만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오해를 하게 될 여지가 크다. 따라서 아무리 기발해 보이는 생각이라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친히 해석하신 의미를 넘어서게 되면 복음의 여러 원리가 왜곡되고 훼손되므로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인 씨가 뿌려진 네 종류의 밭의 상태는 구원받기로 선택된 성도들의 심령의 상태를 의미할수도 있고 구원받은 성도들과 그러지 않은 버림받은 자들의 심령의 상태를 의미할수도 있다. 이것이 성도들의 심령의 상태라고 한다면 뿌려진 씨를 새가 쪼아먹도록 하는 길가와 같은 밭은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 성도의 완악한 심령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 때에는 그 어떤 은혜도 받지 못하므로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부어진들 예수님 말씀대로 사탄 마귀가 거두어갈 뿐이어서 아무런 싹도 틔우지 못하게 될 뿐이다. 씨앗이 제대로 싹을 틔우지 못하는 돌밭이나 가시덤불밭은 성령으로 거듭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성도의 연약한 심령의 상태를 의미한다. 거듭난지 얼마 안된 성도는 성경을 아는 지식으로나 삶으로나 많이 초보적이고 연약하기 때문에 그들의 심령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들이 여러 유혹들과 시험거리들 때문에 자라는데 방해를 받게 된다. 수십 배의 결실을 맺는 좋은 밭은 신앙이 성숙한 성도들의 심령을 의미한다. 장성한 성도들은 단단한 복음의 음식도 능히 소화시킬 수 있고 다른 성도들을 가르칠 수 있으며 순종하는 삶으로 성령의 열매를 충실히 맺을 수 있다. 모든 성도들에게는 이 네가지 밭과 같은 심령의 상태가 모두 존재하고 신앙 수준에 따라서 그 비중이 다를 뿐이다. 성도의 삶은 결실하지 못하는 세 종류의 심령의 비중을 줄이고 많은 결실을 맺는 좋은 밭과 같은 심령의 비중을 높이는 과정이며 성도의 죽음 또는 마지막 심판 이후에 성도들의 심령은 오로지 좋은 밭과 같은 상태로만 존재하게 된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절대불변의 예정의 관점에서 본다면 결실하지 못하는 세 종류의 밭은 영원 전부터 구원받기로 선택되지 못한 버림받은 자들이고 오로지 좋은 밭만 구원받은 성도라고 할 수 있다. 길가와 같은 자는 아예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무관심하거나 드러나게 대적하는 자들이다. 돌밭이나 가시덤불밭은 외적으로는 교회에 소속되어 있으나 거짓복음과 악한 행실로 인해서 스스로 구원받지 못한 버림받은 자들임을 드러내는 자들이다. 교회의 목사라 하더라도 장로라 하더라도 수십년 교회에 열심으로 봉사한 교인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아는 지식에 자라가지 않고 행위와 삶에서도 선한 성령의 열매를 맺지 않으며 모범을 보이지 않는다면 돌밭과 가시덤불밭처럼 버려진 자들에 불과하다. 교회에서 스스로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하는 대부분의 교인들이 이 무시무시한 상태에 놓여있으나 그 심각성과 엄중함을 인식하고 있지는 않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밭에 뿌려진 가라지, 주여주여 하는 사역자들,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미련한 다섯 처녀, 주님의 왼편에 분리된 염소들이 이에 해당된다.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을 통해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신 바, 니골라당과 발람과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와 교회에서 성도를 핍박하는 자들이 이에 해당된다.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교회와 복음을 완전히 저버리는 자들이 이와 같다. 이런 돌밭과 가시덤불밭 같은 자들은 외형적으로만 교회에 소속되었을 뿐 처음부터 교회에 속한 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와 복음을 저버리는 순간 두 번 다시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영원히 멸망 당하게 된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절대불변 예정으로써 구원받은 성도들이 좋은 밭과 같다고 해서 신앙의 열매가 수월하게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결실을 맺는 것은 아니다. 성도들은 복음을 받아들여 거듭난 순간부터 넓고 평탄한 세상의 길을 버리고 좁고 협착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가야만 한다. 온갖 환난과 유혹과 시험을 만나더라도 설령 잠시 넘어지는 때는 있더라도 이를 견뎌내고 참아내면서 성령을 의지하며 일어서야 한다. 그래서 사도는 우리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약해진 무릎을 일으켜세우며 피흘리기까지 공중권세 잡은 자를 대적하여 싸워야 한다고 하였고, 예수님께서는 가뜩이나 복음으로 고난을 받고 있는 교회에 열흘 동안 죽기까지 순종하라고 명령하신다. 오늘날에는 옛날과는 달리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물리적인 손해를 받지는 않는 반면에 여러 보이지 않는 은근하고 교묘한 방식으로 훼방을 받기 때문에 성도들은 더욱 넘어지지 않도록 매순간 스스로를 돌아보며 신앙을 점검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