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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시 해설과 시집
이재무 시인의 시와 해설 -시간의 그물, 위대한 식사, 겨울밤
시간의 그물 / 이재무
굴 속 웅크린 짐승으로 누워
봄 한철을 보냈다
냉장고 안에는 아내가 퇴근 때마다
사온 푸성귀가 가득했으므로 배가 고프진 않았다
베란다 밖으로 펼쳐진 세상을 읽기에도
나는 힘에 부쳤다
나라의 기둥이 무너지고 서까래가 날아가도
나는 아프지 않았다
내 몸이 시들수록, 아내의 눈은 생기로 빛났고
나는 이상하게 먼 곳의 친구조차 그립지 않았다
시간의 그물에 갇혀 나는 행복했다
"굴 속 웅크린 짐승으로 누워” 보내는 날들에 시인은
점차 현실 인식과 강한 의지력을 잃어가고 있다. “나는 힘에 부쳤다"고 고백하는 시인에게 바깥일은 남의 일이 되어 버렸고, 그의 정신은 메마르고 시들어가고 있다. 그리움의 감정마저 잊어버린 것이다. "시간의 그물에 갇혀 나는 행복했노라고 고백하지만 그것은 지독한 역설일 뿐이다.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그의 피폐해진 정신은 그동안 팽팽한 긴장을 늦추지 않았던 과거를 완전히 잊은 듯하다. 치열하게 세상을 응시했던 이재무의 고삐를 느슨하게 만든 것은 바로 도시문명에 길들여지지도 또 벗어나지도 못하는 생활에서 오는 좌절감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문명의 발전은 우리에게 많은
혜택과 편리함을 안겨주었지만 과도한 물질만능 의식은 그 폐해 또한 많이 던져 주었다. 그것은 이재무가 유년 시절부터 늘 지향해온 자연의 모습마저도 위기에 처하게 만들 만큼 심각한 것이었다.
위대한 식사 / 이재무
산그늘 두꺼워지고 흙묻은 연장들
허청함에 함부로 모깃불 널부러지고
마당가 매캐한 모깃불 피어오르는
다 늦은 저녁 멍석 위 둥근 밥상
식구들 말없는, 분주한 수저질
뜨거운 우렁된장 속으로 겁 없이
뛰어드는 밤새 울음,
물김치 속으로 비계처럼 둥둥
별 몇점 떠 있고 냉수사발 속으로
아, 새카맣게 몰려오는 풀벌레 울음
베어 문 풋고추의 독한,
까닭 모를 설움으로
능선처럼 불룩해진 배
트림 몇 번으로 꺼트리며 사립 나서면
태지봉 옆구리를 헉헉,
숨이 가쁜 듯 비틀대는
농주에 취한 달의 거친 숨소리
아, 그날의 위대했던 반찬들이여
“식구들 말없는, 분주한 수저질”을 하는 동안 "우렁된장 속으로” 밤새 울음 뛰어들고 “물김치 속으로” 별이 뜨고, “냉수 사발 속으로" 풀벌레 울음이 몰려든다. 소박한 시골밥상이 위대해지는 것은 인간의 삶과 자연이 하나로 동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식사'와 '식욕'이 본능적 욕망의 충족행위가 아니라, 우주라는 화음 속에 같이 박자를 맞추어 분주한 수저질과 달각이는 그릇
소리로 신명을 돋우는 위대한 행위로 동시에 승화되는 것이다.소박하고 정겹고 풍요로운 느낌이 물씬 묻어나는 경관에 달마저 배부름의 '거친 숨소리'를 낸다.
이렇게 이재무는 자연과 인간의 삶이 조화로움을 추구할 때야말로 진정한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자연을 관조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는 시인은 인간 삶의 행복은 뭐니 뭐니 해도 공존과 상생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너이고 네가 나라는 순환의 법칙, 즉 상호 호혜 관계가 일상화되었을 때 타자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밴 한층 수준 높은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겨울밤 / 이재무
싸락눈이 내리고 날은 저물어
길은 보이지 않고
목쉰 개 울음만 빙판에 자꾸
엎어지는데 식전에 나간 아부지
여태 돌아오시지 않는다
세 번 데운 황새기 장국은 쫄고
벽시계가 열 한 시를 친다
무거워 오는 졸음을 쫓고
문꼬리를 흔드는 기침 소리에
놀래 문 열면
싸대기를 때리는 바람
이불 속 묻어 둔 밥,
다독거리다 밤은 깊어
살강 뒤지는 새앙쥐 소리
서울행 기적 소리 들리고 오 리 밖
상여집 지나 숱한 설움 짊어지고
된바람 헤쳐오는 가뿐 숨소리
들린다 여태 아부지는 오시지 않고
이재무에게 고향은 늘 즐거운 기억이 자리한 곳만은 아니다. 때로는 즐겁고 아늑한 공간이 아닌 가난과 설움이 가득한 곳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그 당시 농촌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생활의 궁핍함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싸락눈, 목쉰 개 울음, 세 번 데운 황새기 장국,기침 소리, 싸대기를 때리는 바람, 서울행 기적소리, 설움 짊어지고 된바람 헤쳐오는 가뿐 숨소리' 등의 시각적.청각적인 소재들은 한 데 어우러져 겨울밤의 싸늘하고 우울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런 밤 '아부지'는 황새기 장국이 쫄아 버리고 "이불 속 묻어둔 밥/다독거리다 밤이 깊”었는 데도 돌아오시지 않고 있다. 이 시 “겨울밤처럼 기다리는 식구들의 안타까움과 우울하고 막막한 시적 배경을 통하여 그 '돌아오지 않음'이 아버지
의 깊은 좌절을 그 구체적 내용으로 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며 '아부지'의 늦어지고 있는 귀가 시간을 설명하고 있다.
벼랑 /이재무
벼랑은 번번이 파도를 놓친다
외롭고 고달픈,
저 유구한 천년만년의 고독
잡힐 듯 잡히지 않고
철썩철썩 매번 와서는 따귀나
안기고 가는 몰인정한 사랑아
희망을 놓쳐도
바보같이 바보같이 벼랑은
눈부신 고집 꺾지 않는다
마침내 시간을 녹여
바다가 되게 하리라
엘리베이터 / 이재무
엘리베이터에 탈 때면
시선 둘 곳마땅치 않아
거울 속 얼굴 들여다보거나
긴한 생각에 삼긴 듯 눈감거나
하릴없이 핸드폰 폴더 열었다 닫으며
1분이나 2분을
십년, 이십 년처럼 길게 기다린다
엘리베이터에 탈 때면
한 동, 한 건물에 사는 이들
생면부지 이방인 같아
입의 지퍼 올린 채
얼굴에서 감정을 지운다
생각하면 너도나도 서러운 이웃들인데
들숨 날숨 나누면서도
행여 옷깃 닿을까 애써 삼가며
바닥 내려다보거나 천장 올려다보거나
닳고 닳은 광고판 건성건성 읽으며
1분이나 2분 사이
고향에도 다녀오고
옛사랑이며
살아온 평생을 두서없이 뒤적인다
이재무 시 모음 4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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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간절
이재무
삶에서 '간절'이 빠져나간 뒤
사내는 갑자기 늙기 시작하였다
활어가 품은 알같이 우글거리던
그 많던 '간절'을 누가 다 먹어치웠나
'간절'이 빠져나간 뒤
몸 쉬 달아오르지 않는다
달아오르지 않으므로 절실하지 않고
절실하지 않으므로 지성을 다할 수 없다
여생을 나무토막처럼 살수는 없는 일
사내는 '간절'을 찾아 나선다
공같이 튀는 탄력을 다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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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감나무
이재무
감나무 저도 소식이 궁금한 것이다
그러기에 사립 쪽으로는 가지도 더 뻗고
가을이면 그렁그렁 매달아놓은
붉은 눈물
바람결에 슬쩍 흔들려도 보는 것이다
저를 이곳에 뿌리박게 해놓고
주인은 삼십년을 살다가
도망 기차를 탄 것이
그새 십오년인데……
감나무 저도 안부가 그리운 것이다
그러기에 봄이면 새순도
담장 너머 쪽부터 내밀어 틔워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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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겨울 나무
이재무
이파리 무성할 때는
서로가 잘 뵈지 않더니
하늘조차 스스로 가려
발밑 어둡더니
서리 내려 잎 지고
바람 매 맞으며
숭숭 구멍 뚫린 한 세월
줄기와 가지로만 견뎌보자니
보이는구나, 저만큼 멀어진 친구
이만큼 가까워진 이웃
외로워서 더욱 단단한 겨울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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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겨울 숲에서
이재무
겨울나무들의 까칠한 맨살을 통해
보았다, 침묵의 두 얼굴을
침묵은 참 많은 수다와 잡담을 품고서
견딘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겨울 숲은 가늠할 수 없는 긴장으로 충만하다
산 이곳저곳 웅크린 두꺼운 침묵,
봄이 되면 나무들 가지 밖으로
저 침묵의 잎들 우르르 몰려나올 것이다
봄비를 맞은 그 잎들 뻥긋뻥긋,
입을 떼기 시작하리라
나는 보았다
너무 많은 말들 품고 있느라 수척해진
겨울 숲의 검은 침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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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공중전화
이재무
아날로그의 고집이여,
자랑으로 붐비던 날들 아득한 전설이 되었구나
한창때 너는 잘나가는 몸으로
식욕 또한 왕성해서
뜨겁고 짜고 맵고 싱겁고 차가운 수천,
수많은 사연 다 삼키고도 뜨거웠지만
늙은 창부가 된 오늘
식어버린, 허기진 몸으로 누군가 인색하게 떨군
은화 몇 닢의 동냥 허겁지겁 삼키는구나
시대의 모든보이 시민의 교양이었지만
뒤처진 애물단지가 되어
생의 수건만을 기다리게 되었구나
생각하면 창부 아닌 삶 어디 흔하랴
줄고 새는 영혼 부풀려 팔고 돌아오는 길
뚜쟁이처럼 서서 호객하는 너를 보는 일
편치 않다 너는 필요보다 크고 무겁고 느리다
네 고집은 불편하다 후불을 모르는
시대의 지지진아 그나마
식은 몸일망정 찾아와 주린 정 채우고 가는
무일푼 고객마저 외면하는 날 올 것인가
미래의 골돌품 아 답답한 순결이,
우리 시대 다 낡은 서정시여,
추운 겨울 외투깃을 세우고 발 동동
구르며 차례 기다리던 날들의 추억이여,
아날노그의 외고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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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구름
이재무
구름으로 잠옷이나 한 벌 해 입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나무 밑
이마까지 그늘 끌어다 덮고
잠이나 잘까 영일 없었던 날들
마음속 심지 싹둑 자르고
생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적막의 심해 속 들어앉아
탈골이 될 때까지 실컷 잠이나 잘까
한 잎 이파리로 태어나
천년 바람이나 희롱하며 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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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국밥
이재무
매번 고인께는
면목 없고 죄스러운 말이지만
장례식장에서 먹는
국밥이 제일 맛이 좋더라
시뻘건 국물에 만 밥을 허겁지겁
먹다가 괜스레 면구스러워 슬쩍
고인의 영정 사진을 훔쳐보면
고인은 너그럽고 인자하게
웃고 있더라
마지막으로 베푸는 국밥이니
넉넉하게 먹고 가라
한쪽 눈을 찡긋, 하더라
늦은 밤 국밥 한 그릇
비우고 식장을 나서면
고인은 벌써 별빛으로 떠서
밤길 어둠을 살갑게 쓸어주더라
출처 : 시집《데스벨리에서 죽다》(천년의시작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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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국수
이재무
늦은 점심으로 밀국수를 삶는다
펄펄 끓는 물속에서
소면은 일직선의 각진 표정을 풀고
척척 늘어져 낭창낭창 살가운 것이
신혼적 아내의 살결 같구나
한결 부드럽고 연해진 몸에
동그랗게 몸 포개고 있는
결연의 저, 하얀 숨결들!
엉키지 않도록 휘휘 젓는다
면발 담긴 멸치국물에 갖은 양념을 넣고
코 밑 거무해진 아들과 겸상을 한다
친정 간 아내 지금쯤 화가 어지간히는 풀렸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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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길 위의 식사
이재무
사발에 담긴 둥글고 따뜻한 밥 아니라
비닐 속에 든 각 진 찬밥이다
둘러앉아 도란도란 함께 먹는 밥 아니라
가축이 사료를 삼키 듯
선 채로 혼자서 허겁지겁 먹는 밥이다
고수레도 아닌데 길 위에 밥알 흘리기도 하며 먹는 밥이다
반찬 없이 국물 없이 목메게 먹는 밥이다
울컥, 몸 안쪽에서 비릿한 설움 치밀어 올라오는 밥이다
피가 도는 밥이 아니라 으스스, 몸에 한기가 드는 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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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까치집
이재무
까치집은 볼 때마다 빈집
저 까치 부부는 맞벌이인가 보다
해 뜨기 전 일 나가
별 총총한 밤 돌아오는가 보다
까치 아이들은 어디서 사나
시골집 홀로 된 할머니에 얹혀사나
허공에 걸린 빈집
심심한 바람이나 툭툭, 발길질하고
달빛이나 도둑처럼 들렀다 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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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남겨진 가을
이재무
움켜진 손안의 모래알처럼 시간이 새고있다
집착이란 이처럼 허망한 것이다
그렇게 네가 가고 나면 내게 남겨진 가을은
김장 끝난 텃밭에 싸락눈을 불러올 것이다
문장이 되지 못한 말(語)들이
반쯤 걷다가 바람의 뒷발에 채인다
추억이란 아름답지만 때로는 치사한 것
먼 훗날 내 가슴의 터엔 회한의 먼지만이 붐빌 것이다
젖은 얼굴의 달빛으로, 흔들리는 풀잎으로, 서늘한 바람으로,
사선의 빗방울로, 박 속 같은 눈꽃으로
너는 그렇게 찾아와 마음의 그릇 채우고 흔들겠지
아 이렇게 숨이 차 사소한 바람에도 몸이 아픈데
구멍난 조롱박으로 퍼 올리는 물처럼 시간이 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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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내 안의 적들
이재무
고양이의 폭정에 시달려 온 쥐들이 모여
숙의를 거듭한 끝에
다른 고양이를 자신들의 대표로 선출하였다
다음 날부터 쥐들은 다시 쫒기는 신세가 되었다
보통의 인간은 엇비슷하던 이웃이
자신보다 잘나갈 때 고통과 불안을 느낀다
노예들은 주인을 경원하거나 질투하지 않는다
그들을 참기 힘들게 하는 것은
천출 벗은 자가 무리 앞에 우뚝 서 있을 때다
이때 이들은 모욕을 넘어 분노를 느낀다
열 마리 백 마리 천 마리 만 마리 누 떼가
한 마리 사자를 당해 낼 수 없듯이
수백 수천만 노예가 주인 몇을 쓰러뜨리지 못한다
역사는 기록에 대한 수사를 발전시켜 왔을 뿐이다
진보 유전자를 지니고 산다는 일은
그 자체로 멍에이며 스스로 불행지수를 높이는 일이다
민중론자들 중에는 자신들보다 열등한 자들을
은근,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배제하려는
못된 버릇과 심리를 지닌 이들도 있다
내 안의 불편부당한 적들과 싸워 이기지 못한다면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책 속에서나
반짝일 뿐 끝내 맨 얼굴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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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너무 큰 슬픔
이재무
눈물은 때로 사람을 속일 수 있으나
슬픔은 누구도 속일 수 없다.
너무 큰 슬픔은 울지 않는다.
눈물은 눈과 입으로 흘리지만
슬픔은 어깨로 운다.
어깨는 슬픔의 제방
슬픔으로 어깨가 무너진 사람을
본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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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도망가는 산
이재무
사람들이 무서워 산은
마을 빠져나와 절뚝절뚝,
온갖 질병 앓는 몸으로 도망가네
담장이 무릎 아래 잔풀 품어 키우듯
으스러지게 마을 끌어안고
억척스럽게 온정 피워내더니
허리 깊숙이까지 파 들어오는
독 오른 삽날이 무서워
품속 가득 껴안은 것들,
나무와 새와 벌레와 독버섯과 쥐와
뱀과 바람과 어둠과 구름과 별과 달과 해
한때의 푸른 추억들 풀어
먼저 챙겨 보내고
그렁그렁, 눈에 밟히는 듯
거듭 되돌아보며
쩔뚝쩔뚝 먼 길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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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목련
이재무
내 몸 둥그렇게 구부려
그대 무명치마 속으로
굴려놓고 봄 한철 홍역처럼 앓다가
사월이 아쉽게도 다 갈 때
나도 함께 그대와
소리 소문 없이 땅으로 입적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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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바위
이재무
나에게서 의지와 묵언만을 읽어온
그대들이 알랴
고요 속에서
눈뜨는 뜨거운 관능의 춤을
내 몸 속은 밤마다
염천의 늪 되어
온갖 회색의 감정 부글거리고
수천 수만 불의 혀가 타오르고
동해 그 큰 물결 숨차게 와서
겁없이 드나든다 또,
어떤 날은 길 잃은 바람 불러모으고
떼지어 내리는 어둠 숨죽인 뒤
온밤을, 온산이 울리도록 뒤척인다
내 몸에 아픈 금과 무늬
그대들이 알랴
한낮의 묵중한, 서늘한 침묵 위해
요동치는 이 서러운 혼돈의 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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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밥알
이재무
갓 지어낼 적엔
서로가 서로에게
끈적이던 사랑이더니
평등이더니
찬밥 되어 물에 말리니
서로 흩어져 끈기도 잃고
제 몸만 불리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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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봄을 달래다
이재무
환하고 눈부신 봄날
까닭없이 아픈 몸을 달래며
가까스로 잠이 드는데 난데없는 확성기 소리
어찌나 크게 짖어대는지
집요하게 달라붙는 잠의 검불 떼고 일어나
문밖으로 나선다 벚꽃 개나리 살구꽃
일열 종대 혹은 이열 종대로 서서
저마다 손나발 불며 주목해달라
꽃잎 한껏 부풀려 외치고 있다
아무렴, 지난겨울 추위는 참으로 혹독하였나니
살아남은 것들의 잔치 어찌 장하지 않으랴
그대들 꽃피운 언변은 귀에 달고 눈에 밝도록
화려하고 유려하구나
하지만 국수틀같이 지치지 않는 입술이여,
오는 봄 가는 봄을 다 헤아리지는 말아다오
화무십일홍이라 했느니라
부디 가지를 떠나는 날은, 새로이
열리는 한생을 다부지게 살아가거라
지난겨울은 참으로 혹독하였나니
나 또한 밤의 거리에서 성난 민심과 함께
자꾸 도지는 광기를 재워
마음의 불꽃 피우고 또 피웠나니
출처 : 시집 《저녁 6시》(창비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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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부재에 대하여
이재무
아픈 아내 멀리 요양 보내고
새벽 일찍 일어나
쌀 씻어 안치고 늦은 저녁에 사온
동태 꺼내 국 끓이다
나는 얼큰한 것을 좋아하지만
아이 위해 '얼' 빼고 '큰'하게 끓이다
가정의 우환과 상관없는
저 왕성한 식욕 위해
나의 노고는 한동안 계속되리라
아내에게서 전화가 오면
함께 사는 동안 한 번도
하지 못한, 살가운 말을 하리라
갓 데쳐낸 근대같이
조금은 풀죽은 목소리로 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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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북한산에 올라
이재무
내려다보이는 삶이
괴롭고 슬픈 날
산을 오른다
산은 언제나 정상에 이르러서야
사랑과 용서의 길 일러주지만
가파른 산길 오르다 보면
그 길이 얼마나 숨차고
벅찬 일인지 안다
돌아보면 내 걸어온 생의
등고선 손에 잡힐 듯
부챗살로 펼쳐져 있는데
멀수록 넓고 편해서
보기 좋구나
새삼 생각하노니 삶이란
기다림에 속고 울면서
조금씩 산을 닮아가는 것
한때의 애증의 옷 벗어
가지에 걸쳐놓으니
상수리나무 구름 낀 하늘
가리키며 이제 그만 내려가자고 길 보챈다
☆★☆★☆★☆★☆★☆★☆★☆★☆★☆★☆★☆★
《21》
빈자리가 가렵다
이재무
새해 벽두 누군가가 전하는
한 선배 암선고 소식 앞에서 망연자실,
그의 굴곡 많은 이력을 안주로 술을 마시며
새삼스레 서로의 건강 챙기다 돌아왔지만
타인의 큰 슬픔이 내 사소한 슬픔 덮지 못하는
이기의 나날을 살다가 불쑥 휴대폰 액정화면
날아온 부음을 발견하게 되리라
벌떡 일어나 창밖 하늘을 응시하는 것도 잠시
책상서랍의 묵은 수첩 꺼내 익숙하게
또 한 사람의 주소와 전화번호 빨간 줄을 긋겠지
죽음은 잠시 살아온 시간들을 복기하고
남아 있는 시간 혜량하게 할 것이지만
몸에 밴 버릇까지 바꾸어놓지는 못할 것이다
화제의 팔할을 건강에 걸고 사는 슬픈 나이,
내 축축한 삶을 건너간 마르고 창백한 얼굴들
자꾸만 눈에 밟힌다 십년을 앓아오느라
웃음 잃은 아내도 그러하지만
생각하면 우리는 모두 죽음을 사는 것인데
생의 종점에 다다를수록 바닥 더 깊어지는 욕망,
죽음도 이제 진부한 일상일 뿐이어서
상투적인 너무나 상투적인 표정을 짓고 우리
품앗이하듯 부의봉투를 내밀고 있지 않은가
나도 모르게 죽음의 세포가 맹렬히 증식하는 밤
빈자리가 가려워 전전반측 잠 못 이룬다
☆★☆★☆★☆★☆★☆★☆★☆★☆★☆★☆★☆★
《22》
사라진 분노를 위하여
이재무
나는 내가 시인인 것이 자랑스럽다
바닥에 떨어진 새의 시체와도 같이 나의
심장은 싸늘히 식어버렸다 나는 이제
분노할 줄을 모른다 지난날 내 생을
다스려온 그 아름다운 분노는
부지런히 죄의 길을 걸어오는 동안
내 생을 떠나버렸다 나는 이제
울지 않고도 크게 세상을 말할 줄
알게 되었다 더러운 추문과 스캔들에
두 눈 반짝이는 나는, 시집을 다섯 권이나
낸 시인이다 거듭 실패하는 동안
제법 독자들의 취향이나 입맛도
알게 되었다 그러니 분노는 내 생을
불편케 할 뿐이다 매향리가 미군에
폭격을 당해도 나는 화가 나지 않는다
나는 북한 어린이가 굶어죽어도 눈물은커녕
비웃음만 나온다 동남아시아 가난한 나라
밀입국한 나이 어린 노동자들이 산재당해
오 년치 칠 년치 임금 고스란히 병원비로
날려버려도 그것은 그들 개인의 불운일 뿐
나는 이제 가슴이 벌집인 양 숭숭 뚫리지도
매맞은 개구리 뒷다리마냥 벌벌
떨리지도 않는다 나 이제 살 만하다
그러니 청승을 강요하지 말라
나는 이제 길바닥 아무렇게나 놓인
돌이 되어버렸다 누군가 내 몸을
토막 난 막대기로 잘못 알고 함부로
걷어차도 인내에 익숙한 나는 아마
견성한 도인처럼 허허허, 웃을 것이다
☆★☆★☆★☆★☆★☆★☆★☆★☆★☆★☆★☆★
《23》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재무
배가 고파 달걀 18개를 훔친 사내가
18개월형을 받았다
달걀 하나에 한 달형을 받은 것이다
곰국에, 계란프라이, 멸치볶음에, 시금치나물로
아침을 먹은 나는 참을 수 없는
굴욕과 부끄러움과 설움이 솟구쳤다
누가 저 사내의 가난에 돌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저 사내가 받은 형벌에 너와 나의 무관심도 가담한 것이다
18개월 형을 때린 검사는
아내가 차려준 더운밥을 먹고
기사 딸린 고급차를 타고 뻣뻣하게 목을 세운 채
출근하여 그것이 거룩한 사명이라도 되는 양
죄 지은 자들에게 엄한 벌을 내릴 것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랑이 없으면 누구나 짐승이 될 수 있다
18개의 계란이 하나, 하나가 낱개의 돌이 되어
구형을 내린 자의 얼굴을 향해 날아가리라
출처 : 《시인동네》(2020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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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삼류들
이재무
삼류는 자신이 삼류인 줄 모른다
삼류는 간택해준 일류에게, 그것을 영예로 알고
기꺼이 자발적 헌신과 복종을 실천한다
내용 없는 완장 차고 설치는 삼류는
알고 보면 지독하게 열등의식을 앓아온 자이다
삼류가 가방 끈에 끝없이, 유난 떨며 집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것이 성희롱인 줄도 모르고 일류가 몸에 대해 던지는 칭찬
곧이곧대로 알아듣고 우쭐대는 삼류,삼류는 모임을 좋아한다
그곳에서 얻을 게 많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류와 어울려 사진을 박고 일류와 더불어 밥을 먹고
일류와 섞여 농담 주고받으며 스스로 일류가 되어간다고 착각하는 삼류
자신이 소모품인 줄도 모르고 까닭 없이 자만에 빠지는
불쌍한 삼류 사교의 지진아
아 그러나, 껍질 없는 알맹이가 없듯
위대하게 천박한 삼류 없이 어찌 일류의 광휘가 있으랴
노래를 마친 삼류가 무대를 내려서자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삼류의 얼굴에 꽃물이 든다
삼류는 남몰래 자신이 여간 대견하고 자랑스럽지가 않은 것이다
사실 열렬한 박수갈채는 노래 솜씨보다 월등한
그녀의 미모에게 보낸 것인데 그 사실을 그녀만 모르고 있다
삼류는 일류들이 앉아 있는 맨 앞줄을 겸손하게 지나서
이류들이 앉아 있는 중간을 우아하게 지나서
삼류들이 뭉쳐 있는 후미에 뽐내듯 어깨 세우고 앉는다
삼류는 생각한다 이렇게 열심히 노래 부르다 보면
언젠가 저 중간을 넘어 저 맨 앞줄에
의젓하게 앉아 있는 날이 올 거야
삼류는 가슴을 내밀어 숨을 크게 마셨다 내뿜는다
그러나 그날은 언제 올 것인가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삼류는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온다
그녀도 세상은 이미 각본대로 연출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채 가고 있는 중인 것이다
삼류는 어제 그러하였고 오늘 그러하였듯
내일 또 무대에 올라 노래 부를 것이다
그러다 자신의 자리와 역할이 일류를 위한 영원한 들러리요, 삐에로요,
악세사리라는 것을, 뼈저리게 무슨 회한처럼 문득 깨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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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소 뼈다귀
이재무
소처럼 가련한 가축이 있을까?
살아서는 노동력을 바쳐야 한다
죽어서는 부위별로 팔려나간다
그 중 뼈다귀는 세 번 네 번 우려지기까지 한다
가죽은 북이 되어 매질을 당하거나
구두가 되어 다시 노동을 살아야 한다
세상천지에 이같이 불쌍한 존재가 또 있을까?
있다! 묻혀서도 걸핏하면 불려나와
부관참시 당하는 사람
그는 소 뼈다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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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손
이재무
새삼 두 손을 번갈아 바라본다
참 죄가 많은 손이다
여자 손처럼 앙증맞은 이 손으로 나는
얼마나 큰 죄를 저질러 왔던가
불의한 손과 악수를 나누고 치솟는 분노로
병을 깨고 멱살을 잡고, 음흉하게 돈을 세고
거래를 위해 술잔을 잡고
쾌락을 위해 성기를 잡고, 잡아왔던가
왼손이 한 일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오른손이
물끄러미 내 얼굴을 바라다본다
펼친 손에는 내가 걸어온 크고 작은 길들이
지울 수 없는 금으로 새겨져 있다
손을 잘라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손 없이 밥을 먹고 손 없이 책을 읽고
손 없이 사람을 만나 뜨겁게 포옹하며
사는 날이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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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수직에 대하여
이재무
수평은 수직이 만든 것이다
산의 수직 하늘의 수평을
해저의 수직 바다의 수평을
기둥의 수직 천장의 수평을
언덕의 수직 강물의 수평을
꽃대의 수직 꽃의 수평을
동이에 가득 담긴 물
이고 가는 그대의,
출렁출렁 넘칠 듯 아슬아슬한
사랑의 수평도
마음 속 벼랑이 이룬 것이다
수직의 고독이 없다면
수평의 고요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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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시간의 그물
이재무
굴 속 웅크린 짐승으로 누워
봄 한철을 보냈다
냉장고 안에는 아내가 퇴근 때마다 사온
푸성귀가 가득했으므로 배가 고프진 않았다
베란다 밖으로 펼쳐진 세상을 읽기에도
나는 힘에 부쳤다
나라의 기둥이 무너지고 서까래가 날아가도
나는 아프지 않았다
내 몸이 시들수록, 아내의 눈은 생기로 빛났고
나는 이상하게 먼 곳의 친구조차 그립지 않았다
시간의 그물에 갇혀 나는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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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쓴다
이재무
식전에 일어나 마당을 쓴다
찬물 뿌려 아직 잠 묻어 있는 바닥 깨운 뒤
손주 볼 알뜰히 문질러 닦는 할미의 손길로
살뜰하게 구석구석 마당 쓸다보면
아직 보내지 못한 애증과 집착
왜 이리도 많은 것인가
돌에 스민 얼룩처럼 지워지지 않는 것들
마당은 패고 싸리비 끝이 울며 부러진다
싸리비 다녀간 뽀얀 얼굴의 마당에
갓 태어난 햇살과 순진한 참새들 내려와 앉는다
손 씻고 방에 앉아 새삼 생각하노니
한 칸 한 칸 시간의 공백 채워 가는 일처럼
두렵고 또 경건한 일이 있을까
안절부절 생각을 풀어놓다가 방문 여니
울타리 밖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는
감나무그늘 그새 백지 마당 한 획 한 획
다는 채우지 않고 넉넉히 적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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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아름다운 이별
이재무
마음 비우는 일처럼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그리움 깊어갈수록
당신 괴롭혔던 날들의 추억
사금파리로 가슴 긁어댑니다
온전히, 사랑의 샘물
길어오지 못해온 내가
이웃의 눈물
함부로 닦아준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요
가슴 무덤에 생뗏장 입히시고
가신 당신은
어느 곳에 환한 꽃으로 피어
누구의 눈길 묶어두시나요
마음 비우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당신은 내 곁에 없었습니다
아픈 교훈만
내 가슴 무덤풀로 자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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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온다던 사람 오지 않았다
이재무
온다던 사람 오지 않았다 밤 열차
빈 가슴에 흙바람을 불어넣고
종착연 목포를 향해 말을 달렸다
西山 삭정개비 끝에서
그믐달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주먹의 불빛조차 잠이 들었다
주머니 속에서
때 묻은 동전이 울고 있었고
발끝에 돌팍이 울고 있었다
온다던 사람은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오지 않았고
내 마음의 산비탈엔 핀
머루는 퉁퉁 젖이 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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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운주사
이재무
다 늦은 봄날, 눈은 내려서
길도 마음도 젖은 흙이 되어서
사는 일 문득 부질없고 아득해져서
생각의 배 맞는 지기 몇 더불어
운주사 가니
큰 배 한 척 산중에 정박중인데
크고 작은 선실마다에
성도 이름도 없이 촌부들 저희끼리
누워 혹은 기대어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
어디서 메주 뜨는 내음 솔솔 풍기고
점심 거른 배 하도나 출출하여
통성명 없이 정인된 절간 속 장삼이사들
데불고 가서 추어탕 한 그릇
탁주 한 사발로 요기와 한기 풀며
거하게 취해 천 년을 살다 오는 길
마음도 길도 미풍에 날려
볼에 와 닿는,
춥지 않은 춘설 되어서
사는 일 문득 달빛 받은 창호지같이
환하고 까닭없이 그저 고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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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웃음의 배후
이재무
웃음의 배후가 나를 웃게 만든다
자꾸 웃음이 나온다
밥 먹으면서 웃고 길 걸으며 웃는다
앉아서 웃고 서서 웃고 누워서 웃는다
수업 하다가 웃고 차 타면서 웃는다
잠자다 깨어 웃고
소리내어 웃고 소리 죽여 웃는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몸에 난 사만팔천 개의 구멍을 열고
비어져 나오는 웃음의 가래떡
찡그리면서 웃고 이죽거리며 웃는다
웃는 내가 바보 같아 웃고
웃는 내가 한심해서 웃는다
이렇게 언제나 나는 가련한 놈
웃다가 웃다가 생활의 목에
웃음의 가시가 박힐 것이다
백지의 공포 앞에서 볼펜이 웃고
웃음의 인플루엔자에 전염된
꽃들이 웃고 새들이 웃고
애완견과 밤 고양이가 웃고
가로수가 웃고 도로가 웃고 육교가 웃고
지하철이 웃고 버스가 웃고 거리의
간판들이 웃고 티브이, 컴퓨터가 웃고
핸드폰, 다리미, 냉장고, 식탁,
강물, 들녘이 웃고 산과 하늘이 웃는다
동심원을 그리며 번져가는
웃음의 장판무늬들
그리다가 돌연 사방팔방 안팎에서
떼 지어 몰려와
두부 같은 삶 물었다 뱉는,
가공할 웃음의 저 허연 이빨들
웃음의 감옥에 갇혀 엉엉 웃는다
그 언제나 즐겁고 신나는
옛날 같은 새날이 와
눈치 보지 않고
눈물 콧물 흘리며 실컷 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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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이별
이재무
마음 비우는 일처럼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그리움 깊어갈수록
당신 괴롭혔던 날들의 추억
사금파리로 가슴 긁어댑니다
온전히, 사랑의 샘물
길어오지 못해온 내가
이웃의 눈물
함부로 닦아준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요
가슴 무덤에 생뗏장 입히시고
가신 당신은
어느 곳에 환한 꽃으로 피어
누구의 눈길 묶어두시나요
마음 비우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당신은 내 곁에 없었습니다
아픈 교훈만
내 가슴 무덤 풀로 자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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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자국들
이재무
내 다니는 회사가 세 들어 있는 건물
입구 유리문에는 익명의 손자국들이 어지럽다
손자국을 힘껏 밀어야 문이 열린다
그러니까 아침에 나는 저 손자국들에
손을 대고 출근을 하고
저 손자국들에 손을 포갠 뒤
점심하러 나왔다 들어가고
저 손자국들에 내 자국을 묻힌 뒤
퇴근하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는 셈이다
저 손자국들 속에는 분명 내 것도 들어 있을 것이다
손자국들은 서로 포옹하거나 클린치하거나
후배위하거나 부둥켜안고 있기도 하다
놀랍지 않은가, 내가 얼굴도 모르는 이들
손자국들이 난교처럼 한 몸으로 엉켜 있다니!
저토록 은밀하게 서로의 체온을 공유하고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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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장작을 패며
이재무
장작을 패며 나는 배운다
싸움꾼의 원칙과 자세에 대하여.
두 눈 부릅떠 결을 겨눌 것.
옹이는 절대 피할 것.
순서는 마른 것에서 젖은 순으로.
한두 시간이 아니라
하루 이틀이 아니라
평생을 도끼질할 때
원칙과 자세가 바로 생명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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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저 못된 것들
이재무
저 환장하게 빛나는 햇살
나를 꼬드기네
어깨에 둘러맨 가방 그만 내려놓고
오는 차 아무거나 잡아타라네
저 도화지처럼 푸르고 하얗고 높은
하늘 나를 충동질하네
멀쩡한 아내 버리고 젊은 새 여자 얻어
살림을 차려보라네
저 못된 것들 좀 보소
흐르는 냇물 시켜
가지 밖으로 얼굴 내민 연초록 시켜
지갑 속 명함을 버리라네
기어이 문제아가 되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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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제부도
이재무
사랑하는 사람과의 거리 말인가
대부도와 제부도 사이
그 거리만큼이면 되지 않겠나
손 뻗으면 닿을 듯, 닿지는 않고,
눈에 삼삼한
사랑하는 사람과의 깊이 말인가
제부도와 대부도 사이
가득 채운 바다의 깊이만큼이면 되지 않겠나
그리움 만조로 가득 출렁거리는,
간조 뒤에 오는 상봉의 길 개화처럼 열리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 말인가 이별 말인가
하루에 두 번이면 되지 않겠나
아주 섭섭지는 않게 아주 물리지는 않게
자주 서럽고 자주 기쁜 것
그것은 사랑하는 이의 자랑스러운 변덕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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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주름 속의 나를 다린다
이재무
일요일 밤 교복을 다린다
아들이 살아낼 일주일분의 주름
만들며 새삼 생각한다
다림질이 내 가난한 사랑이라는 것을
어제의 주름이 죽고 새로운 주름이 태어난다
아하, 주름 속에 생활의 부활이 들어 있구나
아들은 내가 다려준 주름 지우며
불량하게 살아가리라
주름은 지워지기 위해 태어나는 것
주름을 만들며 나를 지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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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해산
이재무
늦은 밤 산속 임자 없는 밤나무들
다 익은 영근 밤알 연달아 토해놓느라
날 새는 줄 모른다 도토리나무도
덩달아 바빠져서 바람을 핑게로
몸 흔들어댄다 아람 벌어져 떨어지는
열매들 이마 때릴 때마다 끙, 하고
산은 돌아눕는다 설핏 잠에서 깬 다람쥐
두리번거리다 곧 귀를 열어젖혀
토록토록 열매를 세다 다시 잠든다
저 멀리 인간의 마을은 불꺼진 지 오래
신혼방 엿보고 오는 길인지
얼굴 불콰한 달빛
숨가쁜 소리로 환한 숲속
나무들 몰래 일어나 바심하느라 여념이 없다
내일 多産 마친 나무들 눈빛 더욱 맑고
몰라보게 몸은 수척해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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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혹
이재무
난쟁이의 등에 난 혹을
사람들은 흉측하게 여겨
떼어냈으면 하는 발칙한 생각도
하는 모양이더라만 아서라,
혹을 캐내면 그는 죽은목숨
뿌리는 그의 몸 전체에 뻗어 있다
누구나 존재의 혹을 지니고 산다
다혈질인 나도 내성적인 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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