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세출의 화가 이중섭
이중섭은 1916년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니 공산당 치하에서는 '인민의 적'이 되었다.
그래서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원산에서 부산행 배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부인이 폐결핵으로 각혈을 하고, 아들은 영양실조였다. 그래서 식구들을 처가가 있는 일본에 보냈다.
가족과 함께 살고 싶은 생각에, 며칠이 멀다 하고 편지를 보냈다.
오늘로 1년째가 됩니다. 1년 또 1년, 이렇게 헤어져서 긴 긴 세월을 보내야 하니, 견딜 수가 없어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지 않으면 안 되나요? 만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요. 답장을 기다리오.
일본인 부인 이름을 '이남덕'이라고 지었다.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만난 복스러운 여인'이란 뜻이다.
이중섭의 작품세계
임용련은 미국 예일대학교 미술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엘리트였다. 이중섭은 그의 문하에서, 모더니즘 분야의 미술을 공부했다.
오산학교 재학 중에는 서구의 아방가르드 회화에 심취했다.
18세 때, 일제가 학교 건물을 새로 짓는다고 하여, 본관이며 교실을 불태웠다.
어려서부터 반일 의식이 투철했다.
그래서 민족의식을 주제로 한 향토적인 그림을 자주 그렸다.
이후에는 피난 시절의 가족과 이별의 아픔과 그리움을 주로 그렸다.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가장 빨리 그리고, 잘 그릴 수 있는 대상을 찾아 치열하게 그렸다.
유작은 유화 60여 점, 은지화 120점, 드로잉 150점, 엽서 그림 88점
종이를 살 돈이 없어, 양담배 내지에 그린 그림이 은지화다.
천도(天桃) 복숭아
초토(焦土)의 시(詩)로 유명한 시인 구상과, 이중섭은 오랫동안 우정을 나누는 친구 사이였다.
그런데 구상은 당시 의술로는 어렵다는, 어떤 수술을 받았다.
몸은 의사가 고쳐주겠지만 마음은 누가 고쳐줄까?
그래서 구상은 절친한 친구 이중섭이 찾아와 주기를 바랐다.
평소에 소원한 친구들도 병문안을 오는데, 정작 이중섭은 오지 않았다.
섭섭한 마음도 들었지만. 이중섭에게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섰다.
뒤늦게 이중섭이 왔다.
심술이 난 구상은, 반가운 마음을 감추고, 짐짓 부아가 난 것처럼, 누구보다 제일 먼저 줄 알았는데! 섭섭하네!
빈손으로 올 수가 없어 그렇게 되었으니 양해하게!
이중섭이 내민 것은, 천도(天桃) 복숭아 그림이었다.
옛말에 천도복숭아를 먹으면 무병장수(無病長壽)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 이걸 먹고 벌떡 일어나게!
과일 하나 사 올 수 없었던 가난한 친구가, 그림을 그려 오느라 늦게 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미어졌다.
구상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천도복숭아 그림을 머리맡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운명은 거기까지였다.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무연고 행려병자로 처리된 주검은, 사흘 만에 이중섭으로 밝혀졌다,
가족과도 만나지 못하고, 미술가로서 빛도 못 본 채, 외롭게 생을 마감한 것이다.
서울 중랑구 망우산(281m) 망우리 공동묘지는,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어 시민들의 휴식 공간이다.
이곳에는 만해 한용운· 시인 박인환· 조봉암 등 유명 인사들이 잠들어 있다.
화가 이중섭의 무덤도 만날 수 있다. '묘지 번호 103535'
후배 조각가가 이중섭의 그림에 나오는, 두 아들의 영정을 새겨 놓았다.
부연하여
제주도에는 유별나게 이중섭을 기리는 행사가 많이 있다.
이중섭 박물관, 이중섭 거리, 이중섭 전시회 등
이중섭은 이북에서 넘어와 통영에 정착했다. 전시회도 통영에서 더 많이 가졌다.
그런데 왜 제주에서는 이중섭을 동향 사람 이상으로 생각할까?
유배를 당해 제주에 왔던 문인들의 향기를 잊지 못해서 이기 때문이리라!
첫댓글 좋은글 감사 합니다
불세출의 화가 이중섭
샤프란님 덕분에..
알아 갑니다.
귀한글 주신 샤프란님 고맙습니다
행복한 주말 휴일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