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4. 3. 7. 목요일.
밤중에 내가 가입했던 많은 카페에서 내 글이 남아 있는지를 또 확인하고 있다.
최근에는 특정 카페에서만 활동하고, 기타 카페에서는 활동을 미미하게 했더니만 대부분의 카페에서 내 글이 사라졌다.
다행하게도 일부 카페에서는 남아 있기에, 고맙게 여기며 이를 퍼서 여기에 올린다.
글쓰기에 관한 내용이다.
또 다른 미련
'저 푸른 색깔의 한복을 입은 분이 전원일기 TV드라마 작가여.
그 옆에 있는 분은 목포대 문학과 교수를 역임했고...'
내 아내와 내 자식 네 명이 바로 내 등 뒤의 피로연 식탁에서 식사하는 가족들을 쳐다보았다.
'내가 인사할까?'
'식사 끝나거든 하세요.'
아내가 나를 억눌렀다.
어쩌다 보니 교수가 안 보였다. 식사를 끝내고 바깥으로 나갔다는 뜻. 한복 입은 분은 뒤쳐지고.
수십 년 전의 일이다.
그들 내외를 만나서 서울 송파구 잠실에서 저녁밥을 함께 했으며, 그분의 집에 초대받아서 방문했다.
그의 집안에는 작은 새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취미로 새를 키우고 있었다.
그 당시 한참 유행하던 일본 소설 '오싱'에 관해서 내가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오싱' 이외에 여러 문학에 대해서 아는 체를 했나 보다.
내가 나름대로는 어떤 일가견을 가졌다는 듯이 말한 탓일까?
그들 내외는 나한테 진지하게 영화사업을 권유했다.
나를 잘못 보았다는 뜻이겠지.
유 교수는 전남 고흥 출신의 대학교수, 소설가, 수필가이고, 안부인은 인기 드라마 작가(김정숙)라는 것을 나는 그 당시에는 몰랐다.
그들이 문학에 관련 있는 분이라는 것을 낌새도 몰랐으니 내가 공자 앞에서 문자를 쓴 꼬라지가 되었다.
그 당시 나는 문학이 아닌 국가공무원인데도 문학에 관심을 가졌다.
직장에서 소설책 등을 많이 빌려서 읽던 때였다. 내가 왜 소설책을 많이 읽었는지 조금은 원인이 있었다.
쌍둥이었던 나. 쌍둥이 둘 다 국문학과를 선택해서는 안 된다는 아버지의 권고대로 나는 다른 학과를 선택했다.
국문학과를 선택했던 작은쌍둥이는 다음 해에 뱀 물려서 20시간 만에 죽었다.
이런 아픔이 남았을까? 나는 문학과는 다른 방향을 걸어갔는데도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글쓰기에 대한 미련을 접지 못했나 보다.
내가 문학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걸으면서도, 직장생활하면서도 외국소설에 관심이 있었을 뿐었다.
그런데도 그 당시 그들은 나한테 영화드라마 계통의 사업을 할 것을 권했다. 미래와 장래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좋은 조언이었으나 나는 전혀 다른 길로만 걸어 갔다. 그만한 투자사업비도 없었거니와 내 영역하고는 전혀 생뚱맞은 영역이었으니까.
나로서는 내가 가던 길, 딱딱한 공직자로서 일한 뒤 퇴직하였다. 욕심을 내지 않고는 그냥 평범한 삶으로서 만족했다.
내가 유 교수의 배우자 김정숙 작가한테 인사를 할까 하다가는 고개를 내저었다.
나를 기억하랴? 혹시 내가 누군지를 잠깐 설명하면 금세 알아보겠지만서도 그냥 포기했다.
승강기 입구 로비에서 유 교수를 만났다.
내가 누군인지를 말하니 그는 금세 나를 알아보았다.
나중에 한 번 더 만날 게다.
내 생질들의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이기에.
오늘은 내 생질녀의 결혼식이었고, 다음에는 생질의 결혼식이 있을 터.
그들은 전남 고흥군 출신. 같은 학교, 같은 학과에서 만나서 ...
전라남도 고흥이 낳은 15인 속에 위 분들이 포함되었다.
고향 녹동 과수원집의 큰아들, 유 교수는 대학교 문학교수이기에 자연에 관한 소설과 수필이 많다.
위 새 이야기는 내가 살짝 언급했고.
내가 문학을 선택했다면 지금쯤 글 잘 쓰는 사람이 되었을까?
이런 것은 아쉬움이지만 모두가 다 지나간 옛날 이야기.
2015. 10. 18. 일요일. 해비치(최윤환)
첫댓글 쌍둥이 동생이 뱀에 물려죽었다는 사연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슬픈 과거가 있으셨군요.. 긴세월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가야할 길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꼭 가고 싶은 길이 많은거죠..
예.
댓글 고맙습니다.
문과대학 교수였던 유씨. 그의 내자는 전원일기 작가인 김정숙씨.
오래 전 그 분의 초청을 받아서 그분의 집에 방문했지요. 새를 정말로 좋아하시대요.
훗날 생질녀의 결혼식장에서 사돈이 된 그분 내외를 다시 만났다는 이야기이지요.
나이 많아지면 기억력이 감퇴해서 옛일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일기, 사진, 녹음기 등은 옛기억을 되살려주지요.
위 글도 우연히 발견했기에 덕분에 지나간 옛기억을 떠올렸지요.
저는 쌍둥이형. 동생이 죽은 뒤부터는 저는 몸을 사리며 살아야 했지요.
어머니한테는 이제는 하나뿐인 아들이 되었기에.
다치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세상을 살아가기 시작했지요.
소소한 시민으로만 조용히 살았더니만 지금은 늙은이가 되어서 오래 살고 있지요.
글, 사진, 녹음기 등은 잘 다뤄서 오래 보관했으면 합니다.
훗날에는 소중한 기억의 자산이 되지요.
글로 성공하고 가족을 부양하는 이들은 많지
않은 지라 어른들께서 말리셨을 겁니다.
창작의 고통 또한 작지 않았을 테구요.
사람의 길은 운명이라는 게 있다고 봐요 ^^
댓글 고맙습니다.
사람의 길은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라고 보시는군요.
아마도 많이 작용할 겁니다.
오늘, 올린 글이 9년 전의 글이었고,
글 속에서의
피로연 자리(아마도 생질녀의 결혼식)에서
수십 년 전의 잠실에서의 저녁식사와
그 교수님댁의 초대로 방문했다는 것을...
가만보니, 누님인지 여동생인지 모르겠지만,
매형의 형제 분들이 훌륭하신 것 같네요.
결과적으로
누님이 시집을 잘 가셨다는 것?
이미 지나간 옛 이야기,
문학을 했으면 어떨 것이며
공무원으로 정년 퇴임했으면
괜찮은 것 아닙니까?
젊은 시절 꿈도 많았고
잘 버티며 살아왔다는 글이면
충분합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제 여동생이지요.
사돈이 되었지요.
무척이나 점잖은 분이고, 또한 부유한 집안이더군요.
그분들이 국어학 교수, 전원일기 작가인 줄도 모르고
제가 문학 이야기를 했으니... 그분들은 속으로 웃었겠지요.
저와 동생은 문학을 좋아했지요.
동생한테 국문학과를 양보하고 저는 다른 길로 갔지요.
딱딱한 정치, 법률, 행정, 논리 계통으로....
지금은 서울 살면서도 시골에 내려가 텃밭농사나 짓고 싶어하는 늙은이가 되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