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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제 이야기를 좀 할까 합니다.
대단할것도 없지만 사실 평범하지도 않습니다.
프로필에 비춰지는 제 모습이 아닌 실제적인 저를 한 번 정도는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소록도라는 섬에서 태어났습니다. 한센병 환자들이 집단으로 생활하는 곳입니다.
아버지께서(작년에 사고로 돌아가셨음) 국립소록도병원에서 행정 공무원으로 근무하실때 태어났
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모릅니다. 가깝게 계신 분들은 주말에 아이들과 꼭 한 번 다녀 오시길 바
랍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다녀와서 호텔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직장 생활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IMF사태가 터졌습니다. 말단이었던지라 다행히 자리는 보전했
습니다.
몇 년간의 직장생활 끝에 적금을 해서 약간의 돈이 모이자 직장생활이 시시하게 느껴졌습니다.
사실 굉장히 괴롭히는 상사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사람이 보기 싫어졌다고 하는게 더 정확할것 같습니다.
회사에 사표를 쓰고 여행을 다녔습니다. 대한민국을 자동차를 타고 한 달 가까이 돌아다녔습니다.
돌아와서 일을 찾던 중 친구(고등학교 동창)가 인테리어 회사를 하고 있었는데 같이 해보자고 설득했습니다.
지분을 투자하고 회사를 좀 더 확장하자는 그의 제안이 솔깃했습니다.
말단 직원에서 바로 사장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한 1년 정도를 같이 했는데 사업이 굉장히 잘 됐습니다. 어린 나이에 무모하리만큼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그때 다른 친구로부터 이제 그런 구멍가게에서 사장 행세 그만 하고 좀 더 큰 꿈을 꿔보지 않겠느냐는 얘길 들었습니다.
몇 달간의 만남 끝에 인테리어 회사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큰 회사의 인수전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야채 슬러지를 이용해 퇴비를 만드는 친환경 자원화 사업을 하는 큰 공장이었습니다.
경매에 참여해 8억 6천만원에 그 공장을 낙찰 받았습니다.
그때 제 나이가 이제 겨우 서른 둘이었습니다. 세상이 참 만만해 보였습니다.
만만해보이는 세상을 비웃는 듯한 생활이 이어졌습니다. 흥청망청 정도가 아니고 로또 한 100번 당첨된 사람 마냥 돈을 쓰고 거만을 떨며 살았습니다.
심지어 양말 하나까지도 만 원짜리가 아니면 안신었습니다.
스스로가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제가 경영하는 공장이 쓰러져 가고 있었습니다.
부도가 나기 일주일 전까지도 전 재무상태가 그렇게 엉망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전혀 모르는 분야의 사업을 새파랗게 어린 놈이 경영하다 보니까 주위에 파리도 들끓었습니다.
일장춘몽의 시간이 지나가고 사업이 부도 나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은행에서 운영자금으로 받았던 12억원의 대출금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습니다.
집은 물론이고 타고 다니던 자동차와 모든 계좌까지도 동결됐습니다. 영화에서나 있음직한 현실이 내 앞에 펼쳐졌습니다.
그때가 2002년 6월이었습니다. 월드컵경기가 막 시작될 즈음이었습니다.
온 나라가 빨간색으로 뒤덮이던 그때 제 눈에 보인건 빨간색 두건과 티셔츠가 아니라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 시커먼색의 제 앞날이었습니다.
돈 만원이 그렇게도 귀하고 큰 가치인줄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자살까지도 생각을 했었지만 원체 여린 가슴을 지닌 존재인지라 차마 실행하지는 못했습니다.
날마다가 거의 구걸하는 인생이었습니다. 내놓고 구걸하지는 않았지만 친구들이 돌아가면서 찾아와 밥을 사먹이고 저녁에 소주 한 잔 사면서 힘내라고 했던게 일상이었습니다.
그 가운데에도 부도와 관련된 재판은 계속 진행됐고 몸과 마음은 더 이상 지쳐할 기운도 없을만큼 피폐해져갔습니다.
건설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그 나이에 사업으로 꽤 성공한 친구였는데 그 친구가 제안을 해왔습니다. 고급스런 BAR를 하나 차리고 싶은데 저더러 대신 운영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 친구는 제가 이렇게 망가지는게 안타깝다고 얘기했지만 사실은 자기 이름으로 하지 못할 사연이 있었던 사실을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소위 바지사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손님들 비위 맞추느라 새벽 3시 4시까지 독한 양주를 마셔댔더니 몸이 더 망가져 갔습니다.
그때 어머니 친구분께서 찾아와서 (꽤 자산가였고 독실한 크리스천인 분이었습니다. 참고로 저희 집안도 종교적으로 비슷합니다)
5천만원을 꿔줄테니 술집 같은거 하지 말고 다른걸 해봐라하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래서 김밥제국(?^^)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모든걸 버리고 그 장사에 미쳐있었습니다. 아줌마 다섯분과 제가 2교대로 근무했는데 하루에 3시간 이상을 자 본 기억이 없습니다
2년정도 하니까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혀갔습니다.
그런던 어느날 경찰서에서 출두하라는 명령서가 하나 날아들었습니다.
고소를 당했는데 자세히 봤더니 저를 고소한 사람은 며칠전에 제가 해고했던 아주머니었습니다.
솜씨가 너무 좋아서 개업할때부터 그 분 덕에 장사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절대적인 존재였습니다.
명절때는 다른 분들 몰래 보너스를 따로 상당히 지급할 정도로 전 그분께 의지했었습니다. 친 누나 친 이모처럼 생각했습니다.
근데 매출은 그대론데 자꾸 마진이 줄어드는걸 이상하게 여기던 차에 돌려보지 않던 CCTV를 한 번 보게 되었습니다.
한 달 정도 분량을 봤는데 그 분께서 계산하면서 적지 않은 돈을 빼돌리는걸 보게 되었습니다.
잠못 자고 고생한 기억때문에 분하기도 했지만 그 동안의 도움 받은 감사함도 있었기에 그만 두라고 얘기 하면서 솔직히 잘못에 대해 시인만 해달라고 했었습니다. 그 분은 시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격하게 화를 내며 앞치마를 제 얼굴에다가 벗어 던지고 떠났습니다.
그분께서 절 고소했던 겁니다.
내용은 그 분과 내가 조를 이뤄 새벽 근무를 할때 (실제 시간배정이 그랬던 적이 많았습니다) 내가
자기를 강간하려고 몇 차례 시도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게 잘 되지 않자 자기를 잘랐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황당한 정도가 아니라 사실 비참했습니다.
다시 서기 위해서 자존심의 밑바닥까지 다 내던지고 2년을 땀흘렸던터라 그 고소장을 받아든 순간 절망했습니다.
몇차례의 대질신문 끝에 경찰은 이미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아주머니가 거짓말하는게 명백하다는 거였습니다.
진술이 자꾸 바뀌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거짓말을 가리기 위해선 또 다른 거짓말을 해야 했기에 그랬던것 같습니다.
경찰은 아줌마의 죄질이 아주 나쁘다면서 무고죄로 고소하라고 했습니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가게 문을 보름 정도 닫았습니다.
24시간 하던 가게의 특성때문에 어쩔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조사 과정이 끝나고 무혐의 처분을 받던 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버스 차창 밖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는데 갑자기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습니다.
버스 안에서 소리 내서 엉엉 울었습니다.
마침 사겠다는 사람이 있어서 서둘러 가게를 처분하고 좀 더 큰 퓨전 일식당을 개업하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때부터 가장 친한 친구와 같이 했습니다.
제가 가진 현금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그때까지도 공장 부도의 여파로 압류가 되어있던 터라 친구의 와이프 명의로 가게를 하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이제 좀 안정이 되어가나 싶었습니다.
4개월쯤 지났을때였습니다.
하루는 가게를 오픈하러 나갔는데 못보던 사람 몇사람
저더러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가게 사장이라고 했더니 무슨 소리냐며 지난달에 계약하고 오늘 잔금 치뤘다며 계약서를 보여줬습니다.
친구에게 전화를 했더니 꺼져 있었습니다. 우리가 투자했던 것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가게를 매각하고 떠난 거였습니다.
지금까지도 그 친구는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전 다시 무일푼이 되었습니다.
눈 뜬 채로 내 2년의 피땀이 남의 손에 고스란히 넘어가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전 웃었습니다.
그로부터 2개월뒤 경남 합천에서 졸음운전으로 전신주를 정면추돌하는 교통사고를 냈습니다.
그때 출동해서 저를 진주에 있는 한일병원 응급실로 이송했던 119 구급대원의 말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당신이 예수를 믿으면 기도 열심히 하고 불교를 다니면 절에 가서 불공 열심히 드리고 종교가 없다면 퇴원하자마자 조상님 묘에 찾아가서 감사하다고 공들이셔야 합니다.
나 구급대원 13년 생활에 당신처럼 차가 가루가 될 정도의 사고도 첨 봤고 그 안에서 당신처럼 적게 다친사람도 첨 봤습니다.
이건 거의 기적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차라리 죽는게 나을뻔 했습니다.
그럼 생명보험금이라도 받아서 가족들이라도 풍요를 누렸을텐데요"
심하게 야단 맞고 그렇게 치료를 끝낸 후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꼬일수 있나 하는 자괴감에 날마다 괴로운 날들을 보내고 있었는데 한 친구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친구가 날 꼭 보고 싶어한다며 연락이 와서 전라북도 봉동이라는 곳엘 가게 되었습니다.
말기암 환자였는데 보험고 없고 치료비 부담할 정도로 넉넉한 형편도 아니어서 고향으로 돌아가 나름 요양하고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해질 무렵 그 친구가 있다는 허름한 시골집에 도착했습니다.
방에 들어서자 그 친구는 방벽에 쭈그리고 앉아있었습니다.
무릎에 얼굴을 묻고 내가 왔다는 얘길 했는데도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3시간을 서로 말 한마디 없이 어두운 방안에 앉아있었습니다.
그때 그 친구가 고개를 파묻은채로 낮고 살짝 울먹이는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불렀습니다.
"민규야.......살고 싶다..."
전 태어나서 그렇게 진실하고 절절한 목소리를 들어본적이 없습니다.
그게 그 친구와 나눈 대화의 다였고 그 친구는 3일뒤 죽었습니다.
그 친구를 보내면서 생각했습니다.
그저 살아 있다는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우린 살아 있습니다.
우린 병에 걸리지도 않았습니다.
우린 맘만 먹으면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떠오르는 해를 보며 하루를 시작할수도 있습니다.
애플의 CEO인 스티브 잡스는 어떤 책에서 `오늘이 마지막 날인것처럼 하루하루를 살다 보면 당신은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다'라는 구절을 발견하고 삶이 180도 달라졌다고 합니다.
그 구절을 본 순간 그렇게 살겠다고 결심했고 지금도 실천하고 있다고 합니다.
누군가에게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인 오늘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삶의 마지막 날이기도 합
니다.
내 아이의 두 눈을 볼때, 내 부인과 얘길 나눌때, 삶의 무게에 눌린 내 남편의 뒷모습에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는 심정으로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눈빛과,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목소리와, 세상에서 가장 힘나는 응원의 한마다를 건네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하루만 그렇게 하는게 아니고 날마다 그렇게 하기를 원합니다.
가정 경제 주치의라는 타이틀을 가진 제가 수많은 상담을 통해 깨달은건 진정한 부는 세상이 가져다 주는게 아니라 바로 내 곁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헌신적인 릴레이션쉽을 통해 이뤄진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은 남은 인생의 첫날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오늘은 남은 인생의 마지막 날일지도 모릅니다
첫댓글 님의 글을 읽고 삶의 진정한 행복이 뭔가를 깨닫습니다.저는 고난 속에서 주님을 만나 모든시련을 이길수 있었습니다. 눈물나도록 시린 마음이 힘들었던 순간 순간을 기억나게 하는 군요.
지금도 난 시련이 있다고 고난속에 있다고 스스로 힘들어 하고 있었습니다...눈물이 핑 도네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뭐든지...
경험을 공유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자신을 되돌아 봐야할 것 같습니다.
감사히 읽고 갑니다~~경험처럼 휼륭한 스승은 없다는말이있지요.
고맙습니다^^..
저도 고맙습니다. *^^* 지치날 힘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