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결혼(結婚)
준비기간이 일주일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듯 화려하고 성대한 결혼식은 모든이들의 부러움을 살 정도로 완벽했다.
자신도 모르는 모든 더문의 사람들과 해서의 친 인척, 정계, 재계 언론계 인물들이 참석했고 연락을 해야할지를 놓고 망설였던 새어머니 정여사와 동생 정수까지.......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화이트로즈를 든 지수를 본 사람들은 아름답다는 찬사를 하며 눈을 떼지 못했고 식에 참석한 모든 남자들은 신부의 아름다움에 마치 넋을 빼앗긴 사람들 처럼 바라보았다.
“ 당신 아버지가 살아 계셨으면 오늘 이결혼식은 우리 두사람의 결혼식이 되었을 텐데....”
한신금융의 한명훈이사였다.
“글쎄요...”
“난. 오늘 이 결혼식이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단한 러브스토리의 결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아마도 당신이 판단컨대 한신금융보다는 해서그룹이 좀더 더문에 필요하다고 생각되었겠죠.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안타깝네요. 난 적어도 당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만 강선우 사장은 그런마음조차 없는 사람이란 걸 당신이 간과한 사실에....
언제든 내 도움이 필요할 때면 날 찾아주시오. 내가 당신의 편임을 잊지 말고...”
“그런일은 없을 것이오. 내 아내가 한이사에게 도움을 받는 그런일 따위는 만들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이제 놓친 고기는 잊어버리고 다른 낚시터를 찾아보시오. ”
저음의 힘있는 목소리에 명훈과 지수가 뒤돌아보자 신부대기실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선우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띄며 말했다.
“그런가요? 아직 난 놓친 고기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그럼. 지수씨 부디 이결혼으로 행복하시길...”
가볍게 인사를 하며 신부대기실을 빠져나가는 명훈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선우가 지수앞으로 다가와 낮게 속삭이듯 말했다.
“저런 초보낚시꾼 바늘에 퍼득이지 않아도 되게 해준 나에게 감사하시오.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저런 사람과 어울리는 일 없도록 각별히 조심해 주길 바라오.
자 그럼 나가볼까요? 신부님.”
지수는 대답조차 들을 가치가 없다는 듯 자신의 말을 무시한채 홀로 이끄는 선우의 손을 잡으며 이 낯선남자와 함께 앞으로 어떤 일들을 겪어야 할지 걱정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화려한 결혼식이 끝나고 피로연 차림의 지수가 기자들의 요청으로 준비된 회견장으로 안내되어 들어서자 벌써 선우의 얘기로 회견장은 떠들썩해있었다.
마침 지수의 등장으로 모든 카메라의 초점이 지수에게로 향하자 선우는 동화속 왕자처럼 크게 포물선을 그리며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며 지수의 손을 회견장 앞쪽 데스크쪽으로 인도했다.
여기저시서 터지는 카메라 플래쉬와 기자들의 질문이 지수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맞추자 선우가 마이크를 들어 자신에게로 관심을 돌리며 보호하듯 어깨를 끌어않았다.
“명신일보 김기자입니다. 두분이 처음 만난것이 7년전이라고 하던데.
그때라면 더문대표이사님은 고등학생 아니셨는지요?”
“아! 예. 맞습니다. 지수는 그때 고등학교 3학년 이었습니다.”
“ 그럼 고등학생인 이사님을 보고 강사장님께서 첫눈에 반하셨단 건가요?”
“예 그럼 안되는 건가요? 그때도 지금처럼 지수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을 지닌 고등학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 매력에서 벗어나지 못해 이렇게 붙잡힌거구요.”
“그럼 그때이후 더문에서의 지원을 거부한 이사님을 위해 강사장님께서 후원을 하며 키다리아저씨를 자청하신거군요”
“예. 그러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그룹에 입사한 지수를 제 수행비서로 대리고 다니면서 정말 연애다운 연애를 해볼까했는데 그만 장인어른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알콜달콩한 연애를 더 할 수없게 되어 제가 억지를 부려 빨리 결혼하자고 졸랐습니다.”
“그럼. 마지막 질문입니다. 이번건은 하우이사님께 여쭙겠습니다. 가족계획은 어떻게..... 강사장님의 나이도 있고하니 빨리 2세를 보실건가요?”
갑작스런 기자의 질문에 지수가 난감해 할까봐 선우가 마이크를 드는 순간 지수의 조용하면서도 힘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선우씨가 졸라 빨리 결혼을 하다보니 저는 연애기간이 짧아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좀더 신혼을 즐긴 다음 ,아기는 나중에 가질려구요. 기자님들도 아시죠? 아이는 아빠의 나이와는 상관없죠? 엄마인 제가 아직 젊으니까요. 제가 낳지 선우씨가 낳는게 아니잖아요? 호호호...”
지수는 선우의 어깨에 몸을 살짝 기대며 작게 어깨를 떨며 웃었다
“ 하하하... 그렇죠. 애기는 사장님이 낳는게 아니시니....”
기자들은 작지만 강단있는 목소리의 지수를 보며 그녀의 말에 동의하며 웃음을 지었다.
그 말 한마디에 지수를 바라보는 기자들의 눈빛에 따스함이 가득했다.
어느새 기자들도 회견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도 지수와 선우의 애틋한 러브스토리를 믿는 것 같았다.
기자회견을 무사히 마치고 신혼여행길에 오르는 지수에게 새어머니와 동생이 다가왔다.
식장에 참석했지만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던 정여사가 지수에게 다가와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지수야.... 네게 혹시 상처를 줬다면 미안하구나.
그렇지만 난 네엄마를 너무 닮은 너를 보면서 겁이 났단다. 혹시 그애처럼 너도 그렇게 변하지 않을까해서 무서웠단다.
넌 잘 모르겠지만...
그래. 다음에 기회가 도면 네엄마의 고향인 춘천에 있는 별장에 한번 가봐라.
거기에 가면 너와 네엄마의 비밀을 알 수있을거다.
그리고 얘야... 넌 부디 남자를 사랑하지 마라. 네 모든 것을 잃게 될지도 모를 그런 무모한 감정에 휩싸이지 마라.
한때 네엄마였던 사람으로 부탁이다. 절대 사랑에 빠지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마라.”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는 정여사를 보며 지수는 알 수없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걱정어린 말이었다.
새어머니와 어린동생의 배웅을 뒤로한채 선우가 직접 운전하는 웨딩카는 여행지인 동해로 향했다.
사이드미러로 보이는 두사람의 모습이 작은점이 되어 사라질때까지 지수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가까운 동해의 별장으로 향하는 신혼여행길 내내 새어머니인 정여사의 말이 귓전을 떠나지 않았다.
그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없지만 정여사의 눈빛에서 묻어나오던 진실함을 지수는 느낄 수 있었다.
“ 좀 자두지.. 피곤할 텐데...”
선우의 목소리에 지수는 정여사의 말을 되씹어보던 자신에게서 겨우 벗어 났다.
“아뇨. 운전할 때 자면 운전하는 사람에게 미안한 일이잖아요.”
“괜찮아. 난 안 피곤하니까. 한숨 자 두는게 좋을꺼야.”
“그래도.. 돼나요?”
“그래 어서자둬요”
“알았어요. 그럼 저 잠깐만 잘께요. 도착하면 깨워줘요”
“알았어”
조용한 국도를 달리는 차안에는 어느새 지수의 낮은 숨소리만 들렸다.
고요한 어듬이 내려앉은 도로 주변에는 작은 시골 마을의 풍경들이 차창밖으로 다가왔다 물러섰다를 반복했고 카라디오에서는 낮은 음악소리가 선우의 귓가를 가득 채웠다.
평상시라면 잘 듣지 않을 대중가요였지만 주파수가 바뀐줄 모르고 달리던 선우에게 처음으로 듣는 가요의 가사가 가슴을 때렸다.
'우리가 인연이 맞다면
넌 나의 운명이 분명해
우리가 사랑이 맞다면
난 오직 그걸로 충분해
우리가 인연이 된다면
완벽한 사랑이 될텐데
우리가 사랑이 된다면
무엇도 바랄게 없는데
너였으면
꿈꿔온 사랑이 너였으면
너였으면
기다린 운명이 너였으면
나였으면
너만의 사랑이 나였으면
영원히 나만 사랑할 너였으면
내가 널 만나기 위해서
수없는 이별을 했나봐
내가 널 붙잡기 위해서
사랑의 연습을 했나봐
니가 날 만난기 위해서
그녀와 이별을 했나봐
니가 날 붙잡기 위해서
사랑을 찾아 헤맸나봐
너였으면
꿈꿔온 사랑이 너였으면
너였으면
기다린 운명이 너였으면
나였으면
너만의 사랑이 나였으면
영원히 나만 사랑할 너였으면
때로는 못견딜만큼 힘이들때
날 안아주겠니
말해줘 내가 너의 사랑이라고
너없으면
나 이제 못살아 너 없으면
너없으면
사랑 할 수 없어 너 없으면
나였으면
너만의 사랑이 나였으면
영원히 나만 사랑할 너였으면
너의 그 마지막사랑 나였으면'
언젠가 자신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지수를 바라본적이 있었다.
연우와 지수가 나란히 가을햇살을 등에 지고 들어서던 그날, 가슴이 먹먹해 질 정도로 아팠던 그날 오후 지수가 이노랫말 처럼 인연이기를, 꿈구워온 사랑이기를, 마지막 사람이기를 바랬었다.
그러나 그 바램은 연우의 자살과 그 일기장을 읽은 순간 자신의 작은 바램은 너무나 터무니 없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동생을 죽음로 치닫게 한 치명적인 사랑.
그사랑의 중심에 서 있는 지수를 자신이 사랑한다는 것은 명백한 배신이었다.
별장에 다다를 때까지 곤한 잠을 자는 지수를 보며 선우는 차마 깨울 수가 없었다. 그녀의 무릎 아래로 손을 넣어 안아들자 가벼운 깃털처럼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지수가 자신에게 파고들며 웅얼거리는 모습을 보며 선우는 심장의 한쪽이 저려옴을 느꼈다.
이미 오래전 묻어버린 감정인줄 알고 있었는데 결혼을 계획하며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고 자신했었는데, 그 모든 자신감이 오늘 결혼식이후 첫날부터 흔들리고 있음을 선우는 느끼고 있었다.
지수를 편안함 침대에 내려 놓고 이불을 덮혀주고는 별장 앞 작은 해변을 거닐기 위해 편한 차림으로 나섰다.
밤바람을 쐬며 자신의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을 필요가 있었다.
이제 시작일 뿐인데 벌써 지수에게로 쏟아져 가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는 좀더 많은 인내심과 노력이 필요 할 것 같았다.
밤바다 저쪽 어디선가 자신에게 모든 힘을 다해 정신을 차리라고 속삭여주는 듯 파도가 밀려 왔다가 다시 밀려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