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마지막 길에서
지난 21일, 울산 방어진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는 친구를 문병하고 돌아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력이 조금 돌아와 함께 차를 타고 ‘욕쟁이 할매두부집’에서 식사도 하고, 식사 후에는
해안가의 조용한 커피숍으로 들어가 멀리 수평선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 유유히 떠가는 배들을 바라보았었다.
그때만 해도 이렇게 빨리 이별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런데 불과 이틀 만에 열이 오르고, 기력이 급격히 떨어졌다고 한다. 부인이 걱정이 되어 “한번 와서 봐달라”는
연락을 해왔다. 병실에 들어서자 친구는 산소호흡기를 끼고 침상에 기대어 있었다. 말소리는 너무 작아 잘 들리
지 않았고, 대화 중에도 금세 눈을 감았다.
밀감 두 개를 겨우 삼키고, 두유를 마시다 떨어뜨리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저려왔다. 예전의 건강하고 활달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숨소리가 가빠지고, 얼굴은 창백했다.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그는 건강했다. 핀치히터로 케미칼선을 한 달간 타면서 황산을 운송했는데, 오래된 배 탓에 탱크
수리가 필요해 갑판 위를 오가며 황산 미스트를 들이마신 것이 탈이 되었다. 하선 후 감기 증세로 병원을 찾았다가
X-ray를 찍고는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말을 들었다. 부산 백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고 임파선암 판정을 받았다.
8차 항암치료를 받았지만 암세포는 줄지 않았다. 오히려 내성이 생겨 심장이 붓고, 숨쉬기조차 힘들어 중환자실로
옮기기도 했다. 결국 더 이상의 치료가 어렵다는 의사의 말에, 그는 집 가까운 울산 방어진 요양병원으로 옮겼다.
면회시간이 짧아 오래 있지 못했다. “몸조리 잘 해라”는 말만 남기고 병원을 나와 경전철을 타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다음 날인 22일 오후 3시, 친구가 별세했다는 부인의 울음 섞인 부고를 받았다.
빈소는 백병원에 차려졌다. 동기생들은 전날 단체로 문상했지만, 그날은 마침 아버지 제삿날이라 가지 못했다. 대신
발인날인 오늘, 마음을 다잡고 새벽 5시 반에 집을 나섰다. 개금역에서 내려 새벽공기를 들이마시며 비탈길을 걸어
백병원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도착하니 상주들도 막 잠에서 깨어나는 중이었다. 7시 20분, 교회 교인들과 지인 약 서른 명이 모여 부산비전교회
김성관 목사님의 집례로 발인예배가 시작되었다. 찬송가가 울려 퍼질 때, 나는 그가 고통 없는 세상으로 떠났음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였다.
예배를 마친 뒤 영정사진을 앞세워 운구가 시작되었다. 장지로 향하는 사람들은 장의버스에 올라탔고, 그때 동기인
오진일 장로가 자기 차로 함께 가자고 했다. 당연히 장지로 가는 줄 알고 따라 나섰는데, 그는 오전에 볼 일이 있어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장의버스가 이미 울산 화장장으로 떠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사람은 얼굴이 다 다르듯이 생각도 다름
을 망각한 탓이었다.
아뿔싸!, 이런 낭패가 어디 있단 말인고.
집으로 오기 위해 동해선 재송역 앞에 내려 벡스코역으로 향했다. 열차에 올라 생각을 가다듬으며, 울산 태화강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면 하늘공원(화장장)에 도착할 수 있겠다는 계산을 했다.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소요시간과 비용을 물으
니 “55분 정도, 3만 2천 원쯤”이라 했다. '목적지에 이르는 길은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화장이 진행되어 끝났을 무렵이다. 그제야 마음속에서 무너져
내렸다. 송정역까지 올라갔다가 결국에는 눈물을 삼키며 되돌아 와야만 했다.
오후가 되자 하늘에서도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친구의 마지막 길을 슬퍼하는 듯 하였다.
끝까지 배웅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고, 유족들 보기에도 면목이 없다. 목적지를 확인하지 않은 내 탓이다.
친구여, 미안하다.
용서하게나.
언젠가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 육신은 비록 이 땅에 묻혔지만, 그대의 영혼은 내 마음속에서 언제나 살아 있을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