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 요동을 점령하다 1
공민왕 5년(1356)에 기철奇轍이 제거되었다. 기철은 몽고 이름 바엔부카伯顔不花로 그의 누이가 원나라 순제順帝의 황후, 기황후다. 그는 기황후의 권력을 등에 업고 전횡을 일삼았는데, 지난 번 포스팅에서 본 바와 같이 배원정책을 쓰는 공민왕에 의해 제거된 것이다. (고려, 강소성을 누비다 [클릭])
아 버지가 처형 당했으나 당시 원은 고려를 돌아볼 수가 없었기에 기철의 아들 기사인티무르奇賽因帖木兒는 울분을 삼켜야만 했다. 기철의 반란을 진압할 때 기철의 친인척을 모두 죽였지만, 그는 몽골에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복수는 요원했다. 당장의 문제는 한족의 반란이었다. 급기야 1368년에 순제는 주원장朱元璋에게 쫓기다가 숨을 거두었고, 그 아들 소종昭宗이 즉위했다. (바로 기황후의 아들이다.) 소종은 몽골 지방으로 쫓겨가 원나라의 명맥을 간신히 유지했는데, 이를 북원이라 부른다.
아 무튼 그것은 조금 뒤의 이야기다. 북경에서 원을 밀어낸 홍건적들은 요동까지 진군했다가 원군의 반격을 받아 고려로 후퇴한다.(1359년 11월) 약탈을 위해 압록강을 건너온 홍건적은 아예 고려를 병참기지로 생각했는지, 다음 달 4만 대군으로 본격적인 침략을 감행한다. 난데없는 침략을 받은 고려는 개전 초기에 평양까지 내주며 밀리고 만다. 다행히 이방실李芳實, 안우安佑 등의 활약으로 홍건적을 밀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1361년 10월. 겨울을 맞이한 홍건적은 다시 한번 고려를 약탈하고자 달려들었다. 홍건적 10여만 군은 파죽지세로 밀고내려와 개경까지 함락시켰다. 공민왕은 안동까지 달아나 숨을 돌려야 했다. 1362년 1월, 총병관 정세운鄭世雲이 이방실, 안우, 최영崔瑩 등을 거느리고 홍건적 토벌에 나섰다. 고려군은 총 20만 대군. 이때 동북면東北面 상만호上萬戶 이성계李成桂가 사병 2,000명을 이끌고 적장 사유沙劉, 관선생關先生 등의 목을 베어버리며 화려하게 등장한다.
홍건적의 무분별한 침입으로 공민왕은 명과 거리를 두고 다시 원과 친교를 맺는다. 때리고 있는 쪽과 손을 잡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러나 이런 관계는 오래 가지 못했다.
문 제는 기황후였다. 자기 오라비를 죽인 공민왕을 기황후가 그냥 내버려둘 리가 만무했다. 기황후는 순제를 꼬드겨 충선왕의 아들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임명하게 했다.(1362년) 최유, 김용 등의 인물이 이에 호응했다. 덕흥군은 요양에 군사를 이끌고 와서 고려로 곧 침공할 판이었다. 드디어 1364년 최유는 1만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고려 국내로 진공했다. 의주가 함락되자 공민왕은 최영과 이성계를 보내 최유를 공격하게 했다. 이성계는 제장들에게 겁쟁이라 야단을 치고 힘써 싸우라고 말했으나, 다른 장수들은 이 일로 이성계를 외면해버리고 말았다. 최유 군과 접전을 벌일 때 다른 장수들은 이성계를 도와주지 않아, 이성계는 홀로 최유 군과 싸워야 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귀신같은 활솜씨로 적장들을 무찌르며 오히려 승전을 일궈냈다. 최유 군은 일패도지하여 불과 17명만이 다시 압록강을 건너갈 수 있었다. 순제는 공민왕을 인정하고 분란을 종식시켰다. 하지만 공민왕이 원에 대해 만정이 떨어졌을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1369년 4월 명은 사신을 보내 수교를 청해왔다. 일단 명과 수교한 공민왕은 이때부터 양 국 사이를 줄다리기 한다. 그러던 끝에 마음을 굳힌 것이 1369년 11월.
공민왕은 동녕부東寧府를 공격할 결심을 했다. 본래 동녕부는 원이 우리나라 평양에 두었던 기관이었다. 고려의 동녕부는 1269년 설치되었다가 1290년 폐지하고 요양으로 옮긴 바 있었다. 요양은 바로 고구려의 요동성이다.
출 진 명령이 동북면원수 이성계에게 내려졌다. 동북면은 지금의 함경남도 일대라, 이성계는 보병 1만, 기병 5천을 이끌고 황초령을 넘어 강계를 통과해 압록강을 건넜다. 동녕부 동지同知 이우로티무르(李兀魯帖木兒:우리 이름은 이원경李原景)가 고려군에 맞섰다.
이우로티무르는 야돈촌也頓村에서 고려군과 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얼마 싸우지도 않고 이우로티무르는 갑옷과 무기를 버리고 말에서 내려 항복했다.
"나의 선대先代는 본래 고려高麗 사람이온 바 신복臣僕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우로티무르(이제 이원경이라 쓴다)는 삼백여 호를 이성계에게 바쳤다. 그러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추장酋長 고안위高安慰가 항복하지 않고 우라兀剌산성에 들어가 항거를 계속했기 때문이다. 이 우라 산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있는데, 위나암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공성전은 공격하는 측에 매우 피곤한 전쟁이다. 이성계는 종자에게서 활을 빌려 편전을 쏘았는데, 70여발이 모두 적군의 얼굴에 명중하는 신위를 떨쳤다. 고안위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는 그날 밤 어둠을 틈타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두목頭目 20여 인이 그 무리를 거느리고 성城을 나와 항복하니 여러 성들이 이것을 보고 모두 항복하여 얻은 호가 무릇 1만여 호나 되었다. 이성계는 노획한 소 2,000여 두와 말 수백여 필은 모두 본래 주인에게로 돌려주어 인심을 얻었다. 이런 조치는 크게 환영받아서 요동의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고려군에 투항하게 되었다. 압록 이북 일대가 일시에 고려 쪽으로 붙는 쾌거를 이룩할 수 있었다. 이성계는 다음달 항복한 삼백여 호의 주민들을 이끌고 고려로 돌아갔다.
원의 위협을 효과적으로 제거한 공민왕은 그해 7월 원의 연호를 폐지하고 명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공식적인 외교 단절인 셈이다. 또한 이성계의 무력 시위와 더불어 지금의 평안북도 일대를 군사기지화 해나가기 시작했다. 안주도호부, 의주만호부, 이성만호부, 강계도호부, 화령부 등을 신설하여 원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평북 일대의 조직을 쇄신했던 것이다.
그것은 동녕부에 웅거하고 있는 인물이 껄끄럽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 동녕부를 차지하고 있던 사람은 기황후의 조카이자 기철의 아들이었던 기사인티무르奇賽因帖木兒였다. 기사인티무르는 원이 멸망하고 북쪽으로 쫓겨나자 동녕부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분사요심관리평장分司遼瀋官吏平章 김백안金伯顔 등과 함께 고려를 침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본래 이성계의 출전도 기사인티무르를 제거하는 게 목적이었으나, 기사인티무르는 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공민왕이 앉아서 당할 위인이 아니었다. 공민왕은 서북면 상원수 지용수池龍壽와 동북면원수 이성계, 서북면부원수 양백연楊伯淵 등에게 동녕부 공략을 명했다.
공민왕 19년(1370) 겨울. 서북면도원수西北面都元帥 지용수池龍壽, 서북면 부원수西北面副元帥 양백안楊伯顔, 안주상만호安州上萬戶 임견미林堅味, 동북면원수東北面元帥 이성계李成桂가 이끄는 요동 원정군은 의주에 도착했다.
원정군의 총책임자 도통사都統使 시중侍中 이인임李仁任은 안주에 머물러 있었다. 실질적인 총지휘관은 상원수上元帥 지용수였다.
원정군의 규모는 얼마나 되었을까?
고려의 군사는 얼마나 되었을까? 우왕 원년(1375년)의 기록을 보면 고려의 병력을 알 수 있다.
총 병력은 보병 8만 2100명, 기병 1만 4700명이다. 불과 5년 뒤의 기록이므로 병력에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이중 서북과 동북의 병사는 서북이 보병 9000, 기병 600. 동북이 보병 4700, 기병 200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이성계의 친위병은 불과 1600명밖에 되지 않는다.)
이 병력은 합해 보아야 보병 1만 3700에 기병 800에 불과하다.
이성계가 요동성을 칠 때 선봉으로 보낸 기병만 3천이었다. 당연히 동서 양계의 병력만 동원된 것이 아니다.
이성계가 단독으로 압록강을 넘어갔던 오로 성 공략 작전 때 동원한 병력만도 보병 1만에 기병 5천이었다.
그리고 1388년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끌었던 요동 정벌군은 좌우군 3만8천8백30명에 겸군(보조군) 1만1천 명인 4만9천 명 규모였다. 여기에 말이 2만 1682필 동원되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가 동녕부 공략을 위한 정벌군으로 보병 2만에 기병 1만쯤 동원했을 것이라 생각해도 괜찮지 않을까?
압 록강을 건너기 위해 부교를 만들었다. 만호萬戶 정원비鄭元庇, 최혁성崔奕成, 김용진金用珍이 만든 부교 위로 말 세 필이 한꺼번에 지나갈 수 있었다. 전군이 압록강을 건너는데만 사흘이 걸렸다. 고려군은 그만큼 대규모였던 것이다. 군의 사기는 양호했던 것 같다. 빨리 건너려고 서두르다가 강 속으로 빠지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이성계가 임견미(입만 살은 간신배로 나중에 사형에 처해짐)와 함께 선두에 서서 도강했다. 고려군이 도강을 마친 날, 폭우가 쏟아졌다. 뇌성벽력이 울려퍼지는 폭우가 쏟아지자 병사들은 불길한 예감에 빠져들었다.
병마사兵馬使 이구李玖는 군의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이것은 길조라고 외쳐서 흔들리는 군심을 바로 잡았다.
"용이 움직이면 반드시 뇌우가 있는 것인데 지금 상원수는 그 이름이 용(龍=지용수)이니 강을 건너는 날에 뇌우가 있음은 싸움에 이길 징조다."
이성계는 이날로부터 18년 후 다시 한번 압록강에 도달한다. 역시 비가 내리고 있었고 그는 선두에 섰던 오늘과는 달리 회군을 결정하고 개성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고 려군은 도강 후에 나장탑螺匠塔에 도착했다. 나장탑은 요동성 동쪽 2백리 지점에 있는 석탑의 이름이다. [고려사] 지용수 열전에서 나장탑에서 요동성까지 이틀 거리라 했으니([고려사]와 [고려사절요], [용비어천가] 등에는 2일 거리라고 나오고, [동국병감]에는 3일이라고 나온다.) 당시 고려군이 하루 100 리를 행군했던 셈이다. 약 40킬로미터 행군을 한 셈인데, 고려군은 7일치 양식을 소지하고 행군해야 했다. 힘들긴 하겠지만 불가능한 거리는 아니다.
그런데 이 당시 기록에는 좀 문제가 있다. 고려군은 정해일(11월 2일)에 압록강을 건너고, 무자일(11월 3일)에 나장탑에 도착하고, 기축일(11월 4일)에 요동성을 공략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절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기록대로라면 고려군은 압록강을 건너서 요동성까지 하루 만에 이동한 셈이 된다. 그렇다고 행군하는데 60일 가까이 걸리지도 않았을 것이니, 이 날짜 기록은 그대로 믿을 수가 없다.
11 월 2일에 압록강을 다 건넌 것이라면, 고려군이 의주에 도착한 것은 아무리 빨라야 10월 30일이었겠다. 압록강을 건넌 지점에서 요동성까지 거리는 약 160킬로미터. 40킬로미터씩 행군한다면 4일 거리다. 따라서 그보다 빨리 요동성에 도착할 수는 없었다고 봐야겠다.
고려군은 요동성 80킬로미터 지점인 나장탑에서 베이스캠프를 차린 뒤, 비장裨將 홍인계洪仁桂(훗날 이성계의 왕위찬탈에 반대하여 투옥되었다가 옥사함. 사후 효수됨), 최공초崔公招 등에게 경기병 3,000을 주어 요동성을 공격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고려군은 선무공작도 펼쳤다.
"요동과 심양은 우리 나라 경계境界요, 백성은 우리 백성이므로 이제 의병을 들어 어루만져 편케 하노니 만약에 산채에 도피하여 숨는 자는 각각 지부 군마(軍馬)에게 살해당할까 염려하노니 곧 군전軍前에 나아와서 실정實情을 고하라."
즉 피하면 죽이겠으니, 빨리 나와서 항복하라는 이야기인 셈이다. 지난 번 포스팅에서도 보았지만 당시 요동에는 고려인들이 적지 않게 살고 있었다. 이들을 불러모으는 포고이기도 했다.
홍 인계 등이 이끄는 기병 3천이 성 앞에 도착하자, 기사인티무르는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난공불락으로 이름 높은 요동성이 아니던가! 겨우 기병 3천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적을 얕잡아 본 기사인티무르는 농성 전략을 취하지 않고 부대를 성밖으로 내보내 진을 치게 했다. 경기병 3천 정도는 깔아뭉개버리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순간 요동 평원 너머로 군마들의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흔들며 다가온다. 고려군 본대가 도착한 것이다. 성 안에서 전황을 관망하던 기사인티무르는 아연실색했지만 이제는 방법이 없었다. 성 안으로 퇴각하려다가는 고려군까지 성 안으로 끌어들이게 되니, 죽든 살든 싸우게 할 수밖에 없었다.
성 밖으로 군사를 끌고 나간 장수 처명處明은 날래고 용맹한 장수였다. 수적 열세가 분명했지만 항복하지 않고 의연하게 앞으로 나섰다. 이성계는 야돈촌也頓村에서 항복했던 이원경을 보내 처명을 설득하게 했다. 처명은 몽고인이라 몽고말을 할 줄 아는 이원경을 보낸 것이다.
"너를 죽이는 것은 손쉬운 일이다. 하지만 재주가 가상하니 거둬 쓰겠노라. 속히 항복할지어다!"
"웃기는 소리!"
"너는 영공의 재주를 모르느냐? 항복하지 않는다면 화살 한 대에 네 몸통이 꿰뚫릴 것이다!"
"자신있으면 해보든지!"
이성계가 활을 들었다. 말로는 설득이 되지 않는 장수라는 게 증명되었으니까. 이성계가 시위를 놓자 날아간 화살이 처명의 투구를 날려버렸다.
"이제 영공의 실력을 알겠느냐? 한번 봐주었으니 항복하라!"
그 러나 처명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항복하지 않았다. 이성계는 다시 활을 쏘았다. 이번에는 넓적다리를 맞췄다. 여기에는 처명도 견디지 못해서 뒤로 물러나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은 도망은 아니었다. 상처를 대충 치료한 처명은 다시 군사를 몰고 와 싸움을 걸었다. 이원경이 또 한번 설득에 나섰다.
"이제 마지막 기회다! 이번에도 항복하지 않으면 얼굴을 맞출 것이다!"
처 명도 끈질긴 이성계의 설득에 마음이 움직였다. 드디어 말에서 내려 머리를 조아린 것이다. 처명은 이후 이성계에게 충성을 다바쳤고, 자신의 다리에 난 상처를 볼 때마다 이성계의 은혜에 눈시울을 적셨다고 한다. 특히 왜구와 싸웠던 운봉 전투에서 용맹을 떨쳐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성밖에 나가 있던 군대가 항복하자 성 내에서는 큰 요동이 일어났다. 누군가가 성벽에서 고려군을 향해 외쳤다.
"대군이 쳐들어 온다 하여 우리는 항복코자 하였으나, 관리들이 싸우라고 밀어부치는 통에 어쩔 수 없이 싸우고 있습니다. 힘껏 공격하신다면 반드시 성을 빼앗을 것입니다!"
용 기백배한 고려군은 시석을 무릅쓰고 돌격하여 성벽을 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미 많은 병력을 잃은 요동성이 함락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화살이 빗발치듯 쏟아지고, 나무와 돌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지만 이미 사기가 오를대로 오른 고려군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성은 함락되었으나 아쉽게도 원흉 기사인티무르는 잡지 못했다. 그의 심복 김백안金伯顔을 사로잡은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성이 함락된 것이 중국인들에게는 꽤 큰 충격으로 남았던 모양이다. "성을 치면 반드시 떨어뜨리는 고려같은 나라는 다시 없을 것"이라는 말이 회자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성 점령 시에 실수가 있었다. 본래 충분한 군량을 준비해서 온 것이 아닌데, 성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성 안의 창고를 모두 불질러 버리는 바람에 성 내에 군량으로 쓸 양식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때에 적이 다시 정비를 갖춰 공격에 나서면 일패도지할 우려가 있었다. 군사를 성 안에서 물러나게 해 성 동쪽에 진영을 갖춘 뒤 나하추納哈出와 야선불화也先不花에게 방을 보냈다.
" 기사인티무르는 본국의 미천한 신하로 천정天庭에 친근하여서 지나치게 수은殊恩을 입어 위位가 1품品에 이르렀으니 의리가 기쁨과 슬픔을 같이 할 것이었다. 천자가 외방外房에 몽진하심에 도의 상 마땅히 좌우 선후로 호위하여 죽더라도 버리지 않아야 할 것이거늘 이에 은혜를 배반하고 의義를 저버리며 몸을 동녕부東寧府에 숨기었고 그 아비 기철이 복죄되었음으로써 본국에 원수를 품고 가만히 불궤不軌를 도모하였다. 연전에 국가에서 군사를 보내어 이를 쳤으나 도망하는 바람에 내 칼로 치지 못하였거늘 또 행재行在에 나아가지 않고 물러가 동녕성東寧城을 지키며 평장平章 김백안金伯顔 등과 더불어 결의하여 심복을 삼고 송보리松甫里, 법독하法禿河, 아상개阿尙介 등지에서 군마를 모아서 또 본국을 침해하고자 하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으매 이제 의병義兵을 들어 죄를 묻노라. 또 김백안 등과 더불어 백성을 달래고 협박하여 성벽을 굳게 하고 명령을 거역하거늘 초마전봉哨馬前鋒이 김백안을 사로잡은 외에 합자파두哈刺波豆 덕좌불화德左不花와 고달로화적高達魯花赤의 총관두목總管頭目을 모두 토벌하여 포박하였는데 사인첩목아賽因帖木兒가 또 도망하고 자수하지 않으니 그가 의탁하고 있는 각 성城은 곧 잡아 속히 보고하라. 만약 숨기는 자가 있을 것 같으면 또 다시 동경東京의 변(1398년에 이성계가 동녕부로 진격했던 그 사건을 가리킴)을 치를 줄 알지어다."
또한 금주金州, 복주復州에도 방을 내렸다.
본국은 요堯 임금과 함께 나라를 세웠다. 주무왕周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封하여 땅을 주기를 서西로 요하遼河에 이르기까지 하여 대대로 강역을 지키었고
원조元朝가 통일하매 공주公主를 내리고 요심遼瀋 땅으로 탕목(湯沐=영지)을 삼아 인하여 성省을 나누어 두었는데 말세에 덕을 잃고 천자天子가 외방外方으로 몽진蒙塵할 때 요심遼瀋의 두목관頭目官들이 못들은 척하여 쫓아가지 않았으며 또 본국에 예를 닦지 않고 곧 본국 죄인인 기사인티무르와 더불어 결탁하여 심복이 되어서 소취(嘯聚=파당을 모음)하여 백성을 학대하니 불충한 죄는 가히 용서할 수가 없다. 이제 의병을 들어서 죄를 묻거늘 사인티무르가 동녕성東寧城에 웅거하여 강함을 믿고 명을 거역하고 있는데, 대군이 이르면 옥석이 함께 탈 것이니 후회한들 어찌 미치리요. 무릇 요하遼河 이동 본국 지경 안의 백성과 대소 두목들은 속히 스스로 내조來朝하여 함께 작록을 받을 것이다. 만약 내공來貢치 않을 것 같으면 동경東京의 변(1398년에 이성계가 동녕부로 진격했던 그 사건을 가리킴)을 치를 줄 알지어다."
요임금과 같은 때 나라를 세웠다는 말은 단군신화를 지용수와 이성계 등 고려 장수들이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또한 서로 요하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강역을 지켰다는 이야기는 이 당시 요하 이동이 우리 영토라는 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이것은 그가 말년에 정도전과 함께 요동 정벌을 꾀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방을 내붙인 고려군은 이번에는 성의 서쪽 10리 지점에 진영을 갖췄다. 고려군이 바로 돌아가지 않은 것은 다른 부대를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고려군의 일군은 석성石城의 요양성평장遼陽省平章 고가노高家奴를 공략하기 위해 출정한 상태였다. 그 군을 이끌고 있던 만호萬戶 배언裴彦(후에 밀직부사를 지내고 왜구 침공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날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어디선가 불처럼 밝은 붉은 빛이 진영을 비추었던 것이다. 일관日官 노을준盧乙俊이 풀이를 했다.
"이상한 기운이 군영을 비추니 군영을 옮기면 좋겠습니다."
지 용수는 이 말을 빨리 요동성 부근을 벗어나라는 말로 이해했다. 장수들은 먹을 것이 부족하니 직선 행로를 택해서 빨리 고려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하지만 지용수는 군세를 자랑하고 싶어서 해안 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길을 택했다. 결국 함께 온 우마를 잡아먹게 되는 사태에 이르게 되자 지용수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빠른 길을 택해 고려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때 원군의 추격을 두려워한 지용수는 마굿간과 뒷간을 짓게 했다.
요동성 함락을 알고 나하추가 고려군을 응징코자 달려왔다. 하지만 나하추는 이미 이성계와 싸워본 적이 있어서 꼭 싸우고 싶은 마음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하추는 고려군의 뒤를 쫓다가 마굿간과 뒷간까지 만들고 있는 것을 보고 군기가 들어있는 부대라 더 이상 추격해야 실익이 없다는 이유를 들고 물러나 버렸다.
요 동성을 떠난지 사흘 만에 송참松站에 도착했다. 송참은 봉황성에서 40리 지점에 있는 곳이니 퇴각할 때는 갈 때보다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후퇴하는 동안은 날이 무섭게 춥고 눈까지 내려 많은 병사와 말들이 굶주림과 추위로 죽고 말았다. 다행히 송참에서 진무鎭撫 나천서羅天瑞가 곡식 수백 석石을 얻어내서 군사들이 죽다 살아날 수 있었다.
지 용수와 이성계의 요동 정벌은 절반의 성공에 그친 것이긴 했다. 당시 기사인티무르는 북원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위치였고, 요양성평장 고가노도 그를 도울 여력이 없었다. 기껏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은 나하추 뿐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려가 요동을 차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바로 이때였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고려군은 미숙하게도 자기들이 먹을 식량마저도 홀랑 불태워버리는 실수를 저질렀는데, 어쩌면 이것은 의도적인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고려군의 목표는 영토 획득이 아니라 기사인티무르의 제거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성계가 요동의 고려인들을 끌고 귀국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은 그의 두 번의 출정이 모두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음을 봐도 알 수 있다. 두번 다 영토 획득이 목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요동성을 초토화해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면 그것으로 족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정벌의 여파는 컸다. 공민왕 20년(1371)년 윤3월에 요양성평장遼陽省平章 유익劉益, 왕우승王右丞 등은 명에 항복하고 싶어했지만, 명이 백성들을 이주시킬까 걱정이 되어 고려로 사신을 보낸다. 요동은 본래 고려 것이니, 백성들을 움직이지 않을 수 있게 압력을 행사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고려 조정은 이 문제에 신경을 쓸 수 없었고, 이들은 명에 귀부하여 요동에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성계 이전에도 고려군은 압록강을 넘어가서 작전을 펼치기도 했었다. 그리고 이성계 이후에도 압록강을 넘어가곤 했다. 그러나 점차 질서는 명에게 기울기 시작했고, 명은 요동에 만족하지 못하고 철령위 설치를 통보하기에 이른다.
우왕은 최영을 내세워 요동정벌군을 편성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을 낳은 요동정벌군이다
고려군이 요동에서 돌아온 뒤 명은 요동 접수에 발빠르게 나섰다.
명 태조 홍무 4년(1371) 즉 고려군이 철수한 다음 해, 명은 북원의 요양행성을 접수하고 요동의 서남부에 정요위와 요동도사를 설치했다.
명 은 고려를 충실한 동지로 보고 있지 않았다. 공민왕은 표면적으로는 명에 기울어진 것처럼 보였지만 북원과 확실한 적대 관계를 가지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런 공민왕의 태도가 요동을 타격하기만 하고 점유하지 않은 이유일지도 모른다.)
1374년 공민왕이 암살 당하고 우왕이 즉위했다. 이 과정에서 명나라 사신이 피살되는 사태까지 일어나자 명의 의심은 더욱 짙어졌다. 명이 의심을 강하게 하자, 우왕은 원나라 쪽으로 기울어졌다.
1377 년, 우왕 3년에 북원으로부터 책봉을 받았다. 정동행성 좌승상 고려국왕이 된 것이다. 북원은 고려가 다시 돌아왔다고 생각하고 요동 공략에 원군을 보내라고 명했으나 우왕은 그것은 거부했다. 오히려 명에도 사신을 보내 등거리 외교를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명은 고려에게 과도한 공물을 요구하고 요동민들을 송환하라는 등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며 고려와 국교 재개를 거부했다. 이 일은 요동을 둘러싼 이해관계 때문에 삼국 간에 일어난 신경전이다.
1385년에 와서야 명은 우왕을 책봉해 주었다. 하지만 양국의 관계는 여전히 불편한 사이였다.
1388년 2월, 우왕 14년에 명의 호부는 철령 남쪽만 고려의 영토로 인정한다는 일방적인 통지문을 보냈다.
이 통지에서 명의 후군도독부가 철령위 설치를 담당할 것이라는 말도 들어있었다.
고려는 외교로 이 사태를 풀고자 했으나 명태조는 일언지하에 고려를 거짓말장이로 몰아붙이며 강행을 선언했다.
우왕과 최영은 이런 명의 태도에 반발하여 북원과 손을 잡았다. 요동공략을 약조하고 명의 복식을 버리고, 원의 복식을 다시 공식 복장으로 채택했다.
1388년 최영은 이성계를 원수로 해서 요동정벌군을 발진시켰다.
그러나 이성계는 유명한 4 불가론을 들고나와 압록강 가운데 있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을 퇴위시키고 명의 연호와 복식을 부활시켰다.
명 의 입장에서는 전쟁을 피하게 되기는 했지만, 고려가 이 일로 일전을 불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안 명은 철령위 설치 건을 포기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성계의 손을 들어준 것도 아니었다. 명은 이성계 역시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1390년에 윤이, 이초 등은 명으로 가서 이성계가 명을 공격하려 한다고 무고하였다. 명의 원조를 얻고자 한 행동이었겠지만 이런 일이 명에게는 악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명은 조선을 즉각 승인해주었다. 이성계가 친명정책을 일관되게 수행한 외교적 승리였다. 다만 명은 요동에 대한 조선의 야욕도 고려 때나 마찬가지로 경계했다.
명은 요동에서 조선으로 들어간 사람들을 송환하라는 명을 끊임없이 내렸고, 조선의 말들을 끊임없이 사들였다. 특히 주전론자인 정도전을 압송하라는 명도 수차례 내렸다. 위기감을 느낀 정도전은 오히려 요동정벌을 서두르게 되었다.
정도전이 주도했던 요동정벌은 이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난(1398)에 의해 무산되고 말았다. 이 무렵(1395) 명태조는 조선이 요동 정벌의 음모를 지니고 있다고 격노하여 조선 정벌을 거론하며 조선을 압박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