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랑훼즈의 추억은)
지도를 보면 마드리드에서 꺾이긴 하였으나 친촌이 가깝고 그 다음이 아랑훼즈이다. 막상 남으로 향하다 보니 친촌 동네는커녕 표지판도 하나 없는 벌판이 계속된다. 이러다가 영 다른 곳으로 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가던 길에서 빠져나와 어느 이름도 없는 로터리에 차를 댔다. 인적도 끊긴 아주 한적한 곳이다. 그렇게 정해진 대상도 없이 몇 분을 기다리다 만난 첫 차가 교통 경찰차다. 마치 우리의 우왕좌왕을 알고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려온 것만 같다. 역시 육감은 무시를 못한다. 로터리 길을 다시 돌아 다른 방향으로 갈 것을 지시한다. 그리고 그곳이 바로 친촌이 아닌 아랑훼즈라 일러 준다. 그렇다면 길을 잘못 들어도 한참 잘못 든 것이다. 어쨌거나 아랑훼즈에 먼저 닿았으니 이곳부터 살펴볼 일이다.
로터리를 돌아 오른 언덕을 내려가니 바로 마을이다. 길은 외길이라 살필 필요도 없는 것이 오히려 다행스럽다. 동네전체가 계획적으로 꾸며진 곳이라 하더니 오래된 올 곧은 나무가 마을 전체 퍼져 가는 길을 포근하게 한다. 운치 있는 휴양지에 온 기분이다. 길가에 선 사람들이 거의 노인들이다. 따뜻한 햇볕을 맞으며 한가히 휘적대며 걷고들 있다. 정말 지금 이곳이 실버타운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역시 자연과 어우러진 삶이 평온함을 낳는다. 왕궁에 다 가도록 누구 하나 막아서지를 않는다. 우리는 왕궁 바로 앞 역시 오래된 건물 앞에 차를 바로 대었다. 가만 고건물을 살펴보니 겉 생김과는 달리 유리창은 깨져있고 도둑고양이들이 서성이는 것이 비워둔 지 꽤 되는 듯하다. 아랑훼즈가 그 좋은 시대를 다 잃고 만 모양이다. 그 연주곡의 그 느낌처럼.
내가 이곳에 오고자 한 것은 궁전 때문이 아니다. 도처가 왕궁이 그득한 스페인에서 굳이 한 곳을 빠트린다고 그리 아쉬울 것 까지 없다. 하지만 이곳은 여타의 곳과는 다르다. 궁전의 형상이 다른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느낌이 다르다는 생각이다. 내가 여행을 하며 보고 느낀다는 것은 결국 그들의 자연과 역사와의 만남이고 또한 그들과의 만남이다. 아는 만큼 느끼고 배울 수 있으며 젖어드는 만큼 호기심에 피어난 묘미는 감미롭다. 여행이란 결국 느낌을 낳고 또한 낚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그들의 역사를 조금은 알고 이곳에 왔다. 하지만 읽어 내린 기록과 고색창연한 회색 건물을 보아 그들에게 다가섰으며 정서를 파악하였다고 정녕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마 내가 이곳에 수 십 년을 살아도 그들의 정서는 쉽사리 훑어지지 않을 것이다.
난 그들의 정서가 솔직히 아쉽다. 이곳은 알다시피 로드리고의 아랑훼즈 협주곡으로 유명한 곳이다. 필시 그 음악 속엔 그들만의 정서가 녹록히 녹아 어느 광경이나 감상보다도 더욱 강하게 스페인을 내게 알려주지 않을까 기대하게 된다. 상상하여 다가설 느낌으로서의 감흥이고 여음이다. 그러니까 나는 음악 속에 묻어난 그들의 정서를 가까이 음미하고자 배경의 곳을 찾아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온 것이다. 그곡의 작곡가 로드리고는 1901년 11월 22일 스페인의 발렌시아에서 태어났으나 불과 3살 때인 1904년에 디프테리아에 걸린 것이 원인이 되어 그 해 갑자기 실명상태가 되었다. 이런 그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어 준 것이 바로 음악이다. 특히 기타에 대한 강한 애착은 앞을 보지 못하는 로드리고의 전부라고 할 만큼 생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고 한다.
그가 발표한 수많은 작품들 중에 그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1940년 38세의 나이에 작곡한 바로 이 곡이다. 기타리스트인 친구를 위해서 만들었다고 하는 이곡은 옛 역사에 대한 회고와 그곳에 거주하는 집시들의 생활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곡은 모두 3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기타라는 악기의 특성을 잘 살려 스페인 무곡적인 리듬의 기타독주가 오케스트라의 여린 지속음에 받쳐져 연주된다. 이것이 그 곡과 그에 대해 내가 아는 전부다. 그러하여 빠져든 나의 느낌은 거의 상상일 수밖에는 없다. 어차피 장님인 그 역시도 이곳에 와서 본 것은 하나도 없으며 단지 상상이었다.
그 협주곡을 듣노라면 그가 그리 회상하였듯 떠오르는 것은 과거이고 그 과거는 아주 어렴풋하고 여릿하다. 흐릿하고 애틋한 서정으로 밀려오는 선율은 초승달이 연상되고 슬픈 이별을 생각나게 한다. 필시 쇠망하는 나라의 기로에 선 선왕이 왕궁에 깊게 드리운 커튼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다가 올 캄캄한 세상을 애처럽게 바라보는 듯 절망과 애틋함이 묻어난다. 그가 떠난 후 초승달이 잠잠히 비추는 것은 쓸쓸한 궁전의 정원이다. 한 시절의 영욕은 허욕으로 변하여 끝내 소멸하였다. 간간이 들리는 것은 궁전을 지키는 휑한 바람소리 뿐 한 시대를 풍미한 영욕은 영영 잠이 들었다. 붉은 커튼 안에 숨겨져 있던 금빛 옥좌, 이를 호위하는 그림과 호화로운 가구, 진홍색 벽면, 로코코 차이나 풍의 도기에 화초문양이 새겨진 장식물은 찬란한 빛과 도도함을 잃고 잿빛으로 밀실에 가두어 그 영광의 시대를 눈물로 그리워하리라. 그대와 누리던 장미 빛 세상은 영영 다시 오지 않으리니.
그렇게 다가선 여릿한 협주 음은 못내 간드러지듯 흐느끼더니 애간장이 녹아내리듯 애달프다. 음률은 벌써 저만치인데 들리는 여음만치나 긴 여운 또한 짙은 그림자 되어 마음을 가라앉힌다. 영욕이 쓰러진 곳에 잡초만이 무성한데 그 누가 그 시절을 부르는가. 그리하여 허공중에 떠도는 것이 구슬픈 집시의 노래라 잡초더미와 다를 바 없는 곳을 차지한 것은 또한 잡초 같은 유랑자 한 무리이다. 사람들은 그들을 에집타노라 부른다. 스스로도 어디서 왔으며 또 어디로 갈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그들이다. 안다는 것은 불행한 운명을 안고 어디든 떠나야한다는 사실뿐. 그러기에 처참하고 가련하다지만 별 빛 가득한 밤 그림자 같은 인생 애절한 선률에 번지는 눈물은 차라리 행복이다. 어차피 생은 은하수 흐르듯 흩어져 들꽃이 되지 않는가. 그 눈물의 나날을 기쁨으로 노래하여 차라리 바람처럼 잊으리라.
실제 그 궁전 주변은 맑은 냇물이 흐르고 깊은 숲이 있어 깨끗하고 아늑하며 호젓하여 색상이 아름답다. 궁전 안에는 많은 아기자기한 보석과 장식들이 또 즐비하다. 그 궁전이 완성된 시기는 부르봉왕조의 카를로스 3세 때인데 계몽절대군주였던 그는 화가 고야에게 불쌍한 백성들을 그려 달라 하여 그의 책상 앞에 두고 늘 안타까워 하였으며 그의 아들인 카를로스 4세가 돈 씀씀이가 크다고 늘 나무랐다고 한다. 놀라운 사실은 그가 재위하던 1749년에는 스페인에 있는 집시들은 모두 체포하라는 법령이 발표되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당시 집시들은 지방 경제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들이었다고 한다. 그들이 사라지자 올리브기름 짜는 물레방아도 안돌아가고 빵집이나 대장간이 멈추었다고 한다. 그러자 1763년 집시들 해방명령이 떨어졌으며 이후 그라나다나 세비아등 산속에는 동굴 안에 자리 잡은 집시들이 많이 늘어났다고 한다.
문득 그의 음악은 그 계몽군주와 집시의 아쉬운 만남에서 출발하였던 것은 아니었을까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의 역사책을 보면서 아쉽다 한 것이 그 군주였기 때문이다. 스페인을 어떻게 해서든 바로 세우기 위해 애썼던 인물이 그였다. 그가 조금 더 집권을 했으면 1808년 스페인의 참상은 거두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들이 다른 나라에 비해 당시 시민계급의 출현이 더디고 지식인층이 두텁지 않았던 것은 계몽을 두려워하여 전통주의가 길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아랑훼즈의 그 추억은 어디론가 떠나야 하는 삶의 허무를 아스라이 담아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힘든 고개 길을 오르는 녹이 잔뜩 슨 마차와 노새가 떠오르고 그 마차 위에 몸을 겨우 지탱한 숱이 많은 까만 눈썹에 길게 찢어진 검은 눈의 깊은 음영을 갖은 그래서 대담성과 수줍음을 동시에 나타낼 것 같은 꺼무잡잡한 북아프리카 출신의 모로 인을 보는 것같은 영상미를 내게 남겨 준다. 오늘따라 깊이 밴 그의 아련한 선율이 허무의 그림자 되어 나를 울린다.
첫댓글 오늘 글을 엄청 올렸네요... 조선 선비 최부 표해록 책 낸 기념으로서도 아들놈 장가가는 기념으로서도 .....ㅎㅎ 그냥 즐겁네요. 제 아들 결혼식에 오실 수 있다면 오시지요 들... ㅎㅎㅎㅎ 11월 25일 12시 ㅇ20분 서울 강남에 피에스타 귀족이라는데 저는 어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시면 책 한 권은 받아가실 듯..오늘은 이만 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