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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8 울산 앞바다
돌고래., 4,000마리 출현.
2017.6.13 장생포
고래생태 체험관
'큰돌고래' 새끼 출산.
2005.5.8 울산 장생포.,고래고기 집앞 부두.
2005,5,8 해동 용궁사
2017.1.1 정유년 간절곶 일출.
2015 울산 간절곶.,신년 일출
2017.4.1 간절곶 등대
우리나라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곶.
매년 새해 해맞이 관광객들이 붐비는 곳.
다만 최동단을 두고 호미곶과 논란이 있다.
'동방의 등불.'
'고요한 아침의 나라.'
아침 朝, 고울 鮮.,조선시대.
우리나라 민족이 신성하게 여긴.,일출.
.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였던.,korea !
그 등불이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에 밝은 빛이 되리라.
마음에는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 들린 곳.' - 타고르 -
일출은 우리나라 국운의 상징이면서
한편으로는.,'희망과 도약'의 상징이다.
힘차게 떠오르는 해처럼 나라가 발전하길~
애국가 속.,양양 하조대 일출
2017.1.1 호미곳 일출
'장보고 청해진 근거지' 완도 일출.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천하를 호령한다.'- 옛 격언.
신라시대 동아시아 해상 실크로드를 개척한.,장보고.
'동아시아 해상왕국' "KOREY" 명성을 얻은.,고려시대.
예나 지금이나.,미래나
국운을 좌우하는.,제해권
미래가 암울했던.,일제 강점기
1929년 3월 28일 자.,조선일보.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준.,시(詩).
일출(日出).,해맞이.
울산 북쪽 서생포와 남쪽 신암리만
그 사이에 돌출된 곳이.,간절곶(艮絶串).
대부분 암석해안이며, 간절곶 등대가 있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대송리.
신라시대 일본에 볼모로 끌려간.,충신 박재상.
아내와 딸들이 기다리다가 결국은 그대로 굳어
망부석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모자상.
........박제상에 얽힌.,망부석 전설............
신라 눌지왕(재위 417∼458) 때 활동한 충신.
당시 신라는 고구려 및 왜와 우호관계를 위해
왕자를 두 나라에 불모로 보내었다고 전해온다.
내물왕 때는 둘째아들 복호를 고구려에,
셋째아들 미사흔을 왜에 볼모로 보냈다.
내물왕의 큰아들인 눌지왕은 즉위한 후
고구려와 왜로 불모로 잡혀있는 두 동생을
구출하기 위해 충신 박제상에게 왕명을 내렸다.
418년(눌지왕 2) 박재상은 고구려에 가서
장수왕을 회유하여 복호를 귀국하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 부인의 만류를 뿌리치고 왜국으로 떠났다.
왜국에 인질로 가있는 왕자 미사흔을 구해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미사흔 구출에 성공했지만, 자신은 왜국에 불모 신세.
'왕의 동생을 구하기 위해 죽기를 각오한 박제상.'
왜국의 왕은 감동하여 신하로 삼으려고 그를 회유.
박제상은 끝끝내 충정을 지키다가 참형을 받고 운명.
한편, 박제상을 기다리던 부인은
남편이 왜국에 가서 돌아오지 않자
치술령에 올라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
그곳에서 늘 데리고 다니던 딸들과 함께
'망부석'이 되었고, 부인의 영혼은 새가 되어
은을암으로 날아가 둥지를 틀었다고 전해온다.
그 애뜻한 사연이 담겨 있는 곳.,'치산서원.'
박제상과 부인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치산서원.
1745년 조선시대 서원으로 원래는 '치술산모' 사당.
....................................................................
"님아! 저 바다를 건너지마오." - 간절곶.
박제상과 그 부인의 가슴아픈., 망부석 설화.
그리하여, '소망우체통'이 세워져 있는.,간절곶.
또한,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4∼5만 조선인 포로.
그들 대부분 규슈로 끌려갔었는데, 바로 그 당시 규슈에는
'나가사키, 히라도'에 세계적인 노예시장이 있었던 곳이었다.
그외, 정유재란 당시에도 일본군이
포르투칼 노예상인들에게 넘긴 4~5만 포로.
어느 하늘 아래 어떻게 살았는지조차 모를 조선인들.
그 소식 만이라도
'간절곶' 바람으로나마
전해듣고 싶은.,소망우체통.
일제 강점기 태평양전쟁 막바지
조선에서도 의용군으로 징병된 후
그 소식조차 알 수 없는 수많은 영혼들.
그리고, 꽃다운 나이에 정신대로 끌려가
지금까지도 그 소식조차 알 수 없는 영혼들.
'잊지 말자.'는 의미가 담겨 있는.,소망우체통.
울산.,간절곶 소망우체통
울산 간절곶.,'해파랑길 5코스(소망길).'
해파랑길은 ‘일출과 푸른 바다를 보면서
너와 내가 벗 삼아 함께 걷는 길’이란.,뜻말.
해파랑길 5 코스
덕화역 ~ 간절곶.
울산 해파랑길 8코스 대왕암
울산 해파랑길 8코스.,대왕암 일출.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사적 제158호." 대왕암"이라 불린다.
해변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다.
신라 제30대 문무왕 수중릉.
문무왕은 삼국을 통일한 왕.
죽어서 호국용이 되겠다고
수중에 장사를 지냈다 한다.
......................................
울산항 야경
2012.03.18
2015.12.20
2016.3.24.
2016.9.24
2014.04.04 울산항.
울산., 태화강 석양
2008.5.13
........................울산(蔚山)............................
경상남도 동북부 광역시 (2015 인구 117만 3534명)
면적 1,060.75㎢ / 4구 1군 4읍 8면 44행정동
(72법정동) 350행정리(118법정리)
한반도 동남쪽 울산은 옛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터전.
석기시대부터 육로. 해로로 들어와 정착사회를 이룬 곳.
서생면 신암리, 병영동 병영성지, 장현동
황방산 신석기유적 석검이 출토된 화봉동과
지석묘가 있는 언양면 서부리.,청동기 유적 등.
북구 중산동, 온산읍 산암리,
언양읍 동부리, 삼동면 둔기리,
온양읍 삼광리, 상북면 덕현리,
동구 일산동, 중구 다운동, 삼남면
방기리 등지에서 각종 유적과 유물이
관계 연구기관과 대학박물관에 의해 발굴.
사연댐 상류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암각화에는
고래·거북·사슴·멧돼지 등 각종 동물그림이 있고,
두동면 천전리 각석에는 원·삼각형·마름모 등의
각종 기하학적 무늬들이 있어 울산지방이 고대
인간사회의 유력한 생활터전이었음을 증명함과
동시에 당시 사람들의 의식세계를 보여 준다.
울산은 삼한시대 진한(辰韓)
중구 다운동(茶雲洞) 중심으로
굴아벌촌(屈阿火村) 읍락을 형성.
신라 파사왕때 굴아화현(屈阿火縣)을 두고,
남쪽에 생서랑군(生西良郡), 동쪽에 동진현(東津縣),
언양지방에 거지화현(居知火縣), 757년(경덕왕 16)에
하곡현(河曲縣, 일명 河西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월성군(月城郡) 외동읍(外東邑) 모화(毛火)
지방에 있던 임관군(臨關郡) 영현으로 삼았다.
언양지방은 본래 거지화현인데,
경덕왕 때 헌양현(헌陽縣)으로
개칭해 양주의 영현으로 하였다.
신라시대 울산지방은 불교문화 파급
태화사 등 불사(佛事)가 성행하였다.
『삼국사기』우시산국(于尸山國)도
울산지방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울주군 웅촌면이 그 위치일 것으로 추정.
신라시대를 통해 울산지방에는
하곡현과 동진현이 임관군의 영현
이란 격을 띠었고 남쪽에 동안군(東安郡)이,
서남쪽에는 우풍현(虞風縣)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 태조 때 개지변(皆知邊)을
지배하고 있던 호족 박윤웅(朴允雄)이
930년(태조 13)에 최환(崔奐)을 보내
항복을 청해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의
공이 컸으므로 '하곡(河曲)·동진(東津)·
우풍(虞風)' 3현을 합해 흥례부(興禮府)로
승격함에 따라 임관군의 영현에서 벗어나
비로소 한고을로서 발전해 현재 기반을 구축.
983년(성종 2)에는 고려왕조가
지방제도 강화로 중앙집권화 추구.
전국에 12목을 설치, 995년(성종 14)
다시 전국을 449현으로 분할, 흥례부를
공화현(恭化縣)으로 낮추고 별호를 ‘학성(鶴聲)’
1018년(현종 9) 공화현·헌양현·기장현·동래현를 합해서
'울주'로 개편, 방어사(防禦使)·지울주사(知蔚州事)를 두었다.
1143년(인종 21) 헌양현을
분립시켜 감무(監務)를 두었고,
동래현령(縣令)을 두어 분립시켰다.
울산은 바다와 접해 있고,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까워
고려후기 왜구피해가 막심.
1397년(태조 6)울주에 진(鎭)을 두어
병마사(兵馬使)가 지주사(知州事) 겸.
1413년(태종 13) 지방행정 개편에 따라
진을 폐지하고 울산군으로 개칭해 비로소
울산(蔚山)이라는 칭호가 등장하게 되었다.
1417년에 경상좌도병마절제사영
(慶尙左道兵馬節制使營)을 경주에서
울산 병영동(兵營洞)으로 이전했다.
1418년 염포(염浦)를 개항해 왜관 설치,
1426년(세종 8)에는 하고 다시 진을 두어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가 지군사를 겸.
1437년 병영을 다시 설치하였다.
그해 1월에 울산도호부(蔚山都護府) 승격.
판관을 더 두었다가 8월에 다시 군으로 강등.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세종 때 울산군의 호구는
1,058호에 4,161명이었다.
1459년(세조 5) 동래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
(慶尙左道水軍節度使營)을
개운포(開雲浦)로 이전했으며,
1510(중종 5) 삼포왜란때 염포 폐쇄
1592년(선조 25)에 개운포에 있던
경상좌수영이 다시 동래군으로 이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울산 의병이 경주·울산을 수복하고
멀리 대구·창녕·동래 적을 무찌르는 전공.
그 공훈으로 당시 좌의정 이덕형(李德馨)의 건의로
1598년울산도호부로 승격하고 병마절도사 겸 부사.
1599년 임진왜란 피해로
자립할 수 없는 언양현을
울산도호부에 합쳤다가
1612년(광해군 4)에
다시 현으로 복구시켰다.
1616년 병마절도 겸직 도호부사직을
전임 도호부사를 두어 맡도록 하였다.
1681년(숙종 7) 하미면(下未面)을
기장현에 이관하고 받기를 되풀이.
1861년(철종 12) 거의 되돌려주었다.
1771년(영조 47) 울산 호구는
8,670호에 3만 2973명이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
도제도를 폐지하고 23개의 부를
새로이 두었는데, 이 때 울산은
도호부를 군으로 개칭하고
언양·양산·동래·기장·거제·
경주·영일·홍해군 등과 함께
동래부의 관할 하에 들어갔다
.
1906년 칙령 제49호의 시행으로
지방행정을 정리해 온남면의 일부와
외남·웅상면을 양산군으로 이속하였다.
1914년 부·군을 정리·폐합하는
지방제도 개편시 언양군을
울산군에 병합했는데, 이 때
태화강 이남의 삼산·달동·신정·
옥동지방을 합해 울산면, 하부면과
내상면을 하상면으로 하고 현남면과
현북면을 합해 대현면이라 개칭하였다.
1931년 11월 1일울산면이 읍으로 승격,
1934년 동면을 읍으로 승격시켜 방어진읍.
1944년대현면을 울산읍에 편입해 출장소를
두었다가 1946년 다시 대현면으로 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는 병영의 비밀청년회조직이
주도해 일본경찰과 충돌하는 격렬한 시위로 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언양·남창·웅촌·온산까지 만세운동
이 파급되어 4명의 사망자와 수많은 부상자를 냈다.
해방 이후 울산은 경제개발정책으로 눈부신 발전.
1962년 2월 1일울산읍, 방어진읍, 대현면, 하상면
전 지역과 청량면 두왕리, 범서면 무거·다운리,
농소면 송정·화봉리를 합해 울산특정공업지구 지정,
같은 해 6월 1일울산시로 승격시키는
한편, 울산군을 울주군으로 개편하였다.
1963년 3월 12일 울주군 서생면이
동래군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양산군의 관할이 되었으나
1983년 2월 15일 다시
울주군으로 복귀하였다.
또 1973년 3월 12일
삼남면의 구수리를
언양면으로 편입시키고,
1973년 7월 1일두서면에
속했던 소호리를 상북면으로
이속시켰으며, 1975년 10월 1일
온양면(현 온양읍)의 덕신리와
청량면의 용암·학남리가
온산면(현 온산읍)으로 편입.
1985년 7월 15일 구제가 실시됨에 따라 중·남구 설치.
1988년 1월 1일 방어진출장소가 동구청으로 승격되어
3구 40개 동이 되었다. 1991년 1월 1일 울주군이 울산군.
1995년 1월 1일울산시와 울산군이 통합되고,
1996년 12월 31일 「울산광역시설치에 관한 법률」
이 공포되어 1997년 7월 15일울산광역시로 출범하였다.
이에 따라 북구가 신설되고
울주군이 울주군으로 복군되어
4구 1군 체제가 되었다.
이후 1998년 3월 1일동구
염포동 일부가 북구로 편입,
2002년남구 무거동 일부를
울주군 범서읍으로, 울주군 범서읍
일부를 남구 무거동으로 각각 편입.
...............................................
조선 선조 때 창건한 울산향교는 중구 교동에 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52년(효종 3)에 중건한 것.
1678년(숙종 4)에 울산의 사림 54명이
중구 반구동에 세운 구강서원(龜江書院)
1694년에 사액서원이 되었다가 훼철되었다.
울산은 삼국시대 화랑들이 수련하였던 유적지로
두동면 천전리 서석(書石) 유적은 화랑교육의 흔적.
울산은 삼한시대에는 진한(辰韓)의 소속으로
중구 다운동 중심으로 '굴아벌촌' 읍락을 형성
신라시대 울산지방은 일찍부터 불교문화가 파급.
남구 황성동의 외황강 강구 해안에는
신라 때 이곳을 순행하고 있던 헌강왕 앞에
동해 용이 나타나 아들 처용(處容)을 바쳤다는
전설로 유명한 처용암(울산 기념물 제4호)이 있다.
'삼국사기' 열전에 나오는 우시산국(于尸山國)
'울주군 웅촌면'이 그 위치일 것으로 추정된다.
983년(성종 2) 중앙집권 고려가 전국에 12목을 설치
995년(성종 14) 전국 지방행정구역을 449현으로 분할,
울산은 바다와 접해 있고,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까워
고려 후기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피해가 막심하였다.
조선시대 초, 1397년(태조 6) 울주에 진(鎭)을 두어
병마사(兵馬使)가 지주사(知州事)를 겸하게 하다가,
1413년(태종 13)에 지방행정 개편에 따라 진을 폐지.
울산군으로 개칭하여 울산(蔚山)이라는 칭호가 등장.
고래고기 수육
원조할매집.,고래탕.
고래고기 육회
장생포 고래박물관
고래 바다여행
2015.08.10 장생포 귀신고래.,출현
2014.10.28
우리나라 포경산업의 전진기지였던 장생포
울산지역 예술문화의 새로운 거점으로 변모.
선사인들의 고래사냥을 담고있는 국보 제285호.
반구대암각화의 예술적 전통을
잇는다는 측면에서도 높은 관심.
..............장생포(長生浦)...........
행정상으로 울산군에 속하여왔으며
현남면(峴南面)의 관할하에 있었다.
1914년 경상남도 울산군 대현면에 속하였으나
1962년 울산이 시로 승격되며 장생포도 장생포동.
1997년 울산광역시가 출범함에 따라 오늘에 이른다.
장생포는 울산만 서쪽 해안가에 위치.
울산만 수심이 깊어 배의 드나듦이 편리.
연안 항로 기항지이며, 고래잡이 좋은 어장.
포경업(捕鯨業) 근거지로서 울산만 내로
태화강·동천·외황강 등이 흘러들며 태화강과
동천이 만나는 하구에는 충적평야와 갯벌이 발달.
울산은 신라시대부터
정치· 경제· 교통 중심지.
국방상 중요한 지역이었다.
일제강점기 대륙침략의 전진기지로서
장생포항에 유류 비축을 위한 축항계획.
장생포 일대 안벽축조 및 울산·장생포간에
철도지선을 부설하여 군수물자를 수송하였다.
장생포는 중요 거점지역이기 때문에
도로와 철도가 이곳을 중심으로 발달.
울산의 도로는 1904년∼1920년에 걸쳐
울산· 부산, 경주 등 간선도로와 장생포,
방어진, 언양, 남창을 경유하여 해운대에
이르는 도로가 개설되면서 발달하였다.
철도는 한국전쟁 후
산업선이 진행되면서
‘장생포선’이 개통하였다.
1960년부터 화물운송에 있어서
장생포역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장생포는 어항 기능뿐만 아니라
공업 발달과 교통요지 역할도 수행.
울산 지역의 효과적인 개발을 위해서
도로·항만· 용지· 용수· 통신· 하천 등 개발.
울산지구종합공업지대
조성추진위원회가 발족해
공업단지를 형성하기 시작.
울산만 일대에 있는 장생포는
공업단지를 조성하기 최적 입지.
정부주도 하에 최초로 울산· 미포
국가산업단지가 건설되었다.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정부는
1962년 울산지구를 특정공업지구로 결정.
장생포동납도(동양나이론 공장부지 안)에서
국민의 관심 속에서 '울산센터 기공식'을 거행했고
울산석유화학공업단지, 온산국가산업단지 등이 들어섰다.
그러면서 장생포도 공업이 발달하는 등
농촌에서 벗어나 도시적인 특징으로 변모.
장생포는 울산공업단지 일부로
대규모 공장들이 들어서 공업 발달.
산업도로 신시가지 연결도로가 발달.
자연스럽게 공장수와 종업원수가 늘고,
'1962~1980' 18년 사이 공업에 종사하는
종업원수 60배, 공장수 3.4배 증가하였다.
........................................................
고래가 춤추는., 장생포 고래문화마을.
2016년 새해 맞이하는 장생포 고래문화마을
울산 반구대., 암각화
2016.11.04 지붕 없는 미술관.,울산 벽화마을
2017.04.11
2015.05.18 울산 장생포 옛 고래마을.
2017. 울산매일 신년특집.
2017.3.6
2017.3.6
울산 대왕암
염포누리(울산 앞바다) 전망대
울산광역시
염포만
해파랑길 7코스(태화강전망대~ 십리대숲~내황교)
염포만
대왕암
염포3거리
.
.................염포(鹽浦)..................
1418년 왜인들에게 개방된 개항장으로
지금의 울산광역시에 위치했던 옛 항구.
염포는 당시 경상좌도병마도절제사영이 설치되어 있던
울산 지역(지금의 울산광역시 북구 염포동 일대)에 위치.
1418년 조선시대 태종 때 왜에 대한 문호 개방 차원에서
부산포, 제포와 함께 염포가 개항되어 왜관이 설치되었다.
왜관 설치와 함께 염포에는 60명 왜인들이 상주할 수 있도록
정해졌는데, 이후 왜인들이 점점 늘어나 100명 이상이 살았다.
1510년(중종 5) 삼포의 왜인들이
조선을 침략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대마도주와 연합해 일으킨 삼포왜란.
이로 인해 염포 왜관은 폐쇄되었고,
이후 제포만 다시 개항했다가 다시
부산포로 개항이 옮겨지게 되었다.
..............................................
대왕암공원 슬도
울산 대왕암 둘레길 & 경주 파도소리길
울산 대왕암.,오토캠핑장
울산 장생포 고래특구
울산 장생포
장생포 고래박물관
울산 장생포 고래고기.
...........울산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
1971년 동국대학교 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견되었다.
200여 점을 웃도는 사람과 짐승, 각종 생활장면 암각화.
울산 반구대 암각화 발견 및 출토로 인해 발견 초기부터
역사학계와 고고학계, 미술사학계 등으로부터 주목받았다.
울산만과의 거리는 직선으로 25km 떨어진 위치.
반구대 암각화는 울산의 중심하천인 태화강의 지류,
대곡천 중류 계곡 오른쪽 절벽에서 강물에 잇닿는 곳.
.
암각화는 너비 6.5m, 높이 3m
주암면에 집중적으로 새겨졌으며,
주암면 좌우 크고 작은 암면에도 표현.
암각화가 새겨진 면은 주(主)암면을 포함해 10개.
암각화는 표현대상 내부를 모두 쪼아낸 면쪼으기(面刻)
즉, 모두쪼으기 기법과 윤곽만 쪼아낸 선쪼으기(線刻) 기법
암각화 내용은 바다짐승과 뭍짐승, 사람, 도구, 기타.
바다짐승으로는 고래, 물개, 바다거북 등이 발견되며,
뭍짐승으로는 사슴, 호랑이, 멧돼지, 개 등이 다수 보인다.
사람은 얼굴만 그려진 경우(가면).
정면상 및 측면상, 배에 탄 모습 등.
측면상은 성기를 돌출시킨 점이 특징.
도구로는 배, 울타리, 그물, 작살, 방패,
노(弩)와 유사한 물건 등을 볼 수 있다.
이 외에 내용을 파악할 수 없는
다수의 그림이 암벽 곳곳에 있다.
표현기법과 암각내용에 의거해 암각화의 제작시기는
신석기시대 중기부터 초기철기시대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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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세와 계곡,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절경으로
거북 한 마리가 넙죽 엎드린 형상이라.,반구대.
1980년대 중반부터는 국문학, 금석학(金石學), 민속학 등
학문분야에서 금석학적, 민속지적, 생태학적인 접근 시도.
오늘날 반구대 암각화를 비롯한 국내 발견 암각화 유적들은
다산과 풍요를 위한 제의장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바위그림
언양읍 대곡리에는 경승지 반구대.
연고산 자락이 이곳에서 우뚝 멎으면서
기암괴석으로 절정을 이루며, 마치 거북이
넙죽 엎드린 형상이므로., "반구대(盤龜臺)".
두동면 천전계곡(川前溪谷) 흘러내리는 옥류가
이곳에 모여 호반을 형성하니 절승가경(絶勝佳景).
옛부터 시인묵객들은 시영(詩詠)으로써 경관을 즐겼다.
신라 때 화랑들은 명산대천(名山大川)에서
고귀한 기상을 기르고 심신을 단련하던 때에,
이곳에 찾아와 훈련하고 야영생활을 했으리라.
또 고려 말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조선초기의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한강 정구(寒岡 鄭逑) 등 삼현이 이곳에서
명시를 남기고 향민들을 교화하였다. 그래서
반구대 아래의 소구(小丘)인 포은대(圃隱臺)에는
삼현 행적을 기록한.,반고서원 유허비와 포은대영모비.
또 맞은편에는 중창한 반구서원이 있다.
이 서원은 숙종 38년(1712년) 세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축, 이들의 위패를 모셨다.
영조4년(1728) 화재로 소실이 되어 다음해 다시 복원.
고종 8년(1728)에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이 되었다.
울산공업 단지가 설정된 1960년대 중반
공업용수를 위하여 범서읍 사연(泗淵)에다
반구천(盤龜川)의 하류를 막아 사연댐을 축조하자
집수 수위가 높아져 암면각화가 수중으로 일부분은 침몰.
이 중 하나는 대곡리 수중(水中)에 있으며
국보 제285호로 지정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상류 천변(두동면 천전리).,국보 제147호 지정.
염포왜관
염포(울산)는 소금 밭이 많아 '소금나는 갯가'라 하여.,염포.
"경상도 염포(울산)를 비롯한 왜인 거주지에는 나이가 어리고
재치 있는 자들을 선발하여, 일어를 가르쳐야.,"- 경상도 감사 -
경상도 감사의 상소를 받은 세종.
1430년 10월 11일에 허가를 내렸다.
얼마 후, 6명이 선발되어.,염포에 배치.
조선은 1407년 부산포, 내이포에 왜관을 열고,
세종8년(1426년) 1월 18일 염포에도 왜관을 개설.
그당시 왜관을 개설한 곳은.,군에서 동쪽 15리 지역.
세종실록 지리지 - 기록.
"수군만호를 두어 지키던 곳은
군 동쪽 15리에 위치한 염포가 있고
군 남쪽 37리에 위치한 개운포가 있고
군 남쪽 44리에 위치한 서생포가 있었다."
염포 왜관은 조선에서 일본과 최단거리 지역이다.
삼포(부산포, 내이포, 염포) 중에서 가장 소규모 왜관.
조선 조정에서 염포 거주를 허용한 가구는 10호에 불과.
1435년 세종은 염포 인구 조사를 명령.
3월 29일 울산 군관들이 염포로 향하였다.
이날, 염포에서 발각된 왜인들의 숫자는 96명.
1494년에는 허가 받은 왜인과
몰래 숨어사는 왜인들까지 51호.
152명의 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왜인들은 1426년부터 1510년까지 84년 간 울산에 거주하였다.
그러나, 1510년 4월에는 '삼포의 난'으로 인하여 울산을 떠났다.
1373년 울산 태화동에서 태어난 외교관 이예 이야기.
1397년 조선건국 4년 후, 왜구 삼천 여명이 울산을 침입.
당시, 울산 주둔 조선군사들은 고작 368명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왜적이 단 한차례 싸움도 없이 항복하자
조선 군영에서는 그들에게 술자리를 베풀려 하였다.
이때 어느 중이 “관군이 바다와 육지에서 협공을 하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왜구는 경상감사 이은을 사로 잡아 돌아가 버렸다.
이예는 스스로 왜구를 쫓아가 포로를 자처.
목숨을 구하고 이은과 함께 대마도에서 귀환.
1349년 이후부터, 왜구 침입이 없는 해가 없었다.
조선은 왜구와 협상에 통역관이 필요.
1406년 이예는 일본에 다녀온 경험을 바탕으로
통역관에 선발되어 ‘일본회례관’ 벼슬로 왜로 가서
조선인 포로 70명을 데리고 돌아오는 공로를 세웠다.
'이예'는 조선과 왜의 관계가 개선된 이후에는.,시장 개선.
물레방아, 화폐, 무역 등의 장점을 조선에 알리려고 애썼다.
조선시대 대일외교 주춧돌을 놓은 충숙공 이예(1373∼1445).
2015년 3월 25일에 국립외교원이 이예 동상 제막식.
외교부 1차관, 국립외교원장, 주한 일본대사 등 참석.
외교부는 2010년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로 이예를 선정.
조선시대 이예가 처음 일본 땅을 밟은 시기는 1400년.
8살 때 왜구에게 잡혀간 어머니를 찾으려 쓰시마섬 행.
끝내 찾지 못하였고 이후 43년 동안 조선통신사 등으로
40여 차례나 일본에 파견되어 정치, 문화 교류를 이끌었다.
한편, 피랍 조선인 667명 귀환을 성사시킨.,이예.
1443년 조선 초, 계해약조(癸亥約條) 체결에 공헌.
계해약조는 쓰시마 왜인들의 무역, 근해 어업을 허용.
그대신에 무역선의 숫자 등을 대폭 제한하였던 한일 조약.
1443년(세종25년)에 체결된 계해조약에 따르면
3포 포구마다 왜관을 설치하고 왜인 무역을 관할.
왜인들이 접대장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3포 왜관은 왜인이 왕래할 수 있어도 상주할 수 없고
왜관은 무역, 어로 업무가 끝나면 곧 귀국해야 하였다.
물론, 3포 왜관에 거류하는 항거왜인은
일시 체류자와는 구별해. 총 60호로 한정.
'제포 30호, 부산포 20호, 염포 10호'의.,왜관.
왜관을 설치하여 항거(恒居)왜인이 거주.
왜관에서 도항왜인의 접대와 교역을 허가.
그 외에는 왜로 돌려보내는 쇄환정책을 실시.
.
당시 71세 그는 세종대왕에게 쓰시마섬 파견을 자청.
이때 조선인 포로 7명을 찾아오고, 왜적 15명을 생포.
그 공로를 인정 받아 종2품인 동지중추원사에 올랐다.
2015년 3월 25 일, 외교부 관계자 - “북방외교 선구자인
고려시대 서희에 이어 대일외교 개척자 이예까지.,두 거목.
동상이 외교관들을 키워내는 외교원에 나란히 서게 되었다."
한반도에서 최초 대일외교의 개척자는
신라시대 전설 속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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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오랑과 세오녀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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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 8 대 '아달라'왕 즉위 4년인.,정유(丁酉)해에.
경주 동쪽 영일(迎日) 동해 바닷가 일월지(日月池) 연못
그 인근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았다.
연오랑, 세오녀 부부는 물고기 잡는.,어부.
어느 날 연오랑이 바다에서 해초를 따던 중,
갑자기 바위 하나가 물위에 떠오는 것을 보았다.
이상하게 여긴 연오랑은 신발을 벗고 그위에 올랐다.
그랬더니, 그 바위는 바다로 점점 들어가
연오를 싣고 일본으로 가버리는 것이었다.
그 검은바위는 귀신고래였던 것인듯 싶었다.
귀신고래 등에 타고 일본에 도착한 연오랑.
그곳 사람들은 그를 그 지역의 왕으로 추대.
한편, 오지않는 남편을 찾아나선 부인 세오녀.
남편이 일하던 곳에는 신발만 남아 있었는데,
역시, 검은바위 하나가 물위에 떠있는 것이었다.
세오 역시 이상하게 생각하고 바위 위에 올라앉았다.
그 바위는 일본으로 건너가 부부는 극적인 상봉.
부인을 다시 만난 연오랑은 세오녀를 귀비로 삼았고
연오랑, 세오녀는 그 나라를 잘 살도록 다스리게 되었다.
연오랑과 세오녀가 일본으로 간 후 신라에서는 이변.
해와 달이 모두 없어지고 온 나라가 암흑천지가 되었다.
하늘의 변화를 보고 점을 치는 일관이 신라 왕께 아뢰었다.
우리나라 해와 달의 정령이 일본으로 갔기에 생긴 변괴.
신라 왕은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두 사람의 귀국을 권유.
신라 사신을 만나 그 말을 들은 연오가 말하길
"내가 여기 온 것은 하늘의 뜻이니 돌아갈 수 없소.
그러나, 신라의 해와 달이 없어진 것도 딱한 일이오."
"나의 왕비가 짠 고운 명주 비단이 있으니
이것을 신라에 가져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신라에 해와 달이 예전처럼 다시 생길 것이오."
연오가 말한대로 그 비단을 제물 삼아
제사를 지냈더니 세상이 다시 밝아졌다.
신라 왕실에서는 그 비단을 국보로 삼았고,
비단을 넣은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 했고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 또는 '도기야'라 하였다.
연오랑, 세오녀 이름에 까마귀를 나타내는.,오(烏).
이는 '태양숭배사상'과도 관련이 깊은.,신라인들의 염원.
'까마귀는 태양 속에 산다.'는 신령스러운.,동아시아 태양신
연오와 세오가 왜로 건너간.,오키 섬.
시마네 반도 북쪽 50㎞, 독도에서 157.5 ㎞.
오키(迎日)는 태양과 관련된 신 왕국의 명칭
연오랑 세오녀는 '태양숭배사상' 종족의 조상.
신라에서 연오랑 세오녀 부부가
살았던 곳으로 추정되는 간절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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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오랑과 세오녀 전설.,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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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 '아달라왕 13년(166년) 음 1월 1일 일식.' 기록.
그로 인하여 신라왕은 두려움에 떨고, 백성은 혼란 소용돌이.
당시 연오랑이 스스로 망명하였다면 필시 세오녀를 대동했을 것.
그러나, 연오랑은 세오녀를 두고 혼자 왜국 행.
이는 스스로 원해서 떠난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당시, 일식을 두려워한 일본인들이
신라에서 일식을 물리치는 능력자를
수소문하여 납치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비록, 강제적으로 납치하긴 하였으나,
연오랑에 대한 왜의 예우는 극진했던듯.
오키 섬을 다스리며 살 수 있도록 배려한듯.
신라에서는 왜국과 같은 예우가 없었던듯.
그래서, 연오랑은 아내 세오녀도 불러들인 것.
일식을 물리치는 일은 세오녀 도움이 필요한 일.
세오녀가 짠 생초비단 없이는 행할 수 없었기 때문.
그래서, 왜국 왕은 신라에 있던 세오녀도 데려온 것.
결국, 그렇게 해서 연오랑 세오녀 부부는 왜국으로 망명.
그들이 왜국으로 떠난지 9년뒤 아달라왕에게는
불길한 일식이 발생할 것이라는 보고가 올라온다.
다른 날도 아닌 음 1.1에 일식이 닥칠 것이라는 보고.
.
만약, 아무런 대책 없이 정월 초하루 일식을 맞을 경우
민심은 흔들릴 것이고, 아달라는 왕의 지위도 위태로웠다.
이미 일식 두 달전인 165년 10월에 아찬 길선이 반역을 도모.
비록 실패한 역모였지만 길선은 백제로 달아났고,
아달라왕은 군대를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한 터였다.
이런 경황 중 일식이, 정월 초하룻날 일어난다면,
그 일을 빌미로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날게 자명한 일.
백제와 대치한 신라 군사 사기마저 땅에 떨어질 판이었다.
위기를 느낀 아달라왕은
급히 왜국에 사신을 파견해
연오랑과 세오녀를 불렀던 것.
그러나, 그들 부부는 왜국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기에 거절.
아달라왕의 사신은 일식을 없앨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애걸.
세오녀가 짠 생초비단을 내주며 제사를 지내면 될 것이라 답변.
그래서, 세오녀가 짠 생초비단 보자기를 놓고
제사를 지내 왕실과 백관 백성들의 불안을 해소.
아달라왕은 재위 후반기 10년간 크나 큰 시련을 겪었다.
그의 왕비 내례 부인이 석벌휴의 아들 이매와 정을 통하였고
아내인 왕비는 이미 벌휴 세력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것.
아달라왕과 벌휴의 싸움은 그후 10년 가까이 지속되었고,
결국 아달라왕은 반란군에 의해 불운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연오랑과 세오녀의 망명은 아달라왕에게 불행의 불씨로 작용.
아달라왕 시대 중국은 후한 말기에 해당되는 시기로
환관들의 정권장악, 반란, 황건적이 세력을 형성한다.
장각 형제 구데타, 조조와 황보숭 등이 황건적을 토벌.
이때, 로마에서는 페스트가 유행하여
이를 계기로 기독교도 박해가 한층 심화.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자성록'
파우사니아스.,'그리스 안내기' 출현 시기.
이때 연오랑과 세오녀가 망명한 곳.,오키 섬.
오키 제도(일본어:
또는 오키 군도(일본어:
동해 상 일본 군도이며 시마네 현 오키 군 소속
역사적으로는 오키섬 중심으로 오키국 구니 설치.
시마네 반도 북쪽으로 약 50 km 떨어진 지점에 위치.
본토와는 오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다.
도고 수로를 경계로 도젠(島前)과 도고(島後).
도젠은 도젠 3섬으로 불리는 지부리 섬(지부 촌),
나카노시마 섬(아마 정), 니시노시마 섬(니시노시마 정)
도고는 도고 섬(오키노시마 정) 한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요 4섬 외 180여 부속 섬으로 이뤄졌다.
도고 섬은 242 km2으로 일본의 섬 중에서
도쿠노 섬에 이어 면적 순으로 15번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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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장생포., 고래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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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고래 축제를 관광자원으로
2005년 5월 행사때 소득 370억원
울산시가 '공해도시'라는 오명을 벗고
국제적인 '고래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다.
2005년 국제포경위원회 회의를 울산에 유치
자동차·조선 공업이 밀집한 산업도시의 명성에다
자연과 함께 숨쉬는 '고래도시'라는 이미지를 정착.
전 세계에 울산을 알릴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고래도시 울산의 기원은 1899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태평양 연안 고래를 해체하는 러시아 포경기지 장생포
IWC가 고래보호를 위해 상업포경을 금지한 1986년까지
87년간 고래에 관한 한 우리나라의 중심이던 장생포항
50여척 포경선이 국내 고래 소비량의 80% 이상을 충당
고래고기 식당만 30여곳이 성업했던 곳이 울산 장생포.
2005년 5월 제 10회 울산 고래축제는 옛 모습을 재연.
'장생포항 일대에선 개도 입에 지폐를 물고 다녔다'
하지만, 포경이 금지되고 울산이 공업화로 발전되며
고래 명성은 장생포항과 함께 몰락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다가 1995년 울산 '고래축제 추진위원회'를 구성
고래의 옛 명성이 '고래축제'로 되살아나기 시작.
이 무렵 울산 앞바다에 고래도 한 두마리씩 출몰.
2005년 5월 제 10회 울산고래축제에 1만명 관광객
2005년 세계 52개국 800여명 고래전문가가 참가한
IWC 연례회의를 울산시가 유치하는 경사가 겹쳤다.
370억원 소득증대 효과는 고래도시 울산의 브랜드화
고래잡이의 전진기지였던 장생포항 일대에
지상 4층 규모 고래전시관 건립을 완공했다.
고래전시관에는 고래생태 체험관을 비롯해
포경역사관,귀신고래전문관,포경유물복원관 등
고래와 포경유적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관광자원.
고래전시관 옆에 고래연구센터도 건립하기로 했다.
부산 국립수산과학원 고래연구센터 등이 옮길 예정
울산이 우리나라 고래연구의 메카로 자리잡게될 것.
이와 함께 BC 3000년경 선사인들의 고래잡이
50여 마리 고래를 바위에 그린 반구대 암각화
국보 제285호이자 천연기념물 제126호 귀신고래
회유해면 등 고래관련 문화유산도 관광 상품 개발중.
울산시는 '1986년 IWC 총회 결정으로 상업포경이 금지후
울산 앞바다에 많은 고래가 다시 찾아오고 있어 길조'라며
울산은 이미지 개선 및 주민 소득증대까지 연결해 나갈 계획.
............1979~80년의 진양호 포경선 항해일지....................
그당시 울산지역 포경선 제 5 진양호(98t) 선장 김수식씨 일지
출항부터 고래를 추적과정, 작살을 쏴 명중시킨 시간.위치 등등.
1980년 2월 28일 오전 10시 울산 장생포항을 떠난 포경선
다음날 오전 8시 부산 태종대-통영 욕지도- 전북 어청도 앞
작살을 맞은 고래는 바다를 붉은 피로 물들이며 도망치다 포획.
'포획한 밍크 고래 몸길이.,24척(7.27m)'
제 5 진양호는 매일 한 두마리를 잡았다.
많이 잡은 날은 1980년 5월 7일 다섯 마리.
밍크고래를 잡은 해역이 3월과 4월은 서해 어청도 부근,
5월과 6월은 울산 동구 화암추, 7월은 경북 죽변,
8월은 경북 울릉도, 9월은 경북 포항시 구룡포,
10월과 11월은 서해 홍도와 흑산도
한반도 동.서해 전역이 밍크 고래의 어장이었던 셈.
특히 울산 근해에서 화암 앞바다 일대가 주무대였다.
제 5 진양호는 75년 3월 방어진 철공조선에서 건조
길이 28.7m, 폭 5.38m에 700 마력 디젤기관 장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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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식 포경선이 처음 등장한 울산포(장생포 용잠동 대곡).
러일전쟁이후 장생포는 연간 800 마리 고래를 포획했던 포경기지.
우리나라에서 86년 1월 1일 포경이 전면 금지된지 20년이 되었다.
장생포 등지에는 20 여개 고래전문 음식점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울산시 남구 장생포는 선사시대부터 고래잡이 전진기지였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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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고래.,생성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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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6천 5백만년 전 쥐만한 크기 '메소니쿠스'라는 포유동물
육지를 걸어다니며 강 하구의 물고기나 조개류를 먹고 살았다.
육지보다 먹이가 많은 바다로 나가 어류나 새우를 먹으며 진화.
거대한 몸집인 오늘날 고래는 약 200 만년 전에 출현.
한반도 화산폭팔로 약 6천 5백만년 전 자취를 감춘 공룡.
2천 5백만년 방황 끝에 중동 지대에서 9 천만년 전에 전멸.
지금은 중동이 사막지대로 변했지만 당시에는 열대우림지역.
한반도 주변 고래는
약 6천 5백만년 전에는
쥐 만한 포유동물이었다.
오늘날, 도마뱀으로 작아진, 공룡.
오늘날, 고래로 진화된 그 옛날., 쥐.
오랜 세월 진화된 두 동물이 비교된다.
'무한 세월 속에 담긴 자연의 신비.'
'고래등 같은 기와집'은 우리나라 서민들의 희망.
우리나라는 옛부터 큰 고래가 많이 잡혔다는 증거.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 - 속담.
'한반도 해역에 새우가 많았다.'는 증거.
'고래 먹이감' 새우는 옛부터 새우젓 재료.
.
한반도는 삼면 바다와 대륙붕이 있어 새우와 프랑크톤이 많다.
고래의 먹이감이 풍부한 지역이고 생태환경도 살기 좋은 곳이다.
그래서, 한반도에서는 선사시대부터 고래잡이를 한 유적들이 많다.
고려 말, 언양에 귀양온 정몽주가
반구대 아래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신석기∼청동기시대> 울주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국보 285호)
반구대 암각화에는 귀신고래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지질학자들은 울산이 바다였던 BC 3000 년 경의 유물로 추정한다.
'따라서, 진주 진양호 일대
포경 역사는 약 5천년 전후.'
반구대 암각화에는 물을 뿜는 고래와 새끼를 등에 업은 고래,
작살을 맞은 고래, 그물에 걸린 고래, 잡은 고래를 끌고 가는 배
고래의 해체와 분배에 관한 그림, 고래에 얽힌 사람에 관한 기록
비록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지만
사실적으로 낱낱이 묘사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포경은 고래를 해변으로 몰아서 잡거나
밀물에 밀려 와 썰물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는 고래를 생포했다.
고래는 부위별로 해체해 대구까지 지계에 짊어지고 가서 팔았다.
우리나라 말에는 옛날부터 고래와 관련된 말이 많다.
"고래고래." "골골거리다." "고래심줄". 골고루-고루고루.
홍익인간의 정신은 고래를 잡아 나누는 풍습과 유사하다.
'진시황의 아방궁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2500년전 고래기름으로 만든 촛불은 '하, 은, 주'에서 유래.
진나라는 물론 중국의 고대국가들도 고래기름 촛불을 사용.
한반도에서 고래잡이 역사는 반만년이라 보아야 할 것 같다.
한반도에서는 특히 삼한시대의 '변한. 진한' 조상들.
그후 가락국, 신라, 고려, 이조에 이르기까지 고래잡이.
고인돌은 코끼리보다 수십배 무계의 고래를 다루던 솜씨.
새우 먹이감에 정신 팔려 밀물 타고 들어온 고래.
썰물 갯벌에 갇힌 고래가 골골 거릴 때.,고래잡이.
조류를 이용한 고래잡이에 익숙한 어부들의 전법.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 전법은
고래를 포획하는 방법과 매우 유사하다.
포경선이 그물망처럼 포진하여 고래잡이.
힘으로 제압할 수 없는 왜군을 고래잡듯 혼낸 충무공.
왜선을 밀물 때 끌어들여 썰물때 퇴로를 차단한 학익진.
왜군이 오도가도 못할 즈음 공격해 바다에 수장했던 전술.
'임진왜란때 왜적을 물리친 뱃사람들을
조선 조정에서는 얼마나 무시하였던가?'
뱃놈, 가파치, 불쟁이, 백정, 무인, 상인을 천민 취급한 조선.
여성을 무시하고, 농민을 상민 취급하며 착취만 일삼던 양반.
17세기~19세기에 조선의 무능한 정권은 나라를 망치고 만다.
'한반도에서 포경이
근대화된 시기는
19세기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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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9년 미국 포경선 포경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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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고래들이 보인다." "수많은 혹등고래와 대왕고래, 참고래,
긴수염고래떼가 사방팔방에서 뛰어 논다. 셀 수조차 없다." -기록.
당시 일본과 미국, 프랑스, 노르웨이 등 서양 포경선들이 몰려들었다
장생포가 근대적인 고래잡이항으로 부상한 것은 1891년부터였다.
당시 러시아의 황태자 니콜라이 2세는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가던 중
장생포 앞바다에서 고래떼를 보고 귀국해 태평양어업주식회사 설립.
조선으로부터 포경권을 얻어 본격적인 고래 사냥에 나섰던 기록.
그당시 포획한 고래의 해체 장소이자 포경 전진기지였던.,장생포.
1899년 러시아가 태평양 연안에서 잡은 고래를 해체하는 기지였다.
1986년 IWC 포경금지 전까지 포경선 50 척, 국내 소비량 80% 충당.
장생포동 김영학(54·선박 수리업)씨는 고래 해체용 도구 41점을 기증.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고래칼을 비롯한 고래도끼, 고래포경용 작살 등
길이 2m 고래 해체용 톱과 대형 고래칼, 도끼는 김씨가 사용했던 도구.
남구청 관계자는 포경도구와 생태,
학술자료, 사진 200 여점, 유물 수집.
국내 유일의 장생포 고래박물관은 관광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할 전망.
울산시는 장생포동 해양공원 내 2000평 대지, 연면적 240평 건물을 건립.
현재 95% 공정률을 보이고 있고 2005년 4월 개관을 앞두고 전시자료 수집.
‘그당시 귀신고래(쇠고래)를
동해에서 다시 볼 수 있을까?'
1914년 미국학자가 한반도 동, 남해안을 2년여 조사한뒤 논문 발표.
겨울철 동해안을 따라 남하해 출산한 뒤 봄부터 북상했던 귀신고래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울산 장생포 앞바다 등 동해안에 풍부했다.
1960년대부터 각국 포경선박이 남획하자 회유 항로를 바꿔버린 듯.
현재로선 한국 귀신고래가 돌아오기에는 자연환경 조건이 어려울 듯.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연평균 150 마리, 2003년에는 280 마리를 발견.
지구역사 45억년 동안 장구한 세월을 생존해 온 고래의 멸종위기
인간 다음 지능, 임신 1년, 60년(향고래)∼100년(수염고래류) 수명.
여러 모로 인류와 닮은 고래는 생태계 보전차원에서 중요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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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가 살지 않는 곳의 고래박물관은 무의미.
“고래도 살고 사람도 사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포경산업보다 고래 관광에 역점 둔 호주의 사례.
울산 장생포 고래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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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반구대 암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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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짐승과 들짐승 300 여점 그림 가운데 40 여점 고래
10명 혹은 20명씩 탄 두 척의 배가 고래를 사냥하는 장면
고래를 잡기 위한 작살, 일종의 부표인 뜨개, 그물 그림들.
20 여명이 타고 고래잡이 할 수 있는 배를 만드는 조선기술
또한 작살을 발사하는 뇌기와 뜨개를 사용한.,고래잡이 기술.
울산만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래잡이 기지이자 바다 도시.
'선사시대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산업이 융성한 지역.'
하늘을 향한 고래 떼 위쪽에 커다란 성기의 남자가 서 있고,
고래 떼 제일 아래에는 무당으로 보이는 사람의 신명난 모습.
이러한 것을 보면 이 그림들이 풍어굿을 하는 모습을 담은 듯.
'고래 떼의 우두머리가 있다.'
'고래 생태를 알고 있다.'는 뜻.
신석기시대 조상들이 고래 우두머리를 향해 풍어굿을 한듯.
제일 위에 새끼를 품은 커다란 고래는 고래의 신 '대왕고래’
그 옆에 새 한 마리가 날고 있는 것은 신의 전령인듯 보인다.
그 다음으로 큰 고래는 작살을 맞은 고래.
그 뒤를 따라 굿판을 벌리는 듯한 고래들.
그당시 고래잡이 풍습을 알 수 있는 그림.
'과연, 한반도 문화가 중국에서 유래된걸까?'
전 세계 7만 고인돌 중 한반도에 집중 분포된 3만기.
선사시대 고인돌 문화와 무관하지 않은 고래잡이 기술.
지리산 일대에 집중 분포된 수많은 사찰들의 장구한 역사.
'서해 속에 잠겨 있을.,선사시대 유적지.'
울산 반구대 바위 그림은 신비를 간직한 미스테리.
한반도 선사시대의 앞선 문명을 풀수 있는 실마리.
진주 진양호 또한 선사시대부터 고래잡이를 했던 곳.
진주는 울산 장생포와 아울러 고래잡이 거점 도시.
선사시대부터 고래잡이가 성행했던 곳으로 보인다.
앞으로 집중 재조명되어야 할 한반도 고래잡이 역사.
오늘날 우리나라의 첨단 조선기술 및 원양 어업.
결코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반만년 고래잡이 선조의 잠재력이 원동력 아닐까?'
귀신고래.
............................귀신고래............................
귀신고래는 귀신고랫과에 속하는 단 한 종의 고래이다.
몸길이 15m, 몸무게 36톤까지, 평균 수명은 50-60년이다.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에 나오는 움직이는 바위가 귀신고래.
태평양에는 두 개의 귀신고래 무리가 있다.
하나는 오호츠크 해와 한반도를 오가는 무리
알래스카와 멕시코 바하캘리포니아를 오가는 무리.
한때 멸종 위기였으나 현재 이만여 마리 이상 증가.
대서양 귀신고래 무리는, 남획으로 300년 전에 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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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잡이.
고래기름은 마가린, 조리용, 양초, 비누, 화장품, 향수.
고래고기는 식용, 고래 심줄은 질긴 끈, 고래뼈는 비료.
1985년부터 과학적인 목적 이외에는 고래잡이 전면 중지.
포경(捕鯨)은 기름이나 고기를 얻기 위한 고래잡이.
음경 포피를 잘라 귀두부 드러내는 포경(包莖) 수술.
서로 다른 말이지만 모양이 유사해 같은 의미로 쓴다.
'선사시대부터 고래를 잡아왔던 우리나라 민족.'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 "고래고래 악쓴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 등 고래에 관한 말이 많다.
심지어 남성 포경수술까지도 고래잡이로 표현한다.
한반도, 일본, 알래스카 에스키모인, 북미 인디언.
선사시대 고래잡이에서부터 항해술이 발달된듯.
풍성한 사냥감, 고래잡이로 골격이 굵어진 인디언.
사냥감, 고래 포획량이 줄자 골격이 작아진 일본인.
옛부터 태풍 지진 천재지변 등이 심했던 일본.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공동체 의식.
일본인의 단결성 충성심은 자연환경에서부터 기인.
사냥감, 고래 따라 북극에 정착한 에스키모인.
극지생활의 외로움 때문에 손님을 반기는 풍습.
옛부터 자기 부인과 이방인 손님을 동침시킬 만큼.
알래스카를 거쳐 북아메리카 인디언으로 정착.
풍부한 사냥감 덕분에 지구 상 마지막 유목민.
몽골리안은 남아메리카 잉카 문명까지 건설한다.
고래가 급격히 줄자 농업으로 전환한 잉카인.
농사를 위한 천문학, 각종 인신공회 기원의식.
식량을 지키고 이민족 침략을 막는 축성술 발달.
'몽골리안이 전세계로 퍼진 원동력은 고래잡이.'
1세기 경 에스키모와 북미 인디언이 최초 고래잡이.
식량, 연료, 연장을 만들려고 고래를 잡았다는 기록.
유럽은 중세 말 비스케이 만에서 체계적으로 고래잡이
16 세기 초 고래를 쫓아 뉴펀들랜드 아이슬란드 행.
대서양 횡단 항해는 1372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17세기 네덜란드인과 영국인들은 대규모의 포경선단
네덜란드는 300척 배로 년간 1만 8,000명이 고래잡이.
18세기 초 포경선단은 그린란드 데이비스 해협까지 진출
18세기 미국 식민지의 포경선은 대서양에 등장하기 시작
고래기름 정제소라 불리는 벽돌로 만든 가마를 배에 설치.
배에서 고래기름을 만들어 무려 4년간 저장할 수 있게 된다.
포경 선단이 장기간 바다를 항해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다.
19세기 고래잡이는 태평양과 북극해로 확산되었으며
미국의 포경선이 세계의 포경산업을 주도하게 되었고
19세기 중반 뉴잉글랜드에서 출항하는 포경선이 700척
19세기말 석유산업 발달로 고래기름 시장을 점유
포경업은 쇠퇴했다가 20세기에 고래 산업이 발달
포경산업은 되살아나기 시작해 고래는 멸종 위기.
에스키모인은 작은 배에서 작살을 던져 고래잡이.
보통 6명 선원이 8.5m 길이 배에 작살과 밧줄을 장치
작살로 고래를 맞추면 고래가 지칠 때까지 끌려다닌다.
지친 고래가 수면에 떠오르면 고래를 긴 작살로 죽인다.
죽은 고래를 배의 측면에 붙잡아 매고서
창으로 기름을 떼어내고 나머지는 버렸다.
목숨걸고 고래와 사투를 벌린 선사시대 고래잡이.
음경 큰 남성이 힘도 강해 큰 고래도 잘 잡았을듯.
남성의 큰 음경은 선사시대부터 동경과 숭배의 대상.
'선사시대 고래잡이에서 유래된 관습이 아닐까?'
울산 고래축제 중.,고래잡이 재현 행사.
'고래등 같은 기와집.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
새우처럼 잠자도 고래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