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첫 여자 친구
이 혜 숙
세 살 된 아들을 데리고 기차역으로 가던 중이었다. 처음 보는 동네 할머니에게 아들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그래놓곤 몇 발자국 가지도 않아 아들이 묻는 말,
“엄마, 쟤 어디 가?”
할머니는 웃으면서 잘 다녀오라고 하시는데 나는 졸지에 애 교육 제대로 못 시킨 엄마로 비쳤을까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날은 아이에게 처음으로 기차를 태워주기로 한 날이었다. 강릉으로 이사 온 지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 기찻길 가까운 집에 살다보니 아이는 기차 소리를 무서워했다. 집 밖에 나갈 생각은 하지 않고 창문 앞에 붙어 서서 기차 수만 세었다. 강릉에서 동해까지 짧은 거리지만 기차를 태워주면 두려움이 가실까 싶어 나선 것이었다. 기차 안에서 아이에게 인사말을 가르칠 생각이었는데 그 사이 잠이 들었다.
바닷가에 가니 바위에 가려서 수평선이 보이지 않았다. 아들을 번쩍 안아 바위에 올려놓고 이번엔 내가 오르려는데, 아들이 손을 내밀었다.
“엄마, 내 손 잡고 올라와.”
단풍잎 새순 같은 손으로 나를 잡아주겠단다. 세 살 밖에 안 되는 녀석이 애인처럼 남편처럼 말했다. 제 힘을 가늠할 줄 모르니 손만 잡으면 끌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아들 덕에 올라간 것처럼 추겨주자 아주 의기양양했다. 탁 트인 수평선을 향해 아이가 소리를 질렀다. 바다야, 안녕. 파도야, 안녕. 갈매기야, 하늘아, 구름아, 안녕, 안녕….
손을 흔드는 아이를 보다가 아까 만난 할머니가 생각났다. 아들에겐 어른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전이라 그저 새 친구로 보였던 것일까. 친구가 반가워 인사를 하고, 친구 가는 곳이 궁금해서 물어봤을, “쟤, 어디 가”였나.
나는 인사말을 가르치려던 것을 잠시 접기로 했다.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아들은 모두 제 친구다. 그 원시의 땅에 서둘러 어른의 말을 심으려 하지 않아도 아이는 크면서 문명의 씨앗을 심을 것이다. 그러면서 바다와 파도와 갈매기가 제 친구였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하늘을 보는 시간이 줄어들고, 구름이 어두워지면 우산을 들고 나서겠지. 어른인 엄마처럼.
오늘 아들이 묻는다.
“엄마, 10년 전에 난 어땠어?”
그 일이 생각나 이야길 해주자, 제 머리를 쥐어박는다.
“아니, 내가 그렇게 버릇없는 놈이었단 말이야? 모르는 할머니, 용서해주세요.”
할머니도 당신이 아들의 첫 번째 친구인 줄 알고 계셨을까. 어린 녀석의 여자 친구가 된 게 재미있어서 웃으셨던 것일까.
첫댓글 나도 이 책을 받아들고 이글을 읽었습니다.
빗나간 예상에서 오는 신선함.
엄마의 사려깊은 마음이 아름답습니다.
그림까지 곁드리니 더욱 상큼합니다.
옮겨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