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1월 14일 조선일보 보도 )
자수한 임헌영과 김남주의 기자와 의 일문 일답을 발췌 했습니다.
임헌영(고유번호 10번, 가명 한민성, 평론가, 상황출판사 대표)
"반정부 문필활동 하다 함정에 빠져"
자수동기는
사회주의이론은 현실과 모순이 많았으며 [남민전]의 조직활동이 파렴치한 범죄적 행위여서 78년이후 회의를 느껴오던중 보도를 통해 자수권고를 받고 자수했다.
가담동기는
반정부, 반체제적인 문필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조금씩 빠져들었다.
투쟁목표는
잠정적으로는 반공체제를 고수하는 현정부를 타도하고 궁극적으로는 북괴가 희망하는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현재의 심경은
자수와 전향을 함께했다. 지난 10여년을 탕자가돼 방황하다 새마음을 갖게돼 한결 가벼워졌다. (회색 싱글에 흰색 줄무늬 감색 넥타이를 맨 "임"은 시중 침착하게 남민전에 관해 설명했다. "임"은 자신에게 고유번호가 주어진것은 신문과정에서 알았고, 이재문이 자신을 [전선기] 앞에서 선서시키지 않은 것이 의문이라고했다. 그는 자수와 동시에 전향했음을 거듭 강조하면서 기회가 주어진다면 조국을 위해 열심히 살겠다고했다.
임헌영은 지금까지 새빨간 거짓말로 일관하고 있지요. 지금까지 그의 행위에서 자수와 동시에 전향을 했다는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짓 전향을하여 관계 당국의 눈을 피해 본격적인 주체사상 전도사 역할을 해왔던 것입니다.
기회가 주어지면 조국을 위해 열심히 살겠다는 말은 대한민국이 아닌 북조선을 위해 열심히 살겠다고 고백한 것인데 우리는 그동안 그에게 속았던 것이지요.
임헌영의 조국은 대한민국이 아닌 북조선인민공화국이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 마디마디가 김정일의 정책에 부응하는 말들을 뱉어낼 수 있겠습니까? 그의 소설 평론을 보면 과연 그가 대한민국을 위해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지요.
이문희(가명 유조양, 무직)
전선기란?
깃발은 조직의 상징이다. 77년초 모형이 결정됐고, 인혁당원 사형수 8명의 옷을 모아 물감을 들여 전ㅇ진과 함께 만들었다. 지난 4월 임동규간첩사건 이후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친정집 땅속에 묻어 놓았다.
이재문과의 관계는..., 또 "이"는 혁명을 무엇이라 설명했는가?
이재문과는 먼친척사이여서 어려서부터 알았고, 3년전부터 동거해왔다. 그는 혁명이 성공하면 사회주의국가가 건설된다고했다.
이재문의 혁명사상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처음엔 아무것도 몰았으나 그의 생각이 옳다고 믿게됐고 지금도 존경한다.(쥐색 상의에 흰색 T셔츠를 받쳐입고 바지차림의 "이"는 기자들 앞에나와 1분여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문을 열었다. 이재문과의 관계를 질문받자 별것을 다 묻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사회주의국가와 공산국가의 차이에 대한 질문을 받고는 당연한것도 모르느냐는투로 사회주의국가 다음엔 공산국가가 오는게 아니냐고 반문했다.
여기 등장하는 이재문이 이재오의 사촌이죠. 이재문은 사형을 언도받고 복역중 지병인 위암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참 대단한 혁명투사들이군요. 먼 친척도 친척은 친척인데 동거를 했다니 발상이 대단하네요.
그런데 친정에서는 아무런 문제 제기도 하지 않았나보군요. 조금만 상식이 통하는 집안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도 태연하군요. 북조선의 입장에서 본다면 먼친척은 남이겠지요? 오로지 김일성이 어버이 수령동무만이 존경의 대상이니....
왜 친북주사파 개떼들이 호주제 페지를 소원하는지 확실히 알겠군요.
이수일(가명, 허균, 정신여중 교사)
남민전의 투쟁방법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조직에 가입후 관계서적을 읽게됐고, 사회제반문제가 심각함을 알았으며 개혁의 필요를 느꼈다. 내생각은 사회개혁에 있어서 꼭 북괴체제를 따르자는 것은 아니다. ("이"는 학원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창백하고 앳된 얼굴. "이"는 굵직한 목소리로 자신의 가명 허균은 역사적 인물인 허균과는 관계가 없고 평등을 주장하는 뜻이라고 소개. 그는 시종 사회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김남주(고유번호 46, 가명 한무성, 무직)
지금의 심경은
목적이 아무리 위대하더라도 수단이 정당화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신사복에 T셔츠를 입은 "김"은 시종 손깍지를 끼고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다. 사회주의국가 건설을 위한 강도질이 정당화 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잘못을 시인했으나, 범행 당시는 이를 몰랐다고 말했다.
그는 D건설대표 C씨집 강도에 실패한것을 두고, 조직의 간부들이 그렇게 허술한 작전을 한것은 반성해야된다고 횡설수설, 시인인 그는 그의 작품만은 이념적 도구가 아니라고 했다.)
요넘도 아주 새빨간 거짓말을 눈썹하나 까딱도 하지않고 하고있네요.
이 자가 누구입니까? 아주 악랄하게 투쟁을 선동한 작자가 바로 요넘이지요.
이넘의 시는 완전히 투쟁의 도구이며 이념의 도구였다는 사실을 모두 아실 것입니다.
적화통일이 되면 남한에서 200만명 이상이 숙청대상이라고 지껄인 놈이 바로 요놈입니다.
이적행위를 하다 붙잡힌 주제에 반성의 기미는 일절 찾아볼 수 없네요.
강도질의 실패를 조직 간부의 허술한 작전탓에 실패했다고 토로하는 것을 보니 이넘은 전혀 반성하지 않은것이 틀림없지요. 저능아도 아닌터에 강도질이 나쁜짓이라는 인지를 하지 못했다는 뻔뻔함에 놀랍습니다. 이렇게 주체사상에 물들면 기본적인 상식도, 양심도 무뎌지고 오로지 공산혁명만이 정당하며 공산혁명을 위해서는 그 어떠한 만행을 저지른다해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말하자면 양심이 마비된 자들이 되버리는군요.
첫째도 혁명,
둘째도 혁명, 오로지 그들의 머리속에 있는것은 적화통일, 어버이 주체사상 받들기 뿐입니다.
첫댓글 1979년 11월 14일이면 10.26 사태 직후였군요. 그리고 그 후의 대학가의 좌경화.
1979년 10월 17일 남민전 과련 첫보도가 있었습니다. 그 보도에서 남민전사건 검거자 2차명단이 발표되었죠. 이러니 박대통령이 얼마나 노심초사하고 있었을까요? 그런데도 박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는 불순한 생각이 참으로 많았던 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중정부장이었으니 저러한 불순한자들이
지하에서 얌약하고 있다는 것을 자신이 더 잘 았을텐데 말이죠.
1949년 10월 17일이 아니라 1979년 10월 17일이지요? 그쵸?
에구.. 역사학도님.. 죄송합니다. 오타네요. 1979년 10월 10일 첫 발표가 있은 후 계속 검거자 명단과 범법 행위가 발표됐지요.
야러 사람이 공유하여야 할 굉장히 귀중한 자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