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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세례축일
✠ 루카복음 3,15-16.21-22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22)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이 죄인들 중의 한 사람으로 세례를 받으시기로 한 결정을 만족하게 여기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심은 당신의 구원과업(사명)을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야할 것인지를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1. 우리 가운데 우리 죄인들중의 한 사람으로 계신다는 것은 임마누엘의 하느님의 의미를 더 명확히 해주고 있습니다.
유다이즘(구약)이 가지고 있는 신관에 따르면 하느님은 초월하시고 근접할 수 없는 분으로 특히 죄인들과는 구별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은 사랑이이어서 우리와, 특히 죄인들과 함께 하시는 분으로 선포합니다.
2. 아무런 죄도 없으신 분이 회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하느님은 드높은 곳에 앉아계시면서 인간을 심판하시는 두려운 분이 아니라 오히려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속죄하시는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이 가지는 하느님에 대한 선입견을 무너뜨리시고 신뢰를 회복시키십니다.
신뢰가 회복될 때 의로움이 자리합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뜻만을 사는 의로움말입니다.
목숨이 빼앗기는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하느님의 뜻이 나와 너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으면 의로움을 살 수 있습니다.
성모마리아의<예>가 그러했고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그러했습니다.
한데, 목숨이 아니라 약간의 손해 앞에서도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 그렇게도 힘이 드는 것을 보면
전 아직도 신앙의 길에서 멀리 있는 것 같습니다.
의로움을 사는 것은 기도가 살아있을 때 가능합니다.
의로움을 사는 것은 꾸준히 하루 이틀 쌓아가는 습관입니다.
인디언 추장이 손자에게 해준 내면의 싸움에 대한 얘기(전에 들려드린 적이 있지요) 끝말이 생각납니다.
ᆢ 생각은 너의 말이 되고
말은 너의 행동이 되고
행동은 너의 습관이 된다.
습관은 너의 인격이 되고
인격은 너의 운명이 되리라.
(천사비나 수녀님)
1월12일 [주님 세례 축일]
루카 3,15-16.21-22
세례의 본질: 아버지 때문에 두려움 없이 살겠다는 결단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주님은 모든 인간에게 세례의 필요성을 알려주시기 위해 당신 친히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일론 머스크는 세례를 받은 사람일까요? 세례의 핵심은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하시듯 ‘하늘 아버지의 인정’입니다.
아버지는 무엇 하는 분입니까? 자녀가 사회에서 굳건히 살아갈 수 있도록 뒷바라지해 주시는
기둥과 같은 분입니다.
세례는 하늘에 그러한 분이 계심을 믿겠다는 결심이고 인정받는 시간입니다.
일론 머스크는 세례를 받은 사람일까요? 그는 성공회 주일학교는 다녔지만, 실제적인 신앙인은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의 육체적인 아버지와는 절연했지만, 그는 한 달에 30달러로 살아보며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없앴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세상에서 살면서 해야 할 사명을 깨닫고 그 길로만 나아갑니다.
이것이 세례받은 삶의 모습입니다.
세례받지 못하면 아버지가 없으니 실패가 두렵습니다.
히스 레저는 영화 ‘다크 나이트’(2008)의 조커로 미친 연기를 펼쳤습니다.
그는 이 연기를 위해 6주 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고 캐릭터 노트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연기를 하고는 영화가 개봉하기도 전에 28세란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우울증 등으로 복용한 약물 부작용 때문이었습니다.
히스 레저는 연기를 전문적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누구보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였습니다.
다만 본인만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실패가 두려웠고 그 스트레스 때문에 가장 연기를
잘해놓고도 두려움과 우울함을 견뎌낼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태가 아직은 세례를 받은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유튜브 파인딩 스타 채널에 ‘군인 아빠의 묘비를 껴안은 소년’이 나옵니다.
이 소년의 아버지는 군인이었지만, 얼마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마일스는 식당 주차장에서 20달러를 주워 게임팩을 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식당에 한 공군 중령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아버지도 군인인데 이 20달러를 군인을 위해 쓰고 싶다고 주었습니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 무덤을 찾았고 묘비를 껴안고 있는 그의 사진은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하늘에 ‘살아계십니다’. 그의 행동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인정해주고 응원해 주고 계십니다. 마일즈 눈에 아버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하늘에 아버지가 살아계심을 믿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단이 그의 삶에 영향을 줍니다. 이것이 세례받은 사람의 자세입니다.
이러한 삶의 변화는 오로지 ‘믿음’ 때문에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리오넬 메시가 하늘에 할머니가 살아계신다는 믿음 때문에 이뤄낸 결과를 보십시오.
믿음이 그를 하이에나에서 사자로 만들었습니다. 월드컵 우승까지 시켜가며 나라에 큰 영광을 심어주었습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도 라이언은 사자로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를 위해 희생한 밀러 대위와 동료들이 죽지 않고 하늘에 살아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례의 효과입니다.
우리에겐 하늘에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사람은 하이에나로 살 수 있고 사자로도 살 수 있습니다.
하이에나는 먹고 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합니다.
열심히 살지만, 힘이 듭니다.
또 상처라도 입으면 다른 하이에나들은 그를 버립니다.
그러니 약해 보이면 안 됩니다.
하이에나는 하늘 아버지가 없는 세례 받지 못한 사람의 상징입니다.
안토니오 사지 신부의 『치유의 순간』이란 책에 이와 같은 예화가 나옵니다.
하이에나와 같은 삶을 살며 힘겹게 살던 한 사람이 현자를 찾아왔습니다.
현자는 이 하이에나 이야기해 줍니다.
그런데 어떤 사자가 심하게 다친 하이에나를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아, 겸손한 하이에나가 되라고 하는구나!’라고 하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처음에 겸손해진 그의 모습을 보며 사람들이 그를 좋아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변한 게 없어졌습니다.
그는 다시 외로워졌고 사는 게 힘들어졌습니다.
현자에게 다시 돌아왔을 때 현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집에 가서 하이에나처럼 살지 말고 사자처럼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에게 사자 아버지가 있음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12일 [주님의 세례 축일]
복음: 루카 3,15-16.21-22
늘 아래로 아래로 발걸음을 옮기셨던 하향성의 예수님!
한 국가의 최고 통치자가 보여준 어쩌면 지극히 당연했던 처신이 전 세계적인 주목과 각광을 받던 때가 있었습니다.
우루과이 호세 무히카(1935~) 전 대통령의 스토리입니다.
그는 자신이 받던 대통령의 월급 가운데 90%를 기부하고 100만 원만 가지고 생활했습니다.
그는 초호화판 대통령궁을 집 없는 사람들에게 내어주고, 자신은 경작지가 딸린 허름한 농가에서
출퇴근했는데, 폐차 직전의 털털거리는 승용차를 직접 운전하며 다녔습니다.
공무가 없을 때는 능수능란하게 트랙터를 운전하며 밭일을 직접 하였습니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특별대우를 항상 거절했습니다.
그가 일반 병원 환자 대기실에서 다른 환자들 사이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는 모습에 사람들은
크게 환호했습니다.
그가 일상적으로 남긴 말들은 불멸의 어록으로 남아있습니다.
“저는 대통령이기 이전에 농부입니다.
가진 것이 적을수록 그것을 지키기 위해 평생 노예처럼 일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정말 좋습니다.”
특혜를 거부하는 차원에서 예수님의 모습도 크게 돋보입니다.
그분은 만왕의 왕으로 이 세상에 육화강생하셨습니다.
특별대우를 받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분이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 외아들로서 이 세상 모든 관습이나 율법의 통제나 지배를 받지 않으셔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특혜도 원치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한 평범한 일원으로서 당시 인간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던 모든 측면을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정결례를 받으셨고,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주관한 범국민적 세례 갱신 운동에도 참여하셨습니다.
세례의 주관자이신 예수님이셨기에, 세례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요르단강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예수님의 자기 낮춤이요, 경탄할만한 겸손의 덕입니다.
이런 예수님이 얼마나 마음에 드셨던지, 그분이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 중에, 하늘이 활짝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모습으로 그 분 위에 내리셨습니다. 이윽고 들려오는 하느님 아버지의 목소리!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
오늘 우리 모두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에 들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항상 자신을 극도로 낮추신 예수님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그 어떤 특혜나 예외를 거부하고 늘 아래로 아래로 발걸음을 옮기셨던 하향성의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세례 축일 강론>
(2025. 1. 12.)(루카 3,15-16.21-22)
<세례를 통해 새로 태어났으니 ‘새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온 백성이 세례를 받은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15-16.21-22)”
1) 예수님의 ‘세례 축일’은, ‘공현 대축일’처럼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공적으로
드러내신 일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동방박사들의 이야기는,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경배하고 예물을 드림으로써 예수님이 온 세상 모든 민족의 메시아라는 것이 드러난 일이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일은, 당신 자신을 낮춤으로써 가장 낮은 사람들도 모두 구원하는 메시아라는 것을 드러내신 일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세례에 관해서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이 주고받은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그를 찾아가셨다.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면서 그분을 말렸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마태 3,13-15).”
여기서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라는 요한의 말은, 요한 자신은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야 할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나타낸 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일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메시아께서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2) 요한이 사람들에게 베푼 세례는 회개의 표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요한의 세례를 받으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이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가 없으신 분이 사람들의 죄를 대신 속죄하려고 스스로 죄인이 되신 일이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일은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죄인의 위치로 당신을 낮추신 일입니다.
따라서 두 일은 ‘같은 일’입니다.
<외양간에서 태어나서 구유에 누워 계셨던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의 시작이었고, 세례를 받으신 일은, 그 수난의 중간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온 일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는 “하느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입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당신이 보내신 메시아라는 것을 하느님께서 직접 공적으로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표현으로는 예수님께 하신 말씀이지만, 뜻으로는 모든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4) 신앙인은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세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인데, 그것을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생활을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일이 ‘십자가 수난’에 연결되는 것처럼, 우리가 받는 세례도 십자가에 연결됩니다.
십자가의 길을 각오했고, 또 그 길을 걸어가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에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말만 하거나 생각만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삶으로’ 믿음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는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성사” 라고 배우는데,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콜로 3,1-4).”
신앙인은 현세적이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이미 죽었고’,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살아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새 생명’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새 생명’의 완성을 바란다면, 땅에 있는 것, 허무한 것은 버리고, 위에 있는 것, 영원한 것만 추구해야 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