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군에 장군의 묘와 말(馬)의 무덤에 대한 이야기는 설화나 기록물 등에 의해서 전해져온다.
예산군 대술면 고려 강민첨 장군의 묘(마부의 묘, 말무덤), 봉산면 조선후기 이억 장군 정려(애마의 말 무덤) , 봉산면 봉림리 우봉이씨 정려(옥전리 말 무덤), 광시면 동산리 마실리고개 설화, 관음리 대흥산(봉수산)중턱 박수사묘, 백제시대 예산읍 발연리 원탱이 말 무덤, 덕산현(고덕의 옛 한내장)의마장義馬場, 광시 마사리 박홍 장군묘(말 무덤) 등이다.
이번 코너 에서는 예산군 봉산면 금치리 산 110-6번지 조선 후기 이억 장군 정려旌閭’와 말 무덤에 대한 소개를 한다.
봉산면사무소에 북쪽으로 도로 따라 1.5㎞가다보면 금치교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 기전에 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 1㎞들어가면 금치리 입구가 나온다. 도로면에서 200m 남쪽에 이억 정려가 있다.
이억李檍(1615~1636)의 본관은 경주, 자는 여량汝樑이며, 아버지는 현감 이석립李碩立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힘이 장사로 승마와 활쏘기에 능하였고 병법에 밝았다. 1636년 그는 22세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충청도병마절도사 이의배李義培지휘 하에 전투에 참여하였다. 광주 쌍령雙嶺에서 적을 만나 힘을 다해 싸웠으나 역부족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숙종실록』에 의하면 이억 장군은 1702년(숙종 28) 6월 8일 기사에 “전 참봉 이경창李慶昌이 상언上言하여 그의 아비 이억李檍이 병자년의 난을 당하여 병사 이의배李義培와 함께 적에게 죽었다. 1)포가褒嘉의 2)은전 입기를 청하였는데, 예조에서 3)복주覆奏하여 정려旌閭와 증직贈職을 청하여 윤허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전해진다.
이억 장군 정려는 건립 이후 1858년(철종 8) 중수가 이루어졌다. 정려 내부에 걸린 비각기에 따르면 중수 후 1860년(철종 10]) 후손들에 의해 비석이 세워진 것으로 보이나 현재 비석은 없었다. 정려의 내부 중앙 상단에는 1702년 내려진 ‘충신 증 통정대부병조참의이억지문忠臣贈通政大夫兵曺參議李檍之門’ 명정 현판이 있 뒤편에는 비각기와 정려 중수기가 걸려 있다. 이억 장군 정려는 1986. 11. 9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282호로 지정되었다.
이억 정려 뒤쪽에는 장군의 유서遺書가 있는 가묘 家廟와 말 무덤이 있다. 병자호란 일어나 이억이 사망하자 말이 이억 장군의 시신을 입에 물고 며칠 밤낮을 달려 이곳 장소를 점지한 뒤 죽었다. 말이 물고 온 장군 시신은 없고 옷과 유서만 있어 유품과 옷을 가묘하고 말(馬)무덤을 만들어 주었다고 전해진다.
‘병자호란에서 패전 후 자결한 이억 장군에게 포상할 수 없었다. 예산지역유림, 자손, 현감을 지낸 이근행李勤行등 백여 명이 이 사실을 충청도 관찰사에 진정하여 이억장군의 의절을 알려 조정에 잘 전달되어 조정에서 정문을 내려주고 표창했다.’라는 사실을 이번 조사에서 알게 되었다.
첫댓글 이리 정리를 하면 멋진 자료가 되겠어요 고운 날 보내세요
예산군은 정려가 많아 행복합니다.
이병헌 소설가님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