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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만 평전』이라는, 두꺼운 책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이수만은 가수, 라디오DJ로는 빠른 시간 내에 성공하고 유학까지 우수한 성적으로 갔다 오고는 카페도 성공시키고 MC도 맡기도 했으나, 이후 H.O.T를 데뷔시키기 전까지 10년 동안은 회사 경영 측면에서 계속 실패에 직면했다고 합니다. 여러 시행착오를 겪다가 결국 H.O.T 데뷔부터 계속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여기서는 어릴 때부터 H.O.T 데뷔 때까지 사건 몇몇 흔적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이수만이 열 살 남짓 되었을 때였다. 집에서 전축을 구입하면서 그의 삶에 획기적인 변화가 찾아오게 된다. 이수만의 작은형 이수영이 "수만아, 이 노래 좀 들어볼래."라며 어디서 구해왔는지 비틀즈의 음반을 전축 턴테이블에 걸었다. 이수영은 이 전축으로 비틀즈를 들으면서 비틀즈 마니아로 변모해갔었다. 진정한 명곡은 누구한테나 듣기 좋은 노래이기 마련이다. 이수만도 비틀즈에게 저절로 관심과 흥미를 갖게 되었다. 수영-수만 형제는 어머니가 구축해준 클래식 음악의 울타리를 수시로 뛰어넘어 비틀즈, 레드 제플린 등 당대를 쥐락펴락한 새로운 서구 대중음악의 세력권 아래로 차츰차츰 전향해갔다.
그간 어머니로부터 전수받은 클래식 음악에만 길들여진 이수만의 음악적 지평은 수영의 세심한 안내를 받아가며 또 다른 새롭고 놀라운 세계로 접속되었다. 이수만이 종래 들어온 교향곡이나 오페라 유형의 클래식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강렬한 드럼 소리와 기타 사운드는 그의 심장을 쿵쾅거리며 요동치게 만들었다. 이수만은 과거와 현재의 음악 사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는 큰 귀와 열린 감수성을 남들보다도 훨씬 이른 시기에 가지게 된 것이다.
이수만 행복 77년 10대가수 가요제
이수만은 부모님과 대화를 나눌 때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는 대중음악가수였고, 어머니는 클래식 음악을 전공했음에도 음악적 견해의 차이로 가족들 사이에 갈등한 적은 없었다. 그는 클래식을 몸의 일부처럼 편안하게 들어왔다. 그 덕택으로 이수만은 어려서부터 꾸준히 쌓아온 고전음악의 지식에다가 당대에 유행하는 대중문화의 톡톡 튀는 감각을 자유롭게 접목시킬 수가 있었다. 어머니의 세계와 그의 세계는 세대차도 있고 바라보는 각도와 지점도 달랐다. 그럼에도 가족들 중 누구도 이수만의 생각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작은 형 이수영은 이수만에게 큰 후원자가 되어주었다. 그는 동생의 음악적 시야를 다방면으로 확대시켜준 길라잡이었다. 수영은 자신이 먼저 새롭게 경험한 노래들을 수만의 음악 바구니에 차곡차곡 담아주었다. 이 결과 이수만의 음악 바구니는 점점 더 풍성해져갔다. 이수만 또래의 세대에게 가정에서 음악의 세례를 듬뿍 받는 일은 여간해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터였다. 이를 보건대 음악인 이수만에게 가족의 존재란 축복 그 자체였다.
이수만의 아버지 이희재는 가수라는 평판 나쁜 직업보다는 대학교수로 존경받으면서 자기 분야에서 능력을 펼치는 쪽이 사회에서 더 인정받는 길임을 이수만에게 강조했다. 이수만은 아버지의 조언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그래도 음악에 대한 갈증을 억지로 누르기는 근본적으로 어려웠다. 포크 음악을 듣고 있으면 마음속 깊은 데서 안정감과 자신감이 동시에 샘솟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체험한 것과 비슷한 감정들을 그는 음악에서 느꼈다.
이수만의 방송 DJ 데뷔는 1974년 TBC <비바팝스>를 통해서 이뤄졌다. 이때 전유성은 이수만의 방송원고 작성을 담당하는 비공식 스크립터로 일하게 된다. 이수만이 방송 DJ 시절 공식적으로 그의 방송원고를 쓴 사람은 명사회자 임성훈의 친구이기도 한 경복고 2년 선배인 홍익대 출신 홍정표였다. 전유성은 사실 방송의 전면에 나서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 대신 그는 이면이나 측면에서 사회자나 DJ의 방송진행을 맛깔나게 포장해주는 임무를 잘 했다. 전유성은 본래부터 독서량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의 다독 습관은 제법 독서광으로 통했던 들국화의 보컬리스트 전인권마저 깜짝 놀라게 한 적이 있었다.
전유성과 이수만은 언제나 낙관적이었다. 그 덕분에 긍정적 생각이 긍정적 결과를 낳고, 긍정적 결과가 또 다른 긍정적 생각으로 이어지는 긍정의 선순환 구조를 믿기 어려울 만큼 쉽게 확립해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수만도 전유성처럼 시간이 나면 틈틈이 책을 읽었다. 그는 열심히 읽었고, 열심히 잃은 것과 비례해 톡톡 튀는 아이디어들을 부지런히 개발해냈다.
이수만은 박성원이 담당했던 <비바팝스>를 맡게 되면서 곧바로 실력 발휘에 들어갔다. 전국의 여학생들은 이수만의 차분하고 재치 있는 말솜씨에 푹 빠져들었다. 이수만이 진행하는 방송은 타 방송사의 경쟁 프로그램보다 인기가 매우 높았다. 그의 명성이 올라감에 따라 그가 맡아야 할 프로그램도 늘어갔다. 이수만은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생활했다.
TBC는 이수만에게 방송계의 문을 열어준 방송사였다. 그는 TBC의 <비바 팝스>라는 프로로 방송에 데뷔했었다. 이수만에게 친정과도 같은 방송사가 신군부의 강요로 인해 문을 닫게 된 것이다.
[라디오녹음] 일레븐팝스 (이수만 최희선) 1980.04.28 TBC-FM
(이수만이 유학가기 전 활동했던 여러 라디오방송 중 하나인 듯합니다)
이수만은 타고난 성실성을 발휘해 남모르게 준비한 끝에 국가에서 실시하는 해외유학 자격시험을 통과하였다.
1981년 2월 8일, 장도를 떠난 이수만은 미국 동남부 휴양지 플로리다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사실상 연예인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었다. 그는 플로리다주 멜버른Melbourne에 소재한 FIT(Florida Institute of Technology, 플로리다 공대)의 공업경영학 전공 대학원생으로 학교 문을 들어섰다.
이수만은 고독한 플로리다주에서의 공부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이참에 아예 전공도 바꾸기로 작심했다. 컴퓨터 공학을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한 그는 로스앤젤레스시 북쪽에 자리한 캘리포니아 주립 노스리지Northridge 대학으로 학교를 옮겼다.
김영민은 이 시기의 이수만에 관해 1983년 여름에 있었던 한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수만을 표현하자면 칼과 집념의 사나이입니다. 그처럼 이를 갈며 공부하는 유학생은 처음 봤어요. 주립대학 성적은 올 A를 마크하고 있습니다. 주위에 여자들이 많이 있어도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아요. 그 어떤 유혹도 그의 목표 달성을 위한 집념을 무너뜨릴 수 없을 겁니다. 그는 칼입니다. 그리고 집념입니다."
(...) 유학준비 과정에서 준비한 영어 실력으로는 미국 고등학교 수준에서 통용되는 영어조차 해득하기가 어려웠다. 간단한 의사소통마저 많은 노력과 경험과 훈련이 쌓여야 가능한 일이었다. (...) 게다가 전공을 공업경영학에서 전자공학 계열의 컴퓨터공학으로 바꾸면서 미국 체류기간이 불가피하게 연장될 수밖에 없었다.
미국 특유의 깊이 있고 체계적인 대학원 시스템은 한국에서 건너온 젊은 유학생의 인내심과 지구력을 인간의 한계 끝까지 몰아붙였다. 하루에 16시간을 책상에 앉아 있어야 하는 생활은 정말 지독한 고역이었다.
한국에서는 방송국이 아무 때고 가수를 부를 수 있었다. 가수들도 음반 판매고를 제고하고, 대중들의 관심을 환기시키려는 목적에서 잦은 방송출연을 마다하지 않았다. 미국 가수들은 달랐다. 구태여 방송출연을 자청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의 유명세만 확보하면 경제적 어려움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미국은 세계 최강국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한국보다 7배 이상 높았고, 인구는 6배에 달했다. 그와 같은 경제적 외형을 씨줄로, 인구와 영토적 규모를 날줄로 삼아 미국에는 다른 나라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세계 최대의 음악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수만은 시간이 나는 대로 작곡에 다시 손을 댔다. 청년문화가 있는 웨스트 할리우드, 24시간 음악의 물결이 일렁이는 MTV, 푸른 코발트색으로 빛나는 태평양과 맞닿은 LA의 풍광은 이수만이 음악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신호등 구실을 했다. 음악과의 인연을 피하려고 전공 공부에 아무리 열중해도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미래를 향도할 생각들이 슬금슬금 들어와 그의 머릿속 한 구석을 벌써 악착같이 차지하고 있었다.
1984년 여름에 이수만은 의미 있는 일로 기록될 일시 귀국을 했다. 유학경비가 부족해서 집을 팔아치워야 할 정도였음에도 한국 방문을 단행한 가장 큰 이유는 귀국한 다음 음악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방송계 복귀 가능성도 타진해야 했다. 유학을 마치고 무작정 귀국해 허둥지둥 일자리를 잡으려고 동분서주하는 것은 꼼꼼하고 준비성이 뛰어난 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벼락치기로 일자리를 구하다 보면 유리한 입장에서 연예계 관계자들을 대하기보다는 인정에 호소해 부탁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방송가와 연예계 관계자들을 미리 만나서 복귀에 필요한 사전정지 작업을 수행하면서, "돌아오면 다시 당신들과 함께 일할 계획입니다."라는 점을 확인해두어야만 했다.
미국의 음악산업에는 예비 가수의 체계적 선발과, 선발된 예비 가수의 과학적 훈련이 기본이었다. 가수들은 크고 작은 무대에서 대중들과의 만남을 반복하면서 실력과 내공을 쌓아나갔다. 이러한 복잡한 과정을 거치면서 치미하게 준비된 가수만이 음반을 내놓을 수 있는 시스템이 미국에는 확립되어 있었다. 이렇게 발표한 음반이 빌보드 차트Billboard Chart에서 순위가 급상승하게 되면 MTV를 통해서 전국적 스타로 발돋움했다. 그리고 전미 순회공연을 통해 엄청난 숫자와 액수의 팬과 돈을 끌어 모았다.
한국에서는 미국 가수들이 추구하는 음악적 성향을 뒷받침해줄 만한 음악 시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
MTV의 등장은 이수만에게 역사적 사명감에 가까운 승부욕과 도전정신을 심어줬다. 대학원에서 배운 컴퓨터 공학을 음악과 융합하고 통섭시킨다면 아날로그 방식으로는 꿈꿀 수 없었던 획기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그는 확신했던 것이다.
이수만은 컴퓨터를 이용하게 되면 연주가가 내는 소리의 한계를 수월하게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익히 알고 있었다.
이수만은 지치고 힘들었던 4년간의 미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1985년 6월 12일 귀국하였다.
이수만은 미국 베니스 비치에 있던 헤밍웨이라는 카페에서 이름을 따와 자신이 운영할 카페 이름을 지었다. ... "멋진 카페가 월미도에 있더라"는 입소문보다 더 효과적인 마케팅 전략은 없었다. 헤밍웨이는 월미도 카페촌의 대명사가 되었다. 월미도에서 음악이면 음악, 인테리어면 인테리어, 이국적이고 맛있는 음식이면 음식, 어느 종목으로도 헤밍웨이에 대적할 만한 카페가 없었다.
이수만은 카페는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들여다보면서 방송활동에 역점을 두는 것이 음악사업 진출계획을 수행하는 데 더 바람직한 방향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사실 음악사업에 뛰어들려면 양질의 노래들을 만들어낼 스튜디오와, 음반제작에 필수적인 각종 기자재들이 필요했다. 음향시설 설치비용과 음악기기를 구입하는 데 드는 돈은 장비와 제품들의 가격에 다라 천차만별이었다. 늘 최고만을 추구한다는 원칙을 좇아온 이수만의 입장에서는 원대한 꿈을 펼치기에 앞서서 재정적 문제를 반드시 먼저 짚고 넘어가야 했다.
1986년 6월부터는 KBS-TV <연예가중계>의 메인 MC로 활약하면서 본격적으로 브라운관에서 대중과 만났다. 이수만은 텔레비전으로 돌아온 첫 방송을 모니터해봤다. 전체적으로 몸이 굳어 있었다. 말하는 내용과 얼굴 표정도 어긋났다. 상당히 부자연스러운 장면이 눈에 많이 띄었다.
완전히 적응하려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이수만은 변화된 방송환경에 빨리 적응하기 위해 말과 표정에 관해서 여러 관계자와 전문가에게 자문하였다. 방송을 하면서 이토록 얼떨떨했던 적은 드물었다. 유학으로 생겨난 공백은 얼렁뚱땅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방송출연이 거듭되면서 마침내 차츰차츰 적응을 해나갈 수가 있었다. 방송에 대한 적응이 진척됨과 아울러 이수만의 천부적 진행능력과 언어감각 또한 곧 회복되었다.
Entertainment 중계 (재업) [1986년 9월 14일]
Entertainment 중계 (일부) [1986년 9월 21일]
1986년 하반기를 기점으로 방송일과 헤밍웨이 카페가 모두 잘 풀려나갔다. 이수만은 그제야 미국 유학생활 후반부에 졌던 부채를 조금씩 청산하며 경제적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는 미국에서 구상한 바 있는 컴퓨터를 이용한 음악작업에 동참할 수 있는 사람들을 물색해나갔다. 우선 MBC 방송국의 지인들에게 컴퓨터에 조예가 깊으면서 음악적 재질이 출중한 사람이 있다면 꼭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 MBC에서 이수만과 함께 방송을 만들던 어느 작가가 자신의 친구 중에서 음악을 좋아하는 컴퓨터 도사가 한 명 있다면 중간에 다리를 놓아주었다. 음악도 좋아하고 컴퓨터에도 능숙한, 일반인의 시각에서는 조금은 괴짜일 수도 있는 그 사람은 곽영준이었다. 곽연준은 1959년생으로서 경희대에서 심리학을 전공하면서 부전공으로 컴퓨터를 공부했다. 이수만은 그를 사운드 엔지니어로 기용했다. ...
이수만은 이번에는 곽영준을 통해서 홍종화를 만나게 된다. 홍종화는 실력 있는 젊은 작곡가였다. 홍종화는 이수만의 음악세계를 확장시켰다. ... 홍종화는 이미 중학생 때부터 FM 라디오의 음악방송을 들으며 매일 밤마다 한 페이지 분량에 달하는 음악일기를 써내려갔다. 맨 위에 제목을 적은 다음 곡에 대한 느낌과 평가를 기록하고는 맨 아래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덧붙이는 식이었다.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 끝에 홍종화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는 피아노와 오르간 연주 실력이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서게 되었다. ... 홍종화는 고교 2학년 여름 방학 때 낙원동 악기상가에서 오랫동안 탐내온 신시사이저를 드디어 구입했다. 신시사이저를 장만한 홍종화는 일본의 전설적 신시사이저 연주가이자 작곡가인 토미타 이사오의 곡을 맹렬하게 연습하였다. 자기 나름의 개성과 취향을 담아 클래식 음악들에 대한 편곡도 시도했다. ... 그는 일본 영화음악의 거장 사카모토 류이치를 '키보드 매거진'을 읽고 알게 되면서 그에게 흠뻑 빠져들었다. 사카모토와 자기가 비슷한 면모가 있다고 생각한 홍종화는 그를 닮기를 바랐다. ... 일찍부터 일본 음악에 관심을 기울인 덕분에 그는 여러 전자악기의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가 되었다. 홍종화는 이때 전자음악에 대한 갈증이 더욱 깊어갔다.
1987년 5월, 이수만, 홍종화, 곽영준 3인은 국내 최초의 컴퓨터 밴드 CPU를 창단하였다.
이수만은 미국에서 귀국하면서 신시사이저나 시퀀서를 다루는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는 전자악기들을 이용하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방식의 음악적 실험을 자신이 쓰던 IBM 컴퓨터에 그와 관련된 소프트웨어들을 직접 설치하면서 과감히 시도하였다.
[희귀영상] 87년8월-이수만2집 녹음작업과정(홍종화 전곡작곡)-한국음반녹음 스튜디오
대중의 판단은 정확했고, 그 정확한 판단은 당사자들에게는 또 한 차례의 시련과 위기를 약속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음반은 하룻밤 새에 나오지 않는다. 긴 시간에 걸쳐 작곡가는 곡을 만들고 부수었다 또 만들고, 작사가는 노랫말을 지겹도록 고쳐 쓰며, 가수는 성대를 학대해가면서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야 한다. 어디 그뿐이랴. 실력 있는 연주자들을 그러모아 악기 소리를 가수의 보컬과 지루하게 조율하고 나서야 한 장의 음반이 완성된다. 만만하게 여길 작업이 아닌 것이다. 대중의 싸늘한 냉대는 음반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의 낙심과 좌절을 야기한다. 밥상에서의 입맛도, 작업실에서의 의욕도 잃게 만들기 마련이다. 한번 꺾인 입맛과 의욕은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의기소침의 시간은 강물처럼 하염없이 흘러간다. 맥 빠진 팀원들은 이윽고 하나둘씩 이런저런 이유를 둘러대며 스튜디오를 떠나게 된다.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자 투지도 환멸로 바뀌었다. 본인은 나름 뉴에이지 음악이라고 최선을 다해 내놓았건만 대중은 그것을 매정하게 거부했다. 그는 무엇인가에 갇혀버린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이수만은 역시 낙천적이었다.
1980년대 중반, 이수만이 대중음악 시장의 교본으로 추켜세울 만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사람이 있었다. 미국의 음반제작자 모리스 스타Maurice Starr였다. ... 이수만이 SM 신화를 창조하는 데 결정적인 주춧돌 구실을 해준 것은 H.O.T의 벤치마킹 대상으로 잘 알려진 뉴 키즈 온 더 블록New Kids On the Block이었다. 흑인 프로듀서가 백인 멤버의 보이 밴드를 기획한 것은 백인시장을 겨냥한 과감한 승부수였다.
모리스 스타의 프로듀싱 방식과 바비 브라운의 댄스 음악의 성공을 목격한 이수만은 자기도 시장에서 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자발적 선택이었건, 타의에 대한 강요에 의해서였건 어쨌거나 한국은 모든 분야에서 미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미국 사회에서 유행하는 음악은 한국에도 상륙할 것이 자명했다.
이수만은 음반사에 버금가는 양질의 장비와 시설을 구비한 독립된 스튜디오를 차려서 그가 직접 선발한 가수들의 음반을 제작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싶었다. 비용도 절약되고, 익숙한 분위기의 공간에서 지속성 있게 녹음작업을 실행하면 연주와 노래가 훨씬 안정감 있게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독립된 녹음실을 확보하게 되면 음질을 개선하는 일과, 작업 중 발생한 수정사항을 처리하는 일 모두를 보다 신속하고 원활하게 수행해낼 수가 있었다.
한동준과 김광진은 SM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인기스타로 급부상한다. 한동준의 두 번째 앨범에 들어 있는 곡 '너를 사랑해'는 90년대 초반 최고의 발라드 음악으로 평가받았다. 빠른 댄스는 사태지와 아이들로, 느린 발라드는 한동준으로 양분되는 구도였다. 김광진이 프로작곡가로서 두각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이수만과의 관계를 정리한 후부터였다. 김광진은 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하게 되는 명곡 '마법의 성'을 비롯해 한동준의 '사랑의 서약', 이소라의 '처음 느낌 그대로', 이승환의 '덩크슛'등 내노라하는 걸작들을 쉴 새 없이 만들어내 히트송 메이커로 성가를 높였다.
이수만에게는 지긋지긋한 징크스가 아닐 수 없었다. (...) 그는 성공과 실패는 동전의 양면이라고 여기며 세상의 순리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현진영은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날로 갈수록 점점 흐릿해지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는 노래로 그 기억을 영구보존하기로 결심했다. 현진영의 듯에 감동한 이탁은 그들 모두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장르인 힙합 리듬의 노래 '흐린 기억 속의 그대'를 작사작곡하였다. 그런데 가사와 멜로디는 간단히 나왔는데 편곡 단계에 들어가자 세밀한 마무리 작업의 진도가 좀체 진척되지 못했다. 이럴 때는 반복되는 연습과 지속적 수정만이 정답이었다. 둘은 갖은 고심과 고생을 해가면서 노래를 완성해나갔다. 이탁과 같이 음반을 만들면서 현진영은 창작의 세계가 선물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희귀영상] 현진영,한동준-홍종화작업실-1990.12.29
이수만은 현진영의 2집 앨범을 준비하면서 '흐린 기억속의 그대'를 타이틀곡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현진영 Go, 진영 GO를 비롯한 나머지 곡들로 음반을 다채롭게 구성했다.
1990 이수만, 현진영
회사의 재무구조를 제일 효과적으로 개선시켜줄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서라벌레코드로부터 들어오는 음반 판매 수입이 늘어나는 길밖에 없었다.
1992년 9월 25일, 서라벌레코드는 거래처에 발행해준 지급어음을 결제하지 못하면서 최종 부도 처리되었다.
SM으로서는 서라벌레코드로부터 들어와야 할 수입 5억 원을 공중에 날려버릴 수밖에 없는 형편에 처한 것이다.
회사의 자금줄이 말랐음에도 이수만은 SM의 앞날을 걱정하지 않았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는 음반시장의 미래를 그 누구보다도 앞서 예측할 천리안과도 같은 안목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경찰의 급습이 있을 지 며칠 후에 도하 신문 사회면들에는 유명 연예인 현진영과 이탁에 대해 필로폰 투약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는 소식이 주먹만 한 글씨로 큼지막하게 보도되었다. 이수만에게 좌절을 안기는 불의의 일경이 또다시 터진 것이다.
이수만도 날개가 완전히 꺾여버렸다.
도돌이표처럼 되돌아온 추락을 담담히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이수만은 교회 예배당에 앉아 신의 뜻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인간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세상일은 혼자 힘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새삼 절감하였다. 그는 자신이 부지불식간에 혹 범했을지도 모를 오만과 방심을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대책과 진로를 고민하였다. 기도와 묵상을 마친 이수만은 사업을 하면서 수시로 롤러코스트를 타게 된 이유를 명료하게 깨달았다. 인간의 본성에 관한 통찰이 부족했다는 뼈저린 자각이 바로 그것이었다.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밤늦게까지 작업하는 경우가 많았다.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약속을 잘 지키지 못하는 음악인들을 종종 보아온 이수만은 SM 기획이 제대로 된 기업의 면모를 명실상부하게 갖추려면 일하는 사람들 모두가 투철한 사명의식을 갖고 약속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렇게 해서 이수만은 유영진의 책임감을 확실하게 검증할 수 있었다.
이수만은 SM 창사 초기부터 자사에 소속돼 활동하는 가수들에게 영어단어 하나하나도 원어민에 가깝게 발음할 것을 요구하였다.
가요시장의 주 고객이 될 10대들이 답변한 내용으로부터 이수만과 SM은 '고교생 그룹+춤+노래+새로운 변화'라는 상세한 공식을 도출할 수 있었다.
H.O.T 프로젝트에 선발된 연습생들의 연습 광경은 비디오 카메라로 꼼꼼하게 녹화되었다. SM에서는 팀의 전체적 균형과 어울리지 않는 부분을 끄집어내 반복적으로 수정을 시켰다. 하나의 완성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자정을 넘어서까지 연습이 계속되기 일쑤였다. 피곤함을 못 이긴 연습생들은 때로는 코피를 쏟기도 하였다.
데뷔를 준비하던 약 8개월은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과 다름없는 기간이었다. 보컬 트레이너 역할을 맡은 유영진은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이들 연습생들에게 좀체 칭찬을 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 씩씩하게 인사 잘하자."
이수만은 데뷔를 준비하던 H.O.T 멤버들에게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건 예의바르고 깍듯하게 인사할 것을 당부하였다.
<1995 H.O.T 데뷔 전 연습 영상 H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