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이 지니와 영혼이 바뀐 사육사 진이, 소설 [진이,지니]
https://youtu.be/vHp_9c0FQN0
진이, 지니
정유정 은행나무 2019/05/27
좋아하는 책이 무어냐는 질문에는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지만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는 질문에는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것 같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특정 작가가 집필한 소설을 몇 권이나 읽어야 감히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를 잘 모르겠고, 특정 작가의 작품
만을 고집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되도록 이 작가의 소설만큼은 다 읽으려고 노력하는, 내게 하나의 강박처럼 굳어버린 작가가 있다.
바로 ‘정유정’이다. 『7년의 밤』, 『28』, 『종의 기원』, 『내 심장을 쏴라』,
그리고 이번에 읽은 『진이, 지니』까지 합치면 정유정의 작품을 무려(?) 5권이나 읽은 셈이다.
이 정도면 좋아하는 작가에 대한 물음에 ‘정유정’이라 자신 있게 말해도 되지 않을까·····.
『진이, 지니』는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의 틀을 벗어나지 않던 기존 정유정의 작품들과 달랐다.
보노보 ‘지니’의 몸속에 들어간 인간 ‘진이’의 영혼이 벌이는 사흘간의 삶의 투쟁이라는 비현실적인 설정이 소설의
바탕을 이룬다. 그렇기 때문에 환상적이고, 강렬하고, 뭉클하다.
그녀의 전작들처럼 탁월한 흡입력 또한 여전했다.
500p 가까이 되는 긴 분량을 빠르게 읽으면서도 줄거리를 놓치고 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으니 말이다.
『진이, 지니』는 ‘구원’을 향한 두 남녀의 치열한 삶의 투쟁이다
. 콩고 킨샤샤에서 길을 잃고, 비를 피해 들어간 가게에서 철장 안에 갇힌 보노보 ‘지니’를 만난 침팬지 사육사 진
이. 그리고 서른이 될 때까지 뚜렷한 목적 없이 살다가 집에서 쫓겨난 ‘백수’ 민주. 진이는 밀렵꾼들의 위협이 두려
워 구조를 바라는 지니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한다.
그리고 민주는 과거 공익근무의 일환으로 독거노인들께 음식 배달을 하던 중, 자신을 향한 노인의 부름을 듣고도
그냥 지나쳤다가 이후 싸늘한 주검이 된 노인을 보고는 이제껏 죄책감을 안고 살아왔다.
각자 다른 결의 죄의식을 안고 사는 진이와 민주는 우연한 만남으로 엮여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진이는 자신이 킨샤샤에서 외면했던 지니를 살리는 대신 자신이 죽거나, 혹은 지니의 몸을 빼앗아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다. 민주는 아무런 득이 없고, 진이의 영혼이 진이 자신의 몸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확실한 보장이 없
는데도 불구하고 진이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거나, 혹은 낯선 타인에 불과했던 진이를 뿌리치고, 자신의 여정을
계속할 수 있다. 결국, 진이는 지니가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민주는 진이가 자신의 임무를 다할 때까지 그녀의 곁을 지켜준다.
둘은 ‘자신의 안위 혹은 타자의 구원’이라는 양자택일의 기로에서 후자를 택했고, 결국 죄의식에 갇혀있던 자기
자신을 구원한다. 타자를 위한 선택이 자기 자신의 구원으로 이어진 것이다.
자신의 목숨이 지상에 머무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동안, 최선을 다해 지니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고 죽음을
맞는 진이를 보면서 질문 하나를 던지게 된다.
‘과연 나라면 선택의 기로에서 제 삶을 홀로 편히 걸어나갈까, 아니면 다른 생명이 기댈 제 등을 내어줄까·····.’
작가는 생명의 존엄성, 그리고 그것을 무참히 짓밟는 인간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신임 동물원장이 치적을 쌓기 위해 침팬지의 출산 전 과정을 언론과 일반인에게 관람시킨다.
제각기 다른 지역에서 잡혀온 다양한 동물들이 어느 중개상의 뜬장에 갇힌 채 먼 바다를 건너다 죽음을 맞기도 한다.
침팬지쇼에 나갈 동물들의 교육에는 어김없이 회초리와 목줄이 등장한다.
동물들이 생명체가 아닌 ‘구경거리’, ‘인간의 즐거움을 충족시키기 위한 개체’로 전락한 순간을 수도 없이 목격한다.
인간들은 서로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듯, 동물에게도 예의를 갖추지 않는다.
진이는 보노보 지니가 되어 고통의 현장을 객관적인 거리에서 보기도, 직접 겪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더 이상 지니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었고, 더 이기적일 수 없었다.
그동안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즐겁게 봐왔던 동물원과 서커스 그리고 좁은 유리 상자에 갇힌 채 새 주인을 기다리
는 강아지들을 볼 수 있는 애견숍까지·····
이 모든 게 커다란 비극이었다. 인간이 동물의 고통에 완전히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진.
『진이, 지니』는 매력적이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인간은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선택을 내릴까, 나는 동물을 독립된 하나의 존엄한 개체로 여겨왔
는가, 난 아물지 않은 가슴속 상처의 쓰라림을 견디고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는가’ 등의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며
책에 빨려들 수 있었다. 정유정의 작품을 볼 때마다 항상 느끼지만 그녀의 작품은 –지극히 진부한 표현이지만- 한
편의 영화 같다. 거대한 스크린이 머릿속에 펼쳐져 빠르고, 웅장하고 디테일한 서사가 펼쳐진다.
되레 영화보다 더 장업한 저자의 서사 구현 능력 때문에 영화는 결코 그녀의 작품을 본 뜰 수 없을 것이라는 기분
좋은 무력감에 젖기도 한다.
물론 이 작품을 읽으며 아쉬운 점도 있었다. 중간중간 다소 이질적이고 과한 기교로 비치는 수사들이 있었다.
하나 예를 들면, 의외의 결정을 내린 떠돌이 민주가 「철학자 대니얼 데닛은 “우리가 영혼에게 바랄 수 없는 게 있
다면, 그것은 바로 영혼이 바라는 대로 행동할 자유다.”」라는 말을 떠올리는 대목에서 다소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
다. 그래도 정유정은 이런 작은 흠보다 눈부신 장점들이 훨씬 많은 작가다.
‘무람없이, 윤색하자면, 하늑대며’ 등 다채로운, 내겐 생소했지만 그렇기에 새롭게 알 수 있었던 우리말이 가득해
좋았다.
‘작가의 말’에서 그녀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세계 각국의 영장류학자, 교수들, 사육사를 만나 가며 취재를 했다는
데 실로 작품 곳곳에서 그녀가 공부를 많이 했다는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모두가 잠든 육군훈련소에서 보내는 마지막 주말 아침 6시에, 벌떡 일어나 아무런 방해 없이 『진이, 지
니』의 드라마틱한 결말을 보며 눈물을 글썽일 수 있어서 좋았다. 분명, 『진이, 지니』는 이 책을 읽은 순간의 장소
와 분위기가 주는 특수성 때문에라도 내게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거 같다.
출처: https://book.skku.edu/%EC%A7%84%EC%9D%B4-%EC%A7%80%EB%8B%8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