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儒學思想 및 傳統思想을 硏究, 承繼, 普及하고
現代化, 生活化하여 先賢의 崇高한 理念을 오늘에 되살리며
道德社會를 具現하는 靑壯年들의
2022년 6월先賢遺蹟踏尋
慶北 永川
2022年 6月 5日
社團法人 博 約 會
大邱廣域市支會 靑壯年委員會
22년 5月 경북 영천 선현유적 답심 일정
예정시간 | 답심지 | 주소 |
08:20 | 반월당 현대백화점 맞은 편 | |
08:40 | 범어네거리 대구은행 건너편 | |
09:30 | 영천조양각(永川朝陽閣) | 경북 영천시 문화원길 6 (창구동) |
10:00 | 임고서원(臨皐書院) | 경북 영천시 임고면 포은로 447(양항리 493) |
10:40 | 환구세덕사(環丘世德祠) | 경북 영천시 임고면 환구길 142-1 (선원리) |
11:10 | 연정고택(蓮亭故宅) | 경북 영천시 임고면 선원연정길 49-10 (선원리) |
13:40 | 하천재(夏泉齋)・부비각(附碑閣) | 경북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산660-2번지 |
14:30 | 용계서원(龍溪書院) | 경북 영천시 자양면 용산리 303번지 |
15:20 | 옥간정(玉磵亭) | 경북 영천시 화북면 별빛로 122 (횡계리) |
모고헌(慕古軒) | 경북 영천시 화북면 별빛로 106 (횡계리) | |
16:30 | 자천교회(慈川敎會) | 경북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 773번지 |
2022년 6월 선현유적자료집 목차
일정------------------------------------------------------------ | 2 | ||
目次------------------------------------------------------------ | 3 | ||
인물편(人物篇 )-------------------------------------------------- | 4 | ||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 ------------------------------------ | 4 | ||
경은(耕隱) 이맹전(李孟專) ------------------------------------ | 5 | ||
훈수(塤叟) 정만양(鄭萬陽)------------------------------------- | 6 | ||
지수(篪叟) 정규양(鄭葵陽)------------------------------------- | 7 | ||
유적편(遺跡篇) -------------------------------------------------- | 9 | ||
1. | 영천조양각(永川朝陽閣)------------------------------------ | 9 | |
2. | 숭렬당(崇烈堂)--------------------------------------------- | 11 | |
3. | 창대서원(昌臺書院)----------------------------------------- | 12 | |
4. | 임고서원(臨皐書院)---------------------------------------- | 13 | |
5. | 포은유허비((圃隱遺墟碑)------------------------------------ | 13 | |
6. | 영천경주김씨지사공종택(永川慶州金氏知事公宗宅)------------- | 14 | |
7. | 환구세덕사(環丘世德祠)------------------------------------- | 15 | |
8. | 함계정사(涵溪精舍)----------------------------------------- | 16 | |
9. | 영천 연정 고택(永川蓮亭古宅)------------------------------- | 17 | |
10. | 영천 매산고택과 산수정(永川 梅山古宅과 山水亭) ------------ | 17 | |
11. | 하천재(夏泉齋)--------------------------------------------- | 18 | |
12. | 강호정(江湖亭)--------------------------------------------- | 19 | |
13. | 삼휴정(三休亭)--------------------------------------------- | 19 | |
14. | 사의당(四宜堂)--------------------------------------------- | 20 | |
15. | 오회당(五懷堂)--------------------------------------------- | 21 | |
16. | 용계서원(龍溪書院)----------------------------------------- | 22 | |
17. | 옥간정(玉磵亭)--------------------------------------------- | 23 | |
18. | 모고헌(慕古軒)--------------------------------------------- | 25 | |
19. | 영천자천교회(永川慈川敎會)--------------------------------- | 26 | |
20. | 오리장림(五里長林)----------------------------------------- | 28 |
Ⅰ. 인물편(人物篇)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
① 가계(家系)
이형상(李衡祥)의 본관은 전주. 자는 중옥(仲玉), 호는 병와(甁窩) 또는 순옹(順翁)이며, 1653년(효종 4) 5월 23일 인천 죽수리(竹藪里) 소암촌(疏巖村)[현 인천광역시 남구 주안6동]에서 태어나 1733년(영조 9) 11월 30일 과천(果川) 객사에서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조는 송화현감(松禾縣監) 이승기(李承器)이며, 증조는 강음현감(江蔭縣監) 이사민(李師閔), 조부는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 이장형(李長馨)이다. 부친은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 이주하(李柱厦)이며, 모친은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성균진사(成均進士) 윤세구(尹世耈)의 딸이다.
부인은 은진 송씨(恩津 宋氏)로 통덕랑(通德郞) 송지규(宋之奎)의 딸이다. 아들은 통덕랑(通德郞) 이여강(李如綱)과 생원(生員) 이여항(李如沆), 생원(生員) 이여성(李如晟), 진사(進士) 이여적(李如迪), 이여극(李如克)이며, 사위는 좌랑(佐郞) 김징경(金徵慶), 오명운(吳命運)이다.
② 활동 사항
이형상은 1677년(숙종 3) 사마시에 장원을 하여 진사(進士)가 되었으며, 1680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1681년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고 이듬해 율봉도 찰방(栗峰道察訪)에 제수되었다.
1685년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봉상시 직장(奉常寺直長),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호조 좌랑(戶曹佐郞)을 지냈다. 1686년 통훈대부(通訓大夫) 병조정랑(兵曹正郞), 광주부경력(廣州府經歷)을 지내고, 1687년 성주목사(星州牧使)로 부임하여, 교화에 힘써 20조의 훈첩(訓帖)을 반포하고 유생 150명을 선출해 관비로 교육시켰으며, 인조 때 의사 이사룡(李士龍)을 위해 충렬사(忠烈祠)를 지어 사적을 길이 남겼다.
또한 파괴된 채 방치되던 독용산성(禿用山城)을 민정(民丁)을 차출해 3일 만에 완축시켰다. 이듬해 기사사화(己巳士禍)와의 관련으로 사직하였다가 12월 금산군수(錦山郡守) 겸 전주진관병마동첨절제사(全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로 제수되었다.
1690년 경오년(庚午年) 청주목사(淸州牧使), 동래도호부사(東萊都護府使)를 거쳐 이듬해 동래도호부사 겸 동래진병마첨절제사(東萊鎭兵馬僉節制使)을 지냈다. 동래부사 때는 관할 지역이 일본과 접경된 관문으로서 국방상 요지임을 절감하고 방비에 더욱 힘쓰는 한편, 당시 많은 폐단을 일으키는 일본의 구송사(九送使)를 폐지시키려 노력하였다.
이듬해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충무위부사직(行忠武衛副司直) 등 여러 벼슬을 모두 사양하였으나, 10월 양주목사(楊州牧使) 겸 양주진병마첨절제사(楊州鎭兵馬僉節制使)로 제수되었다. 1692년부터 1698년까지 경주부윤(慶州府尹)과 양주목사 등 매년 조정에서 벼슬을 내렸으나 노모봉양과 시묘(侍墓) 등의 이유로 사양하였으며, 1699년에 경주부윤(慶州府尹) 겸 경주진병마절제사(慶州鎭兵馬節制使)를 제수받았다.
1700년 날로 심해지는 조정의 붕당에 염증을 느끼고 벼슬을 버리고 경상북도 영천에 복거(卜居)하며 호연정(浩然亭)을 지었다. 1701년 제주목사(濟州牧使) 겸 제주진병마수군절제사(濟州鎭兵馬水軍節制使)를 제수받아 제주의 풍습을 유교적 풍속으로 바꾸는데 힘을 썼다.
즉 석전제(釋奠祭)를 행하던 삼읍(三邑)의 성묘(聖廟)를 수리하고 이름 높은 선비로서 선생을 정해 글을 가르치게 하였으며, 그리고 고을나(高乙那)·양을나(良乙那)·부을나(夫乙那) 등 삼성의 사당을 세우고 동성혼인 등의 풍속을 금지하였고, 해녀들이 나체로 잠수하는 것을 금하였다.
또한 지방민들이 제주도 남부에 있는 한라호국신사(漢拏護國神祠)인 광정당(廣靜堂)에서 기도하던 풍습을 금지시켰으며, 이 밖에도 신당 129개를 모두 불태워 음사(淫祠)를 철저히 단속하고 미신적으로 흐르는 불교를 배척해 사찰을 불태우고 유교를 권장하였다.
이처럼 목민관으로서 학문을 진흥시키고 문화재와 고적을 수리·보존했으며, 미신적인 인습과 악습을 타파해 도민(島民)의 풍속 교화와 생활 개선에 힘썼다. 이에 당시 백성들은 송덕비 4개를 세워 그의 청덕(淸德)을 칭송했다고 한다.
1704년 제주목사를 그만두고 6월에 영천으로 돌아왔고, 1705년(숙종 31) 영광군수(靈光郡守) 겸 전주진병마절제사(全州鎭兵馬節制使)로 부임하였다. 이후 수차례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저술 활동에 전념하였다.
이형상은 이처럼 고위 관직에 여러 차례 임용되었지만, 관리로서의 본분을 지켜 1796년(정조 20)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③ 학문과 저술
『병와집(甁窩集)』 외에 보물 제652호로 지정된 『선후천(先後天)』 3책, 『악학편고(樂學便考)』 3책, 『악학습령(樂學拾零)』 1책, 『강도지(江都志)』 2책, 『남환박물지(南宦博物誌)』 1책,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1첩, 『동이산략(東耳刪畧)』 1책, 『둔서록(遯筮錄)』 1책, 『복부유목(覆瓿類目)』 1책, 『정안여분(靜安餘噴)』 1책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형상 [李衡祥]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경은(耕隱) 이맹전(李孟專)
① 개설
이맹전은 조려(趙旅), 원호(元昊), 김시습(金時習), 성담수(成聃壽), 남효온(南孝溫)과 함께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② 가계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백순(伯純), 호는 경은(耕隱). 지밀직사 이견간(李堅幹)의 후손이며 이군상(李君常)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이희경(李希慶), 아버지는 이심지(李審之), 어머니는 공부전서 여극승(呂克勝)이다. 선대가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호장곡(好章谷) 일대에 세거하였다.
③ 활동사항
이맹전은 1427년(세종 9)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이 되었다가 사간원좌정언, 지제교, 소격서령을 거쳐 거창현감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살펴보고 장차 단종에게 화가 미칠 것을 예견하고 벼슬을 버리고 장인인 직제학 김성미(金成美)가 사는 선산 망장촌(網障村,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읍 오로리)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은거 중 청맹과니에다 귀까지 멀어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 하여 문을 닫고 30년을 하루같이 폐인으로 자처하며 손님도 사절하면서도, 의관을 정제하고 단종의 유배지인 영월 쪽으로 배좌(拜坐)하였고 북쪽인 한양 쪽으로는 향하지도 앉지도 않았다. 또 매월 삭망(朔望)에는 영월을 바라보며 향배(向拜)하였으니 집안사람들이 물으면 신병을 위해 기도한다고 하였다.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의 아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가끔 찾아 배알하면 문을 닫고 마음 속 깊은 이야기를 하였다. 훗날 점필재가 『이준록(彛尊錄)』에 참뜻을 기록하여 세상에서 알게 되었다. 부인 김씨(金氏)와 90세까지 해로하였는데 집안에는 한 끼의 양식도 비축된 것이 없었다고 한다. 저술로 잡서(雜書)가 있었다고 하나 병화로 소진하고 없다. 묘소는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금호리 미석산(彌石山) 재궁동(齋宮洞)에 있다.
④ 상훈과 추모
시호는 정간(靖簡)이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 묘갈(墓碣)을 지었으며, 퇴계(退溪) 이황(李滉),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의 사적을 전했다. 1781년(정조 5) 이조판서와 양관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선산 월암서원(月岩書院), 함양 서산서원(西山書院), 영천 용계서원(龍溪書院)에 배향되었다. 경은선생유허비각(耕隱先生遺墟碑閣)이 경상북도 구미시 형곡동 댓샘 옆에 세워졌으나 현재 구미시립중앙도서관으로 이전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맹전 [李孟專]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훈수(塤叟) 정만양(鄭萬陽)
① 개설
영일 정씨(迎日鄭氏)는 고려 시대 한림학사(翰林學士)이며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을 시조로 하고 있다. 문과 급제 후 봉익대부행전공판서(奉翊大夫行典工判書)인 정인언(鄭仁彦)과 그의 아들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판서(工曹判書) 정광후(鄭光厚)부터 영천 전촌(錢村)에 옮겨 살았다.
② 가계
정만양(鄭萬陽)의 자는 경순(景醇), 호는 훈수(塤叟)이고, 1664년(현종 5) 10월 13일 안동(安東) 천전리(川前里)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1730년(영조 6) 7월 1일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조는 어모장군(禦侮將軍)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 정안번(鄭安藩)이며, 증조는 부사(府使) 정호인(鄭好仁), 조부는 정시행(鄭時行)이다. 부친은 진사(進士) 정석주(鄭碩冑)이며, 모친은 의성 김씨(義城金氏)로 생원(生員) 김방열(金邦烈)의 딸이다.
정만양의 첫째 부인은 진사(進士) 이지욱(李之煜)의 딸로 1남 3녀를 두었고, 둘째부인은 조문하(曺文夏)의 딸로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정일기(鄭一夔)·정일연(鄭一燕)이며, 사위는 박평(朴枰)·권분(權賁)·안경원(安慶遠)·조지경(趙之經)이다.
③ 활동 사항
정만양은 처음에는 종조부 정시연(鄭時衍)에게 수학하여 문리를 밝게 통달하였으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아우 정규양(鄭葵陽)과 더불어 보현산 아래 횡계(橫溪)로 들어가 깊은 학문을 닦아 경사(經史)에서부터 성리학(性理學)·예학·천문·지리·역학·경제·정치·율려(律呂)·과제(科制) 등에 이르기까지 두루 정통하였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정호(程顥)·정이(程頤) 형제와 같다고 하였다. 퇴계학에 몰두하면서 윤증(尹拯)·정제두(鄭齊斗)·정시한(丁時翰)·이형상(李衡祥) 등과 학문에 관한 토론과 서신 왕래가 많았으며, 학파를 초월하여 학문의 진수를 탐구하였다.
아우와 우애가 무척 깊어 저서를 낼 때도 반드시 함께 이름을 붙여 ‘훈지록고례(壎篪錄攷禮)’라 하고 자손에게도 모두 훈지(壎篪)[형과 아우를 일컬음]의 뜻을 따라 우애를 다하기를 유언하였다. 정만양은 1724년(경종 4)에 순릉참봉(順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④ 학문과 저술
목판본인 32권 16책의 『훈지양선생문집(壎篪兩先生文集)』과 6권 3책의 속집(續集)이 있다. 『곤지록(困知錄)』의 내외편, 『가례차의(家禮箚疑)』와 『개장비요(改葬備要)』, 『상지록(尙知錄)』, 『모현록(慕賢錄)』, 『심경질의보유(心經質疑補遺)』, 『이기집설(理氣輯說)』, 『계몽해의(啓蒙解疑)』, 『의례편고(疑禮便攷)』, 『치도의설(治道擬說)』, 『산거일기(山居日記)』 등의 저술이 있다.
⑤ 묘소
정만양의 묘소는 영천시 북안면(北安面) 원당리(元堂里)에 있으며, 광릉(廣陵) 이만운(李萬運)의 갈문(碣文)이 있다.
⑥ 상훈과 추모
영천시 화북면(花北面) 횡계리(橫溪里)에 옥간정(玉磵亭)과 모고헌(慕古軒), 횡계서당(橫溪書堂)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정만양 [鄭萬陽]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지수(篪叟) 정규양(鄭葵陽)
① 개설
영일 정씨(迎日鄭氏)는 고려 시대 한림학사(翰林學士)이며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지낸 정습명(鄭襲明)을 시조로 하고 있다. 영일 정씨는 문과 급제 후 봉익대부행전공판서(奉翊大夫行典工判書)인 정인언(鄭仁彦)과 그의 아들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판서(工曹判書) 정광후(鄭光厚)부터 영천 전촌(錢村)에 옮겨 살았다.
② 가계
정규양(鄭葵陽)의 자는 숙향(叔向), 호는 지수(篪叟)이며, 1667년(현종 8) 4월 29일 영천시 대전동(大田洞)에서 태어나 1732년(영조 8) 임자년(壬子年) 6월 15일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조는 어모장군(禦侮將軍)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 정안번(鄭安藩)이며, 증조는 부사(府使) 정호인(鄭好仁), 조부는 정시행(鄭時行)이다.
부친은 진사(進士) 정석주(鄭碩冑)이며, 모친은 의성 김씨(義城金氏)로 생원(生員) 김방열(金邦烈)의 딸이다. 부인은 인천 이씨(仁川李氏)로 교관(敎官) 이석복(李碩馥)의 딸이며, 후사(後嗣)가 없어 족제(族弟) 정중록(鄭重祿)의 아들 정일규(鄭一珪)로 뒤를 이었으며, 사위는 조인경(趙麟經)이다.
③ 활동 사항
정규양은 어려서부터 모든 경서와 사기를 읽어,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이현일(李玄逸)·윤증(尹拯)·정시한(丁時翰) 등에게 수학하여 학문의 폭을 넓혔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형 정만양(鄭萬陽)과 더불어 보현산 아래 횡계(橫溪)로 들어가 형 정만양과 함께 경사(經史)에서부터 성리학·예학·천문·지리·역학·경제·정치·율려(律呂)·과제(科制) 등에 이르기까지 두루 연구하여 정통하니 사람들은 이들을 정호(程顥)·정이(程頤) 형제와 같다고 하였다.
특히 퇴계학에 몰두하면서 윤증(尹拯)·정제두(鄭齊斗)·정시한(丁時翰)·이형상(李衡祥) 등과 학문에 관한 토론과 서신 왕래가 많았으며, 학파를 초월하여 학문의 진수를 탐구하였다.
학설은 이황(李滉)의 이기이원론을 사상적 핵심으로 삼아 이(理)는 본연이요, 기(氣)는 성절(性節)로서 이는 허무공적(虛無空寂)이 아닌 만물을 생성하는 우주의 근원이요, 기는 칠정(七情)에서 나뉘어 용(用)이 수반되는 기질성(氣質性)으로 분리하니, 이는 곧 주(主)요, 기는 곧 자(資)라 정의하였다.
정규양은 형과 우애가 무척 깊어서 저서를 낼 때도 반드시 이름을 함께 붙여 ‘훈지록고례(壎篪錄攷禮)’[‘훈지’란 형과 동생을 부르는 말]라고 하고 자손에게도 우애를 중히 여길 것을 유언하였다.
정규양은 1714년(숙종 40)에 암행어사의 장계로 현릉참봉(顯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④ 학문과 저술
목판본인 32권 16책의 『훈지양선생문집(壎篪兩先生文集)』과 6권 3책의 속집(續集)이 있다. 『곤지록(困知錄)』의 내외편, 『가례차의(家禮箚疑)』와 『개장비요(改葬備要)』, 『상지록(尙知錄)』, 『모현록(慕賢錄)』, 『심경질의보유(心經質疑補遺)』, 『이기집설(理氣輯說)』, 『계몽해의(啓蒙解疑)』, 『의례편고(疑禮便攷)』, 『치도의설(治道擬說)』, 『산거일기(山居日記)』 등의 저술이 있다.
⑤ 묘소
정규양의 묘소는 영천시 화북면(華北面) 죽전리(竹田里) 용골산(龍骨山)에 있으며, 진양(晉陽) 정종로(鄭宗魯)의 갈문(碣文)이 있다.
⑥ 상훈과 추모
영천시 화북면(花北面) 횡계리(橫溪里)에 옥간정(玉磵亭)과 모고헌(慕古軒), 횡계서당(橫溪書堂)이 남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규양 [鄭葵陽]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유적편(遺跡篇)
1. 영천조양각(永川朝陽閣)
① 개설
조양각(朝陽閣)은 서세루(瑞世樓)라고도 하며, 고려 말에 명원루(明遠樓)로 창건되어 여러 차례 시대의 변란에도 지금까지 우뚝 서있는 영천을 상징하는 유적이다. 조양각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누각으로 손꼽히는 경상남도 밀양의 영남루·진주의 촉석루 등과 함께 영남 3루라고도 전하며, 안동의 영호루·울산의 태화루·양산의 쌍벽루·김천의 연자루와 합쳐 영남 7루라고 기록하기도 한다.
영천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를 비롯해 수많은 명현들이 조양각을 거쳐 갔으며 현재까지 그들의 시가 편액되어 남아있다. 영천은 조선 시대 부산에서 한양에 이르는 영남대로의 중간 지점으로 금호강변의 조양각에서 왜의 조선통신사가 기착점으로 이용하고 마상연(馬上宴) 등 큰 행사를 벌이기도 했다. 아쉽게도 창건 당시와 조선 시대의 규모와 모습은 잃었으나 여전히 금호강 청석벽 위에 늠늠하게 서 있다.
현재 영천 문화원이 그 옆에 위치해 영천 문화의 초석이 되고 있다. 과거에는 대구·경산·의성·군위·청송·경주·포항 등지에서 영천을 거쳐 타 도시로 가려면 반드시 이곳 조양각을 거쳐야 했다. 당시에는 영천 읍성이 있어 읍성내의 동서남북 대로의 교착지점에 조양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② 위치
조양각은 행정구역으로 경상북도 영천시 문화원길 6[창구동 1-1]에 있다. 대구·경산 등지에서 영천 시내를 들어오면 서문통[영천시 성내동과 화룡동의 교차로]을 거쳐 포항 방면의 동문통[영천시 문외동], 청송 방면의 북문통[영천시 문내동, 교촌동]으로 이어진다. 조양각은 이 두 통로의 중간에 놓인 교차점[남문통]에 놓여 있다. 현재 영천 문화원과 조양 공원을 찾으면 그 옆에 조양각이 보인다.
③ 변천
명원루[조양각]는 1934년에 작성된 『영양지(永陽誌)』에 따르면 고려 말 부사 이용이 1368년(공민왕 17)에 창건했다고 한다. 명원루의 당호는 당나라 문장가인 한퇴지(韓退之)의 시 중에 ‘원목증쌍명(遠目增雙明)’[훤희 트인 먼 곳 경치를 바라보니 두 눈조차 더 밝아 오는 듯하다]이란 시구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1482년 군수 신윤종(申允宗)이 동서별실을 고쳐 동실을 청량당(淸凉堂), 서실을 쌍청당(雙淸堂)이라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1485년에도 명원루를 중수하고 포주(苞廚)·구영(九楹)을 별도로 지었다고 한다. 그 후 1592년 7월 27일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1638년 군수 한덕급(韓德及)이 명원루 터에 누각 15칸[현재의 규모]과 협각 3칸을 지어 조양각이라 했다.
1676년 군수 이만봉(李萬封)이 중수했고 1702년 군수 권영경(權寧經)이 중창했다. 1742년 군수 윤봉오(尹鳳五)가 중창하고 누를 서세루(瑞世樓), 내문을 남덕문(覽德門), 외문을 곤구문(昆邱門)이라 했다. 1762년 군수 조재득(趙載得)이 중수했고 1804년 군수 이의교(李義敎) 때 외문인 곤구문이 5월에 화재로 소실되어 같은 해 10월에 중건하고 내의루(來儀樓)라 했다. 중건된 외문 내의루는 고루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 후 1870년과 1886년에 각각 중수되었다.
일제 강점기인 1921년 가을에 군수 장윤규(張潤圭)가 수선했고, 그 후 일본인들이 조양심상소학교를 건립하면서 누각의 내외문을 비롯한 부속건물을 모두 철거했다. 해방후인 1947년과 1956년, 1983년에도 군수 최효경, 군수 박돈양, 시장 마용수가 중수했다.
가장 최근인 손이목 시장 때인 2006년에는 초석 일부 교체, 방[실]의 창호와 벽을 복원, 서까래 교체, 번와, 단청 등의 전면 해체를 통해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조양각은 건립된지 640여 년이 지나도록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중창·중건·중수·수선 등이 이루어졌다. 이는 조양각이 지니고 있는 상징성 때문으로 여겨진다.
④ 형태
조양각은 보현산에서 발원한 두 강[자호천·고현천]이 양쪽으로 흘러 조양각 일대에서 다시 하나로 합해지는 지점인 현 위치에 세워진 영천의 상징적 고적이다. 금호강[남강]변 북쪽 벼랑[청석바위] 위에 남동향으로 앉아 있는 조양각은 현재 정면 5칸, 측면 3칸의 중층 누각으로 현재의 모습은 1638년에 이루어 진 것이다. 하지만 조양각 주변으로 협각·내문·외문 등은 1921년에 소실되어 현재까지 복원되지 못했다.
평면은 오른쪽 협칸의 뒷열과 중간열 칸에 방을 두고 나머지는 마루로 구성한 단순한 평면이다. 하지만 건물 가장자리 전체에 계자각난간을 두른 헌함을 두었고 그 하부를 누하공간으로 처리했다. 진입은 일반적으로 강에 면한 누각의 특성상 배면진입으로 처리했다. 구조는 암반 위를 정지하고 큼직한 자연석 초석 위에 건물전체를 원형기둥을 세워 오량가의 가구를 완성했다.
기둥 상부는 창방과 장혀 사이를 화반 2구씩 놓고 이익공을 처리했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처리해 위용있는 모습을 갖추고 있다.
⑤ 현황
강 절벽에 우뚝 서 있는 조양각은 시원한 바람이 늘 불고 확 트인 경관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주변은 최근 조양 공원이 조성되어 한층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다가서 있다. 바로 옆 동쪽에는 영천 문화원이 있고 그 주변에 산남의진비와 영천지구 전승비가 서 있다. 또 조양각 북서편 약간 높은 곳에는 사현대라는 비림이 조성되어 있고 서쪽으로는 와계정이 있다.
건물 정면인 강변 쪽에는 ‘서세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진입부쪽인 배면에는 ‘조양각’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또 내부에는 정몽주를 비롯한 수많은 명현들의 시가 편액되어 걸려 있고, 상량문·중건기 등 많은 기록들이 전한다.
사방이 개방된 만큼 주위를 철제 울타리를 쳐 보호하고 있고, 건물 처마와 천정부에 부시[새가 날아들지 말라고 쳐 놓은 그물 망]가 있어 약간 시야를 가리고 있다.
1981년 4월 25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44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⑥ 의의와 평가
조양각은 영천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누각으로, 규모가 가장 크고 역사적 상징성이 있는 건물이다. 십 여 차례의 중건과 중수가 이루어진 만큼 영천에서는 아끼고 길이 보존해야 하는 당위성을 갖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주변의 부속건물들이 일제 강점기에 훼손된 후 아직까지 복원되지 못한 점은 아쉽고 하루 빨리 고증을 통해 복원되기를 바란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천조양각 [永川朝陽閣]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2. 숭렬당(崇烈堂)
① 위양공 이순몽(威襄公 李順蒙, 1386~1449)
위양공 이순몽(威襄公 李順蒙, 1386~1449)은 세종 때의 무장이다. 영천에서 태어나 4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에서 성장한 그는 태종 5년(1405) 음직(蔭職)으로 벼슬에 오른 뒤 1417년에는 무과에 급제, 본격적인 무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세종 1년(1419) 우군절제사에 임명된 그는 그해에 있었던 쓰시마 정벌에 참여하였으며, 세종 15년(1433)에는 중군절제사가 되어 여진족 토벌에 나서기도 했다. 세종의 총애가 두터워 복장군(福將軍)이라 불리기도 한 그는 1434년 경상도 도절제사를 지냈으며 1447년에는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에 올랐다.
② 특징
영천 시내 도심에 자리한 숭렬당(崇烈堂)은 이순몽의 사제(私第)였다. 얼핏 그 이름만 들어서는 무슨 충신이나 유명한 장군을 받드는 사당쯤으로 생각되고 크기나 평면구성으로 보아서는 서원이나 향교의 강당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대청 위에 걸린 「숭렬당중수기」에는 이순몽이 ‘휴식을 취하고 생활하던 곳’(燕息起居之所)이라 했으니 일반 주택의 사랑채였음에 거의 틀림이 없다. 그래 그런지 집도 주인을 닮아 다분히 무인풍이다. 웬만한 양반집이나 대갓집의 사랑채와는 견줄 수 없을 만큼 덩치가 크고 지붕도 높아 우선 그 크기부터 무장의 풍모가 있다. 육간대청만 해도 넓다고 하는데 아홉 칸이나 되는 대청은 툭 트여 시원스럽고, 대청 양쪽으로 방을 하나씩 들였을 따름으로 구조도 복잡하지 않아서 단순명쾌하고 호방한 무인의 기질에 들어맞는다. 집 크기에 어울리는 굵은 서까래와 기둥, 큼직큼직한 익공, 부재들에 드러나는 단순소박하면서 건실한 초각 등도 묵직하면서 간결명료하여 주인의 신분과 잘 어울린다.
③ 평면 구조
집은 두 줄로 막돌허튼층쌓기한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워 정면 5칸 측면 3칸의 별당식 평면을 이루고 있다. 기둥 사이의 간격은 가운데 세 칸은 같지만 좌우의 툇간은 약 한 자가 좁다. 가운데 세 칸은 모두 우물마루를 깔아 대청이 아홉 칸이나 되는데다 정면에는 대청보다 약간 낮게 턱을 지워 툇마루를 덧달아 크고 넓은 마루가 이 집의 호방한 분위기를 이끈다. 좌우 툇간에는 2칸통의 온돌방을 설치하고 앞퇴는 마루를 놓아 대청과 연결시켰다. 방 뒤로는 반반칸의 개흘레1)가 덧대어져 있고, 대청 뒤로는 개흘레 너비만큼의 쪽마루가 붙어 있다.
④ 공포 구조
기둥 위에 짜인 공포는 익공이 이중으로 겹쳐진 이른바 이익공식인데 주심포계와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초기적인 형식이다. 장혀 위에 놓인 외목도리의 힘을 익공으로 전달하는 행공(行工)2), 창방 위에 얹혀서 장혀를 받치고 있는 화반 등에 보이는 초각수법도 조선 초기의 양식에 속한다. 이 점은 두 방의 측면 벽에 난 붙박이 광창도 마찬가지여서 두껍고 투박한 넉살창 또한 고식에 든다. 사방의 귀기둥 밖으로는 창방, 장혀, 도리의 뺄목이 유난히 길게 빠져나와 있는데, 이는 지붕의 구조에 따른 필연적인 현상이면서 숭렬당의 또 다른 특색을 이루는 부분이기도 하다. 공포의 익공이 이중으로 겹쳐진 이익공 형식이나 주심포계와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초기적인 형식을 띠고 있다.
⑤ 지붕 형태
지붕을 살펴보면 가운데 3칸은 맞배지붕을 만들고 양 옆 툇간 위는 거기에 덧대어 부섭지붕으로 처리하였다. 가적지붕이라고도 부르는 이런 형태의 지붕은 영천지방 일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형식으로, 맞배지붕이 팔작지붕으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주는 형태이다. 이 부섭지붕이 앞뒤의 처마선과 엇비슷한 길이로 길어지다보니 귀기둥 밖으로 내민 부분을 받치기 위해 뺄목이 길게 빠져나오게 되는 것이다.
⑥ 역사적 의의
이처럼 곳곳에 오래 된 양식이 돋보이는 숭렬당은 1433년에 지어진 건물로 조선 초의 일반 건축으로는 아주 희귀한 예에 든다. 1970년 보물로 지정된 뒤 해체·복원하면서 처음 모습에서 바뀐 부분을 바로잡아 원형을 되찾았다. 편액은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국권을 상실한 뒤에는 대동단과 임시정부의 요인으로 활약한 김가진(金嘉鎭, 1846~1922)의 글씨이다.
숭렬당 뒤로는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사당이 있다. 이곳에 이순몽 장군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9월 상정(上丁), 곧 간지(干支)에 처음 정(丁)이 드는 날 제사를 받드는데, 그의 직계자손이 없어 유림에서 모신다. 그 때문인지 숭렬당도 관리상태가 허술하고 사당 안쪽은 버려져 있다시피 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숭렬당 (답사여행의 길잡이 8 - 팔공산 자락, 초판 1997. 11쇄 2009.
3. 창대서원(昌臺書院)
① 배향인물
정대임의 본관은 영일, 자는 중경(重卿), 호는 창대(昌臺)이며 1553년(명종 8) 6월 4일에 태어났다. 정대임은 임진왜란에 분기하여 일어나 일신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창의하여 적을 토벌하고, 왜군을 공격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정제의 자는 가승(可升), 호는 남창(南窓)이며, 1689년(숙종 15) 8월 2일에 영천시 명산동(鳴山洞)에서 태어나 1765년(영조 41) 1월 4일에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창대 서원은 1697년 정대임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고 후에 정제를 추향하였다.
② 위치
창대 서원(昌臺書院)은 영천 시내 중앙 사거리 근처에 있으며, 금호강을 바라보고 있다.
③ 변천
창대 서원은 1697년 지방 유림의 공의로 정대임을 추모하기 위하여 영천시 녹전동에 건립된 후, 1786년(정조 10)에 정제를 추향하였다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그 뒤 1955년 영천시 녹전동 창대마을에서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그 뒤 200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복원하였다.
④ 형태
창대 서원 경내 건물로는 사우(祠宇)·신문(神門)·쌍전당(雙全堂)·동재·문간채 등이 있다.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1.5칸의 팔작지붕 겹처마 건물이다. 정대임과 정제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쌍전당은 강당으로, 누각형 건물로서 정면 4칸, 측면 1.5칸의 팔작지붕 겹처마 건물로 평면의 구성은 전면 반 칸을 툇마루로 꾸미고 뒤쪽 3칸 모두를 온돌방을 두었다. 툇마루의 전면과 측면에 난간을 둘렀다.
동재(東齋)는 강당의 측면에 직각으로 축을 틀어 대문채 뒤편에 두었다. 정면 3칸, 측면 1.5칸의 맞배지붕 겹처마 건물로서 평면은 강당과 마찬가지로 전면 반 칸을 툇마루로 꾸미고 뒤쪽 3칸 모두를 온돌방을 두었다.
⑤ 현황
창대 서원에서는 매년 3월 중정(中丁)[두번째 정일(丁日)]과 9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7변(籩)7두(豆)이다. 유물로는 은환도(銀丸刀)·옥각대(玉角帶)·지도·전투복 등이 있으며, 재산으로는 전답 8,000평·임야 150정보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창대 서원 [昌臺書院]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4. 임고서원(臨皐書院)
임고서원(臨皐書院)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역사 인물인 포은(圃隱) 정몽주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 명종(明宗) 8년(1553)에 노수(盧遂), 김응생(金應生), 정윤량(鄭允良), 정거(鄭?) 등의 사람들을 창솔하여 부래산(浮來山)에 창건을 시작하여 이듬해인 1554년에 준공하였으며, 명종으로 부터 사서오경과 많은 위전(位田)을 하사받은 사액서원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선조 36년(1603) 현 위치에 이건(移建)하여 재사액(再賜額) 받았으며, 인조 21년(1643)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을 배향하고, 정조 11년(1787)에는 지봉(芝峰) 황보인(皇甫仁)을 추배하였으며 고종 8년(1871)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고종 16년(1879)에 존영각(尊影閣)을 건립하여 영정을 봉안하였다.
1965년에 복원하여 포은 선생만 복향하고 1980년부터 1999년까지 1차 성역화사업을 마치고 2001년 지봉(芝峰) 황보인(皇甫仁)을 다시 배향하였으며, 묘우는 문충사(文忠祠), 내삼문은 유정문(由正門), 강당은 흥문당(興文堂),동협은 경의협(敬義夾), 서협은 명성협(明誠夾), 동재는 수성재(修省齋), 서재는 함육재(涵育齋), 문루는 영광루(永光樓)이며, 경내 심진각(尋眞閣)과 전사청(典祀廳) 포은 선생 신도비(神道碑)‚단심가비(丹心歌碑), 백로가비(白鷺歌碑) 등이 있다.
5. 포은유허비(圃隱遺墟碑)
유허비란 한 인물의 옛 자취를 밝혀 후세에 알리고자 세우는 비로, 이 비는 포은 정몽주 선생의 효행을 기리고 있다.
정몽주 선생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며 삼은(三隱)의 한사람이다. 공민왕 5년(1355) 부친상을 당하여 묘 곁에서 3년상을 치르고, 그후 공민왕 14년(1365) 모친상까지 당하여 역시 3년상을 지내였다. 이토록 지극하였던 그의 효성이 조정에 보고 되자, 출생지인 이곳 우항리 마을에 비를 세워두도록 하였다.
비는 반듯하고 널찍한 사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운 모습이다. 앞면에는 효행을 행한 마을이라는 뜻의 ‘효자리(孝子里)’라는 글귀를 세로로 큼직하게 새겼다. 공양왕 원년(1389)에 세운 것으로, 그후 잃어버렸던 것을 조선 성종 18년(1487) 땅속에서 찾아내어 비각을 세워 모시고 있다.
6. 황강리 영천경주김씨지사공종택(永川慶州金氏知事公宗宅)
① 개설
김흡의 자는 협지(浹之), 경주 김씨(慶州金氏) 규정공파(糾正公派) 후손으로 조선 시대 문과에 급제해 장사랑(將仕郞) 정릉참봉(定陵參奉)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를 지냈다. 묘소는 영천시 자양면(紫陽面) 용산리 원각마을에 있다. 종택 최상부에 조성되어 있는 사당은 임진왜란 때 창의한 공으로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으로 추증(追贈)된 노항(魯巷) 김연(金演)[1552-1592]의 부조 묘이다.
② 위치
영천경주김씨지사공종택은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황강리 죽등마을에 있다. 황강리 죽등마을은 임고면소재지에서 포항시 기계면 방면으로 2.2㎞ 정도 가다보면 좌측에 있다. 마을길로 들어가 황강못 끝단 도로변에 종택이 보인다.
③ 변천
영천경주김씨지사공종택은 16세기 무렵 김흡이 자신의 종택으로 건립했으나 화적떼에 의해 소실되었다. 그후 자손들이 19세기 초에 중건했다고 한다. 1999년 12월 30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73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④ 형태
영천경주김씨지사공종택은 경사진 대지에 장방형으로 토석 담을 두르고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ㄷ’자형 사랑채와 ‘一’자형 안채가 ‘口’자형을 이루고 있다. 안채 후면에는 높은 축대 위에 내삼문을 들어서면 노항 김연의 부조 묘와 신도비가 있다. 전체적으로 문간채·사랑채·안채·내삼문·사당이 축선을 이루며 남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종택의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4칸으로 ‘ㄷ’자형을 이루고 있다. 세분하여 살펴보면 전면의 두 칸 대청과 사랑방 두 칸이 ‘一’자형의 사랑채에 좌우 측면에 부속채를 사랑채와 직교하게 붙여 놓은 형태이다. 정면 우측에서 두 번째 칸에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있다.
사랑채의 지붕은 홑처마의 팔작지붕으로 처리하고 직교된 부속채 끝단은 맞배지붕이다. 대청과 사랑방 전면에는 반 칸의 퇴를 두고 그 가장자리에 계자각 난간을 두른 헌함을 두었다. 대청으로 오르기 위해 난간을 끊어 주 출입부로 삼았다. 사랑방 뒤로는 벽장을 두었고 우측 대청 후면으로는 외여닫이문을 달아 쪽마루와 연결된다. 구조는 누하부에 원형 초석을 앉힌 다음 전면에만 두리기둥[원주, 원형 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네모기둥을 세웠다. 기둥 상부에는 간결한 소로 수장으로 처리해 오량 가의 가구를 완성했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1.5칸의 ‘一’자형 평면으로 좌측으로부터 정지, 1.5칸 안방, 1.5칸, 대청 마루방 2칸, 건너방 1칸으로 배열되어 있다. 온돌방과 대청 전면에는 반 칸 퇴를 두었고, 배면에는 벽장과 쪽마루를 부설했다.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처리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내삼문을 들어가면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당이 ‘一’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전면 전체를 퇴 칸으로 구성하고 기둥 상부를 수서와 앙서로 초각해 이익공 양식으로 처리했다. 원형 초석 위에 전면에만 두리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네모기둥을 세웠다. 목부재 전체에 화려한 단청을 입혔고 지붕은 맞배지붕에 박공면에 풍판을 달았다.
⑤ 현황
영천경주김씨지사공종택의 솟을대문 상부에 ‘노항김선생구택(魯巷金先生舊宅)’이라는 현대식 현판이 걸려 있고, 사랑방 전면 상부에는 ‘보본당(報本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종택의 현 소유자는 김종철로 되어 있다. 이 마을 입구에는 김연의 아들인 남강공(南岡公) 김취려(金就礪)가 강학했던 남강정사(南岡精舍)가 넓다란 연못 안에 있다. 또 종택 서쪽에 경주 김씨 김준희(金俊熙)의 정자인 소강정(小岡亭)이 있다.
⑥ 의의와 평가
영천경주김씨지사공종택은 안채·사랑채·사당·내삼문·문간채가 정연하게 배치되어 종가로서 규모를 잘 갖추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천경주김씨지사공종택 [永川慶州金氏知事公宗宅]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7. 환구세덕사(環丘世德祠)
1990년 8월 7일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87호로 지정되었다.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臨皐面) 선원리(仙源里)에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천의병장으로 활약하여 전공을 세운 정세아와 아들 정의번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777년(정조 1) 서재 뒤쪽에 충현사(忠賢祠)를 지어 배향하고 학문을 닦는 도장으로 사용하였다.
그후 경주복성전(慶州復城戰)에서 왜적에게 포위되자 아버지를 구출하고 장렬하게 전사한 정의번에게 충효정려(忠孝旌閭)가 내려져 사당 왼쪽에 충효각(忠孝閣)이 세워졌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거되었다. 지금은 충효각과 서고·고직사 등 부속 건물 2동만 남아 있으며, 정현목이 소유·관리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환구세덕사 [環丘世德祠]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8. 함계정사(涵溪精舍)
① 개설
함계정사는 조선 후기 유학자인 정석달이 후진 양성을 위해 건립한 정사 건물이다. 정석달은 경상북도 영천(永川) 출신으로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가행(可行), 호는 함계(涵溪)이고, 부친은 대호군(大護軍) 정시심(鄭時諶)이다. 문집으로는 『함계집(涵溪集)』 5권이 전한다.
② 위치
영천 시내 시청 오거리에서 포항·안강 방면 국도 25호선을 타고 조교 삼거리까지 진행한 다음 임고면 방면으로 좌회전한 후 지방도 69호선을 타고 4.9㎞가량 가면 임고면사무소가 있는 양항리가 나온다. 면사무소에서 2.6㎞를 더 진행하면 평천리가 나오는데 길 왼쪽에 농협하나로마트에서 좌회전하면 선원마을로 가는 길이다. 이 길을 타고 300m가량을 가면 자호천을 건너는 선원교가 나오고 다리를 건너면 선원마을로 들어서게 되는데, 함계정사에 가기 위해서는 마을을 가로지르는 선원천을 한번 더 건너야 한다. 이 다리가 신선교로, 다리를 건넌 후 10시 방향을 바라보면 산자락에 있는 함계정사를 만나게 된다.
③ 변천
함계정사는 1702년(숙종 28)에 안락재라는 이름으로 초창한 후 1779년(정조 3) 정석달의 손자인 일찬공이 중창하여 함계정사라 했다.
④ 형태
함계정사는 정사 건물 1동과 일각 대문 2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경사진 대지에 터를 마련하고 방형의 토석 담장을 둘러 일곽을 구성했다. 정사 건물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대지에 남동향을 바라보게 배치했다.
정사 정면에 자리한 일각 대문을 들어서면 대지 배후로 치우쳐 정사가 자리하고 있다. 정사는 정면 3칸, 측면 1.5칸 규모의 3량 가로 구성한 홑처마 맞배 기와집인데 박공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평면 구성은 가운데 대청 좌·우에 방 1칸식을 들인 중당협실형(中堂夾室型)으로 전면에 퇴 칸을 마련했다. 측면과 배면으로 쪽마루를 달아 공간 확장과 통행에 편리를 꾀했다. 퇴 칸 전면과 측면에는 계자각 난간을 설치했는데 출입은 좌·우 측면으로 한다.
구조는 경사지를 적절히 이용해 자연석으로 만든 여섯 벌대 내지 여덟 벌대의 높은 기단을 마련하고 자연석 초석을 놓은 다음 원기둥을 올렸는데 퇴 칸 전면 기둥 하부에는 누하주를 세웠다. 상부 가구 구조는 원기둥 위에 창방을 건너지르고 주두를 올린 다음 장혀와 도리를 얹어 서까래를 받도록 했다. 주간 상의 창방과 처마도리 밑 장여 사이에는 소로를 받쳤다.
창호는 온돌방 전면과 측면에는 머름 위에 쌍여닫이 세살문을 청방 간에는 삼분합 들문을 각기 달았고 대청 배면에는 쌍여닫이 울거미 널문을 달았다. 방 전면과 측면에 설치한 창호 아래에는 통머름을 설치했는데 문설주를 세우고 견실한 머름청판을 끼운 후 머름중방을 걸었다.
우측 방 배면에는 반침을 마련하고 쌍여닫이 미닫이문을 달았으며 우측 방 배면 상부에는 환기와 채광을 위한 벼락닫이 창을 달았다. 전면 툇기둥 좌·우측으로 설치한 홍살 형식의 가림벽을 설치해 난간 가장자리로 통행할 수 없도록 막아두었다.
⑤ 현황
함계정사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30호로 지정된 후 보수가 이루어졌으며 문중의 지속적인 관리로 중건 당시의 모습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으나 일부분에서 개축된 부분이 확인된다. 처마 끝부분에는 양철 물받이를 달았고 우측 방 측면 창호는 비닐로 창호를 막아두었으며 가운데 대청 천장에는 선풍기를 설치해 미관을 해치고 있다.
⑥ 의의와 평가
함계정사는 선원마을에서도 비교적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마을 앞으로 펼쳐진 넓은 들과 선원천을 조망하도록 했다. 방 전면과 측면으로 설치된 창호 구조와 전면 툇기둥 좌·우측으로 설치한 홍살 형식의 가림벽 부분은 여타 다른 정사 건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함계정사가 가지는 특징적인 부분이다. 1990년 8월 7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30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함계정사 [涵溪精舍]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9. 영천 연정 고택(永川蓮亭古宅)
국가민속문화재 제107호. 넓은 대지에 연당이 있는 이 집은 1756년(영조 32)에 지었다고 전한다. 일심당(一心堂)은 그 때 붙여진 정침의 당호라고 한다. 안채와 사랑채·곳간채 등이 직각으로 결합하여 □자집을 구성하였고 서남향으로 앉혀져 있다. 개울 옆의 연정(蓮亭)은 별당으로서 사랑채 마당가에 뚝 떨어져 남향으로 앉혀져 있다. 안채는 안방이 2칸이고 대청이 4칸인데 안방의 뒤쪽에는 골방과 툇마루가 있고, 안방의 아래는 3칸 크기의 큰 부엌이 있다.
안방 아래로 부엌이 가로 길게 굽어나가는 ㄱ자집 형식은 영남지역의 대가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구조이다. 또 부엌 끝으로는 3칸의 긴 광채가 이어져 있다. 2칸의 안방은 가운데에 장지를 두어 아랫방·윗방으로 구분해 쓸 수 있게 되어있다.
대청의 건너편에는 한 칸이 좀 넘는 크기의 건넌방이 있는데 이 집에서는 작은방이라 부른다. 이 작은방 아래에서 직각으로 꺾어 붙인 외양간과 방앗간, 광을 가진 아래채가 부엌밑 광채와 마주하였으며 방앗간에는 디딜방아가 설치되어 있다.
사랑채는 一자집이며 사랑방·대청·대문·광·작은사랑·마루방 등으로 이루어졌다. 사랑방은 한 칸의 온돌이며 전퇴를 제외한 대청에는 3면에 분합을 달아서 사랑방의 협소함을 보완하였다.
대청의 전퇴 마루 끝에는 긴 평난간이 갖추어져 검소한 가운데 운치를 더하고 있다. 외양간과 여러 광채의 벽은 판재(板材)로 탄탄히 꾸민 판벽이다. 사랑채 단하 마당 끝에는 대략 3칸 크기의 마판이 있었으나 철거된 지 오래다.
연정은 마당 밖을 굽어 흐르는 작은 계변에 있는데 건너편 급준한 언덕 위에 오래된 소나무와 잡목들이 들어차 있으며 맑은 물이 끊이지 않고 조용히 소리 내어 흐르므로 깊은 산골과 같은 정취를 돋운다.
계류는 부정형으로 크게 넓혀서 연못을 만들었는데 인공의 티가 거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다. 정자는 3칸의 온돌방과 5칸 크기의 대청으로 구성되어 있고, 연못가 동변에는 네 개의 퇴기둥을 내세워서 기와지붕을 덧달아 내었다. 이것은 차양으로 처마를 깊게 드려서 일조와 더위를 차단하고자 한 것이다. 몸채와 정자의 합리적인 구성과 작은 계류를 막은 연못의 존재는 주인의 자연애와 운치스러운 생활관, 인생의 지혜를 잘 나타내준다. 이 집은 조선시대 향원(鄕園)유적으로서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천 연정 고택 [永川蓮亭古宅]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0. 영천 매산고택과 산수정永川 梅山古宅과 山水亭 ]
현소유주의 10대조인 매산(梅山) 정중기(鄭重器: 1685∼1757)가 원래 살던 선원리에 천연두가 만연하자 이곳으로 옮겨와 짓기 시작하여 그의 아들 정일감(鄭一鑑)이 완성하였다고 한다. 위치는 삼매리에서도 10여 리 가량 들어간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3칸의 솟을대문이 있는데 가운데칸만 대문간이고 양쪽에 마판(馬板)과 행랑방으로 꾸며져 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대문 양측면에 고방(庫房)이 있었다고 하나 후대에 고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대문을 들어서면 1.5m 높이의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본채가 있다.
본채 건물은 전형적인 ㅁ자형 평면이다. 경주의 관가정(觀稼亭)이나 양동 서백당(良洞書百堂)과 같은 계열이다. 단지 여기서는 정면 5칸, 측면 5칸의 건물 오른쪽 앞으로 사랑채와 누마루를 사랑방과 직각을 이루어 덧붙인 형식이 특이하다. 정면에서 보면 누마루가 한 칸 앞으로 나온 형식이다. 누마루는 자연암반을 이용하여 두리기둥을 세우고 마루를 깔았다. 건물 왼편으로도 1칸의 마루를 두고 난간을 둘렀다.
안채는 가운데 대청을 깔고 좌우로 온돌방을 설치하였다. 대청은 두리기둥을 썼고, 머리에는 초익공의 공포를 짜는 등의 장식을 하였다. 마루대공(臺工)에는 행공(行工)첨차로 마루도리 밑의 장혀를 받들고 있는데, 형태가 견실하다. 대청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부재(部材)도 연약하며 볼품이 없다. 지붕은 맞배지붕이 서로 직교하는 형식인데, 누마루 부분은 합각을 하여 마치 팔작지붕처럼 보인다. 사당은 안채 옆, 사랑채의 뒷면에 배치하였다.
집의 서북쪽 골짜기 암벽 위에는 산수정이라는 정자가 세워져 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5칸인데 좌우 양쪽 칸은 온돌방이며 가운데칸과 앞퇴에는 마루를 깔았다. 원래는 아랫사랑, 고방채 등 여러 부속채도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안채, 사랑채, 사당, 그리고 산수정만 남아 있다.
지정 당시 명칭은 '영천 정재영씨가옥 및 산수정'이었으나, 2007년 1월 29일 정중기의 호를 따서 ‘영천 매산고택 및 산수정’으로 변경되었고, 2017년 2월 28일 '영천 매산고택과 산수정'으로 바뀌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천 매산고택과 산수정
11. 하천재(夏泉齋)
① 개설
하천재(夏泉齋)는 조선 중종 때의 학자이며 장사랑을 역임한 이배원(李培源)과 이의(李椅) 부자와 함께 통정대부 작위 이수눌(李守訥)과 이수겸(李守謙)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건립한 재사이다.
② 위치
자양면사무소에서 지방도 69호선을 타고 평천리 방향으로 200여m 이동하면 좌측에 하천재로 들어가는 샛길이 있다. 길 초입 좌측에 ‘벽진 이씨 하천재 입구’ 표지석이 세워져 있고 10여m 뒤에 하천재가 있다.
③ 변천
하천재의 창건연대는 밝힐 수 없으나 1978년 영천댐 건설공사로 성곡리 아래[현 영천댐 수몰지 내]에서 마을 위쪽 성곡리로 이건하였다. 하천재의 관리자인 이종활[남, 58세]의 증언에 따르면 영천댐 수몰 이전에 재실이 있었으며, 어릴적[초등학교 입학 전]에 재실에서 놀았던 기억이 난다고 한다. 건물의 부재와 증언을 비교해 볼 때 하천재의 건립 시기는 근대로 추정되며 이건(移建) 시 부재의 교체 등 약간의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④ 형태
하천재는 가로로 긴 직사각형의 대지에 재사, 부속사, 대문채를 ‘ㄷ’자 형태로 배치하고 일곽은 블록담장을 둘렀다. 재사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규모이며, 가운데 둔 두 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 1칸, 우측에 2칸의 방을 드린 형식이다. 우측방의 배면에는 벽장을 설치하고 배면을 제외한 모든 면에 쪽마루를 설치하였다. 대청 전면은 판벽사이 문을 설치하여 폐쇄시켰다. 정지한 대지에 기단을 낮게 조성하고 화강석 초석을 놓았다. 기단 상면은 시멘트 모르타르로 마감하였다.
기둥은 모두 각주를 세웠는데 단면크기가 180×180㎜로 규모에 비해 세장한 것을 사용하였다. 기둥상부는 장혀와 납도리를 수장하고 보아지를 받쳐 보를 결구하였다. 가구는 3량 구조로 대들보 위에 제형 대공을 세우고 종도리를 받게 했다. 종도리 장혀 하부에는 상량 묵서가 기록되어 있다. 창호는 방의 경우 정면과 양 측면에 창을 내어 쌍여닫이 세살문을 달았다. 청방 간 출입문은 아래 굽널을 끼운 사분합 들어열개문을 달았다. 대청 전면에는 아래 굽널을 끼운 사분합 들어열개문을 달아 마루방을 이루게 하였다. 대청 뒷벽은 쌍여닫이판문을 달았다. 지붕은 홑처마에 팔작지붕으로 함석가첨을 덧달았다.
⑤ 현황
하천재는 뒤로 산을 등지고 재사, 부속사, 대문채가 ‘ㄷ’자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재사 좌측에 3칸 규모의 대문을 세워 재사로 출입케 하였으며, 우측에는 3칸 규모의 부속사를 배치하였다. 건물 및 주변의 관리 상태는 양호한 편이고 묘제는 매년 음력 10월 초에 지낸다.
⑥ 의의와 평가
영천댐 건설로 이건된 하천재는 창건연대와 창건 당시 건물의 형태를 파악하기 어려우나 벽진 이씨 문중에서 선조에 대한 정신을 본받고 추앙하는 풍습을 잘 지켜나가고 있는 측면에서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재실은 영천 지역 재실의 특징이 약간 엿보이며 근현대로 오면서 변화되는 건축사적인 면도 살필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하천재[재사] [夏泉齋]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12. 강호정(江湖亭)
임진왜란 때의 의병대장 정세아가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기 위해 세운 누각이다. 선조 32년(1599)에 지은 후 여러 차례의 보수공사가 있었는데, 지금의 건물은 영천댐 건설공사로 인해 1977년에 현 위치로 옮겨 다시 지은 것이다.
정세아는 임진왜란 당시 영천·경주지방을 되찾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전쟁이 끝난 뒤 국가에서 수여하는 모든 영예를 사양하고, 고향인 용산동에 이 정자를 지어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가르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양쪽에는 각 2칸의 방이 있고, 가운데 1칸이 마루로 꾸며져 있으며 화려한 난간을 설치하였다. 뒤에는 2채의 작은 부속건물이 있는데, 그 마당을 통해 정자로 오르게 되어있다.
13. 삼휴정(三休亭)
정면 4칸, 측면 1칸반의 팔작지불건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75호. 임진왜란 때 영천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웠던 정세아(鄭世雅)의 증손 호신(好信)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후손들이 지은 건물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는 호를 삼휴(三休)라 하였으며, 학문에 전념하는 한편, 자연을 벗삼아 작사(作詞)하는 데 뜻을 두었다고 전해진다. 정자에 걸려 있는 원운(原韻)을 살펴보면, 이 정자는 여울가에 자리하고 있어 물소리가 베갯머리로 스며들었고, 주위는 마치 푸른 병풍을 둘러쳐놓은 듯이 수많은 봉우리가 이어져 경승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천댐이 축조되면서 수몰당하는 운명에 놓여 지금은 옛자리를 굽어보는 산비탈로 옮겨져 옛 정취를 찾아볼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다락집으로 반육축(半陸築)되어 있으며, 기둥 가운데 앞줄의 5개만이 원주(圓柱)이고, 나머지는 육축(陸築:지면에 축조하는 일) 위에 초석(礎石)을 놓고 평주(平柱)처럼 세워져 있다. 평면의 4칸 가운데 중앙의 2칸이 대청으로 꾸며져 있고, 좌우 2칸에는 반칸의 전퇴(前退)를 두고 각기 1칸 크기의 방을 들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삼휴정 [三休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4. 사의당(四宜堂)
①개설
사의당은 1732년(영조 8)에 정중호(鄭重鎬)·정중기(鄭重岐)·정중범(鄭重範)·정중락(鄭重洛) 사형제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학문 연구와 인재 양성을 위해 삼귀리에 건립한 건물이다.
② 위치
영천 시내 시청 오거리에서 포항·안강 방면 25번 국도를 타고 조교 삼거리까지 진행한 다음 임고면 방면으로 좌회전한 후 69번 지방도를 타고 5km 가량 가면 임고면소재지가 나온다. 임고면에서 자양면 방면으로 6km가량을 더 진행하면 영천호를 만나게 되고 영천호를 우측에 두고 5.5km 가량을 더 가면 자양면소재지가 나온다. 자양면사무소에 이르기 전에 좌측으로 기룡산[해발700m] 줄기가 시작되는 곳에 영천댐 건설로 인한 집단 이전지가 있는데 이곳에 사의당이 있다.
③ 변천
사의당은 1726년 삼귀리에 처음 건립되었으나, 퇴락이 심해 1802년 용산리에 이건 중창했다. 1977년 3월 영천댐 건설공사로 인해 현재의 장소로 이전, 복원하였다. 1975년 8월 18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74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④ 형태
사의당은 강학 공간인 사의당과 수의헌 두 건물과 행랑채, 고방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경사지를 이용하여 짜임새 있게 배치하였다. 대문 간채를 들어서면 고방채와 사의당 측면이 보이고 두 건물 사이로 난 통로를 들어서면 넓은 안마당 너머에 수의헌 정면이 바라보이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튼‘ㄷ’자 형태이다. 사의당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으로 평면 구성은 왼쪽에서부터 2칸 마루에 방 3칸이 붙은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경사지 위에 5벌대 자연석 기단을 마련한 후 초석을 놓고 기둥을 올린 형태의 3량 가 건물로 2칸 대청 전면에만 원기둥을 사용했고 기둥 상부에는 소로를 수장했다. 대청 전면에 계자각 난간을 부설하고 우측방 전면에는 쪽마루를 설치해 난간 부분과 이어지도록 했다. 창호는 청방간에는 4분합들문을 달았고 대청 배면과 측면에는 외짝바라지창과 쌍여닫이창을 각기 달았다. 아울러 방 전면과 배면에는 쌍여닫이 세살문과 외여닫이 세살문을 달고 방과 방 사이에는 외여닫이 세살문을 달아두고 있다. 수의헌은 정면 6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으로 좌측으로부터 정지 1칸, 온돌방 2칸, 마루 2칸, 방 1칸을 붙여 구성하고 있다. 대청 전면과 올돌방 전면에는 쪽마루를 덧달아 공간 확장을 꾀했으며 정지와 방 사이에는 다락을 설치해 공간 활용도를 높였다. 창호는 청방간에는 외여닫이 굽널띠살문을 대청 배면에는 쌍여닫이 띠장문을 각기 설치했고 방 전면에는 쌍여닫이 띠살문을 달았다. 고방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으로 상인방과 하인방 사이에는 판벽 처리하고 상인방과 장혀 사이에는 심벽 처리했다. 좌측으로부터 2칸은 마루를 드린 형태로 가운데를 벽으로 구분하고 있으며 우측 1칸은 전면에는 따로 벽을 설치하지 않았다. 행랑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으로 가운데 대문칸을 기준으로 온돌방 1칸씩을 좌·우에 붙여 구성하고 있다.
⑤ 현황
사의당은 성곡리에 이전할 터를 마련할 당시, 기존 건물의 배치를 고려해 넓은 대지를 마련한 다음 건물들을 배치했기 때문에 건립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경사지를 적절히 활용하여 적절히 건물을 배치한 후 현재까지 관리가 잘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전이 이루어진 후에는 크게 개변된 부분은 확인되지 않는다.
⑥ 의의와 평가
사의당은 영천댐 건립에 따라 이전하게 되었으며 함께 이전해온 전통 가옥들이 주변에 모여 있어 관리가 쉬운 편이다. 사의당이 자리한 집단 이전단지에는 사의당을 포함한 다양한 성격의 유적들이 함께 있고 영천호가 주변에 있어 관광 자원으로써 활용하기 좋은 상태지만 일반인들이 접근하기에는 교통편이 불편한 상태이다. 관계기관과 문중 간의 유기적인 협력을 통한 지속적인 관리가 이루어진다면 영천의 문화 자원으로 활용할 가치가 있어 보인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15. 오회당(五懷堂)
① 개설
정석현[1656~1730]의 본관은 영일, 자는 지원(志遠), 호는 오회당(五懷堂)이며, 삼휴정(三休亭) 정호신(鄭好信)[1605~1649, 자 덕기(德基)]의 손자로 정만양(鄭萬陽)·정규양(鄭葵陽)·이형상(李衡祥)·정중기(鄭重器)·정간(鄭榦) 등 당시 명망있는 선비들과 교우했다. 집 밖에 오회당이란 별서를 지어 오형제들과 친모했다. 저서로는 『오회당일고(五懷堂逸稿)』가 전하며 현 오회당 뒷산 선산에 묘소가 있다.
② 위치
오회당은 행정구역으로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산78번지로 영천댐을 내려다보고 있다. 영천시내에서 임고면을 통과해 영천댐으로 올라가면 자양면소재지가 나온다. 면소재지 직전 100m에 좌측으로 난 산길을 올라가면 문화재 이전 단지가 조성되어 있는데 오회당은 문화재 이주단지 통로 중간쯤인 오회공 종택 다음에 있다.
③ 변천
오회당은 정석현이 만년에 오형제들과 친목과 여생을 함께 즐기기 위해 집 앞에 별서로 건립한 정자로 1725년(영조 1)에 건립했다. 문화재청과 여러 문헌에는 1727년 관찰사 권대규(權大規)의 후원으로 정석현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고 하지만 정석현은 1730년에 죽었기 때문에 그 추측은 맞지 않다. 아마도 후대에 중건년대를 오해한 것은 아닌지 확인 해 볼 필요가 있다. 여하튼 ‘오회당서(五懷堂序)’에 따르면 오회당은 정석현이 살아 있을 때인 1725년 건립하고 오형제들간의 친목을 위해 건립되었다고 한다. 오회당의 당호는 『시경(詩經)』「소아(小雅)」 상체(常棣) 편에 나오는 ‘형제공회(兄弟孔懷)’라는 어원에서 인용되었다고 『영천의 누정』에서 밝히고 있어 더욱 신빙성이 있다. 그 후 영천댐 공사로 인해 수몰됨에 따라 이곳으로 옮겨지기 전인 1975년 8월 18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1977년 현재 위치로 이건했다.
④ 형태
오회당은 문화재 이주단지 가운데에 위치하는데 오회공 종택 옆에 북동향에 있다. 배치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두르고 정면에 난 사주문을 계단을 통해 들어서면 전면에 ‘一’자형 정자가 독립배치되어 있다. 정자는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우측에 대청마루방 두 칸을 두고 좌측에 온돌방 두 칸을 드린 편당형이다. 특히 대청마루방 우측에 반 칸의 퇴를 두고 좌측 방 측면에 반 칸의 마루 없는 퇴를 두어 독특한 평면구성을 하고 있다. 이것은 맞배지붕의 측면에 풍판을 달지 않고 가적지붕을 덧붙인 공간을 퇴로 활용한 것이다. 건물 전면에는 쪽마루를 두었는데 대청칸과 온돌방칸의 쪽마루 높이가 다르다. 창호는 청방간에 외여닫이문을 두고 대청 전면에 쌍여닫이 굽널세살문, 후면과 측면에 쌍여닫이 판문을 두었다. 방의 전면에는 쌍여닫이세살문을 두어 건물의 정면 방과 대청 그리고 측면의 청퇴간으로 진입이 가능하도록 했다. 방의 배면과 측면에는 외여닫이문을 두어 동선의 편의를 도모했다. 구조는 평평한 대지에 네벌대 자연석기단 위에 건물전체에 방주를 세워 삼량가의 가구를 완성했다. 주 상부에는 간결한 소로수장으로 꾸몄다. 지붕은 맞배지붕의 양 측면에 가적지붕을 덧대어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⑤ 현황
오회당은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어 보존관리상태가 양호하다. 정면 온돌방 우측칸 상부에 ‘오회당’이란 현판이 걸려 있고 내부 대청에 많은 편액이 걸려있다.
⑥ 의의와 평가
오회당은 지붕형태가 영천 지역에서 간혹 볼 수 있는 가적지붕을 취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평면 또한 측면에 반 칸의 퇴가 형성된 것은 독특한 구조로 건축적 가치가 높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16. 용계서원(龍溪書院)
①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용산리에 있는 조선 시대 서원.
② 개설
용계서원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이맹전(李孟專)[1392~1480]의 학덕과 충의를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③ 위치
용계서원은 영천호를 끼고 도는 69번 도로를 따라 가다가 원각길로 빠지는 길을 통하여 가면 원각마을이 나오는데 마을 초입부에 있다.
④ 변천
용계서원 건물은 선생이 죽은 후인 1782년(정조 6) 왕명으로 토곡동(土谷洞)에 건립되어 경은 이맹전을 비롯한 생육신을 배향하였다. 1786년에 사액되었다. 1868년(고종 5)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노항동(魯巷洞)으로 옮겨 서당으로 사용되다가 1976년 7월 영천댐 건설 공사로 현 위치로 옮겨졌다.
그러나 『경북서원지』에는 1684년에 이맹전을 모시기 위하여 지방 유림의 공의로 창건하여 1759년에 생육신 조려, 원호, 김시습, 성담수, 남효온을 추가 배향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⑤ 형태
용계서원은 3칸 대문채를 통하여 들어가면 강당이 있고 그 뒤에 사주문을 통하여 사당으로 출입하도록 하고 사방으로 낮은 담장을 두른 속에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가지고 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이익공계(翼工系) 형식의 5량 가로 건축된 누각식의 팔작집이다. 낮은 기단 위에 누마루를 높이 짜고 그 위에 건물을 세웠는데, 전면 1칸과 측면에 툇간을 만들고 밖으로 난간을 둘렀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기둥머리는 초익공으로 장식하였으며 가구는 3량가이다.
⑥ 현황
용계서원은 매년 2월과 8월의 중정(中丁)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관리 상태가 양호하다. 서원의 주변에는 경은 선생의 불천위 제사(不遷位祭祀)를 지내는 부조묘(不祧廟)와 제단(祭壇)이 있다. 용계서원은 1974년 12월 10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5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⑦ 의의와 평가
용계서원의 누각 형태의 강당은 흔하지 않은 모습으로 건축적 가치가 있는 건물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용계서원 [龍溪書院]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17. 옥간정(玉磵亭)
① 정의
경상북도 영천에 있는 조선 후기 학자 정만양과 정규양이 강학을 위해 건립한 정자.
② 개설
영일 정씨(迎日鄭氏) 후손인 정만양(鄭萬陽)[1664~1730]의 자는 경순(景醇), 호는 훈수(塤叟)이며, 아우 정규양(鄭葵陽)[1667~1732]의 자는 숙향(叔向), 호는 지수(篪叟)이다. 부친이 돌아가신 후 함께 보현산 횡계(橫溪)로 들어가 정자를 짓고 학문에 전념했다. 벼슬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학문과 우애로 여생을 보내며 영의정 조현명(趙顯命), 형조참의 정중기(鄭重器) 등 많은 명현과 석학들을 길러냈다.
정만양은 아우 정규양의 거처인 태고와[모고헌]를 왕래하며 형제간의 우애를 돈독히 했고, 항상 저서에 자신들의 호를 따 ‘훈지(壎篪)’라 하고 자손에게 모두 그 뜻을 따르도록 했다. 저서로는 『훈지양선생문집(壎篪兩先生文集)』 등이 전한다.
③ 위치
옥간정(玉磵亭)은 행정구역으로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별빛로 122[횡계리 439-3]에 있다. 화북면소재지인 자천리에서 청송 방면의 노귀재로 가기 전 우측으로 난 도로를 따라 보현산 천문대로 향하면 중간에 횡계마을이 있다. 정자는 횡계서당(橫溪書堂)을 지나면 도로 변에 접해 있다.
④ 변천
옥간정은 조선 숙종 때 성리학자인 정만양·정규양 형제가 1716년(숙종 42) 강학을 위해 건립했다. 1992년 7월 18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0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⑤ 형태
옥간정은 횡계천 변 암반 위에 지은 정면 3칸, 측면 4.5칸의 ‘ㄴ’자형 맞배집으로 우측에 풍뇌정이란 건물과 함께 전체적으로 ’ㄷ’자형을 취하고 있다. 경내 북쪽과 서쪽은 토석 담장이 둘러져 있다. 도로에서 두 칸 대문채를 들어서면 먼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풍뇌정이 남-북으로 배치되어 있고 풍뇌정을 돌아 들어가면 옥간정이 계변에 걸쳐 있다.
옥간정의 평면은 횡계천과 나란히 배치된 누각형 건물에 직교해 방과 서고가 풍뇌정 배치와 같은 향으로 놓인 ‘ㄴ’자형으로 되어 있다. 누각형 건물은 두 칸 대청 우측에 한 칸 온돌방을 드린 다음 전면에 반 칸의 퇴를 둔 편당형이다. 대청 좌측 칸 북쪽에는 직교해 온돌방 두 통칸 뒤로 서고 한 칸이 있다. 건물의 전면 계곡 쪽에는 퇴 칸 가장자리에 계자각 난간을 두른 헌함을 두고 나머지는 쪽마루를 부설해 동선의 편의를 도모했다. 청방 간에 모두 삼분합 들문을 설치해 유사시에 넓은 공간이 창출되도록 했다.
대청 우측의 방 전면과 측면에는 머름 위에 쌍여닫이 세살창을 두었고 배면에는 외여닫이문을 두었다. 한편 대청 북쪽의 두 통칸 방은 측면에 외여닫이문만 부설했다. 서고는 동쪽 면에만 외여닫이문을 달아 마루방으로 된 서고로 출입하도록 되어 있다.
진입은 배면 진입으로 대청 우측 칸의 배면 판벽에 외여닫이 판문으로 진입한다. 자연석 주춧돌 위에 방과 퇴 칸 모두 원주를 세워 오량 가의 가구를 완성했다. 퇴 칸의 주 상부는 초익공으로 처리하고 주간에는 소로를 끼웠다. 대청 상부는 연등천장으로 처리하고 방 앞의 퇴 칸 상부는 소란반자로 처리해 격식을 갖추었다. 지붕은 홑처마의 맞배지붕에 박공 면에는 풍판을 달아 비바람에 대비했다.
⑥ 현황
옥간정이 있는 곳은 보현산에서 발원한 횡계천이 퇴적암의 청석 암반[셰일과 혼펠스로 이루어진 바위]을 드러내 절경을 이루는 곳이다. 앞의 횡계천을 내려다보며 시원한 경관을 정자로 끌어들이고 있다. 특히 이 지역의 기후에 영향을 받은 듯 누하 공간은 천석으로 축대를 쌓고 건물 측면 앞쪽을 돌담으로 막았다. 또 온돌방의 함실아궁이 양 옆도 바람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돌담을 쌓았다.
정자 남쪽에는 횡계서당과 모고헌이 있다. 건물 내부에는 ‘성재(誠齋)’, ‘정재(定齋)’ 등의 현판과 편액이 걸려 있다.
⑦ 의의와 평가
옥간정은 인근의 모고헌과 함께 훈지수(塤篪叟) 형제의 강학 공간으로 건축된 역사적 건물로 평면 구성과 짜임새 있어서 건축주의 세심한 배려가 돋보이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옥간정 [玉磵亭]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18. 모고헌(慕古軒)
① 개설
정규양[1667~1732]의 본관은 영일, 자는 숙향(叔向), 호는 지수(篪叟)이며, 형인 정만양(鄭萬陽)[1664~1730]과 함께 부친이 돌아가신 후 보현산 횡계(橫溪)로 들어가 정자를 짓고 학문에 전념했다. 벼슬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학문과 우애로 여생을 보내며 영의정 조현명(趙顯命), 형조참의 정중기(鄭重器) 등 많은 명현과 석학들을 길러냈다.
정규양은 형 정만양의 거처인 옥간정을 왕래하며 형제간의 우애를 돈독히 했고, 항상 저서에 자신들의 호를 따 ‘훈지(壎篪)’라 하고 자손에게 모두 그 뜻을 따르도록 했다. 저서로는 『훈지양선생문집(塤篪兩先生文集)』 등이 전한다.
② 위치
모고헌은 행정구역으로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별빛로 106[횡계리 457-3]에 있다. 화북면소재지인 자천리에서 청송 방면의 노귀재로 가기 전 우측으로 난 도로를 따라 보현산 천문대로 향하면 중간에 횡계마을이 있다. 정자는 도로 변의 횡계서당(橫溪書堂) 경내의 남쪽 계변에 있다.
③ 변천
모고헌(慕古軒)은 조선 숙종 때 성리학자인 정규양이 1701년(숙종 27)에 태고와(太古窩)로 건립했는데 후에 1730년(영조 6) 그들의 문인들이 수리해서 모고헌이라 했다. 1992년 7월 18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1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④ 형태
모고헌은 횡계천 변 암반 위에 지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북쪽에 횡계서당이 있으며 건물 아래는 청석 암반의 계곡이다. 평면은 가운데 온돌방 한 칸을 두고 사방으로 반 칸의 퇴를 둔 중실형의 독특한 평면 구성이다. 건물의 반은 정지한 땅에 걸치고 반은 계변 청석 암반에 두어 중층의 누각 형식을 취하고 있다. 건물 정면인 계변 쪽에만 퇴 앞으로 계자각 난간을 두른 헌함을 두고 나머지 퇴 칸 앞은 별도의 기둥을 세워 판벽으로 막았다. 판벽의 양 측면에는 쌍여닫이 판창을 두었고, 배면에는 외여닫이 판문을 내어 이곳으로 진입한다. 특히 판벽 상부에는 바람이 통하도록 홍살형의 살창을 두었다.
중앙의 온돌방 정면과 양 측면에 쌍여닫이 세 살 창호를 내고 배면에만 외여닫이 세 살 창호를 두었다. 특히 벽장이나 반침을 별도로 둘 수 있는 공간이 없어 방 벽 상부에 감실형 수납장을 달았다. 온돌방의 아궁이는 건물 정면의 누하 아래에 있다. 자연석 주춧돌 위에 방과 퇴 칸 모두 원주를 세워 오량 가의 가구를 완성했다.
특히 헌함 가장자리에는 별도의 기둥을 세우고 상부는 처마 서까래 중간 부분에 인방을 두어 판벽을 설치한 아주 독특한 구조이다. 퇴 칸의 주 상부는 몰익공으로 처리하고 주간에는 소로를 끼웠다. 또 퇴 칸의 평주 상부에는 우미량 형식의 충량을 걸어 아름다운 곡선미를 자랑하고 있다. 지붕은 겹처마의 팔작지붕에 한식기와를 이엇으며, 모서리 서까래는 선자연을 취했다.
⑤ 현황
모고헌이 있는 곳은 보현산에서 발원한 횡계천이 퇴적암의 청석 암반[셰일과 혼펠스로 이루어진 바위]을 드러내 절경을 이루는 곳이다. 모고헌은 앞의 횡계천을 내려다보며 시원한 경관을 정자로 끌어들이고 있다. 북쪽에는 횡계서당이 있고 정자 바로 뒤 서당 사이에는 오래된 향나무가 있다. 이 향나무는 영천시에서 관리하고 있는 보호수이다.
모고헌에서 계류를 거슬러 150m 정도 오르면 정만양의 거처인 옥간정(玉磵亭)이 있고 북쪽 산기슭에는 정규양의 사당이 있다. 모고헌 건물 내부에는 ‘태고와’, ‘모고헌’ 등의 현판이 걸려 있고 기문이 전한다.
⑥ 의의와 평가
모고헌은 한차례 수리가 있었지만 건립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고 영천 지역의 누정 중 가장 독특한 평면을 가지고 있다. 특히 정자 앞쪽만 트여 있고 나머지는 판벽을 설치한 점은 이 지역의 기후와 매우 밀접한 관계로 보여 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모고헌 [慕古軒]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19. 영천자천교회(永川慈川敎會)
①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에 있는 우진각 지붕의 단층 목조 한옥 교회당.
② 개설
영천자천교회는 개신교 선교 초기[1900년대 초]의 한옥 교회당으로 영천 지역에 현존하는 유일한 건물이다. 구조와 외관은 대체로 한국 목조건축 양식을 따랐으나 내부 공간구성은 서양 초기의 그리스도교 양식인 바실라카식 교회 형식을 일부 채용하는 등 한·양식 절충의 교회당이다. 이는 우리나라 교회건축 초기의 시대적, 건축적 상황과 교회건축의 토착화 과정을 잘 반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부공간의 절충적 구성 수법 등에서 건축사적 가치가 있다
③ 위치
영천자천교회는 화북면 내에 있는 화북 초등학교와 화북 치안센터 사이에 서북쪽으로 난 자천8길로 100m가량 들어간 마을 안쪽에 있다.
④ 변천
영천자천교회는 화북면 보현산 자락에 있으며 1895년 입국하여 대구·경북 지방에서 선교활동을 전개하던 안의와(安義窩)[James. E. Adams] 목사가 1898년 4월 경 전도차 대구에서 영천을 거쳐 청송으로 순회하던 중 영천과 청송의 경계 지점인 노귀재에서 권헌중을 만나 그를 선교하였고, 같은 해 10월 권헌중이 화북면 자천동의 초가삼간을 구입하여 서당 겸 기도소로 사용하면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후 1909년 선교사 어도만(魚塗萬)이 신자와 합심하여 예배당을 신축하였다. 건물은 우진각 지붕의 단층 목조 한옥 교회당으로 1948년 좌·우로 남녀 구분하던 출입문을 없애고 교회당 뒤편에 출입문을 새로 만들었다. 또 1950년 강당 뒷부분[1.7×2.9m]의 벽을 헐고 증축해 사용하다가 지금은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1980년 현관 출입문을 시멘트 블록조에 슬레이트 지붕으로 증축하기도 했다. 2005년 원형 발굴에 의한 보수가 이루어져 옛 모습을 찾았다.
⑤ 형태
영천자천교회는 우진각 지붕의 단층 목조 한옥 교회당으로 평면은 장방형으로 정면 2칸이고, 측면 4칸이다. 내부공간은 강단 2통 칸에 예배석 4통 칸, 온돌방 2칸으로 꾸며져 있다. 즉 중앙 2칸에는 예배석을 배치하고 예배석 앞으로 강단이 마련되어 있으며, 예배석 뒤로는 온돌방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조는 외벌대의 자연석 기단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그 위에 네모기둥을 세워 심벽으로 벽체를 구성하고 창호를 달았다. 하인방 아래로는 심벽으로 처리하고 그 외는 회반죽으로 마감했다.
출입은 양 측면에 남녀 구분해 두었는데, 외여닫이 울거미띠장널문이다. 창호는 양 측면의 출입문 칸을 제외한 예배당 공간에는 각기 쌍여닫이 정자살문의 고창을 두었다. 한편 온돌방은 예배 공간과의 사잇칸에 2분합 들문을 들이고 후면에는 각 칸에 외여닫이 굽널세살문과 고창을 한 세트로 대칭되게 시설했다.
내부공간은 내부 열주(列柱)에 의해 공간이 양분되어 있고, 강단부에서는 중앙 열주를 멈추어 넓게 하고, 대들보 밑에 양쪽으로 샛기둥을 세워 예배석을 향한 시선의 방해를 막음과 동시에 강단과 예배석의 공간을 분절시켜 주고 있다. 중앙 주열 사이에는 남·녀석을 구분하기 위해 판자로 칸막이벽을 설치하였고, 뒤편에 온돌방 2칸을 넣고 강단 쪽으로는 각 방에 4분합 들문을 설치했다.
지붕 상부가구는 연등천장이며, 구조는 5량가에 트러스가 보강된 합성 구조를 구사했다. 가구는 내부 중앙 주열 상에 좌우의 대들보를 합보로 받았고, 각 대들보 위에 보아지를 끼운 동자주에 종대공을 결구시켰다. 종대공 위에 역시 동자주를 세워 마룻대를 받는 단순한 구조이다. 각 도리의 간격에 다른 지붕 변작법은 3분 변작법을 적용했다.
한편 지붕가구에서 주목할 것은 전통 목조건축의 5량가 구조에 중대공 좌우로 허술한 트러스 같은 구조로 보강한 점이다. 마치 전통 목조건축 구조에 서양의 트러스 구조를 보강한 듯한 수법을 구사했다. 이는 내부의 공간적 특징과 함께 지붕 가구법에서도 개신교 도입 초기의 교회건축의 일면을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전체적으로 부재의 치목이 거칠고 결구 수법이 격식에는 맞지 않지만 자연스러운 구조미를 느끼게 한다.
⑥ 현황
영천자천교회는 2005년 원형발굴에 의한 보수가 이루어져 옛 모습을 찾아, 30여 명의 신도를 갖고 있는 작은 교회로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전국에 유일하게 한옥형 교회에서 바쁜 일생을 잠시 내려놓고 쉼의 시간을 갖도록 하는 ‘처치스테이(church stay)’를 시행하고 있다. 또한 인근 문화기관과 연계한 염색체험, 제빵체험과 지역사회에 각종 봉사 및 교육을 실행하고 있다.
⑦ 의의와 평가
영천자천교회는 개신교 선교 초기[1900년대 초]의 한옥 교회당으로 영천 지역에 현존하는 유일한 건물이다. 1948년과 1980년에 강단과 출입구 각 1칸씩을 증축한 것을 제외하고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구조와 외관은 대체로 한국 목조건축 양식을 따랐으나 내부공간은 전체적으로 서양 초기의 그리스도교 양식인 바실라카식 교회 형식을 일부 채용하고 있다. 특히 내부 출입방식 및 예배공간을 남녀 칸으로 엄격히 구별했던 구한말 유교적 사고방식이 내부공간과 전통 목조가구식에 서양의 트러스 구조가 결합된 복합양식을 보인다. 이는 개신교 선교 초기의 시대적, 건축적 상황과 교회건축의 절충과 토착화 과정을 잘 반영하고 있어 건축사적 가치가 크다. 2003년 12월 15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52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영천자천교회 [永川慈川敎會]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20. 영천 자천리 오리장림(五里長林)
① 정의
제방 보호와 마을의 수호 및 풍치 조성을 위해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 마을 주민들이 조성한 숲. 1999년 4월 6일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② 형태
영천시 화북면 면소재지인 자천리로 들어오는 35번 국도변에 1㎞ 남짓한 길이로 울창한 숲이 조성되어 있다. 5리에 걸쳐 있다고 이 숲을 ‘오리’장림(五里長林)으로 불렀으나 현재 숲의 길이는 5리의 반밖에 안 된다. 면적은 6,600여 ㎡이다. 오리장림에는 현재 12종 282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다. 숲을 이루는 수종은 활엽수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 가운데 낙엽활엽수는 은행나무 1주, 왕버들 37주, 굴참나무 87주, 시무나무 9주, 느티나무 25주, 팽나무 26주, 풍게나무 18주, 회화나무 26주, 말채나무 2주, 등 9종 231주가 있다. 상록침엽수로는 적송 27그루, 개잎갈나무(히말라야시다) 19그루 등 3종 51그루가 있다. 나무의 수령은 20년에서부터 450년이 넘는 나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특히 느티나무, 왕버들, 회화나무 등의 고목이 많다. 가슴높이의 나무둘레가 4~5m나 되는 고목도 적지 않으나, 그루로 수령 100년 안팎의 나무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숲 속에는 제장(祭場)도 있다. 화강암으로 네모지게 쌓은 석단 위에 큰 돌을 하나 올려놓은 형태로, 석단이 무너지지 않게 시멘트로 잘 발라 두었다.
③ 역사
오리장림은 제방 보호와 마을의 수호 및 풍치 조성을 위해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 주민들이 1500년대에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랜 역사를 입증하듯이 450년이 넘는 노거목들이 다양한 자태를 자랑한다. 자천리에서는 1600년경부터 매년 정월대보름날 이 숲에서 제사를 지내왔다고 한다. 그러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이 숲은 1982년에 영천시 ‘천연보호림’으로 지정되었으며, 1999년에 다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래된 마을 숲들이 전쟁, 태풍, 개발 등으로 인해 사라지거나 훼손되었듯이 오리장림도 원형을 많이 잃었다. 영천시와 청송군을 잇는 35번 국도가 가운데를 관통하면서 숲을 동서로 갈라놓았을 뿐만 아니라 많은 고목이 그때 잘려 나갔다. 1959년의 사라호 태풍 때에도 숲의 일부가 사라졌다. 그런가 하면 1972년에는 이 숲의 바로 옆에 자천중학교가 설립되면서 숲의 일부가 학교 운동장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뒤에도 국도가 확장되는 과정에서 숲의 규모가 많이 줄어들었다. 현재 오리장림의 면적은 6,600여 ㎡이고, 길이는 5리의 반인 1㎞ 남짓이다. 최근에 와서는 전통마을 숲에 어울리지 않게 외래 수종을 심기도 하였다. 특히 20여 그루의 개잎갈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광경은 이 숲의 본래 모습을 망가뜨린 흠이 되고 있다.
④ 내용
오리장림은 마을의 바람막이, 제방 보호 및 수해 방비를 위해 마을 주민들이 조성한 숲이다. 근래에는 마을 이름을 따서 ‘자천숲’으로도 알려졌다. 숲이 있는 화북면 자천리는 영천시내에서 북쪽으로 20여 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다. 자천은 영천의 진산인 보현산에서 흘러내린 앞내가 ‘잘내’ 또는 ‘자을천’(慈乙川)이라 불리던 것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또 자천리는 보현산에서 시작된 고현천이 마을 앞을 휘감고 지나가는 지형이어서 비가 많이 오면 하천이 범람하여 수시로 농사를 망치곤 하였다. 이 때문에 마을 주민들이 홍수 방지를 위해 나무를 심어 넓고 긴 숲을 조성한 것이다.
자천 1, 2리 마을에서는 오랫동안 매년 정월대보름날에 이 숲에서 동제를 지내 왔다. 봄에 잎이 무성하면 그해는 풍년이 든다는 속신도 전해진다. 1970년대 새마을사업으로 중단되기까지 매년 마을의 평안을 비는 제사가 행해진 신성한 숲이었던 것이다. 신성한 숲의 전통은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 1편에 실려 있는 신라의 ‘시림(始林)’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림은 신라 개국 당시 국가 차원의 제사가 이루어진 신성한 숲이다. 박혁거세와 김알지가 이곳에서 신성한 존재로 출현하였다. 신성한 숲의 전통은 영남지방에서 흔히 보는 동구(洞口)의 ‘비보숲(裨補藪)’들로 이어져 왔다. 마을에서 방풍림이나 수해방비림으로 조성한 경우라하더라도 여기에 풍수적 해석이 보태지면서 비보림의 성격을 지니게 된 경우가 많다. 마을을 수호하는 공간인 만큼 마을공동체신앙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의 송림이 전형적인 사례이다. 자천 1, 2리가 합동으로 오리장림에서 제사를 지내게 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자천리에서는 정월대보름이 되기 열흘 전에 흉이 없고 깨끗한 사람으로 제관, 제주, 축관을 한 명씩 선출하였다. 정월 열사흗날 아침이 되면 제관들이 모여 왼새끼로 금줄을 꼬아 오리장림의 제당과 자신들의 집 주변에 두르고 황토도 뿌려 둔다. 이때부터 제주는 제수 마련을 위한 장보기 외에 일절 집 밖을 나가지 않고 근신한다. 제물로는 메, 국, 장닭, 백편, 건명태, 나물류(배추·고사리·도라지나물), 과일류(밤·대추·곶감·사과·배) 등을 올렸다. 정월 열나흗날 자정에 행해진 제의는 초헌-고축-아헌-종헌 순으로 이루어진 헌작과 배례 후에 제관-제주-축관-동네의 순서로 소지를 올림으로써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정월대보름 아침이 되면 모든 동민이 마을회관에 모여 음복을 나누고 결산을 하였다.
오리장림의 동제는 1970년대 새마을사업과 더불어 중단되었다가 다시 화북면 단위의 제의로 부활되었다. 영천에서 청송으로 이어지는 국도에서 교통사고가 빈발하자 화북면 내 18개 마을 이장들이 모여 제의를 지내기로 결정하였다. 장소가 오리장림으로 정해진 것은 이 숲이 국도변에 있는 데다 숲 속에 제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설날이 지나면 화북면 번영회가 주체가 되어 대보름 전날 전후로 택일을 한다. 면장, 이장 대표, 지서장 또는 조합장이 각각 제의의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을 맡는다. 제물로는 돼지, 삼실과, 술, 사과, 배, 명태포를 올린다.
한편 이 숲은 오랫동안 자천리 주민들에게 놀이의 장이기도 하였다. 음력 칠월 논매기가 끝나면 행하는 ‘희초(또는 서리초)’를 이 숲에서 했으며, 단오놀이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지금도 오리장림 숲은 여름이면 마을 앞을 흐르는 고현천의 맑은 물과 더불어 하늘을 가리는 숲 그늘이 어우러져 멋진 피서지가 되고 있다. 그런데 여름 휴가철이면 피서객이 몰리는 데다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숲이 몸살을 앓고 있다. 얼마 남지 않은 숲 속에 상점, 화장실, 음수대 등이 들어서 있다. 신성한 숲의 전통을 되살리고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숲으로서의 품격을 유지해 나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천 자천리 오리장림 (한국민속신앙사전: 마을신앙 편, 2009.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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