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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호수♡마리아
▪루카 10,25-37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오늘 율법 교사가 예수님한테 물었어요.
영원한 생명은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테마입니다.
우리가 70년 살려고 이렇게 내가 혼자 사제로 한평생 살아야 하고
여러분들이 먼 곳에서 비싼 기름 버리며 이곳에 올 이유가 없죠.
영원한 생명 때문에 온 거예요.
인간적인 관계성이 있지만, 그것을 통해 우리가 추구하는 마지막 목적은 영생, 영원한 생명입니다.
오늘 율법 학자가 2천 년 전에 했던 이 질문, ‘제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 앞에서 무릎 꿇고 이런 질문을 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이제껏 한 번도 그 질문을 던져본 적이 없다면 그 사람은 아직 신앙인이 아니라 그냥 종교인이에요.
첫 단추로 바로 가장 먼저 구해야 할 것은 아픈 몸뚱아리 낫게 해달라는 것이나,
돈벼락 맞게 해달라는 것이나, 집안 편안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세례받은 사람의 입에서 나와야 할 제일 첫 번째 질문은 ‘제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율법 학자의 질문에 예수님은 ‘율법에 뭐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물으시죠.
그 사람은 머리에 달달 외고 있거든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고 적혀 있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옳게 대답했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영생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아마 율법 교사는 첫 번째 것은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을지 몰라요
하지만 대부분 걸려 넘어지는 것이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 하는 두 번째예요.
솔직히 이웃을 여러분 몸뚱아리처럼 사랑해본 적 몇 번이나 돼요?
양심껏 속으로 대답해보세요.
분명히 예수님이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네 마음 다하고 목숨 다하고 힘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이것은 돈이 안 드는 거예요.
그런데 네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은 모든 걸 다 투자해야 해요.
우리 몸이 더러우면 목욕탕에 가서 정성껏 닦죠?
그럼 이웃 더러운 사람이 있으면 네 몸 닦듯이 닦아주라는 얘기예요.
너는 밥 먹고 있으면서 배고픈 사람한테 ‘주님 저 사람한테 밥 좀 갖다주세요.’
누가 갖다줘? 내가 갖다줘야지, 내가 먹으려던 밥 갖다 먹여야지요.
‘뒷집 사람이 아파서 거의 죽어가요. 천사가 좀 사람 도와주세요.’
천사가 어디서 와? 내가 천사 노릇 해야지요.
우리를 뒤돌아보면 정말 좋은 얘기는 많이 듣고 살았지만,
순간순간마다 오늘 복음에 나온 세 인간 중에 두 인간처럼 살았어요.
사제처럼 살고, 레위인처럼 살았어요.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살아본 적이 몇 번이나 되느냐 이거예요.
사제라든지 레위인이 동정심이 없는 거 아니에요.
‘아이고 저거 강도 맞았네, 큰일 났네.’
하지만 그 사람 앞에 가로막는 걸림돌이 많았죠.
체면과 형식들로 자기가 만든 법.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는 강도를 만나서 초주검이 됐다고 돼 있어요.
거의 다 죽게 된 사람을 보고 사제도 지나가다 동정심 느꼈고 레위인도 동정심 느꼈죠.
하지만 왜 안 도와준 거예요?
오늘 복음은 어디 버릴 데가 하나도 없어요.
구조적으로 딱 부러지게 짜여 있죠.
영원한 생명에 관한 질문이 나와요. 그다음 그 답을 예수님이 유도하죠.
‘좋다 그러면은 그대로 하여라.’ 그랬더니, 이 율법 학자가 ‘그대로 하는 것이 어떻게 하라는 거지’ 하며
멍때리고 있으니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예화를 들며 세 인물을 등장시키시죠.
그리고 마지막에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이 누구냐?’ 물으십니다.
누구에게 물어도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세 번째 사람이라 할 거예요.
사마리아 사람은 당시 유대인과 웬수였죠.
하지만 율법에 있는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를 실행한 사람은 사제도 아니었고 레위인도 아니었고
원수처럼 여기던 사마리아 사람이니, 그렇게 대답 안 할 수가 없죠.
율법 교사는 그 와중에도 ‘사마리아 사람입니다.’라고 얘기 안 해요.
그 와중에도 빠져나가려고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해요.
은근슬쩍 사마리아 사람과 또 거리를 둬요.
얼마나 교활하고 머리를 굴리고 산 인간이야.
그 정도 되면 ‘예, 주님 제가 바로 강도 만난 사람 보고 지나간 사제요, 레위인처럼 살았습니다.
죄인입니다.’ 해야지, 자비 베푼 사람이 그래도 제일 이웃과 가깝네요.
오늘 예수님이 율법 학자에게 하시는 훈계를 보면 어떻게 이렇게 기가 막히게 예화를 드셨을까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예화에 ‘예리코로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났다고 하시죠.
누구나 그 길에 얼마나 강도가 득실득실하는지는 유대 사람들은 다 알 정도로,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통하는 길은 위험한 길이었어요.
예루살렘은 해발 700m 위에 있고 예리고는 해발 400m에 아래에 있어,
차이가 1,100m, 거리도 30km가 넘는 먼 거리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리코까지 좁고 낭떠러지 길이었기 때문에 강도를 만나면 도망칠 데가 없어.
얻어터지든지 뺏기든지 죽든지 그 방법밖에 없어요.
아니면 낭떠러지로 떨어져야 해. 그런 일이 자주 있었던 거죠.
이렇게 예수님은 그런 자주 있었던 일을 예를 들어서 오늘의 핵심을 찔러주고 계시죠
한 여행자가 있었는데 강도를 만나 다 죽게 되었고, 그 곁으로 사제가 지나가고 레위인이 지나가고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갔다 하면서 얘기를 이끌어 나가십니다.
오늘 나오는 이 세 종류의 인간을 딱딱 한 마디씩 나누면
제사장은 형식주의형 인간,
두 번째 레위인은 안전 제일형의 인간,
세 번째 사마리아 사람은 열매를 맺는 형, 열매형, 실천형의 인간이에요.
여러분들 이미 지금 이 복음을 들을 때 나는 주로 어디에 속하네 하고 생각했을 거예요.
여기서 얘기하는 강도라고 하는 것은 굳이 강도만을 뜻하는 건 아니지요.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사람들이 있어요.
우리는 그 사람을 살리려고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살았는가.
예수님의 가르침은 ‘네가 빠지더라도 그 인간 살리는 게 우선이다.’라는 말씀이거든요.
첫 번째 지나간 이는 사제였어요.
이 사람도 분명히 사제이니 설교할 때마다 얼마나 사랑을 부르짖었겠습니까?
하지만 막상 피투성이가 된 강도 맞은 사람이 딱 만났을 때 이 사람은 어떻게 해요.
기도 안 차요. 다른 길로 갔대요.
양심은 있어서 그 길로는 못 지나간 거죠.
무섭기도 하고 피투성이가 됐으니 무섭기도 했겠죠.
저기 딱 보니까 뭐가 시뻘건 피투성이가 움찔거려. 아이고. 강도 맞는 사람이네 어떡하지?
얼마나 그 순간 갈등을 겪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때 이 인간의 머릿속에 떠오른 성서 구절이 민수기 19장 11절이었어요.
‘누구의 주검이든 그것에 몸이 닿는 이는 이레 동안 부정하다.’
그러면서 사제법이 떠올랐어요.
죽은 자를 만지면 성전에서 너에게 돌아올 제사 지낼 직무를 상실하게 된다.
그 피를 만지면은 제사를 못 지내는 거예요.
그래서 아까 내가 이런 사람을 무슨 형이라고 그랬다고요?
형식주의형이예요.
사람 살리는 것보다 형식이, 율법이, 교회법이 더 중요한 거예요.
이 세상 모든 법은 사람보다 위에 있을 수 없어요.
그런데 인간이 사람보다 교회법을 위에 만들어 놓죠.
지금 가톨릭에도 얼마나 많은 교회법이 있습니까, 수만 가지 교회법 2천 년 전이랑 똑같아요.
예수님 나타나면 다시 기가 막힌다고 하실 거예요.
이 사제는 제사장으로 일할 기회를 잃어버릴 위험을 선택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먼 길로 돌아갔어요.
다시 말하면 이웃 사랑의 요구보다는 의식적인 요구를 더 먼저 따르는 형의 인간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사신 적 없습니까?
좋은 일을 하고 싶은데 ‘아니야, 저거 하면 내가 안 돼.’
그 순간에 머릿속에 손익 계산 대차대조표를 두드립니다.
‘도와줘, 말아? 아니야 아니야 괜히 도와줬다가 파출소 가서 조서 써야 하고 복잡해,
우리 엄마 말씀하시기를 그런 데 가지도 말라 셨어.’
엄마들, 그런 얘기 한 적 있죠?
‘얘야 싸우는데 근처는 절대 가지 마. 어지간하면 그냥 지나가거라.’
성당 가는 길인데 웬 사람이 길바닥에 데굴데굴 굴러요. 복통이 생긴 거죠.
이런 응급이 생길 때 여러분은 그 사람 차에 싣고 병원에 가실 거예요,
아니면 ‘아이 딱하네, 누가 좀 도와주세요. 저는 미사 가야 해서 급해요’ 하실 겁니까?
만일에 말이죠.
다 죽어가는 사람 내버려 두고 성당에 들어왔죠, 그거 성사 거리에요.
대죄입니다.
죽어가는 사람 두고 왜 성당 구석에 처박혀 앉아 있는 거냐 이거죠.
그러니까 성체 영 할 자격 없어요.
그리고 병원에 데려다주느냐 그날 마지막 미사였는데 궐했어.
그건 성사 안 봐도 돼, 오히려 하느님의 칭찬 받을 거예요.
‘아이고 내 새끼 잘했다. 너 내가 시키는 대로 했구나!’
물론 해설이나 전례를 맡았다면 빨리 사무실에 전화해야죠.
성당에서는 모범 신자이지만 집에서는 빵점짜리 신자도 있어요.
기도한다고 열심히 묵주기도 하지만 옆방에 중풍으로 누워 있는 시부모 머리에 서캐가 허옇게 내려앉아도
생전 목욕시키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아무튼 이 사제는 생각이 많았어요.
‘내가 저 시체 만지면 7일 동안 부정한 거고, 또 피를 만지면 내 제사장직을 뺏기는데, 그럴 수 없어.
아예 애초부터 못 본 걸로 하자.’
먼 길로 돌아갔어요.
문제는 그 사제가 이후에 행복했을까요, 마음이 편했을까요?
솔직히 여러분들 그런 적 많았죠?
그 순간을 놓치고, 집에 가서 편했겠냐?
늘 힘든 거예요. 그런 설교 들을 때마다 늘 찔리곤 하죠.
‘바로 난데 내가 옛날에 이렇게 살았는데 그런 적이 많았는데.’
두 번째가 누구예요? 레위인.
레위인은 야곱의 12명 아들 중의 하나인 레위의 직계 후손 남자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전통적으로 제사장에 오를 수가 있었죠.
이 레위인도 피투성이가 된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동정심이 당연히 들겠죠.
그런데 이 사람을 아까 내가 어떻게 표현했어요?
첫 번째 사람은 형식주의형, 두 번째 사람은 안전제일형이죠.
왜냐하면 이 사람 머릿속에 딱 떠오른 게 뭐냐?
‘저놈이 도둑놈일 수 있어.’
실제로 당시에는 도적 중 하나가 아픈 척하고 길에 누워 있다가 도와주려는 사람이 나타나면
벌떡 일어나 칼을 들이대는 일들이 종종 있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 레위인은 ‘내가 저런 위험을 무릅쓰고서까지 내가 남을 도울 이유가 전혀 없다.
안전한 게 최고다.’ 생각합니다.
‘이상한 데 끼어들지 말라’라고 모든 부모는 그렇게 가르치죠.
하지만, 의로운 부모는 거기에 한 마디 더 붙여야지요.
‘그러나 네가 반드시 도와주어야 할 상황은 외면해선 안 된다. 네가 다치더라도 말이야.’
그렇게 가르쳐야 합니다.
안전 위주형의 인간은 이기주의를 낳습니다.
그리고 이 이기주의는 무관심을 낳아버립니다.
지금 이 세상이 말세가 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렇게 겉으로는 안전 위주를 찾으면서
이기주의형의 인간으로 키워지는 것입니다.
부모도 ‘얼씬도 하지 마라, 에미 눈에 피눈물 나는 거 보려고 하냐’ 합니다.
‘엄마, 할아버지가 젊은 애들한테 맞고 있는데도 도망쳐?’
‘그럼 도망가야지.’
그렇지만 의로운 엄마는 ‘네가 맞더라도 그 할아버지를 네가 몸으로 감싸고 지켜야 해.’ 합니다.
정말 현대는 바로 이런 소수의 의인과 영웅이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 합니다.
토인비라는 역사 철학자는 ‘인간의 역사는 소수의 창조자에 의해서 이루어 만들어진다.’라고 했죠.
다수의 멍청한 인간들이 아니라, 다수의 어두운 인간들이나 비겁한 인간들이 아니라,
다수의 두려움을 갖고 사는 인간들이 아니라, 소수의 용감한 사람들에 의해서 인류의 역사는 진보한다 했어요.
현대 교육은 그걸 안 가르쳐요.
어떡하든지 안전하게 살아야 하고 다치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결국에는 이기주의라고 무관심을 낳아버립니다.
무관심의 죄가 얼마나 큰지는 예수님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너무나 잘 나오죠
세 번째 오늘의 주인공 누굽니까? 사마리아인.
이 사람을 실천형 다른 말로 열매를 맺는 형이라고 표현했어요.
아마 짐작건대 이 사마리아인은 먼 곳을 규칙적으로 방문해서 장사하는 행상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또 그에게는 신용이 있었던 것도 분명합니다.
왜? 여관 주인이 돈 안 받고 그 사람 말만 듣고 그를 믿죠.
‘나중에 내가 다시 돌아오다 돈이 모자라면 드리겠으니 이 사람 치료해 주십시오.’
그것은 그전부터 알던 사람으로 신용이 있던 사람이라는 뜻이죠.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생각할 때 거슬러 올라가면 배는 아브라함의 배이지만,
정통적인 유대인들에 비하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단자일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사마리아 사람들 가운데는 유대인들보다 정직하게 의롭게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겁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 가운데 한 명이 사마리아 사람이었죠.
나병 나은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신나게 딴 데로 갔다고 그랬어요.
마누라 두드려 패러 가고, 술 마시러 가고, 창녀집에 가고.
그렇지만 유일하게 감사하러 돌아온 딱 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죠.
결국에는 유다인들이 손가락질하던 이단자였던 사마리아인이 죽어가는 사람을 도와주었죠.
이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느님의 자비가 깃들여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가끔 익명의 크리스천 얘기를 많이 하죠.
세례는 안 받았지만, 삶 자체가 하느님을 향해 가고 있고 교회를 향해 가고 있는
익명의 크리스천들을 바라보면서 소위 성체를 영하는 천주교 신자들은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세상 밖에는 이방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우리보다 정말 훨씬 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이 너무너무 많다.
그냥 일주일에 한 번씩 좋은 소리 듣고, 일주일에 몇 번씩 좋은 소리 듣는 우리는
그저 머리만 커지고 귀만 커지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예수님은 오늘 하느님을 알고 규칙을 알면서도 스스로 하느님 앞에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이들보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 사람이 사마리아인이라고 하면서, ‘너도 가서 사마리아 사람처럼 해라’ 하고 하시죠.
다시 말하면 형식적으로 살지 말고, 안전 위주로만 살려고 하지 말고,
무관심하지 말고, 실천하여라 열매를 맺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죠.
이웃 사랑의 실천은 단순히 동정을 느끼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되고 실제적이어야 됩니다.
아까 내가 그랬죠?
누가 배고프면 자기가 먹고 있는 들고 가서 먹여야 합니다.
누가 아프면 주머니 다 털어 그 사람 업고 응급실로 달려가야 합니다.
이게 실제적인 사랑이에요.
레위인이, 사제가 사랑이 뭔지 몰라서 그냥 지나갔겠습니까?
누구보다도 그쪽의 전문가들이었어요. 그런데도 실천을 안 했죠.
그러나 손가락질받던 이단아 취급당하던 사마리아 사람은 행동으로 옮기잖아요.
과연 하느님이 내려다볼 때 누구를 구원할 것이냐?
제가 늘 ‘천주교 신자 됐다고 구원되는 거 아니다. 구원의 문 안으로는 들어와 있지만 완성된 건 아니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야고보서 2,17).’라고 말씀드리죠.
제사장도 레위인도 상처 입고 죽어가는 사람에 대하여 동정은 분명히 느꼈을 겁니다.
동정이 참된 동정으로 살아나기 위해서는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하느님이 원하시는 핵심입니다.
여러분들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은 행동 때문에 완전하게 되고 성숙이 됩니다.
믿음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성령 세미나 한번 갔다 와서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우리의 행동으로 인하여 완성이 됩니다.
미사 후에라도 즉시 내가 찾아가야 할 사람 찾아가고, 용서 청할 사람한테 전화하고,
화해할 사람한테 화해하고, 내가 못된 짓 한 사람한테 용서 청해야죠
돌보지 않았던 내 부모님에게 찾아가야죠.
그게 바로 성체를 영한 사람들이 열매 맺는 구체적인 행동이 아니겠는가.
이 강론을 준비하면서 저도 사제로 살면서 과연 첫 번째나 두 번째 인간처럼
그런 사람을 외면한 적이 있었던가 돌아보았어요. 다행히 없었어요.
저는 군종신부 시절에도 어마어마한 군대 세력과도 목숨 걸고 신자를 지키려고 싸웠어요.
양들을 지키기 위함이라면 어떤 권력 앞에서는 굴한 적 없었어요.
그 양들이 천주교 신자만은 아니었어요.
그런 사람들이 있을 때 나는 목숨을 바칠 각오로 살았고 또 앞으로도 그럴 각오가 돼 있어요.
그래서 강론 준비하면서 ‘주님 감사합니다. 다행입니다.
저는 그래도 세 번째 사마리아인처럼 산 것 같습니다.’
오늘 나오는 이 세 종류의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2천 년 전의 사람 얘기가 아니라,
현재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얘기 들으시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다짐하지만, 막상 상황이 닥치면 자신 있으세요?
쉽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위험한 곳에서 정말 애타게 누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때,
목숨 바쳐 구해주면 하느님이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 사람도 살리고 나도 살게 됩니다.
그러면서 내가 그만큼 커져 있을 거예요.
사랑의 삶, 의로운 삶이라는 것이라는 것이 예수님이 얘기하신 사마리아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을
우리들이 체험하면서 성숙이 될 거예요.
오늘 예수님의 말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머릿속에만 외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인 형 안전 제일 위주의 형으로부터 벗어나 실천형, 열매 맺는 형으로 살아갈 때
하느님께서는 당연히 안전하게 도와주실 거라는 것을 믿읍시다.
나는 안전해야지 하고 미리 생각하면 오히려 더 위험이 커져요.
하느님이 원하시는 대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다 보면 산보다 더 큰 권력과도 싸워 이길 수 있고
나중에는 기적이 일어나는 거예요.
‘내 힘으로, 세상에! 내가 그 사람을 살렸구나.’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명심합시다.
♣2022년 연중 제15주일 (7/10)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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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호수♡마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