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을 따질 때 이것 아니면 저것의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예인가, 아니오인가?", "참말인가, 거짓말인가", "백인가, 흑인가", "앞면이냐, 뒷면이냐", "짝수냐, 홀수냐"... 등등 말이다.
이와 같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를 통틀어 두 가지 뿐으로 보는 것을 이분법이라고 부르는데, 퍼즐이나 수학의 문제 중에는 이 이분법을 써서 풀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그 보기로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여러분이 지금 배우고 있는 수학 교과서 중의 어떤 문자 또는 기호 하나를 머리 속에 새겨 두어라.(이를테면 문제의 번호인 "2"도 좋고,"수"라는 문자도 좋다.)
그것이 어떤 문자, 또는 기호일지라도 스무 번의 질문에 정확하게 맞힐 수 있다. 이때, 여러분은 내 질문에 예, 또는 아니오(옳은 경우에는 예, 틀린 경우에는 아니오)라고만 대답하면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질문을 하면 좋은가?
한번의 질문으로 알아 맞출 수 있는 문자나 기호의 수는 두 가지이다. 가령 a와 b가 있을때, "a 인가?"라는 질문에 "예"라고 대답하면, 그것은 a이고, "아니오"라고 하면 b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의 질문으로는 2×2=4가지 중에서 답을 알아맞힐 수 있다. a, b, c, d의 네 가지 문자, 또는 수가 있을 때, "a아니면 b중의 하나인가?"라고 질문하였을 때, 대답이 예이건 아니오이건, a. b(a아니면 b중의 하나) 아니면 c. d이기 때문에, 나머지 한번만 질문하면 정답을 얻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3번의 질문으로는 2×3=8가지 중에서 답을 얻을 수 있고... 20번의 질문으로는 220=1048576 가지의 문자나 기호 중에서 정답을 얻어 낼 수 있다.
보통 교과서는 300페이지 안팎이고, 1페이지 당 1000자 미만이기 때문에 교과서에 실린 문자나 기호를 모두 합쳐도 300 1000 = 300000 가지에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앞의 식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20번의 질문으로 100만 가지 중의 하나를 알아맞힐 수 있기 때문에, 30만도 안되는 문자나 기호를 알아맞히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이다.
실제로 할 때에는 한번의 질문 때마다 페이지 수를 반씩으로 나눈다. 그러면 9번째 질문에서 어느 페이지인가를 알 수 있다. (29=512이기 때문에!)
작도 문제는 자와 컴퍼스 이외의 기구 사용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작도 불가능인 문제도 많다.
옛날부터 유명한 작도의 3대 불능 문제는 다음과 같다.
1) 임의의 각을 3등분하는 것.
2) 임의의 원과 면적이 같은 정사각형을 그리는 것.
3) 임의의 정육면체 부피의 두 배인 부피를 갖는 정육면체의 한 변의 길이를 작도하는 것.
이 문제들은 고등학교에서 공부하는 해석기하학을 익히면 쉽게 해결된다.
어떤 사람이 좋아하는 한 가지 숫자가 연이어 있는 수를 나타내는 식을 생각해 보자.
먼저 0에서 9까지의 정수 중에서 여러분이 좋아하는 수를 생각하여라. 그 수에 37을 곱하고 그 곱에 다시 3을 곱하여라.
그러면 여러분이 좋아하는 숫자로만 된 세 자리의 수가 나올 것이다. 이것을 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즉, 여러분이 좋아하는 수를 X라 하면
X 37 3 = XXX
가 된다. 만일 좋아하는 숫자가 6이라면
6 37 = 222,222 3 = 666
이 식의 원리를 생각하기 전에 다음과 같은 것을 하나 더 알아보자. 좋아하는 수에 12345679를 곱하여라. 그리고 그 곱에 다시 9를 곱하라. 그러면 좋아하는 숫자로만 된 9자의 수가 나올 것이다.
예를 들어 좋아하는 숫자가 7이라고 하자.
7 12345679 = 86419753
86419753 9 = 777777777
따라서 이것을 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이된다.
즉, 학생이 좋아하는 수를 X라 하면,
X 12345679 9 = XXXXXXXXX
이제 이 식이 이루어지는 원리를 생각해 보자.
X=7일 때를 생각하면,
7 12345679 9 = 777777777
양변을 7로 나누면
12345679 9 = 111111111
우변의 수 111111111은 9자리의 수이고 각 자리의 숫자가 1이므로 각 자리의 수의 합은 9이다. 따라서 111111111은 9의 배수이다.
이것을 9로 나누면 몫은 12345679이다.
따라서,
X 12345679 9
에서 12345679 9는 항상 111111111이 됨을 알 수 있고 여기에 좋아하는 수 X를 곱하면 X만으로 된 9자리의 수가 나오게 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X 37 3 = XXX
에서 생각해 보자. 이 식은 37 3=111이 되는 것에 착안하여 만들어진 식이다. 이와 같은 원리를 활용하면 또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다.
0은 아라비아에서 탄생하였다. 0은 세상에 나타나면서부터 즉각 일부 종교단체들로부터 모진 학대를 받았다. 심지어 그들은 0의 지식을 전파하는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만행까지 서슴지 않았다.
지금으로부터 약 14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0의 지식은 유럽에 전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로마숫자에는 0이 없었던 터라 로마교황 유스티누스는 장엄하게 선포했다.
"로마숫자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것이니 앞으로 어느 누구도 맘대로 숫자를 보탤 수 없느니라."
헌데 로마의 한 학자는 0에 대해 무척 관심이 많았다. 그는 교황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암암리에 0에 관한 지식과 계산하는데 있어서의 0의 작용을 연구 전파하였다. 그러나 누가 신고를 했는지 교황은 즉시 그 학자를 체포해서 감옥에 처넣었다. 그 학자는 무서운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고 꿋꿋이 자신의 의견을 내세웠다. 그러자 부아가 난 교황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놓고 혀를 잘라내고 손가락을 싹둑 잘라버리게 했다. 학자는 끝내 십자가에 못박힌 채 숨을 거두었다. 그렇지만 교황이 아무리 미치광이처럼 제지를 하려 해도 과학이 자연규칙에 따라 발전하는 것만큼은 제지하질 못했다. 0은 드디어 로마와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0이 사용되기 시작하자 뜻하지 않게 수학 왕국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 부호의 4형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0을 비난했다.
나누기가 선두주자로 일어나 항의했다.
"어떠한 숫자이든 0으로 나누어 보았자 아무 변화도 없잖아. 그러니 0을 어디다 써 먹겠는가?"
더하기가 기다렸다는 듯이 맞장구를 쳤다.
"그래! 어떠한 숫자에 0을 더해 보았자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잖아. 0은 아무 가치도 없는 존재야!"
잇따라 빼기가 비아냥대는 말투로 말했다.
"숫자에 0을 빼보았자 역시 그 모양이지."
곱하기가 심사숙고한 다음 0을 비꼬았다.
"아무리 훌륭한 수자라 하여도 0을 곱하면 싹 없어져버리고 말지. 그러니 곱하기가 무시당하는 거지."
4형제는 이구동성으로 0을 바라보며 고함을 질렀다.
"썩 꺼져! 우린 너 같은 녀석이 필요 없어. 멀리 멀리 꺼져버려. 영원히 안 봐도 좋으니깐."
그러자 0이 일어나 반박했다.
"평소에 이런 말을 잘하지요. '모든 것은 0으로부터 시작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 이 말이 곧 우리 숫자 형제들 가운데서 내가 차지하는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여실히 반영하는 말이오. 0은 즉 기점이며 숫자에서 첫 번째라는 거요. 비록 내가 아무 것도 없음을 나타내지만 내가 빠져서는 되는 것이 없어요. 소수점 숫자를 봐. 0.5, 1.05...등과 같이 나에게 의존해야 성립이 가능하지. 소수점의 끝자리에 나를 보태주거나 빼버리면 수치의 크기가 변하지 않더라도 정확도를 따질 경우에는 없어서는 안 되지. 예를 들어 1.05그람의 중량 정확도는 소수점 뒤의 두 자리 숫자까지 나타내지요. 그걸 만약 1.5그람으로 쓴다면 정확도는 소수점 첫 자리까지 밖에 나타낼 수가 없어요. 중량은 같더라도 정확도의 차이는 자그만치 10배나 되오. 그러니 나의 작용이 얼마나 크오."
0이 허리를 쭉 펴고 야무지게 반박해 나갔다.
"나는 옹근수 0이며 수학의 기초요, 평면과 입체좌표의 중심이며, 또한 나는 온도계에서는 빙점을 표시하며, 시간에서는 과거의 하루와 새로운 하루의 교체 시기를 표시하며, 측량기에서는 새로운 기점을 표시하고 있으며 전자계산기에 사용하는 '이진제'의 숫자는 단 두 개뿐인데 즉 나 0과 1이지. 여기서 나는 절반의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셈이야."
그제서야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 4형제는 자신들의 실책을 깊이 뉘우치고 머리를 숙였다. 이때 수학왕국의 노학자가 일어나 그들을 점잖게 타일렀다.
"0을 얕잡아 보아선 안 되느니라. 옛날 어느 수학가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0은 그 어떤 숫자보다도 풍부한 의미를 갖고 있다'."
1500여 년 전의 일이다. 중국에 장구건이라는 소년이 있었는데 그는 유달리 학문에 열중했다. 그의 아버지는 닭을 키워 생계를 꾸려나갔지만 때로는 호롱불을 켤 기름도 없어 쩔쩔 매곤 했다. 그러면 장구건은 반딧벌레를 한웅큼 잡아와 투명한 주머니 속에 넣고 반딧불 밑에서 공부를 하였다.
장구건이 열두 살이었을 땐 거의 안 읽은 책이 없을 정도였다.
그가 제일 흥미 있어하는 것은 수학이었다. 일단 유명한 수학가들의 책이라면 그는 거의 통달하다시피 읽고 또 읽었다. 마을에서 무엇을 계산해야 할 문제가 생기면 그를 모셔갈 정도까지 되었다. 그는 빠르고 정확하게 계산하여 그 명성이 널리 전해졌다. 사람들은 그를 장신동이라 불렀다.
장신동의 소문은 나라 재상에게까지 전해졌다. 그 당시 재상은 정직하고 바른 사람이었다. 만약 장구건의 소문이 헛소문이 아니라면 그를 인재로 등용할 계산을 하였다. 재상은 일단 그를 시험해 보기 위해 닭을 사도록 했다. 그때 수탉 한 마리의 가격은 은전 5닢이었고, 암탉 한 마리는 3닢이었으며 병아리는 3마리에 1닢이었다. 재상은 장구건의 아버지에게 은전 100닢을 건네주면서 이튿날까지 닭 100마리를 가져오라고 말했다. 물론 한 마리가 모자라도 안 되며 더 많아도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집으로 돌아온 장노인은 침통한 얼굴로 깊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필경 아버지에게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고 생각한 장구건이 아버지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아버님 무슨 일이 있으세요? 제가 도움이 될른지는 모르겠지만 제게 말씀해 보세요."
"간단한 일이 아니다. 나라 재상의 뜻을 거스르면 목숨도 건지기가 어렵다." 라고 입을 연 장노인은 재상이 자기에게 시킨 일을 털어놓았다.
"제가 해결해 드릴 게요."
장구건은 침착하게 계산해 나갔다.
"아버님 내일 아침에 수탉 4마리와 암탉 18마리, 병아리 78마리를 사다드리세요."
이튿날 장노인은 아들이 시킨 대로 하여 닭 100마리를 재상에게 갖다 주었다. 계산이 맞는가 확인해 본 재상은 재삼 시험해보기 위해 또 은전 100닢을 장노인에게 주면서 닭을 100마리를 가져오되 각 닭의 숫자가 오늘과 같아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달았다.
장노인은 울상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장구건은 잠깐 생각하고 나서 그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튿날 장노인은 아들의 말대로 수탉 8마리, 암탉 11마리, 병아리 81마리를 광주리에 담아 들고 재상을 찾아갔다.
이번에도 정확하게 가져온지라 재상은 속으로 감탄했다. 하지만 재상은 다시 한번 장구건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는 장노인 에게 또 은전 100닢을 주면서 닭 100마리를 가져오되 그 수가 지난번과 같아서는 절대 안 된다고 했다. 장노인은 지레 겁을 먹고 얼굴이 창백해 졌다. 한두 번은 그렇다 해도 이번에까지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하지만 이번에도 노인은 아들 구건의 말대로 수탉 12마리, 암탉 4마리, 병아리 84마리를 가져갔다. 재상은 닭의 숫자를 확인하고 나서 즉각 장구건을 조정으로 불렀다. 그후 장구건은 재상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열심히 공부하여 유명한 수학자가 되었다.
이 이야기에 나온 문제는 부정 방정식을 이용한 해결방식이다. 이 방정식에 통달하면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가 있다.
삼각형이나 사각형 그리고 원 등을 같은 도형으로 간주하는 재미있는 기하학을 '토폴로지(위상기하학)'라고 부른다는 것은, 이미 이야기한 바와 같다. 그리고 서로 같은 도형을 '동상'이라고 부른다는 것도 말이다.
이 기하학에서는 원과 선분은 서로 다른 것으로 취급된다는 것도 복습을 겸해 덧붙여 둔다. 왜냐하면 늘이거나 줄이거나 하는 것만으로는 선분을 원으로 변형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마찬가지 이유로 이어진 도형과 그렇지 않은 도형은 '같아(=동상)'질 수 없다. 도너츠와 커피잔이 동상이라지만 도너츠는 커피를 담을수가…
여기서는 길이, 넓이, 부피, 각도 등은 일체 문제시하지 않는다는 이유도 앞에서 말한 이 기하학의 성질을 생각하면 금방 알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늘이거나 줄이는 동안에 변화해 버려서 일정한 기준을 둘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사면체, 오면체... 등의 다면체는 한결같이 (면의 개수) + (꼭지점의 개수) - (모서리의 개수) = 2 라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이것은 다면체에 바람을 넣어서 부풀게 하였을 때 생기는 구면의 성질이다. (예를 들어 축구공 표면에 임의로 다각형을 그려 연결시켜 보면 위의 공식이 성립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알고 있는 이 관계 즉, 모양이야 어떠하든 입체도형의 표면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관계는 사실은 토폴로지(위상 기하학)의 성질인 것이다.
부호이론 전공자가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기
부호이론(coding theory)을 전공하는 사람은 어떻게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을까?
부호이론은 응용대수학의 한 분야로서, 컴퓨터 통신간에 데이터를 송수신하는 데 있어서 발생하는 에러를 검출하고 이를 수정하는 이론과 관계 있는 수학이다. 따라서 코끼리의 코만 냉장고에 집어넣고, 냉장고 속에서 그 코를 가지고 에러를 찾아내어 코끼리를 만든다.
위상수학 전공자가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기
코끼리에게 냉장고를 먹인 후 코끼리의 겉과 속을 뒤집는다.
그러면 냉장고 속에 코끼리가 들어가지 않을까........
확률론자가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기
확률을 가지고 냉장고에 넣는 방법.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시행을 코끼리가 냉장고에 들어갈 때까지 한다.
해석학자가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기
코끼리를 미분해서 냉장고에 넣고 냉장고 속에서 적분한다.
선형대수학자가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기
선형대수를 공부한 사람들은 어떻게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을까?
우선 코끼리라는 공간의 기저(basis)인 네 다리를 냉장고에 넣고 이 기저로 냉장고 속에서 코끼리를 생성(generate)한다
수학이란 결코 문제를 푸는데 즐거움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수의 불가사의한 아름다움과 마력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수의 여러 가지 방법으로 더하고 곱하여 다음과 같은 아름답고 규칙적인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종류 1 1 1 = 1
11 11 = 121
111 111 = 12321
1111 1111 = 1234321
11111 11111 = 123454321
111111 111111 = 12345654321
1111111 1111111 = 1234567654321
11111111 11111111 = 123456787654321
111111111 111111111 = 12345678987654321
인수분해의 계수들
(a + b) = 1a + 1b
= 1a + 2ab + 1b
종류 2 0 9 + 1 = 1
1 9 + 2 = 11
12 9 + 3 = 111
123 9 + 4 = 1111
1234 9 + 5 = 11111
12345 9 + 6 = 111111
123456 9 + 7 = 1111111
1234567 9 + 8 = 11111111
12345678 9 + 9 = 111111111
123456789 9 + 10 = 1111111111
종류 3 9 9 + 7 = 88
98 9 + 6 = 888
987 9 + 5 = 8888
9876 9 + 4 = 88888
98765 9 + 3 = 888888
987654 9 + 2 = 8888888
9876543 9 + 1 = 88888888
98765432 9 + 0 = 888888888
종류 4 123456789 1 9 = 111111111
123456789 2 9 = 222222222
123456789 3 9 = 333333333
123456789 4 9 = 444444444
123456789 5 9 = 555555555
123456789 6 9 = 666666666
123456789 7 9 = 777777777
123456789 8 9 = 888888888
123456789 9 9 = 999999999
무한의 문제는 수학이 수학답게 발달한 지금까지 중요한 과제로써 많은 수학자들에 의하여 연구되어 왔으나, 아직까지 밝히지 못한 부분이 많다. 지금은 결론이 나왔으나, 100년 전만 하더라도 수학자들의 논쟁 대상이 된 문제를 소개하고자 한다.
# S = 1 - 2 + 4 - 8 + 16 - 32 + 64 - 128 + … 의 답은 다음 중 어느 것일까요.
1) S = 1 - 2(1 - 2 + 4 - 8 + 16 - 32 + 64 - 128 + …)
S = 1 - 2S
2) S = 1 + ( -2 + 4) + (-8 + 16) + ( -32 + 64) + ( -128 + 256) + …
S = 1 + 2 + 8 + 32 + 128 + …
S = ∞
3) S = (1 -2) + (4 - 8) + (16 - 32) + (64 - 128) + …
SS = -1 -4 -8 -64 - …
S = -∞
위의 3가지 풀이 방법이 모두 이치에 맞는 것 같은데 답이 3가지인 것으로 보아 뭔가 이상하다. 위의 답은 무엇인가?
1), 2), 3) 모두 틀렸다. 즉, 답은 없다. 왜냐하면 유한의 수에 적용되는 법칙과 계산을 무한의 수에 그대로 적용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유한의 연장선이 무한인 듯 생각하기 쉬우나 유한과 무한은 전혀 다르다.
기원전 3세기경인 알렉산드리아에서 살았던 그리스의 수학자 파퍼스가 쓴 <수학집성>이라는 책에는 꿀벌에 관한 책이 있다. "꿀벌은 천국에서부터 꿀이라는 신들의 음식을 얻어서 인류에게 날라다 준다. 이처럼 귀한 꿀을 땅바닥이나 수목에 저장하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그래서 꿀벌들은 꿀을 저장하기 위한 적당한 그릇을 만들었다. 이 그릇은 불순물이 끼지 않아야 하고 빈 공간이 없이 채울 수 있어야 한다. 그 도형은 정삼각형, 정사각형, 정육각형뿐이다. 꿀벌들은 본능적으로 최대의 각(꼭지점)을 가진 정육각형을 택하였고, 이 형태가 다른 둘보다 많은 꿀을 저장할 수 있다. 벌들이 정육각형을 만드는 이유는 재료를 아끼겠다는 경제의 원칙을 터득한 결과일 것이다.
자연 속에서는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기하학적 도형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우주는 수학이라는 문자로 되어 있다>라는 감탄사가 저절로 입에서 나온다.
서정이는 수학 선생님에게 "임의의 수 a는 0과 같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증명(?)해 보였다.
a=b라 할 때, 식의 양변에 같은 수 a를 곱하면,
a2 = ab
또, 양변에서 b2을 빼면,
a2 - b2 = ab - b2
이것을 인수분해하면,
(a+b)(a-b) = b(a-b)
양변을 (a - b)로 나누면,
a + b = b
양변에서 b를 빼면, 결국
a = 0
앞의 증명의 어느 부분이 잘못된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a에 실제로 수를 대입해 보자.
a = 2 = b라 하면,
1식 : 2 = 2
2식 : 22 = 2 × 2
3식 : 22 - 22 = 2 × 2 - 22
4식 : (2 + 2)(2 - 2) = 2 (2 - 2)
5식 : 2 + 2 = 2
6식 : 2 = 0
여기서, 4식에서 5식으로 넘어갈 때, (2 + 2)·0 = 2·0이 2 + 2 = 2가 되어 5식이 틀렸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0으로는 다른 수를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즉, 0분의 a는 불능이다.
어느 사형수가 토요일에 판사로부터 다음과 같은 선고를 받았다.
"교수형은 다음 주 7일 중 어느 날인가 오후에 집행한다. 그러나 형을 집행하는 날 아침에 그 사실을 알릴 때까지 너는 그 날이 어느 날인지 모른다."
그 재판관은 약속을 잘 지키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죄수는 변호사와 함께 감방으로 돌아왔다.
단둘이 마주 앉았을 때 변호사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판사의 판결은 실시 불가능이야."
"무슨 뜻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라고 죄수가 말하자,
"그러면 설명하지. 다음 주 토요일에 형의 집행이 불가능한 것은 확실하다. 토요일은 주의 마지막 날이다. 금요일 오후까지 만일 살아있다고 가정하면 토요일에 형이 집행된다는 것을 너는 안다. 즉, 토요일 아침, 형이 집행되기 전에 너는 알아버린 것이 된다. 그 것은 판사의 판결에 위배된다."
"그렇군요." 라고 죄수는 말하였다. 변호사는 계속하였다.
"그래서 토요일은 확실히 제외된다. 그러면 금요일이 집행 가능한 최후의 날이다. 그러나 목요일 오후가 되면 다음 금요일, 토요일의 이틀밖에 없으므로 금요일의 집행은 불가능하다. 토요일의 집행이 불가능하니까 금요일이 최종 집행일이어야 되는데 이 사실을 네가 알았으니, 이 날 집행하는 것은 판사의 판결에 위배된다."
"알 것 같습니다."
"똑같은 이유로 목요일, 수요일, 화요일, 월요일도 집행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내일뿐인데 우리가 이미 내일이라고 아는 이상 내일 집행도 불가능하다."
판사의 판결은 자승자박 속에 빠진 것 같다.
그러나 그의 판결을 구성하고 있는 두 진술에 이론적 모순은 없지만 과연 형의 집행이 불가능할지는 의문이다.
어느 마을에 들린 나그네가 이발사에게 경쟁 상대가 있는지를 물었다. 이발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경쟁상대는 없습니다. 이 마을 사람 중에서 스스로 수염을 깎는 사람 외에는 모두 내가 수염을 깎아 줍니다."
이 답변을 들은 나그네는 새로운 궁금증이 생겼다. 이 이발사는 자신의 수염을 스스로 깎는지 어떤지 하고 말이다. 우리도 함께 생각해 보자.
먼저, 이발사가 스스로 면도를 한다고 하자.
그러면 이 이발사는 자신의 수염을 스스로 깎는 사람에 대해서는 면도질을 안 하기 때문에, 결국 그는 자신의 수염을 자신이 깎지 않는 셈이 된다.
그렇다면, 그가 자신의 면도를 하지 않는다고 해보자.
그러나 이 이발사는 스스로 수염을 깎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모두 면도해 주기 때문에 결국 그는 자신의 수염을 깎는 셈이 된다.
이런 기막힌 일이란! 알고 보면 이발사는 가엾게도 자신의 수염을 깎을 때는 깎지 않고, 깎지 않을 때에는 깎는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인 것이다.
재미있는 일화
수학을 잘하면 반드시 계산도 잘 한다고 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계산을 잘 한다고 그가 수학자라고는 더욱 말할 수 없다. 암산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암산을 잘 못하는 수학자는 역사상 너무나 많이 있었다.
암산의 명인은 많이 있으나 그 중에서 미국인 콜방(1804-1840)은 명수중의 명수였다. 그는 국민학교에 입학하자마자 13×97=1261을 암산으로 계산하였고, 8세일 때 16승의 계산 즉, 216=28147497610656을 암산으로 구했다. 한 자리의 10승 계산도 모두 암산으로 하였다.
대수학자 오일러는 4294967297=232+1 임을 연구 고심한 후 발견하였으나, 콜방은 641×6700471로 분해됨은 암산으로 해치웠다고 한다.
그러나 콜방은 10세 때부터 암산 능력이 감퇴되고 어른이 되어서는 목사가 되어 신학교에서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등을 가르쳤다. 그렇다고 암산 명수들은 모두 수학자의 재능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독일이 낳은 대수학자 가우스는 18세기 후반, 벽돌 공장을 하는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3세 때 아버지가 직공들 월급 계산하는 것을 옆에서 보고 있다가 잘못을 지적하였다고 한다.
학교에 입학한 후 선생님이 다음과 같은 문제를 냈다.
1+2+3+4+5+6+7+8+9+10 = ?
즉, 1에서 10까지의 합이 얼마인가? 하는 문제였는데, 가우스는 즉시 답을 계산하고 친구들 계산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한다.
가우스의 계산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1+2+3+4+5+6+7+8+9+10
= (1+10)+(2+9)+(3+8)+(4+7)+(5+6)
= 11×5
= 55
= (1+10)+(2+9)+(3+8)+(4+7)+(5+6)
= 11×5
= 55
이 방법은 등차 급수의 합을 구하는 방법과 같은 방법이며 단순한 암산과는 달리 수의 법칙을 이용한 경이적인 것이다.
인도의 수학은 그리스의 수학과는 달리 상업에 의한 실용적인 면에서 발달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인도의 수학자 굽타가 628년에 쓴 수학책에는 원금과 이자 계산에 관한 문제가 많이 실려 있는데 특히, 현재의 근의 공식과 비슷한 이차 방정식의 풀이법도 실려 있다.
그리스와 인도 수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아라비아의 수학에 있어서는 방정식에 대한 이론이 크게 발달되었다. 특히, 알콰리즈미(Alkhwarizmi)는 인도수학의 영향을 받아 많은 수학책을 썼는데, 오늘날 통용되고 있는 알고리즘(셈법을 뜻함)이란 말은 그의 이름을 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차방정식을 다음과 같이 5가지로 분류하여 풀었다.
1. aX2=bX
2. aX2=c
3. aX2+bX=C
4. aX2+c=bX
5. aX2=bX+C
이때, 그는 두 양수의 근만을 가지는 이차방정식을 다루었고, 또 두 양수의 근 중 작은 쪽만을 근으로 취급했다.
옛날 동프로이센에 쾨니히스베르크라는 도시가 있었다. 2차 세계 대전 때 독일 군이 이 도시에서 완강히 저항하였는데 1945년 4월 9일, 결국 소련군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그후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 결과 이 도시는 소련 영토가 되었다. 소련 령이 된 이 도시는 소련의 혁명과 미하일 이봐노빗치 카리닝의 이름을 따서 카리닝그라드로 바뀌었다. 이 카리닝그라드, 옛날 쾨니히스베르크에는 부레겔 강이 흐르며 그 강에는 그림과 같이 7개의 다리가 있다.
이 다리를 두 번 건너지 않고, 모든 다리를 한번씩만 건너서 산책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그곳 시민들의 관심거리였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오일러가 증명하였다는 이야기는 앞에서 한 바 있다.
위대한 천재는 우리가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은 사건으로부터 불멸의 진리를 발견한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이나, 목욕탕 물이 넘치는 것에서 비중의 원리를 발견한 아르키메데스나, 고층 빌딩에서 실족해서 떨어지는 사람을 보고 상대성 원리를 발견한 아인슈타인이나 모두 우리들이 흔히 보는 평범한 사건에서 그 위대한 진리를 발견한 것이다.
오일러도 이 7개의 다리 문제에서 '위상수학(topology)'의 새로운 부문을 개척하였다.
결국 7개의 다리를 건넌다는 것은 오른쪽 그림의 "한 붓 그리기" 문제와 같은 것이며, 한 붓 그리기가 가능한 것은 홀수점(한 점에 모이는 선의 수가 홀수 개인 점)의 개수가 0또는 2개일 때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다음 그림을 보고 홀수점의 개수를 알아보고 한 붓 그리기가 가능한 것은 어떤 방법인지 찾아보아라.
아폴로니우스의 별명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아폴로니우스는 '엡실론 선생'이었고, 에라토스테네스의 별명은 '베타 선생'이었다.
두 선생의 강의실이 제5, 제2교실이었기 때문에 그리스 문자의 알파벳이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α(알파), β(베타), γ(감마), δ(델타), ε(엡실론)
--- 선생님에게 별명을 붙이는 것은 좋지 못한 것이지만 만일 붙인다면 이와 같이 산뜻한 것이면 좋지 않을까?
옛날의 사상가들, 예를 들면 데카르트(1596-1650), 파스칼(1623-1662), 라이프니쯔(1646-1716)등의 대 사상가들은 수학자로도 더 유명하다. (실제로 수학사전을 찾아보면 이들의 이름이 있다. 그렇다면 왜 지금은 사상가이자 수학자는 없을까? 이러한 의문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잘못 되었다. 17C는 수학자니, 철학자니 하는 분업이 없었다. 근대 유럽의 개척자인 이들은 사상뿐 아니라 수학까지 생각하여야 하였다. 하기야 사상과 수학의 유대는 비단 이 시대에 국한하지 않고 그리스이래 줄곧 이어오고 있는 유럽의 전통이기도 하다. <자본론>의 저자 마르크스(1818-1883)는 미적분학의 발달사에 관한 논문을 남겼으며, 마르크스와 함께 '마르크스주의'를 창시한 엥겔스(1820-1895)는 그의 저서 <자연 변증법>속에서 수학의 본질을 깊이 다루고 있다. 그래서 러시아가 지금에서도 수학의 첨단을 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 금세기의 문학비평가 슈펭글러(1880-1936)의 대표작 <서양의 몰락>의 첫 장은 '수학에 대하여'로 되여 있다. 한편 뉴턴을 숭배했던 철학자 칸트가 실제 수학적인 내용을 다룬 것이 싱겁게도 '7 + 5 = 12'정도가 고작이었던 것은 아이러니컬하다. 그러나 비록 수학적인 형태는 취하지 않았으나, 시간과 공각에 관한 이율배반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등 뛰어난 수학적 자질을 엿보여 주고 있기도 하다. 이 점에서는 그는 아주 위대한 수학자의 소질을 가졌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과학자의 수가 별처럼 많다고 하지만 아르키메데스(B.C.287- B.C.212)처럼 위대한 과학자는 극히 드물다. 그는 인류 역사상 위대한 과학자 3명을 꼽으라면 반드시 그는 손꼽힌다. 그는 원주율의 연구, 지렛대의 연구, 포물선의 연구 등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만 단순한 수학자가 아니라 물리학에 관해서도 수많은 업적을 남기고 있으며, 당시에는 그의 지식을 이용하여 무기도 발명했었다. 그의 부력의 원리는 잘 알려진 일이고, 그의 모국 시라쿠사가 로마의 침략을 받았을 때 아르키메데스는 땅에 원을 그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 때 로마의 병사 하나가 뛰어 들어와 그가 모래판에 그려놓은 도형을 짓밟고 지나가려 하자 아르키메데스는 '이 그림을 밟지 마라!'고 호통을 쳤다. 무식한 병사가 위대한 과학자의 마음을 헤아릴 턱이 없었다. '시건방진 늙은이가 제 처지도 모르고'라는 욕설과 동시에 오랜 전쟁에서 거칠어질 데로 거칠어진 이 로마 병사는 단 칼에 아르키메데스의 목을 베었다. 아르키메데스를 진심으로 존경한 로마의 사령관 말케르스는 나중에야 이 사실을 알고 가슴 아파했으며 고인의 업적을 길이 빛내기 위해 원기둥에 구가 내접하도록 새긴 묘비를 세웠다.
뉴턴에 대하여서는 새삼스럽게 소개할 것도 없지만, 그가 남긴 <자연 철학의 수학 원리(1687)>-일명<프린키피아>-라는 저술은 근대 이후 현대에 이르는 물리학의 기틀이 되는 불멸의 책이다. 그가 살았던 때는 청교도 혁명, 왕정복고, 명예혁명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혼란의 시대였으므로 영국인에 있어서 그의 이름은 어두웠던 시대의 또 다른 밝은 일면을 나타내는 영국의 영광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프린키피아>에는 적분법을 이용한 면적 계산의 정리가 실려 있다. 뉴턴의 선구자로 손꼽힐만한 업적을 세운 사람이 카발리에리이다. 그가 발견한 면적 계산의 원리는 뉴턴의 방법에 비하여 유치한 데가 있으나, '어떤 도형을 면적 구하기 쉬운 도형으로 바꾸고 계산하는 데는 편리하다. 더구나 그의 방법에는 '극한'이 이미 담겨져 있었다. 뉴턴의 방법도 잘 다듬어진 지금의 미적분학에 비하면, 불완전한 점이 적지 않다. 뉴턴과 더불어 미적분학의 발견자로서 영광을 나누어 가진 라이프니쯔는 뉴턴보다 조금 뒤에 이 학문을 착안했지만 여기에 사용되는 편리한 기호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뉴톤보다 높이 평가받고 있다.
철학자이기도 하였던 라이프니쯔는 철학에 있어서의 기호적 상징의 중요성을 깊이 생각하였던 사람으로, 기호적 계산에 의하여 인간의 사고 세계를 나타낼 수 있다는 생각을 젊었을 때부터 가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쓰고 있는 기호 중에도 라이프니쯔가 쓰고 있는 기호가 있다.
dx,
또 라이프니쯔가 이름지은 '무한소'와 '해석'이란 명칭은 '무한소해석'이 되고, 그 후 '미적분학'이라는 명칭으로 정착이 되었는데 이 또한, 라이프니쯔의 공이라 생각된다. 미적분학의 창시자로서 뉴턴과 라이프니쯔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뉴턴이 물리학의 연구와 관련 있는 운동의 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반해, 라이프니쯔는 '원자론적'인 철학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조상들은 1, 3, 5, 7,… 등 홀수를 양의 수 2, 4, 6, 8,… 등 짝수를 음의 수라 하였다. 양은 밝고 높고 따뜻한 것으로, 음은 어둡고 작고 낮고 서늘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달력에도 양이 겹치는 날을 명절로 정하였다.
1 월 1 일 : 설
3 월 3 일 : 삼짓날
5 월 5 일 : 단오
7 월 7 일 : 칠석
9 월 9 일 : 중제
위의 날들은 모두 양이 겹쳐 있어서 중양절이라 하며 경사스러운 날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였다.
수에 의미를 부여하기는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다. 피타고라스는 "약수의 합이 그 수 자체가 되는 수를 완전수"라고 하였다.
6의 약수는 1, 2, 3,인데 1+2+3 = 6,
28의 약수는 1, 2, 4, 7, 14, 28 인데 1+2+4+7+14 = 28
그러므로 6, 28 등의 숫자를 완전수라 하였고, 최초의 완전수가 6이므로 신은 6일 동안에 천지 창조를 하였다고 믿었다. 또한 28살에 결혼을 하면 평생 길하다고 믿었다.
1798년 초여름, 나폴레옹은 군대를 인솔하여 이집트의 원정길에 올라 피라미드 밑에서 한판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전쟁의 공포로 불안해하는 부하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4000년 역사가 여러분의 용맹을 지켜보고 있다! 최선을 다하여 싸워라!" 하고 외쳤으며, 드디어 그 싸움은 승리로 끝났다. 나폴레옹의 부하들이 피라미드에 올라가서 구경을 하는 동안 나폴레옹은 무엇인가 계산하기에 바빴다. 기자(지명 : 이집트의 동북부, 나일강의 기슭에 있는 옛도시)에 있는 3개의 큰 피라미드의 돌을 전부 합쳐서 높이 6피트, 두께 1피트의 돌담을 쌓으면 프랑스 전체를 둘러 쌀 수 있는 긴 성벽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나폴레옹은 피라미드의 계산뿐 아니라 전쟁에 필요한 물자의 수송 소비 등 여러 가지 계산을 손수 즐겨 하였다고 한다. 위 계산으로 짐작한데 피라미드의 크기는 굉장하다고 생각한다. 인공위성으로 달나라에 착륙하여 지구를 봤을 때 육안으로 보이는 구조물은 중국의 만리장성뿐이라고 한다. 참! 스핑크스의 코가 깨어진 것은 그때 나폴레옹 포병이 장난으로 대포를 쏴서 코를 맞춘 탓이라 한다.
어느 날 탈레스가 나귀등에 소금을 싣고 강을 건너 갈 때이다. 나귀 한 마리가 실수로 강물에 넘어져서 등에 싣고 있는 소금이 강물에 녹아 짐이 많이 가벼워 졌다. 여기에 재미를 붙인 나귀는 그 다음부터 강을 건널 때마다 일부러 넘어져 짐을 망쳤다. 탈레스 선생은 이 고약한 나귀의 버릇을 고치려고 많은 생각을 하다가 이번에는 나귀의 등에다가 해면과 솜을 실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도 강에 넘어진 나귀는 짐이 더욱 무거워 져서 나쁜 버릇을 즉시 고쳤다고 한다.
제논은 그리스의 소피스트(궤변론자)이며, 머리도 좋고 학식도 높았으나 성질이 괴팍하여 그 당시의 대수학자들의 학설을 비꼬기만을 하였다.
그가 내세운 반론(역설)은 많은 사상가들에게 고민을 주었고, 사람의 미움을 받게 되었고 마침내 왕에게까지 미움을 받아 야속하게 처형되고 말았다. 그 형장에서도 마지막으로 왕에게 직접 전해야 할 비밀이 있다고 하여 왕에게 직접 다가가서 갑자기 왕의 귀를 물어뜯었으며, 호위병이 달려와서 칼로 목을 쳤으나 잘린 목이 여전히 왕의 귀에 있더라는 전설이 남아있다. 다른 전설에 의하면, 제논이 사형을 언도 받고 왕에게 직접 책을 한 권 주면서 자기가 지금까지 발표하지 않은 중요한 학설이 이 책 속에 있으니 읽어보라 하였다. 왕은 책을 받아들고 책장을 넘겼으나 책장이 너무 찰싹 달라붙어 한 장씩이 잘 넘겨지질 않아, 왕은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그 책장을 다 넘겨봤는데도 아무 내용이 없었다. 그러자 제논이 "나를 죽이려는 왕아! 너도 그 책 속에 묻은 독이 곧 몸에 퍼져 죽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는 또 하나의 전설이 있다.
제논의 역설
1. 모든 운동이란 있을 수 없다.
A E D C B
+------+------+-----------+---------------------+
A에서 B까지 움직이려면 AB의 중점 C를 지나야 한다. 또 C까지 가려면 AC의 중점 D를 지나야 한다. 이와 같이 중점들을 계속 지나야 하는데 그 중점들은 무수히 많아 영원히 갈 수 없고 따라서 운동이란 있을 수 없다.
2. 토끼와 거북이
초등학교 교과서에 "토끼와 거북이"란 단원이 있다. 제논의 주장에 의하면 "토끼는 거북이를 앞지를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토끼는 거북이가 처음 있는 지점까지 가면 거북이는 이미 앞의 어느 지점까지 전진해 있다. 또 토끼가 그 지점까지 가면 거북이는 앞의 어느 지점까지 가 있다. 이렇게 계속 된다면 토끼는 영원히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가 없을 것이다.
3. 공중을 날으는 화살은 움직이지 않고 정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화살이 A에 왔을 때, 그 위치에 순간적으로 정지하고 있다.
B에 왔을 때도 마찬가지로 B에 순간적으로 정지해 있다. C, D, E,… 등 계속 그 위치에 순간적으로 정지하고 있으며, 이런 일들이 순간적으로 연속하여 일어나는 것이지 화살은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실린 신화적인 전설 가운데 노아의 대홍수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가장 높은 산까지도 물에 덮였다는 이야기이다. "7일간 홍수가 일어났다. ---- 비는 40일 동안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하늘에서 쏟아졌다. --- 물이 불어나서 배를 띄웠더니 땅위를 덮은 물위를 떠다녔다."는 식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을 덮을 만큼 비가 실제로 내렸을까? 이 문제를 수학적으로 계산을 해보자.
대홍수를 일으킨 물은 실제 대기 중에서 생긴 것이다. 실제로 수학적으로 계산하여 보면, 기상학의 책에 의하면 1㎡의 땅위에 공기 기둥에는 수증기가 평균 16kg 포함되어있으며, 많아도 25kg 이상을 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대기 중의 수증기 전체가 비가 되어 땅에 내릴 경우 그 깊이는 얼마나 될까? 25㎏, 즉, 25000g의 물의 부피는 25000㎤이다. 1㎡ = 100 × 100(㎠) = 10000(㎠)에 대하여 이 부피를 밑넓이로 나누면 깊이가 나온다. 25000 ÷ 10000 = 2.5 즉, 전세계를 덮은 대홍수는 기껏해야 수심이 2.5㎠ 밖에 되지 않는다. 이 이상의 수분은 대기 중에는 없고, 또한 내린 비가 땅에 스며들지 안는다는 가정 하에서이다. 이 2.5㎝라는 높이는 지상 8840m의 에베레스트 산 꼭대기에는 훨씬 못 미친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나오는 대홍수의 이야기는 무려 350000배나 과장이 된 것이다.
유클리드 이야기를 할 때 그 이름이 나온 메네쿰스와 알렉산더 대왕에 관한 일화! 알렉산더 대왕은 학문에 관심이 있어서 메네쿰스를 스승으로 모시고 기하학을 공부하였다. 정치하는 여가를 틈타서 공부를 하였으므로 배우는 것이 힘이 들고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왕은 "왕의 권위로서 좀더 쉽고 빨리 배울 방법은 없을까"라고 메네쿰스에게 물었다. 메네쿰스는 즉시 "나라에는 임금님의 전용도로나 사유지 도로가 있어서 지름길이 가능 할 수 있지만 기하학에는 모든 사람에게 오직 한 길 뿐입니다" 대답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기하학에는 왕도가 없다'는 말은 지금까지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우리들이 공부한 삼각함수의 기호는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고 많은 변천을 거쳐 현재의 것이 되었다. 1220년에 출판한 이탈리아의 피보나치가 쓴 <실용 기하학>에는 사인을 Sinue rectus areus라는 긴 이름으로 썼고, 그 후 1553년 독일의 뉴른베르그에서 레지오몬타누스기 쓴 책 속에는 Sine totus rect-us라고 썼고, 1542년 독일의 계산의 대가 레티쿠스의 삼각함수표에는 Sinus totus로 쓰여 있다. 그 후 Sinus라는 말은 자주 나타났으며 1624년 군타라는 사람은 sin, cosinus, cotangems라는 기호를 썼으나 인쇄가 되질 않아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1626년 네덜란드의 지라드(1595 - 1623)가 각A의 사인을 그냥 A로, 코사인을 90°- A = a 로 놓고 이를 a로 나타내고, 탄젠트를 Atan,세크를 Asec로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일반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 후 많은 책 속에 sin의 기호가 나타났으며, sin은 프랑스의 헤리곤 cos은 무어, tan와 sec는 지라드, cotan은 무어, cosec는 오우트레드이다.
주워진 자연수 중 어떤 수가 "소수"인지를 알아보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467이 소수인가 아닌가를 알기는 쉬운 일이 아니며 특히 숫자가 클수록 어려워진다. 그래서 일정한 숫자 범위 내에서 "소수표"를 미리 만들어 놓으면 편하다.
2 3 5 7 11 13 17 19 23 29 31 37 41 43 47 53 59 61 67 71
73 79 83 89 97 101 103 107 109 113 127 131 137 139 149 151 157 163 167 173 179 181 191 193 197 199 211 223 227 229 233 239 241
251 257 263 269 271 277 281 283 293 307 311 313 317 331 337 347
349 353 359 367 373 379 383 389 397 401 409 419 421 431 433 439
443 449 457 461 463 467 479 487 491 499
우리들 각자도 위의 표를 만들어 본다면 500까지 하나하나 <체로 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실제로 19까지 <체로 친>다음 19의 배수를 지워버리면 위의 표가 만들어진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소수표를 만들 때 파피루스를 틀에 씌워 거기에 수를 써놓은 다음 합성수를 오려냈다. 그리하여 후세에 이 소수표를 "에라토네스의 체"라 하였다.
이집트에는 매의 머리를 가진"호르스"라는 이름의 신이 있다. 그러니까 "호르스의 눈"이란 매의 눈을 뜻하기도 한다. 이 "호르스의 눈"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신화가 있다.
하늘의 신과 땅의 신 사이에서 태어난 오씨리스는 이집트를 다스리면서 나라를 미개의 상태로부터 문명국으로 발전시켰다. 그의 동생 세트는 형의 성공을 시기한 나머지 흉계를 꾸며 형을 죽이고 시체를 상자에 넣어 나일강에 흘러보냈다. 오씨리스의 아내 이씨스는 이 상자를 강기슭에서 건졌으나 다시 세트에게 빼앗겨 버렸다. 이것을 빼앗은 세트는 또 다시 오씨리스의 시체를 토막으로 쪼개어 이집트 각지에 뿌려 버렸다. 하지만 이씨스는 이것을 꼼꼼히 주어 모아서 형체나마 남편의 모습을 되찾아 버렸다. 그런 후 死者의 신이 오씨리스의 시체를 미이라로 만들어 버렸다. 이씨스는 자신의 날개로 이 시신에 부채질하여 남편을 되살아나게 하였다. 그후 오씨리스는 저승의 왕이 되었다. 한편 오씨리스의 아들로 나중에 "신중의 신"으로 섬겨지게 될 호르스는 세트를 무찌르고 왕위에 오르지만 세트는 그의 눈을 뽑아내어 산산조각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신화를 근거로 하여 이집트인은 눈 전체를 1로 하여 눈의 각 부분에 단위분수를 배치했다. 이 분수의 전체를 더한 것은 1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족한 부분인 1/64은 토토신이 보충하기 때문이라 한다. 이 단위 분수를 "호르스 분수"라고 한다는, 이집트다운 신화이다.
27세의 젊은 나이로 죽은 노르웨이의 천재 헨릭 아벨(H.Abel,1802-1829)은 수학을 전문으로 공부할 때에 나오는 고등 수학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긴 수학자이다. 그는 중학교 때 공부를 잘하진 못했으나 수학은 뛰어나게 잘했다. 하지만 희망에 가득 찬 아벨도 19세쯤 되는 나이에 목사였던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러나 아벨은 수학 공부만큼은 포기 할 수 없었다. 마침내 일대 결심을 하여 대학에 입학을 하였다. 물론 가난한 아벨은 대학생이 되면서도 끼니를 굶은 날이 적지 않았다. 추운 겨울밤에 한 장의 담요 속에서 형님과 얼싸안고 떨면서 잠을 이루기도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친구를 몹시 좋아했으며 언제나 쾌활하였다. 장난꾸러기였던 아벨이 중학시절의 은사님께 보낸 편지 끝에 년이라는 괴상한 날짜 표시가 되어있었다. 이 편지를 받은 교사는 그에게 수학에 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던 교사이며 여러 가지 번거로운 질문에 대해 친절히 지도해 주었던 호른보애라는 수학교사였다. 6064321219의 3제곱근은 1823.5908275...이니까 이 1823은 서기로 따져 그해 곧 1823년을 가리키고 나머지 소수점 이하는 1년을 단위로 할 때 소수이기에 날짜로 고치면 365×0.5908275...=215.652...일. 요컨대 1월 1일부터 따져 216일째 된다는 것이며 그것은 8월 4일에 해당한다. 즉 아벨은 1823년 8월 4일이라고 쓰는 대신에 3제곱근을 썼다. 그는 대학에 들어갔을 때 당시의 수학계의 숙원이었던 이러한 결과를 코펜하겐의 학술원에 제출하였지만 퇴짜를 맞고 말았다. "이러한 헛수고로 아까운 재능을 낭비하지 말고 수학의 대양에서 미젤란해협을 발견하도록, 보람있는 연구에 전념해 주기 바란다."라는 친절한 충고와 함께. 그후 아벨은 이 실패를 거울삼아 5차이상의 방정식일 때는 해의 공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1824년) 그리하여 그는 이번에야말로 마젤란해협보다는 더 의의가 큰 수학의 해협을 개척하게 된 것이다.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하면 여러분은 금방 '난장이의 나라'와 '거인의 나라'의 이야기를 머리에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난쟁이 나라의 1피트가 우리 나라의 1인치에 해당하고 한편 거인의 나라의 1인치가 우리의 1피트에 해당한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1피트는 12인치이기 때문에 난장이 나라에는 모든 것이 보통 크기의 1/12이고, 반대로 거인의 나라에는 12배가 되는 셈이다. 스위프트는 우리가 사용하는 여러 가지 양을 이 두 나라에서 사용하는 양의 기준으로 환산하느라고 무척 애를 쓰고 있다. "걸리버 식사의 양은 난장이 나라에서는 몇 사람 분이 되겠는가?" "걸리버의 옷을 만드는 데는 이 나라에서는 몇 사람 분의 옷감이 필요한가?" "거인의 나라의 사과의 무게는 얼마인가?" ...스위프트의 계산은 정확히 맞는다. 예들 들면 난장이들의 신장은 걸리버의 1/12이기 때문에 몸의 부피는 '1/1728(12×12×12=1728)이며, 따라서 걸리버의 한끼 시사는 이 나라 사람 1728명분이어야 한다. 또 걸리버의 양복바지의 넓이를 계산할 때에는 이렇게 하고 있었다. 즉 몸의 표면적은 이 나라 사람의 12×12=144이므로 옷감도 재단사도 144배 필요하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300명의 재단사가 동원되었다.'라고 쓰여 있었다.
해석기하학은 이미 2천년도 더 오랜 옛날에 시작되었다!?
- 유클레이데스보다 더 위대한 기하학자 아폴로니우스
수학의 역사상 드물게 보는 대 천재 아르키메데스와 좋은 대조를 이루는 사람은 그와 거의 같은 시대에 활약하였던 아폴로니우스(B.C. 260쯤~200쯤)이다. 그리스에는 아폴로니우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 이 기하학자를 그의 출신지 이름을 머리에 붙여 ' 페르가의 아폴로니우스'라고 흔히 부르고 있다.
아폴로니우스의 많은 수학 업적 중에서도 그의 '원추곡선론(圓錐曲線論)'이야말로 최고의 걸작이다. '원추곡선'이란, 원, 타원, 포물선, 쌍곡선 등을 통틀어 부르는 명칭으로,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이들 도형(2차식으로 나타내어질 수 있다는 뜻으로 '2차 곡선'이라고도 한다.)이 원뿔을 절단하는 방법에 따라서 각각 나타나기 때문이라는 것을 여러분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폴로니우스가 원추곡선에 관한 유명한 논문을 쓴 것은 원추곡선이라는 것이 알려진지 이미 150년 가량이나 지난 무렵이었다. 그렇다면 왜 그의 '원추곡선'이 그토록 유명하였을까? 그것은 저 유클레이데스의 『기하학 원론』이 그 이전의 수학 교과서를 무색하게 만들만큼 잘 짜여진 수학책이었던 것처럼, 원추곡선에 관한 이론으로는 유클레이데스의 책을 포함해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아폴로니우스의 것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즉, 이 분야의 연구에서는 그의 『원추곡선론』이 최고의 저술이었던 것이다.
그리스에서는 직원뿔(直圓錐)을 모선에 수직인 평면으로 절단하였을 때 꼭지각이 예각, 직각, 둔각인 경우 절단 부분의 형태가 각각 달라진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었다. 유클레이데스의 『기하학 원론』에는 원추를 절단하였을 때 얻어지는 이들 곡선에 관한 연구가 실려 있다. 아르키메데스는 이것을 더 발전시켜 꼭지각이 직각인 원뿔을 모선에 수직인 평면으로 절단하였을 때의 단면을 직선으로 베어낸 절편의 면적을 구하였다. 아폴로니우스는 아르키메데스가 꼭지각이 직각인 원뿔을 모선에 수직인 평면으로 절단하여 얻은 곡선을 꼭지각이 일반적인 각의 경우에도 모선에 평행인 평면으로 절단해서 얻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 아르키메데스가 다룬 원추곡선은 아폴로니우스의 연구의 특별한 경우인 것으로 밝혀지게 되어 원추곡선론(圓錐曲線論)은 일반화되었다. 그리고 종래에는 '예각원추의 절단면', '직각원추의 절단면', '둔각원추의 절단면' 등으로 번거롭게 불리어지고 있었던 것을 '타원', '포물선', '쌍곡선'이라는 명칭으로 바꾸어 부르게 된 것도 아폴로니우스 이후부터의 일이다.
아폴로니우스는 이전의 다른 수학자들이 여러 가지 종류의 직원뿔(直圓錐)을 그 한 모선에 수직인 평면으로 잘랐던 것과는 달리, 하나의 직원뿔을 여러 가지 평면으로 자르는 통합적인 방법을 썼다. 그리하여 평면이 직원뿔의 밑면과 이루는 각이 각각 모선이 밑면과 이루는 각에 비하여 '보다 작다', '같다', '보다 크다'에 따라서 절단부분에 나타나는 도형을 각각 '부족하다(ellipsis)', '일치하다(parabale)', '넘어선다(hyperbole)'라고 불렀다.
이것이 오늘날의 '타원(ellipse)', '포물선(parabola)', '쌍곡선(hyperbola)'의 어원이 된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단편적인 논문으로 미루어 보면, 아폴로니우스의 기하학은 '해석기하학'적인 색채가 다분히 있다.
해석기하학의 창시자 데카르트는 실제로 아폴로니우스에 관해서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다. "무에서 유는 생기지 않는다"는 말은 이런 경우에도 성립한다!
요즘 우리 나라에서도 먹는 샘물(생수)를 사서 마시는 것이 보통이 되었다. 하지만 한 세대 전만 해도 나라 방방곡곡 어디에서나 좋은 물이 솟았다. 유럽에서는 원래 물이 좋지 않아 포도주를 만들어 마셨다. 따라서 끼니 때마다 물 대신 포도주를 마시는 습관이 생겼으며, 여기서 마침내 적분학의 기원이 만들어졌다.
1612년 독일에서는 포도가 대풍작이었다. 그 덕에 포도주를 값싸게 마실 수 있었다. 이 무렵 어느 사나이가 어느 사나이가 통에 든 포도주를 사 마시면서 이상한 사실을 발견했다. 포도주 장수는 통의 구멍으로 자를 집어넣고 자가 포도주에 얼만큼 젖는지를 보고 통 속에 들어 있는 술의 양을 쟀다. 그러나 통의 위·아래와 가운데 부분의 크기가 같지 않기 때문에 양을 정확히 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술장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항상 젖은 자의 부분에 비례해서 돈을 받았다. 세상이 어수룩한 시대의 일이어서 모두 그것에 아무 불평은 하지 않았다. 천문학자이자 수학자로 유명한 케플러는 정확히 통의 부피를 계산해서 술장수에게 항의했다. 1615년 그는 드디어 〈통의 부피를 재는 방법〉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그의 방법은 통을 얇은 두께의 수없이 많은 원판이 겹쳐서 생긴 것으로 생각했다. 얇은 원판의 부피를 계산하는 것은 단순하지 않았다. 극단적으로 얇으면 높이가 0이며, 부피도 0이다. 0의 부피는 아무리 많이 더해 보았자 결국 0이라는 결과가 나온다. 그러나 두께가 0이 아닌 것으로 생각한다면 얇을수록 그들의 합은 전체 부피에 접근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적분법의 발상이다. 적분이란 ‘대상을 얇은 폭, 또는 낮은 높이로 나눈 뒤 그들의 총합으로 넓이 또는 부피를 계산하는 방법’이다. 미분은 극단적으로 짧은 시간 안의 속도 계산이고, 적분은 극단적으로 짧은 시간 안의 속도로 달린 거리의 총합이다. 즉 적분과 미분은 정반대의 계산이다. 미적분의 시작은 엉뚱하게도 술장수와 수학자의 시비에서 비롯하였다.
- 도박에서 종교까지를 확률로 따지는 서양인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도 한 치 앞을 예견하지 못하며, 증권시장에서는 매일같이 희비극이 엇갈린다. 앞일을 알 수 없는 인간은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고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태고이래 인간의 최대 관심사다. 특히 난세에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더욱 크다. 요즘은 과학시대라고 하지만 한 편으로 정보의 범람으로 혼돈(카오스)의 시대가 되고 미래의 모습을 점치는 점쟁이나 미래학자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세상살이에서 양자택일의 갈림길에 부닥칠 때가 많다. 어느 쪽을 선택해야 좋을지 몰라서 고민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이 심정을 햄릿의 독백에서 “할 것이냐 말 것인가, 그것이 문제”라고 말한다. 특히 시간이 촉박해 지금 당장 선택해야 할 문제는 직감에 의존하며 긴장을 맛보기도 한다. 이 때문에 인간은 도박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도박은 어느 문화권에나 있었다. 그러나 도박에서 확률론이라는 수학이 시작된 것은 독특한 철학에서 비롯되었다. 한국에서도 확률론의 모태가 되는 도박이나, 쌍륙, 주사위놀이, 윷놀이 등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을 비롯한 동양 문화권에서는 도박이 수학으로까지 승화되지 않았다. 이러한 데는 여러 가지 문화적인 이유도 있겠다. 우선 한국에서는 도박을 매우 불건전한 놀이로 생각했다. 게다가 미래의 일을 점치는 것은 얄팍한 무당이나, 점쟁이가 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미래의 일은 어떻게 될 것인지 전혀 알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진인사 대천명'이라는 말도 있다. 앞일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니 사람이 관여할 바가 아니며, 오직 내 할 일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동양에서는 앞일에 대한 것을 이치 있게 따지는 일을 하지 않았다.
한편 서양에서는 어떠한 현상에라도 숨어있는 배후가 있다는 믿음과 그 법칙성을 발견하고자 하는 문화적 전통이 있었다. 서양 사람은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자세히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스의 대 철학자 파르메니데스는 “무에서는 아무 것도 생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연이라 할지라도 원인은 있다”고 고대 로마의 시인 페트로니우스가 맞장구를 쳤다. 파르메니데스는 논리적인 필연성으로 이 우주를 설명하려고 했던 최초의 한 사람이다.
이런 신념이 도박장에서 확률론을 탄생시킨다. 동전을 던질 때 앞이냐 뒤냐, 태어나는 아이는 남자냐 여자냐는 확률은 1/2이다. 심지어 파스칼은 `신이 있느냐 없느냐'는 종교까지도 확률로 계산했다.
[ + 와 - ]
이 두 기호는 독일의 윗드만(J. Widmann)이라는 사람이 1498년에 지나치다(+), 부족하다(-)의 뜻으로 사용하였는데, 차츰 덧셈과 뺄셈의 기호로 쓰이게 된 것이라 한다. 또, +는 라틴어로 "그리고"를 뜻하는 "et"를 빨리 쓰다가 이 모양이 되었으며, -는 minus(마이너스 ; 빼기)의 머리글자 m을 빨리 쓴 것이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
[ × ]
이 기호는 1631년에 출판된 오트렛드(W. Oughtred)의 『수학의 열쇠』라는 책에서 처음으로 쓰여졌다.
[ ÷ ]
이것은 1659년에 나온 라안(J.H.Rahn)의 대수학 책에서 선을 보였다. 본래 이 기호는 비를 나타내는 " : "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 a2, a3, … ]
지금의 이 지수를 나타내는 기호를 처음 쓰기 시작한 사람은 데카르트(R.Descartes, 1596~1650)라고 한다.
[ 원주율 π ]
원주율을 π로 나타내는 것은 존스(W. Jones)가 처음 생각해 냈다고 한다. 오일러, 베르누이(J. Bernouli, 1667~1748), 르쟌들(A. M. Legendre, 1752~1833)등의 대수학자들이 계속 이 기호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원주율을 나타내는 기호로 인정받게 되었다.
[ f(x) ]
"함수"라는 낱말을 처음으로 수학에서 쓰기 시작한 사람은 라이프니쯔(G.Leibniz, 1646~1716)였다. 그러나 함수에 f(x)라는 기호를 쓴 것은 오일러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 미지수 x ]
데카르트가 미지의 양을 x, y, z 등으로 나타낸 것이 습관이 되었다.
오랜 옛날부터 우리 인간들은 대칭성을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기준의 하나로 생각해 왔다. 원, 정다면체, 구와 같은 도형에 수많은 학자들이 매료되었고, 이 도형들의 성질을 연구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얼토당토 않는 철학적 의미까지 부여하고자 한 것이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행성의 공전 궤도와 운동에 관한 3가지 법칙을 정리한 케플러도 대칭성에 매료되고 대칭이 주는 완전성을 맹신한 나머지 수많은 오류를 범했던 대표적인 천문학자이다. 망원경이 급속하게 발달하면서 천체에 대한 관측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여러 가지 행성들에 대한 자료가 쏟아지게 되었다. 케플러는 이런 자료들을 근거로 행성의 궤도로 적당한 도형을 찾는데 무려 8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케플러의 발목을 잡은 것은 고정관념이었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행성들은 당연히 원 궤도를 따라 움직일 것이라 생각했다. 가장 완벽한 대칭성을 가진 원을 따라 행성이 움직이고 그리하여 우주가 완전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화성의 관측 기록을 접한 케플러는 일주일 안에 수수께끼를 풀겠다고 호언장담한다. 그러나 원 궤도로 계산한 화성의 공전주기와 실제로 관측한 자료와는 몇 분간의 오차가 발생하였고, 이 오차를 무시할 수 없었던 케플러는 결국 8년간의 고심 끝에 원을 집어던지고 타원을 행성의 궤도로 받아들이게 된다. 고정관념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 고정관념의 미로에 갇혀 해답을 찾는데 노력을 바쳤으니 밑빠진 독과 같아서 터무니없는 시간과 열정을 쏟아 붓게 한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없었다면 또 조그만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정신이 없었다면 지금까지의 발전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 위대한 발견의 시작이다." 우리는 고정관념을 깨면서 발견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뉴턴의 일화 1
만유 인력을 발견한 뉴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친구인 스턱켈리 박사가 저녁을 같이 먹기로 하여 뉴턴을 찾아 왔더니 식탁에는 이미 요리된 닭은 있는데 뉴턴은 외출중이었다. 저녁 약속을 잊어버린 뉴턴은 몹시 늦게 들어왔고, 기다리던 스턱켈리 박사는 이미 닭을 모두 먹어 버렸다. 그런데 나중에 들어온 뉴턴은 식탁에 앉아 그릇의 뚜껑을 열고 뼈만 남은 그릇을 보고 말했다.
"아참, 우리가 이미 저녁을 먹었군."
평범한 사람이 이런 일을 벌이게 되면 건망증이 심하다는 평을 듣고 끝나는 일이지만 뉴턴의 경우에는 다르다. 그는 건망증이 심하다기보다는 집중력이 강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한 번 생각에 빠지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 다른 것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우리 주위에도 한 가지 일만 잘하는 사람을 종종 볼 수 있다. 보통 때는 없는 듯이 있다가 특별한 때가 오면, 예를 들어 춤을 출 때라든가, 수학 경시 대회라든가, 영화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라든가, 그럴 때마다 눈에서 빛이 나면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있다. 뉴턴도 바로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수학, 과학에 대한 생각을 시작하면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그런 집중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이런 집중력이 바로 그의 위대한 업적의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그가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 인력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는 아마도 이렇게 다른 사람은 그냥 지나쳐 버리는 어떤 현상의 의미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과학적으로 분석해 내는 능력을 빗대어 생긴 이야기일 것이다.
뉴턴은 그 시대의 수학자들 사이에 알려진 다양한 어려운 문제 중 어느 것도 풀지 못한 것이 없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와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라이프니쯔는 "인류 역사상 뉴턴이 살았던 시대까지의 수학을 놓고 볼 때, 그가 이룩한 업적이 반 이상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가 수학에 관하여 이룬 업적은 매우 훌륭하다.
17세기는 수학의 발전에 있어서 괄목할 만큼 풍요로운 시기였는데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업적이 바로 미적분학의 발견이다. 고등학교에서는 미분을 먼저 배우고 적분을 나중에 배우는데 역사적으로는 미분보다 적분이 먼저 발달되었다. 적분은 넓이나 부피, 호의 길이 등을 구하는 것과 관련되어 시작되었고, 미분은 곡선의 접선과 함수의 최대, 최소에 관한 문제로 인하여 시작되었다. 그리고 한참 지난 후 적분과 미분의 관계가 더하기와 빼기 또는 곱하기와 나누기처럼 서로 반대되는 과정이라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수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미적분학의 발견은 뉴턴과 라이프니쯔가 해낸 일이다. 라이프니쯔는 원래 법관이었는데 26살에 파리에 있을 때, 수학자 호이겐스를 만나 수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되었다. 그는 1673년에서 1676년 사이에 미적분학을 고안하여 발표하였다. 반면 뉴턴은 1660년대 후반에 이것을 발견하였으나 발표는 늦어졌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 영국과 유럽이 뉴턴과 라이프니쯔 중에 누가 먼저 미적분학을 고안하였는지에 대한 논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지금은 두 사람이 서로 독립적으로 미적분학을 발견하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논쟁으로 인해 영국과 유럽 대륙 사이에는 수학교류가 끊기게 되었고, 그 결과 영국의 수학 발전이 거의 100년이나 늦어지게 되었다.
그러면 뉴턴은 왜 발표를 미루었을까? 1669년 광학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 후, 뉴턴은 일부 과학자들로부터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 뉴턴은 그러한 논쟁이 너무 지겨워 과학에 관한 어떤 것도 다시는 발표하지 않으리라 맹세하였다고 한다. 현재 알려져 있는 그의 모든 논문들은 발견한 지 수년이 지난 후에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겨 발표된 것이라 한다.
우리 나라에서 수학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고, 수학을 공부하는 사람도 많으며, 수학자들이 서로 격려하면서 열심히 연구할 경우에 훌륭한 수학자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시작부터 오직 유한 개의 소수만이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이 가정으로부터 모순을 끌어내면 된다. 먼저 소수가 유한하다고 가정하자. 소수가 유한하면 우리는 소수를 2, 3, 5, ...., 151, ...P처럼 나열할 수 있다. 여기서 P는 가장 큰 소수이다. 이렇게 나열된 소수를 모두 곱하면, 우리는 새로운 수 N=2 X 3 X 5 x ... X 151 X ... X P를 얻게 된다. 이제 새로 만든 수 N 보다 1이 큰 N+1을 자세히 살펴보자. (N+1)이 2로 나누어 떨어지는지 살펴보자. 나누어지면 나머지는 0이 되고, 나누어 떨어지지 않으면 나머지는 1이 될 것이다. 그런데 2는 N의 인수이므로 (N=2 X 3 X ... X P), N은 2로 나누어진다. 이 사실은 동시에 (N=1)이 2로 나누어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즉 수 (N+1)을 2로 나눈 나머지는 1이다. 나아가 3 역시 N 의 인수이므로 N 은 3으로 나누어진다. 따라서 (N+1)은 N보다 1이 큰 수이므로 (N+1)을 3으로 나눈 나머지 또한 1이 된다. 5, 7, 그리고 P까지 모든 소수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즉 N은 어떤 소수로도 나누어지는 반면에, (N+1)은 어떤 소수로도 나누어 떨어지지 않고 항상 나머지 1이 남는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N=1)은 모든 소수 2, 3, 5, ..., P에 대해 나누어지지 않으므로 수 (N+1)에 관해 우리는 다음 2가지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수 (N+1)은 P보다 더 큰 어떤 소수에 의해 나누어진다. 우리는 이미 P가 가장 큰 소수라고 가정했으므로 첫 번째 경우는 명백히 거짓이다. 따라서 두 번째 경우가 성립해야 한다. 두 번째 경우가 성립하려면 가장 큰 소수 P보다 더 큰 어떤 소수가 존재해야 한다. 이것 역시 소수가 유한하다는 원래 가정에 위배된다. 그러므로 가장 큰 소수란 없으며, 따라서, 무한히 많은 소수가 존재한다.
"사람이 호흡을 하듯, 독수리가 공중을 날듯 아무런 힘을 들이지 않고 계산을 해냈다."
이 말은 수학과 그 응용 분야에 걸쳐 정열적으로 연구하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논문을 남긴 스위스의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Leonhard Euler, 1707~1783)를 두고 한 말이다. 수학자, 물리학자인 그의 일생은 극적이다. 수학을 연구하는 사람이 사색의 수단이 되고 표현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시력을 잃으면 어떻게 될까?
점자를 이용하는 현대에 있어서도 맹인들이 특별한 예외의 경우를 제외하고 고등수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천재에게는 신체상의 결함은 그의 초인적 사색과 노력에 의해 보완되고 도리어 화를 도약의 계기로 삼는 경향이 있다. 그 유명한 베토벤이 귀머거리가 된 후에도 악상을 갈고 닦아, 음악 사상 최대의 금자탑이 된 9번 교향곡을 완성하여 청중을 열광시킨 사실은 익히 잘 아는 일이다. 오일러가 태어난 곳은 스위스의 바젤이었으며 아버지는 목사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친 것은 수학이었고 따라서 오일러도 일찍부터 수학에 대한 흥미를 갖고, 수학 공부에 몰두하곤 했다. 1720년 그는 바젤 대학에 들어갔으며 그때 그 대학에는 베르누이 교수가 수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베르누이 교수는 라이프니쯔의 많은 제자 가운데 가장 훌륭한 수제자였으며, 그의 집안에는 모두 9명의 수학자가 있었다. 오일러는 이 베르누이 교수를 통하여 라이프니쯔가 발견한 미적분학을 배웠고, 베르누이 교수도 오일러의 뛰어난 재능을 인정하였고 아껴주었다. 그는 1727년 러시아 정부의 초청으로 페데르스부르크(지금의 레닌그라드)로 갔다. 오일러는 러시아에서 15년 동안 물리학, 수학교수로 지내며 많은 수학 공식을 연구해냈다. 특히 1735년에는 천문학상의 어떤 문제를 풀기 위해 다른 수학자들이 몇 달씩 걸려 푸는 문제를, 오일러는 자기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사흘만에 풀어서 모두를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1738년에 러시아 지도를 만드는 데 수학적으로 도와 달라는 부탁을 받고, 너무 그 일에 열중한 나머지 오른쪽 눈을 실명하여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1741년 프러시아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청을 받아 베를린 학사원의 수학 부장이 되었다. 베를린에서 25년을 지내는 동안 미적분학을 완전히 독립된 학문으로 체계 있게 완성시켰다. 그는 많은 저서를 발표하였는데, 그 모두가 독특한 새로운 연구들로 가득했으며 전집만도 45권이나 된다. 오일러라는 이름이 붙은 공식과 정리도 많이 있는데, 특히 볼록다면체에서 꼭지점의 개수(v), 모서리의 개수(e), 면의 개수(f) 사이에는 v-e+f=2인 관계가 성립한다는 사실이 '오일러 공식'으로 정리되어 있다. 듣지 못했던 베토벤이 세상의 조화로움과 아름다움을 지금까지 우리에게 음악으로 들려주듯이, 보지 못했던 오일러는 음악 대신에 간결한 수식과 공식으로 그것들을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다. 곧, 수학으로 세상을 보는 눈을 우리에게 준 셈이다. 삼각함수의 기호 sin. cos, tan등을 비롯하여 자연 대수의 근에 쓰이는 e, 허수의 기호 i도 처음으로 오일러가 사용한 기호이다. 1883년 9월 7일 오후 수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점심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며 파이프를 입에 물었을 때 갑자기 졸도하여 "나는 죽는다"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고 한다.
보이지 않아도 연구를 계속한 오일러
오일러는 '계산법'을 고안해내는 수학자로 재능을 발휘하였다. 계산법의 예를 들어보자. 모든 자연수는 약수를 갖는다. 그러면 그 약수는 어떻게 찾을까? 또, 모든 자연수는 실수인 제곱근을 가진다. 그러면 그 제곱근은 어떻게 계산할 수 있을까? 이와 같이 어떤 문제에서 요구되는 실제적인 계산을 해내는 방법을 찾는데 오일러는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수학을 공부하다보면 어떤 정교하고 기묘한 기술을 써서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가 종종 있고, 그 절묘한 기술은 우리를 감탄하게 한다. 오일러는 바로 그 기술을 찾아내는 능력을 천부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수학자였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기호도 일정하게 규칙을 갖고 사용하게 되었는데 함수를 f(x)라고 표기하는 것, 삼각형 ABC의 세 변의 길이를 a, b, c라고 하는 것, 삼각형의 내접원의 반지름을 r, 외접원의 반지름을 R이라고 하는 것 등은 모두 오일러에 의하여 정하여진 것이다.
스위스에서 태어난 오일러는 러시아와 독일에서 대부분의 생애를 보냈다. 그가 러시아에 있을 때의 일이다. 여제 에카테리나의 궁정에 초대된 프랑스의 철학자 디드로는 무신론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에 싫증이 난 에카테리나가 오일러에게 이 철학자의 입을 막아버리도록 명하자 오일러는 디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 엄숙하고 확신에 찬 태도로 그에게 말했다.
"각하, (a+bn)/n=x 그러므로 신은 존재합니다. 대답 해주십시오."
디드로가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폭소가 터졌고 디드로는 프랑스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에게 불행이 닥친 것은 파리 학사원 상을 받으려고 시도하면서이다. 저명한 수학자들이 몇 개월의 시간을 달라고 할 정도로 어려운 문제를 그는 상을 받기 위하여 사흘만에 풀었는데 너무나 오래 긴장한 상태로 집중한 결과 오른쪽 눈이 안보이게 된 것이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 17년은 완전한 장님으로 보냈다. 그러나 베토벤이 귀가 먼 후에도 음악 활동을 계속 했던 것처럼 눈이 안 보이게 된 후에도 오일러는 복잡한 계산은 머리 속에서 암산으로 하고 논문은 구술하면서 그 이전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살았다고 한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시력이나 청력보다는 자신의 재능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통찰력과 그것에 매진하는 성실성인 것이다.
2×3=6(사랑·결혼)
피타고라스는 모든 것은 수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기본 요소는 1이라고 여겼다. 또 짝수는 우주 속에 있는 여성적인 수, 홀수는 남성적인 수라고 생각했다. 1에서 9까지 수 중 최초의 짝수인 2는 여성의 수이고, 3은 사물의 기본인 1을 제외한 최초의 홀수로서 남성의 수로 중시되었다.
여성수 2와 남성수 3과의 결합수 5는 남녀의 서로 부족함을 보완해 만든 수이다. 따라서 5는 조화·정의의 상징이기도 했으며, 그것은 또한 인간이 갖추어야 할 모습이기 때문에 5는 인간 그 자체라고 믿었다. 그들 교단의 상징인 별은 이런 5를 도형으로 나타낸 것이어서 가장 완전하고 아름다우며, 양팔을 벌리고 두 다리로 굳건하게 서 있는 사람의 형상을 상징하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아직도 5각형에 대한 신앙이 남아 있어 미국 국방성(일명 Pentagon)건물이 5각형인 것도 그런 연유라고 한다.
또 여성수 2와 남성수 3을 곱한 6은 사랑과 결혼의 수이다. 6을 상징하는 정삼각형과 역정 삼각형을 겹쳐 만든 다윗의 별은 사랑, 결혼, 우주를 표현하기도 한다.
중학 수학에서 일차방정식, 이차방정식과 같은 대수 문제는 쉽게 해결하면서 삼각형, 사각형, 원과 같은 도형 문제에서 해를 구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이 많이 있다. 특히 전혀 예상치 못했던 보조선을 그어야 풀 수 있는 도형 문제는 수학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는 학생들에게조차 당혹스러울 때가 많다.
이런 점에서 유클리드 기하학의 '비논리적 비약'에 불만을 느낀 데카르트는 일찍이 대수학에 관심을 두었다. 대수는 기하와는 전개 방식이 좀 다르다. 기하학이 종합적인 데 반해 대수학은 분석적, 또는 해석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방정식을 풀 때, 그 값을 알지 못하는 미지수를 x라 놓고 마치 알고 있는 것처럼 취급하여 '2x+3=7'와 같은 결론을 얻으면 그 후의 순서는 기계적 조작만으로 그 해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데카르트는 대수학의 기호화에도 큰 노력을 기울여 오늘날처럼 상수는 a,b,c 미지수는 x,y로 나타내었다. a,b,x,y와 같은 기호의 사용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의 이전에는 A2,B3과 같이 간단한 표현을 'A quardratum, B solidum' 또는 'AA, BBB'와 같이 사용하였다고 하니 그의 기호법이 얼마나 간단하고 시각적인가를 알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대수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대수학과 기하학을 하나로 묶은 '해석기하학'을 낳았고 그 덕분에 변화의 개념은 없고 도형의 성질만을 연구하던 유클리드 기하학의 한계가 극복되었으며 수학이 과학을 발전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평생에 걸쳐 근대 과학의 터전을 닦은 그는 1649년 크리스티나 여왕의 초대로 스웨덴으로 간지 몇 달 후 북유럽의 차가운 날씨 때문에 폐렴에 걸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내가 바라는 것은 평온과 휴식뿐이다."라는 평소의 그의 말처럼 54세의 일기로 영원한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20세기 최대의 수학자로 불리는 힐버트(1862∼1943, 독일)는 잊는 것이 많기로 유명하였습니다.
초대한 손님들이 올 시간이 되었다는 부인의 재촉을 받아 넥타이를 바꾸어 매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간 그가 손님이 온지 한참이 되었는데도 내려오지 않아 부인이 올라가 보니, 잠잘 시간으로 착각하고 잠자리에 들어 있었습니다.
또 방문객이 너무 오랫동안 이런 저런 얘기를 이어가면서 버티고 있는데 지친 그는 자리를 뜨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곳이 자기 집인 걸 깜박 잊고 자기가 방문한 것으로 착각하여 옆에 있던 부인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이거 너무 오랫동안 실례했군. 이제 그만 집에 갈 시간이 되지 않았나?"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노예 토마스 풀러는 교육이라는 것을 전혀 받아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14세에 노예로 팔려 미국의 한 농장에서 혹사당했습니다.
흑인은 백인보다 훨씬 열등하다고 믿었던 백인들은 토마스가 주위의 어떤 백인보다 계산 능력이 뛰어난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토마스 풀러가 70세 때 두 백인이 그를 초대해서 그의 능력을 실험한 적이 있었습니다. "1년 반은 몇 초인가?" 라는 물음에 2분만에 암산으로 {47304000초}라고 정답을 맞추었습니다. 또 "70년 17일 12시간을 산 사람은 몇 초동안 산 셈인가?" 라는 물음에도 역시 2분만에 {2210500800초}라고 답했습니다. 두 백인 중의 한 사람이 연필로 계산해 보고는 토마스의 암산이 틀린다고 말하자 토마스는 "아니오. 당신 계산에는 4년마다 2월이 29일까지 있는 것을 계산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까지 정확하게 계산하면 내 계산이 맞을 것이오."
이런 토마스는 1790년에 80세로 죽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는 14세에 노예로 팔릴 때까지는 10까지의 수도 셈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단지 농장에서 노동을 하면서 소의 머리에 돋아 있는 털의 개수나 통속에 있는 밀알이나 콩의 개수를 계산하면서 그의 계산력을 닦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흑인은 백인보다 계산 능력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뒤엎었고, 흑인도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수학을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미국 백과사전과 영국 백과사전에 따르면, 에라토스테네스는 하지(일년 중 낮이 가장 긴 날) 정오에 이집트의 시에네(지금의 아스완)에서 태양광선이 머리 위에서 직접 내리 쬐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답니다. 당시에 우물가에 그림자가 전혀 드리워지지 않아서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꼭 우물일 필요는 없고, 상자나 튜브처럼 우물에 평행한 용기라면 어떤 것이라도 태양이 직선으로 내리 쬐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관찰이 가능했겠지요. 그리고 나서 그는 태양의 광선들이 지구에 평행하게 내리 쬐이고 있다는 가정을 했습니다. 공 두 개를 놓고 상상해 보신다면, 하나의 공이 다른 공에 멀어질수록 모든 대응선이 평행해 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평행하다는 것은 모든 선이 완전히 동일한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그는 지구가 완전한 구의 형태라는 가정을 했습니다. 또한 그는 시에네와 알렉산더리아의 경도가 동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지구는 지축이라 불리는 직선 주위를 돌고 있는 구입니다. 경도는 이 지축의 윗점에서 아랫점을 잇는 선분입니다. 에라토스테네스가 이 두 도시의 경도가 같음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같은 시간에 두 도시에 내리쬐이는 태양광선이 똑같은 방향임을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마치 적도처럼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에라토스테네스는 알렉산드리아와 시에네의 거리가 그리스의 길이를 재는 단위로 5,000스타디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는 약 800km입니다. 따라서, 하지 정오에 알렉산더리아에서 에라토스테네스는 태양광선의 각을 측정한 것입니다.
주위에 금속성 대를 두른 지구의를 가졌다고 해 봅시다. 그리하여 지구의 주위를 움직일 수 있게 합시다. 하지만, 완전히 평행할 수도 있습니다 (보통 지구의의 대와 지구의는 수직입니다). 교실에도 이와 같은 것이 있을지 모릅니다. 만약 이 지구의를 가지고 나가서 그림자가 선 하나로 나타날 때까지 이 대를 돌려보시면, 이는 태양 광선과 평행할 것입니다. 원의 어떤 부분의 대를 돌려야 하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에라토스테네스는 아마도 이와 같은 것을 고안해 낸 것 같습니다. 태양 광선과 평행하게 하도록 하기 위하여 원의 1/50을 회전시킨 것입니다.
기하학을 사용하여 에라토스테네스는 5,000스타디아가 지구 둘레의 1/50 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지구의 둘레가 252,000 스타디아라는 사실을 계산해 내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와 시에네 사이의 거리가 800km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1/50이라는 분수를 이용하면 지구의 둘레가 800 × 50 = 40,000km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가들은 1스타디아가 어느 정도 되는지를 잘 모르므로 에라스토테네스의 답이 옳은지는 잘 모릅니다만, 어땠든 그가 지구의 둘레를 측정하는 방법은 옳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즈음, 두 도시 사이의 거리를 정확히 측정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많은 오차가 야기되는 것입니다.
디오판토스의 묘비에는 그의 인생 역정을 수수께끼로 묘사한 글이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신의 축복으로 태어난 그는 인생의 1/6을 소년으로 보냈다.
그리고 다시 인생의 1/12이 지난 뒤에는 얼굴에 수염이 자라기 시작했다.
다시 1/7이 지난 뒤 그는 아름다운 여인을 맞이하여 화촉을 밝혔으며,
결혼한 지 5년만에 귀한 아들을 얻었다. 아! 그러나 그의 가엾은 아들은
아버지의 반밖에 살지 못했다. 아들을 먼저 보내고 깊은 슬픔에 빠진
그는 그 뒤 4년 간 정수론에 몰입하여 스스로를 달래다가 일생을 마쳤다.
디오판토스가 살다간 햇수를 L이라고 하자.
우리는 그의 묘비에 적힌 서술에 따라 그의 인생 역정을 다음과 같이 세분할 수 있다.
생의 L/6동안 소년이었다. L/12동안은 청년이었으며,
그후 L/7을 더 보낸 뒤에 결혼하였다. 결혼후 5년만에
아들을 낳았으나, 아들은 아버지의 반밖에 살지 못했다.
아들을 먼저 보낸 후 슬픔 속에서 4년을 더 살다가 그의 생을 마감했다.
디오판토스의 나이는 위의 기간들을 모두 더한 것이므로
L=L/6+L/12+L/7+5+L/2+4
라는 방정식을 얻게 된다. 이 식의 우변을 계산하면,
L=25L/28+9
이 되고 동휴항을 정리하여 L을 구하면,
3L/28=9
L=84
를 얻는다, 따라서 디오판토스가 죽었을 때, 그의 나이는 향년 84세였다.
어느 날 도서관 사서는 책이 꽂혀 있는 선반을 둘러보다가 한 묶음의 카탈로그를 발견했다. 거기에는 소설, 참고서, 시집등의 제목이 일목요연하게 소개되어있었다. 그런데 일부 카탈로그 목록에는 카탈로그 자신까지 소개되어 있고, 다른 카탈로그는 그렇지 않았다.
사서는 책의 분류체계를 단순화하기 위해 두개의 카탈로그를 추가로 만들었다. 그 중 하나는 다른 책들의 목록과 함께 자기 자신(카탈로그)의 제목까지 수록되어 있는 카탈로그들을 소개하는 카탈로그였다.
그런데 작업이 끝나갈 무렵, 도서관 사서는 난관에 봉착했다. '자기자신은 소개되어 있지 않는 카탈로그의 명단을 모두 수록한' 두 번째 카탈로그의 명단에 자기 자신을 수록해야 할 것인가? 만일 수록한다면 그것은 사서의 카탈로그 제작 의도에 위배된다.
이 카탈로그는 앞서 말한 대로 '자기 자신은 소개되어 있지 않은 카탈로그들' 만을 수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록하지 않는다면 정의에 의해 이 문제의 카탈로그는 그 안에 수록되어야 한다. 결국 사서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옛날 그리스 명문가 청년 한 명이 그 당시 매우 유명했던 소피스트학파의 한 학자를 찾아와서 제자가 되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학자는 제자를 삼아주는 대신 돈 100파운드를 요구하였다. 이 당시 100파운드는 정말 어마어마한 큰돈이었다. 해서 청년은 너무 비싸다고 말하고 지금 50파운드를 내고 장차 유명한 사람이 되면 나머지 돈을 주기로 약속하고 학업을 시작하였다. 청년은 스승과 함께 열심히 공부하여 그 지방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었다. 이를 알게된 학자는 그 청년을 찾아가 나머지 돈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청년은 줄 수 없다고 잘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해서 학자는 이것을 가지고 재판을 걸었다. 스승인 학자가 말하기를 "난 이 재판에서 이겨도 돈을 받아야 하며 저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그러자 청년은 이렇게 말하였다. "난 이 재판에서 이겨도 돈을 줄 수가 없고 저도 돈을 줄 수가 없습니다." 음 .....이상한 일이군.
학자의 말인즉 재판에서 이기면 이겼기 때문에 돈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고, 재판에서 지면 스승을 이긴 훌륭한 제자가 된 것이 증명되는 것이기 때문에 돈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제자인 청년도 같은 뜻이었다. 재판에서 이기면 이겼기 때문에 당연히 줄 수가 없는 것이고, 지면 아직 훌륭한 사람이 안되었다는 뜻이기에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적 관습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이지만 이 이야기에는 수학에는 정의되지 않은 말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는 아무런 의심 없이 여러 정의를 만들어서 증명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 이야기는 그런 상황에 가장 어울리는 이야기라 하겠습니다.
에바리스트 갈루아는 프랑스 혁명이 발발한 지 22년이 지난 1811년 10월 25일 파리 남쪽 근교에 있는 부르 라 레느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러시아 원정에서 절망적인 실패를 겪은 다음 해인 1814년에 엘바 섬으로 유배되고 루이 18세가 왕으로 즉위하였다. 1815년 엘바 섬에서 탈출한 나폴레옹은 파리에 입성하여 다시 재기하였으나 100일도 되기 전에 워터루 해전에서 참패를 당한 뒤 왕위는 다시 루이 18세에게 돌아갔다. 갈루아는 소피 제르맹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격동기를 겪으며 성장했다. 그러나 제르맹은 프랑스 혁명으로 야기된 사회적 혼란에 일절 관여하지 않고 오로지 수학에만 몰두했던 반면 갈루아는 정치적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다소 다혈질적인 인물이었다. 결국 갈루아는 격동의 시대에 정치적 성향을 억제하지 못하여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에는 모든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불안감 속에서 살고 있었다. 갈루아의 정치적 성향은 그의 아버지 니콜라 가르리엘 갈루아로부터 전수된 것이었다. 에바리스트가 네 살이 되던 해에 그의 아버지는 부르 라 레느 시의 시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때는 나폴레옹이 재집권에 성공하여 또 한번의 야망을 불태우던 시기였는데, 니콜라의 진보적인 성향은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 그런 대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니콜라 가브리엘 갈루아는 교양 있고 친절한 사람으로, 시장으로 선출된 직후부터 여러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뒤에 루이 18세가 다시 왕위에 올랐을 때에도 시장직을 박탈당하지 않았을 정도로 그는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사람이었다. 정치 활동 이외에 그는 풍자시를 즐겨 쓰곤 했는데. 시의회 회의석상에서 청중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자작시를 직접 낭송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자신이 지은 풍자시 때문에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에바리스트 갈루아는 열두 살 때 루이 르 그랑이라는 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전국적으로 잘 알려져 있었으나, 매우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학풍을 가진 학교였다. 입학 초기에 갈루아는 수학과 관계된 과목을 전혀 수강하지 않았으며, 학교성적이 좋은 편이었지만 그다지 뛰어난 학생은 아니었다. 그러나 첫 학기에 일어났던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갈루아의 삶은 변하기 시작했다. 갈루아가 다니던 학교는 원래 예수회 재단에서 설립한 학교였는데 '이제 곧 학교가 카톨릭재단으로 넘어간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공화정을 신봉하는 공화주의자들과 군주제를 신봉하는 군주주의자들이 삼각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 대립은 곧 루이 18세와 시민 대표들 사이의 대립을 의미했고, 카톨릭 사제들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면서 대립은 루이 18세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대부분의 공화주의적 성향을 가졌던 학생들은 비밀리에 무력 시위를 계획하였으나 당시 교장이었던 베르토가 이 사실을 알아내어 수십 명의 주동자들을 퇴학시키는 강경한 조치를 취했다. 그 다음날 베르토는 상급 학생들을 모아놓고 학교 재단의 방침에 무조건 따르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으며 이 일로 인해 100여 명의 학생들이 또다시 제적되었다. 갈루아는 그 당시 나이가 너무 어려 이러한 일련의 집단제적 사태에 휘말리지 않고 끝까지 학교에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학교에서 억울하게 쫓겨나는 선배들을 보면서 어린 갈루아의 가슴 속에는 공화주의적 성향이 서서히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갈루아는 16세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수학 수업을 접할 수 있었다. 평소 성실한 수업 태도를 보였던 그는 이 수업 때문에 통제 불가능한 문제 학생으로 낙인찍히게 된다. 생활기록부에 따르면 그는 다른 과목들을 완전히 제쳐놓고 오로지 수학 공부에만 몰두했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수학자 라파엘로 봄벨리는 여러 가지 수들의 제곱근을 연구하던 중 도저히 대답할 수 없는 질문 하나를 제기한다. 그의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1의 제곱근은 1과 -1 두 개다. 음수를 두 번 곱하면 양수가 되어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1의 제곱근은 얼마인가?"
이 문제는 사실 해결이 불가능했다. 같은 수를 두 번 곱한 결과는 항상 양수이기 때문에 +1이나 -1은 -1의 제곱근 루트-1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수학자들은 이런 단순한 질문 하나 때문에 완전성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구겨진 자존심을 추스르며 하는 수 없이 새로운 수의 개념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것이 허수의 발견이다. 봄벨리의 질문에 의해 발견된 수 즉 " i "였다.
인류가 세계 문화의 많은 부분을 보존해오는 데 있어서 상당히 중요했던 것은 아라비아인들이 그리스와 인도의 해박한 지식을 잘 보존하고 발전시켰다는 데 있다. 아랍권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근대 서양 과학이 이슬람 과학 위에서 싹텄다면 어리둥절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과학 용어의 어원을 따져보면 이슬람 문화가 서양에 끼친 영향이 쉽게 눈에 띈다. 많은 별 이름이, 특히 희미한 별 이름은 대부분 아라비아어이고 알칼리, 알코올 등 자연과학에 등장하는 용어들 중 많은 것이 아랍어에 기원을 두고 있다. '대수(代數, algebra)'라는 말도 그 주제에 관한 알-화리즈미의 논문 < al-jabr>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이 제목은 그대로 번역할 때, '재결합과 대립의 과학' 또는 '이항과 소거의 과학'이 된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이 책은 유럽에 라틴어 번역본으로 알려지면서 'al-jabr' 또는 'algebra'가 만들어진 것이다. 또, 1857년에 라틴어 번역본으로 발견된 알-화리즈미의 책은 "알고리트미(algoritmi)가 말하기를, ..."로 시작되고 있다. 여기서 '알-화리즈미'의 이름이 '알고리트미'로 변하였고, 그것은 현재 어떤 특별한 방법으로 계산하는 기술을 의미하는 '알고리즘(algorithm)'이 되었다. 그러면 이슬람에서 학문이 융성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마호메트가 창시한 이슬람교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지식의 탐구는 천국에 이르는 길'이라고 가르치면서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지식을 갈구할 것을 유언했다. 마호메트의 이런 소망이 이후 아랍인들에게 지식을 구하기 위해서는 동방으로의 탐험도 마다하지 않는 모험심과 열정을 불어넣은 것으로 보인다. 바그다드의 회교 왕들은 학문의 후원자가 되어 뛰어난 학자들을 궁정으로 초대했었다. 그리하여 천문학, 의학, 수학 등에 관한 인도와 중국, 그리스의 많은 저작들이 부지런히 아라비아어로 번역되었으며 그 덕분에 후에 유럽 학자들이 그것을 라틴어 및 그 밖의 다른 언어로 번역할 수 있었다. 아라비아 학자들의 작품이 없었다면 암흑의 중세 시대를 거치는 오랜 동안 많은 과학 유산이 돌이킬 수 없이 잊혀져 버리고 유럽 근대 문명이 꽃피우는 것은 어려웠을 지도 모른다. 알-만수르 왕의 통치기간 중에 브라마굽타의 저작들이 바그다드(약 776년)에 전해졌고 아라비아어로 번역되었다. 이것이 바로 인도 숫자가 아라비아 수학에 전해진 계기였다고 전해진다.「아라비안 나이트」의 이야기로 잘 알려진 왕인 하룬 알-라시드의 아들인 알-마문의 통치 기간(809년 ~833년) 중에 살았던 가장 유명한 수학자인 알-화리즈미(al-)는 대수에 관한 논문과 인도 숫자에 관한 책을 썼는데, 그 두 가지 다 12세기에 라틴어로 번역되었을 때, 유럽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 북아프리카, 스페인에까지 영토를 확장했던 이슬람제국은 이후 쇠퇴기에 접어들게 된다. 터키족의 침입, 십자군과의 전쟁 등을 겪고 몽고족의 강력한 침략을 당하여 위축된 이슬람 제국은 결국 1492년 스페인에 전복되고 말았다. 서양 과학이 발달하기 시작하는 12, 13세기에 유럽 학자들은 그리스와 아랍의 과학 문헌들을 라틴어로 옮기는 작업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과학사에서 '번역의 시기'라고 불리는 이 시대에 거의 대부분의 과학책들과 철학책들이 번역된 것이다. 이로써 유럽인들은 5세기에서 10세기에 걸쳤던 과학의 암흑기를 벗어남과 동시에 자신들의 연구 업적을 축적해나갈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아라비아인들이 중세의 암흑시대에 세계의 많은 지적 재산을 관리하여 후대의 유럽인들에게 넘겨주지 않았더라면 17세기의 과학혁명이 불가능했으리라고 장담하는 역사가들도 많다. 이슬람의 유산은 과학혁명기의 위대한 과학자들이 어떤 문제에 부딪쳤을 때 어떤 방식으로 풀어 나가야할지에 대한 지침을 주었던 것이다.
처음으로 수가 등장한 것은 물건, 이를테면 원시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사냥감이나 기르는 가축들의 수를 셈하기 위해서였다.
수에는 어떤 물건의 모임이 대응한다. 그러나 음수에 해당하는 물건은 없다. 가령 -3마리의 양떼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다. 1, 2, 3과 같은 자연수는 금방 그 수에 해당하는 눈에 보이는 물건의 집합이 있다. -1, -2, -3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 점에 있다.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취급하니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은 상상력을 가졌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도 머리 속에서 그려 낼 수 있다. (-3마리의 양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면 반물질로 된 양이거나 빚을 진 3마리의 양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1, 2, 3 …과 같은 자연수는 전세계 어느 곳에서나 자연스럽게 발견되었다. 그러나 음수를 발견하는 데는 그 후로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야 하였다. 학생들이 음수를 어렵게 느끼는 데에는 나름의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수라고 하면 모두가 자연수뿐이었으므로, 따로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음수라는 것이 등장하면서 그와 대조적인 수(자연수)를 새삼 새로운 이름으로 부를 필요가 생겼다. 자연수를 음수의 반대 개념인 '양수'로 부르게 된 것은 그래서였다. 그러다 보니, 양수·음수에 0을 덧붙인 전체를 부르는 이름도 필요하다. 정수가 그것이다.
고대에 음수를 이해하고 있었던 곳은 중국뿐인 것 같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2∼3년경의 진·한(秦漢)시대에 [구장산술]이라는 책이 쓰여졌으며, 신라의 수학교과서로 쓰이기도 했다. 이 책에서도 양수, 음수를 사용하고 있으며 양수를 나타내는 수막대는 빨 간색, 음수는 검정색으로 표시했다. 요즘도 손해를 봤을 때 '적자(赤字)'라고 하는데, 이것은 빨강과 검정의 뜻이 엇바뀌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들은 음수·양수를 이용하여 연립 일차방정식의 해법을 설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7세기경에 인도의 브라마굽타가 0 및 음수의 개념을 도입했다. 그것이 8세기경에 아라비아로 건너가고 12세기경에 유럽에 전해진다. '플러스', '마이너스'는 피보나치(1180?-1250?)가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는 라틴어의 et(영어의 and)를 갈겨쓴 것에서, -는 minus의 m을 갈겨 쓴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대수 방정식의 해로서의 음수를 인정하게 된 것은 16세기경이다.
중국에서 일찍이 음수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동양사상의 기본인 음양론 덕분이다. 우리 태극기는 음과 양이 조화를 나타내고 있다. 이런 사상이 있었기 때문에 쉽게 동양인은 음수를 생각해낸 것이다.
이런 옛적의 사상(음양론)을 모르는 독자 여러분이 음수를 이해하고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은 절대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다. 데카르트 이전의 서양의 수학 대가들에게 이미 음수가 알려져 있었지만 그들은 음수를 가공의 수, 불합리한 수, 가짜의 수로 여기고 있었다. 서양인에게의 음양의 사상이 없었기 때문에 수로서 실감나지 않았던 것이다.
뫼비우스 띠가 우리들에게 가져다주는 사상적 의의는 무척 크다. 우리는 모든 것에 안과 밖의 구별이 있고, 안과 밖은 서로 통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주의 내부에서는 우주의 외부로 가지 못하고, 시간대의 내부에서 그 외부로도 못가며, 공간대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뫼비우스는 이런 고정관념을 깨고 안과 밖이 없는 띠를 만들고 서로 연속적으로 통한다는 것을 실증하였다.
실로 인간의 지혜는 끝이 없으며, 신의 영역까지 도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