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케이트 앳킨슨의 전작 《라이프 애프터 라이프》는 어설라 토드가 런던 대공습 기간 동안 겪었던 일에 대한 내용이다. 전작의 속편이라기보다는 ‘자매편’에 해당하는 이 《폐허 속의 신》은 어설라의 남동생 테디와 영국 공군 폭격기 부대 소속 핼리팩스 조종사로서 살아간 그의 삶에 대한 내용이다. 그러나 둘 중 어느 책도 전쟁만을 주로 다루고 있지는 않으며 실제로는 전쟁 전 이야기와 전쟁 후 이야기에도 작가의 세심하고 유쾌하며 냉철한 시선이 동일하게 녹아있다. 그럼에도 어쨌든 전쟁의 경험은 이후 어설라와 테디의 삶에 똑같이 영향을 미친다. 두 남매는 개인적으로, 그리고 때로는 함께 전쟁을 겪어나간다.
저자가 전작에서 환생이란 소재를 사용했다면, 《폐허 속의 신》에선 독특한 전개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과거, 현재, 미래가 한 팩에 있는 카드처럼 구성된 것이 이 책의 특징이다. 각 카드는 과거, 현재, 미래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카드들이 뒤섞이고 순서가 바뀌어도 자연스럽게 하나의 스토리가 완성된다.
테디 토드, 격동의 20세기 한복판에 선 삶
테디 토드는 시인이자 파일럿이며 누군가의 아들, 남편, 아버지, 할아버지였다. 빠르게 변화하는 20세기의 극적인 상황 속에서 테디는 그에 순응하며 살 수 밖에 없다. 평범한 중산층에서 태어난 테디 토드. 그의 아버지 세대부터 이미 전쟁에 익숙하다. 테디는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쟁에 참여한다. 지루한 은행업무보다 군 복무가 훨씬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후 테디는 낸시와 결혼해 새로운 삶을 산다. 딸 비올라를 낳고 안락한 삶을 유지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비올라와의 갈등을 피할 수 없었다. 테디와 비올라의 갈등은 세대 간의 갈등과 그 양상이 같다. 영국군의 대량 학살을 비난하는 전쟁 다음 세대인 비올라와 직접 대량 학살에 가담했던 전쟁 세대인 테디. 비올라는 테디가 독일 기업과 독일 제품을 불매하는 것을 비난한다. 비올라가 보기에 독일과 영국은 다름없기 때문이다.
자라난 비올라는딸로서 엄마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비올라와 그의 남편이 하지 못한 부모의 역할은 테디가 대신해야 했다. 테디는 비올라의 자식인 서니와 버티에게 있어 유일한 안식처였다. 부모가 주지 못한 사랑과 안정을 테디가 채워준 셈이다. 테디의 손녀 버티는 테디가 남긴 세월을 물려받는다. 버티의 증조할머니부터 내려온 시계, 전쟁 중에 죽은 테디 친구의 귀걸이 등 전쟁을 매체로 배우는 세대인 버티는 테디의 뒤를 이어 전쟁을 기억한다. 버티는 테디와의 추억 여행을 통해 할아버지의 인생을, 할아버지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 자체를 이해한다.
테디는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전쟁 속에서 몇 번의 위기를 이겨내고 늙어 기력을 다한 순간에도 병을 물리친다. 그 모습을 보며 비올라는 불사신이라며 혀를 내두른다. 그런 테디의 마지막 순간은 허무하리만큼 조용하고 담담했다.
역사상 최악의 결과를 낳은 제2차 세계대전
얼마나 많은 생명이 피지도 못하고 저버렸는지 케이트 앳킨슨은 소설을 통해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전쟁터에서 윤리나 도덕은 설 자리가 없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라면 보호받아야 하는 사회적 약자들이 아무런 죄의식 없이 희생당했다. 현대의 전쟁이란 공격이 목표일뿐이다. 그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전쟁의 의미다. 전쟁이 끝나고 찾아온 무거운 평화 속에서 영국인들이 지우고 싶었던 현실은 영국이 무고한 사람들을 공격하고 죽였다는 사실이다. 테디는 손자 서니와 함께 장병 전몰 묘지에서 옛 동료를 기억하고 추모한다. 묘지에 안착된 대다수의 장병들은 서니와 비슷한 나이대인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이며 대부분 훈련 중에 사망했다. 혹은 귀환하는 도중에 추락하거나 공습 중 부상을 입고 사망한 사람들이다. 많은 병사들이 묘지에 안착됐지만 시신 수습은커녕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는 병사들을 셀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이름은 물 위에, 그을린 땅 위에, 공중에 새겨졌다. 전쟁 장교들에게 남은 것은 창고에 처박힌 전쟁 훈장뿐이다. 그러나 이 훈장도 전시 중 사망한 무고한 목숨에 비하면 아무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 저자는 테디를 통해 옳다고 생각했던 행동이 돌이켜보니 무조건 옳은 것이 아니었음을 언급하고 전쟁의 희생양이 된 무고한 시민들을 애도한다.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이 어우러진 걸작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엄청난 재미와 감동을 한꺼번에 전달하는 이 책은 인간 타락의 상징인 전쟁을 통해 전쟁을 겪은 세대와 그 이후를 살아가는 세대의 아픔을 아울러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소설로서의 재미도 결코 잊지 않는다. 그 재미가 폭발하는 부분이 소설 말미에 등장하는, 정말 심장이 조여들 만한 반전이다. 그 반전은 그야말로 칼날처럼 독자들의 목 위로 떨어진다.
케이트 앳킨슨은 자신이 가진 역량을 마음껏 발휘한다. 독자들로 하여금 소설의 주인공들과 자신의 관계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도록 만드는 《폐허 속의 신》은 정교한 설계와 소설만이 보여줄 수 있는 매력, 그리고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이 어우러진 걸작이다.
《폐허 속의 신》이 ‘소설’이라는 형태를 완벽하게 구현해냈다는 평을 받고 있는 것은, 전작인 《라이프 애프터 라이프》와의 상관관계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전작을 읽지 않은 독자라도 이 《폐허 속의 신》 그 자체만으로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케이트 앳킨슨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소설가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책속으로
가족들은 모두 다 행복했다. 적어도 테디는 그렇게 확신했다. 하지만 훗날 테디는 행복이란 결코 생각했던 것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행복이란 인생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마치 새의 가냘픈 고동 소리처럼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것이며, 숲속의 블루벨꽃처럼 언제 지고 떨어질지 모르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행복이 지속되는 한 폭스 코너는 영원한 이상향이나 마찬가지였다. -p.66
테디는 무엇인가를 ‘좋아한다’ 또는 ‘마음에 든다’ 같은 말을 한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다. 하루하루가 아슬아슬하고 마치 오늘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날처럼 느껴졌던 시절, 오직 현재만 중요하던 시절이었다. 미래를 위해 그토록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지만 테디에게 미래는 어쩌면 다가오지 않을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자신을 포함한 병사들은 적들을 향해 가진 모든 것을 내 던졌다.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전멸을 각오하고 모든 것을 내던지던 나날이었다. 실비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희생이란 말로 살육에 대한 죄책감을 덮곤 하지.” -p.129
자유는 사랑과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무엇이며 어떤 변덕이나 호의로 포장돼서는 안 된다는 사실 역시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p.154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을 무렵에는 테디도 어떤 남녀관계에 대해서도 전혀 놀라지 않게 됐다. 정말로 놀라거나 당황할 만한 일은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문명의 모든 부분은 상상력과 사상누각의 불안한 조합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을 뿐이라는 사실이 전쟁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버린 것 이다. -p.186
테디는 자신이 비올라의 마음에 제대로 차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혹시 다른 쪽으로 생각해보시지 않으실래요?” 버티가 말했다. “어머니 쪽에서 할아버지를 실망시킨 것일 수도 있잖아요.” 테디는 이렇게 대꾸했다. “언제나 부모가 문제지 자식이 먼저 문제를 일으키는 적은 없단다.” -p.223
어떤 전쟁이든 그 뒤틀린 현실 속에서 희생당하는 것은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다. 요즘에야 ‘부수적 피해자’ 어쩌고 하는 표현을 쓴다지만 그런 일반인들은 불필요하게 피해를 입은 게 아니라 바로 공격 목표 그 자체였다. 현대의 전쟁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더는 군인들이 군인들만 죽이는 전쟁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죽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건 누구든 상관없었다. -p.231
비올라는 미래를 향하여 두 사람이 눈을 가리고 쏘아올린 한 개의 외로운 화살이었다. 그 화살이 어디로 가서 떨어질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p.328
“당연하지.” 테디는 행복이라는 말의 뜻에 대해서 더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지만, 낸시가 원한다면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쯤은 언제라도 할 수 있었다. 어머니 실비는 “사랑과 행복을 똑같이 생각하는 건 실수”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p.473
실비는 항상 인간이 서로를 죽이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려는 것이 바로 과학이라고 말했고, 전쟁을 겪은 뒤에도 한참 더 세월이 지난 뒤에야 테디는 어머니의 말이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p.328
“내가 정말 그렇게 끔찍한 엄마였어?” 비올라가 버티에게 물었다. “왜 지금은 아닌 것처럼 말하세요?” 버티가 대꾸했다 -p.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