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선사(道詵寺) 대웅전 주련(柱聯)
阿彌陀佛在何方(아미타불재하방)-아미타 부처님은 어느 곳에 계실까
着得心頭切莫忘(착득심두절막망)-마음에 간직하여 잊지 말 것이니
念到念窮無念處(념도념궁무념처)-생각 생각 이어가다 생각조차 끊긴 곳에 이르면
六門常放紫金光(육문상방자김광)-육근의 문에서 성스러운 금빛광명 찬란하게 나오네
盡美來際度衆生(진미래제도중생)-미래세가 다하도록 중생을 구제하며
自他一時成佛道(자타일시성불도)-모든 중생 너나없이 불도를 이루어지이다
청담(靑潭)과 박정희 흔적을 수능시험 염불이 덮은 도선사(道詵寺)
발길 닫는 대로 온 곳이 우이동 북한산 자락에 있는 도선사(道詵寺)다.
대략 40년전에 한번 온 기억이 날뿐 도로며 사찰의 대웅전(大雄殿)이나 요사(寮舍)
건물들이 전혀 생각이 안 난다.
2016년 11월 17일이 수능시험일자라 부모들이 자식들의 좋은 성적을 비는
원화(願花)가 도선사(道詵寺)를 봄날로 착각할 정도로 조화(造花)로 덮혀있다.
곳곳이 합장하고 합격을 비는 염불소리
절이나 교회가 “기복신앙(祈福信仰)”이 아니라면서도 곳곳이 복비는 소리요
불전함(佛錢函)이 놓여 있다.
먼저 도선사의 역사를 알고 싶어
“도선사(道詵寺)의 내력”이라는 큰 게시판(揭示板)의 글부터 읽었다.
요약하면
《주산(主山)인 삼각산(三角山)을 배경으로 1100여년전 신라말엽의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말세불법(末世佛法)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 예견하고 사찰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옆에 있는 큰 바위를 반으로 잘라 그 한쪽 면에다 20여척 크기의
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像)을 주장자(拄杖子)로 새겼다.
*주장자(拄杖子)-승려가 좌선(坐禪)할 때나 설법(說法)할 때에 가지고 있는 지팡이
지팡이 끝으로 관세음보살상(觀世音菩薩像)을 조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오늘날 아무리 살펴봐도 정(釘)을 사용하여
쪼은 흔적이 보이지 않는 불가사의(不可思議)로 남아있다고 한다.
조선조 광무(光武) 7년에 광무황제(光武皇帝-고종)로부터 정식으로
국가기원(國家起原) 도량(道場)으로 지정받았다.
도선사가 더욱 빛을 발하게 된 것은 한국불교 정화유신운동의 총수인
청담대종사(靑潭大宗師)로 인해서 였다.
청담대사의 대원력으로 고 박정희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대덕화 보살님의 후원으로 대가람인 호국참화원을 1968년 11월 20일에 건립하였다.
고 박정희 대통령과 영부인 고 육영수 대덕화 보살님은 1960년초 고 박대통령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계실 때부터 청담대종사의 호국염원에 크게 감화를
받으셔서 청담대종사로부터 대덕화(大德華)란 불명까지 받으셨다.
고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의 물심양면의 지원으로 우이동 버스종점에서
도선사 안양암(安養庵) 마음의 광장에 이르는 4km의 청담도로와 약 500m의
경내도로를 포장했다.
도선사 대강단 3층에는 청담 대종사 영정이 봉안 되어 있으며
고 박정희 대통령 영부인 고 육영수 대덕화 보살님과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님의 영정이 명부전전에 봉안되어 있다.
청담대종사의 사상이 넓게 호응을 일으켜
대웅전 범종각 적묵당 큰방(大房) 사천왕문 명부전(冥府殿) 등의 대작불사를 성취하였다.
청담혜명복지원 혜명불교보육원(惠明佛敎保育院) 혜명불교양노원(惠明佛敎養老院)
청담종합사회복지관 서울시 각구 어린이집 13개와 독서실
학교법인 청담중학교 청담정보통신고등학교 재단법인 청담문화재단
포교지인 월간여성불교(月刊女性佛敎) 주간도선법보(週間道詵法報)등을 운영한다》
↓아래 사진들은 청담스님의 부도
현대 도선사(道詵寺)는 청담(靑潭)스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사찰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절 입구에 청담(靑潭)스님의 동상이 먼서 시선을 끈다.
잠깐 청담스님의 불교 활동사를 간추려 본다.
일제(日帝)의 침략은 이 땅의 불교에도 비극의 씨앗을 뿌렸다.
일본은 소위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구호 하에 한국 불교의 왜색(倭色)화가
노골화된 것이다.
*내선일체(內鮮一體)-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는 뜻으로,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조선인의 정신을 말살하고 조선을 착취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구호.
일본 불교는 생활불교를 표방하면서, 승려의 결혼. 육식(肉食)등을 허용하였다.
반면 한국 불교는 참담한 일제치하(日帝治下)의 현실 속에서도 청정(淸淨)한 불법(佛法)을 생명처럼 지켜오고 있었다.
일본은 또 당시의 31본산(本山)을 중심으로 하여 스님들의 도쿄 유학길을 열었다.
그때 한국에서 유학간 승려들은 대부분은 대처승(帶妻僧)의 신분이 되어 되돌아 왔다.
*31본산(本山)-조선 사찰 31본산(本山)
일제강점기 일본이 조선 불교를 체계적으로 통치 관리할 목적으로 한국 사찰을
31구역으로 나누었다.
각 지역의 31 중심 사찰이 그 지역의 다른 사찰들을 관할하는 제도다.
본사 주지는 조선총독 인가사항, 말사 주지는 도지사 인가사항이며,
총본산은 “태고사(현 조계사)”였다.
31본산 제도는 해방이 되고 1945년 9월에 개최된 전국승려대회에서
일제가 제정한 사찰령을 부정하고 총본산 태고사법과 31본산제를 폐지하였다.
1962년 대한불교조계종 총합종단이 발족 하면서
“25교구본사” 제도가 실시되었다.
참고로 본사(本寺)와 말사(末寺)의 불교 제도는 고려 말과 조선 초에는 11종의 종파가 있었고, 이들 종파를 1407년(태종 7) 7종으로 혁파(革罷)하였는데,
한양을 중심으로 각 종파의 본산이 있었다.
일본도 조선의 본사(本寺)와 말사(末寺)제도를 도입한 것으로 본다.
1945년 해방 이후부터 시작된 비구(比丘) 대처(帶妻)의 갈등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이판사판(理判事判-理判僧 事判僧)”도 비구 대처에서 나온 말이다.
1945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태고종사찰을 방문할 때 마당의 빨랫줄에 기저귀와
여자 옷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청정해야 할 사찰에 왠 기저귀냐며 결혼한 승려는
절에서 다 나가라고 했다.
이것이 이승만 대통령의 불교에 대한 특별유시 였다.
“왜색(倭色) 승려는 사찰에서 물러나라”는 내용이었다.
이때부터 대처승(帶妻僧)인 태고종의 전통 사찰은 다 비구승들에게 내주어야 했다.
이렇게 보면 일본에 의하여 훼손된 한국불교의 전통을 원상회복하는 조계종은
일본에 의해 훼손된 한국불교를 원상 복귀한 개혁종단(改革宗團)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스님들이 입는 가사(袈裟)의 색상을 홍가사(紅袈裟)가사에서 밤색(栗色)가사로 바꾸고 종단이름도 조계종(曹溪宗)이라고 했다.
지금 서울에 있는 조계사(曹溪寺)도 원래 이름은 태고사(太古寺) 였다.
왜색(倭色) 승려는 대처승(帶妻僧)을 가리킨 용어였다.
선학원에서는 비구승을 중심으로 대처승을 몰아내기 위한 결의 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를 주도한 승려는 청담(靑潭). 효봉(曉峰), 금조(金鳥), 동산(東山), 등이었다.
청담(靑潭)스님의 승단정화(僧團淨化)는 한국 근세승(近世僧) 중에 승단정화(僧團淨化)에 대해 특별히 투철한 인식을 가졌던 스님이 있었을까.
하고 물을 정도였다고 한다.
청담(靑潭)스님은 한국불교가 일본불교 식으로 변하여 절간의 기강이 바로 서 있지 않고 부패해 가고 있는 것을 한탄하였다. 이를 바로 잡는 것은 승단정화(僧團淨化)뿐이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대원강원(大圓講院)에서 학인대회(學人大會)를 결성하기도 하였으나
일본경찰(日警)의 심한 간섭으로 무산돼버렸다.
청담(靑潭)스님에게 있어 원력(願力)이 성취되기 시작한 것은 해방(1945)후인 1954년이다.
서울 선학원(禪學院)에서 전국 승려대회를 개최하게 된 것이다.
청담(靑潭)스님은 “불법에 대처승(帶妻僧)이 없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불교가 세속화된 것은 모두 승려(僧侶)가 처자(妻子)와 가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청담(靑潭)스님의 정화(淨化)노력으로 1962년 통합종단(統合宗團)이 이루어지는데 는 성공했으나 현실적으로 조계(曹溪비구승)와 태고(太古대처승)로 나뉘게 되었고
지금도 그 갈등은 남아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비구·대처 분규에 있어 청담(靑潭)스님은
어느 스님보다 강경했다고 한다.
이것은 항일운동으로 옥고까지 치른 청담(靑潭)스님으로서는 왜색불교에 대한 증오심이 대단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간다.
이는 수행인(修行人)이라는 차원을 넘어 대처(帶妻)불교는 한국불교의 존폐에
암적 존재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담(靑潭)스님은 과격했다고 한다.
1966년 12월, 64세에 한국불교에 최고 지도자인 종정(宗正)에 추대된 청담(靑潭)스님은 그 자리를 놓고 도선사(道詵寺)에 들어가 “호국참회원(護國懺悔院)”건립에 착수했다.
청담(靑潭)스님인 없는 조계종에서는 비구승단(比丘僧團)의 종권(宗權) 다툼이 시작됐다.
청담(靑潭)스님은
“한국불교는 절간만 남았다. 이제 종지(宗旨)는 사라졌다”고 개탄하며 화합을 호소했으나, 종단 권력 다툼에 정신이 없어 누구도 청담(靑潭)스님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1969년 여름, 청담(靑潭)스님은 조계종(曹溪宗)을 탈퇴했다.
조계종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청담(靑潭)스님은 종교 간의 유대와 화해를 주도하고 세계 고승법회를 주재하여
한국불교의 세계적 위치를 확보하는 등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후 1971년 11월 15일 도선사에서 세수 70세, 법랍 45세 입적했다.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