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섬을 데려와야겠다
김 상 립
내 기억 속에는 섬 하나가 있다. 예의 섬은 내 고향 통영 항구로부터 외지로 나가게 되는 비교적 좁은 바닷길에 장식품처럼 떠 있다. 그 섬은 마치 옛 얘기 속에 나오는 거인의 큰 밥 그릇을 꺼꾸로 엎어놓은 것 같은 모양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섬 아래 부분은 단단한 바위병풍으로 빙 둘러쳐졌으며, 그 위쪽으로는 정원을 꾸며놓은 듯 잔디와 돌과 키 낮은 잡목들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고, 꼭대기에는 제법 큰 소나무들이 빽빽하게 서 있어서 한껏 운치를 더해준다. 아주 작은 그 섬이 어른들에게는 관심 밖이어서 내겐 오히려 다행이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는 없지만, 또래들은 그 섬을 공주 섬이라 불렀다. 멀고 먼 옛날‘어떤 왕국의 어여쁜 공주가 부왕의 노여움을 사서 유배를 당해 헤매다가 지금의 자리에 멈춰 섬으로 변했다’는 슬픈 전설이 전해져 붙여진 이름이라 했다. 그러나 내 주변 아이들 사이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돌아 그곳에 가는 것이 금기 시 되었다. 섬에는 바다 밑으로 통하는 깊은 동굴이 있고, 머리 둘 달린 집채만한 뱀이 새빨간 혀를 날름거리며 동굴 입구를 지키고 있다고. 하지만 어린 내 눈에 비친 섬은 환상 그 자체였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답답했던 시절, 우울하고 허전한 마음 달랠 길 없어 무작정 집을 나섰어도, 바닷가에서 그 섬만 바라보고 있어도 언제나 마음이 차분하게 갈아 앉았다. 시간을 잊고 서 있노라면, 마치 섬이 내게 다정스레 말을 거는 착각에 빠져들기도 했다. 더러는 내가 만화 속의 주인공이 되어 주술에서 풀려난 공주를 데리고 비밀의 유리 성으로 몰래 들어가는 몽상을 즐기기도 했으니.
중학생이 된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헤엄 잘하는 친구 서넛 꼬셔서, 타이어 튜브를 유일한 생명선으로 삼아 섬으로 헤엄쳐서 갔다. 반시간이나 걸려 겨우 섬에 도착한 우리는 잠시 원기를 회복하고는 무서움을 달래기 위해 목이 터져라 노래도 부르고, 뛰고 솟으면 춤도 추었다. 우리는 바닷가에서 멍게나 해삼을 줍거나 해초 류를 뜯어 먹으며 허기를 달래기도 했다. 막상 섬에서 쳐다보니 체구는 작아도 참으로 당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섬은 사열대위에 버티고 선 장군처럼 그 작은 체구에도 의연하게 오고 가는 배들을 점검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 부ㅡ웅하고 뱃고동 소리가 길게 꼬리를 끌면, 그도 붕ㅡ하고 따라 울기도 했고, 물새들의 조잘거리는 소리에는 가만히 귀 기울려 듣는 자상함도 보였다. 바다가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빤짝이면, 그도 싱싱한 생선비늘처럼 나뭇잎을 반짝거려 대답하고 있었다.
섬은 언제나 파도와 함께였다. 그 곳은 파도가 휴식하며 새로운 힘을 충전하는 간이역 같은 곳이었다. 머나먼 길에 지친 파도는 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흙 냄새를 맡을 수 있었으니까. 나 또한 그 섬에서 파도처럼 쉬고 싶었고, 섬을 통해서 힘을 얻고 찬란한 미래를 키워가기를 소망했다. 해마다 여름방학이면 꾸준히 섬을 찾았지만, 이런 나의 집념도 고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진학에 쫓겨 그만 느슨해지고 말았다. 대학에 들어가면 섬을 다시 찾으리라는 바람은 서울과 통영이라는 거리의 벽에 막혔고, 3학년이 되자 학생회 일을 책임지게 되면서, 정신 없이 바빠서 고향에 가지도 못했다. 이후 파란만장이란 표현이 딱 어울릴만한 삶이 수년 동안 계속되다 보니, 섬은 자연스레 내 기억에서 멀어져 버렸다.
차차 사회생활에 자리가 잡혀가자 그제야 어떤 계기에 부딪히면 한 번씩 섬 생각이 났다. 그렇지만 잘해야 1년에 한두 번, 고작 하루를 머무는 귀향의 여정에서 섬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부모님 뵙기도 빠듯한 일정이라 어쩔 방법이 없었다. 수년 후 1년 간격으로 부모님이 다 돌아가고, 마음 기댈 곳마저 사라지고 나니, 고향 갈 기회가 더 없어져 버렸다. 세월은 무정하게 흘러 퇴직이 눈 앞에 다가오니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고향에서의 학창시절을 회상하다 보니 불현듯 섬이 그리워진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을까? 보고 싶고 궁금한 생각이 한꺼번에 밀려와 더는 참지 못하고, 오직 섬을 본다는 목적으로 먼 길을 나섰다.
섬은 그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거대한 조선소의 작업장 끝에서 지척의 거리에 놓였다. 사람의 손길이 섬을 육지 가까이로 바짝 당겨 놓은 때문이다. 바다 밑에는 철길이 길게 깔렸고 조선소의 부대시설들이 여기저기 즐비하다. 아름답고 신비하기는커녕 작고 초라한 큰 바위덩어리 하나가 해일에 밀려오다가 겨우 널 판지 하나 붙잡고 숨을 헐떡이며 떠있는 같아 가슴이 아프다. 내 청소년시절 그 곳을 바라보며 끝없이 상상의 날개를 폈던 흔적은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자연, 그것은 있는 그대로 둘 때 좋은 것이지, 사람의 욕심이 가 닿는 순간부터 불행이 시작된다 했던가? 섬 정수리부분, 그 무성하던 나무도 탈모증 환자처럼 성글게 되어버렸고 나무들도 많이 탈색되었다. 처녀의 맨발보다도 더 하얗던 바위 아래쪽마저도 때가 덕지덕지 앉은 채, 검은 바다를 더 검게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섬 전체가 작업 먼지로 뿌옇게 덮인 것 같아 내 마음도 우중충하다. 아마 세월이 아득히 흘러가버린 먼 훗날, 어느 누가 찾더라도 섬의 아름다웠던 옛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지금의 섬과 추억 속의 섬을 연결 지울 고리는 오직 내 기억뿐이었다.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이던 21년 7월 나는 중병을 선고 받았고, 지금까지 투병 중이다. 그 동안 코로나를 핑계했지만 사실은 내 몸 상태가 외부활동을 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다. 그래서 나는 대도시에 살면서도 한 개 잊혀진 섬처럼 살고 있다. 누가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내가 찾아가지도 못하는 고도(孤島)에서 산다. 사람들과의 소통을 잊어버렸고, 단체생활에서 어울리는 몸짓을 망각한지도 오래다. 수 년간 회원들과 함께 어울려 재미난 여행 한번 못해봤다. 나의 숨구멍은 오직 수필을 써서 세상에 내놓는 길뿐이다. 어떤 날은 정령(精靈)마저 떠나버린 황폐해진 그 섬이 지금의 나를 닮았다는 생각에 자꾸 눈물이 난다. 안 되겠다. 이제 그를 내 옆으로 데려오자. 그래서 마음 속 얘기를 실컷 나누고 서로 위로하며, 황혼 길을 함께 걸어야겠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변한다 해도 변치 말아야 할 것 하나, 그것은 바로 인간이면 인간답게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나는 아직도 믿고 있다. 모두가 밖으로만 하는‘척’말고,‘자연보호’라는 생명같이 귀한 상식에 좀 더 집중하고 살아주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첫댓글 오래 전에 남구미 IC에서 야은 선생 묘소로 가는 길에서 본 "지주중류" 비가 떠 오릅니다. 중국 황하의 탁류 속에 우뚝 버티고 선 바위 섬 하나가 있었는데 그 바위를 대하고 쓴 붓글씨를 유성룡이 얻어와서 돌에 새겨서 비석을 만든 것이라 하였습니다. 제가 30대 초반에 그 글씨의 웅혼 함에 반하여서 사진을 찍어 온 게 있는데 아직 어디 보관되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선생님.
너무 아름다운 섬 이야기 ~.
선생님의 섬을 읽고 머리속이 멍해졌습니다.
어쩌면 그 아름다운 섬이 가슴 속에서만 살아있다니. 그래도 가슴 속에 품을 섬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부럽습니다. 도시에서만 살아온 사람이라 그 서정까지 부럽습니다.
평생 섬으로 살아온 섬이라
섬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 것 같은 공주 섬입니다~~추억이 묻은
그 섬이 있어 선생님은 큰 위안이 되시겠습니다
선생님 글을 읽자니 언젠간 섬으로 될 날들이 그려져 더 짠해집니다~~
저는 어떤 섬을 나중에 데려와야 할는지 문득 돌아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