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10.26)은 안중근 의사 의거 110주년입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경이었다.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통감이 되어 고종의 퇴위와 국권침탈을 추진한 이토 히로부미가 사살되었다. 의병 안중근이 러시아 하얼빈역에서 사살한 것이다.
처음에는 한국을 보호국화 할 생각이었던 이토는 항일 의병 투쟁이 격렬하게 일어나자 한국의 국권을 침탈하기로 생각을 바꿨다. 일본 정부는 1909년 한국 보호국화라는 원래의 방침을 침탈로 완전히 전환햇다. 이토는 이에 동의했다.
국권 침탈이 결정된지 3개월이 지나 만주 시찰을 나선 이토는 안중근에게 사살되었다. 안중근 뿐 아니라 모든 의병에게 한국 침량의 원흉으로 여겨진 이토였다. 이들을 대표해 안중근이 나선 것은 민중이 의병으로 나서길 촉구한 고종의 칙서에 응한 결과라 할 수 있다.
- 독도,1500년의 역사,호사카유지 41,42쪽
1909년 10월26일 만주 하얼빈역 앞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뒤 체포되는 안중근을 묘사한 그림.
순국
안중근 의사를 면회온 동생 안정근과 안공근 형제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일본 관헌에게 넘겨져 뤼순의 일본 감옥에 수감되었고 이듬해 2월 14일,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며, 3월 26일 형이 집행되었다. 옥중에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였으며, 서예에도 뛰어나 옥중에서 휘호한 많은 유묵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순국 직전 동포들에게 남긴 의사(義士)의 마지막 유언-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여사는 1862년 황해도 해주군에서 배천 조씨 조선의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같은 지역의 안태훈과 혼인하였으며 슬하에 안중근, 안성녀, 안정근, 안공근 등 3남 1녀를 낳았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맘 먹지 말고 죽으라"
안중근의 거사를 도운 최재형 선생
최재형은 1869년 러시아로 이주해 1884년 귀화한 고려인 1세대다. 러시아군에 부식을 공급하고 정부 발주 도로 공사에 참여해 큰돈을 벌었다. 고려인 계몽운동과 가난 퇴치에 힘써 '고려인의 페치카(난로)'라는 별명을 얻었고, 동의회와 권업회를 결성하며 독립투쟁에 앞장서 '연해주 항일운동의 대부'로 꼽혔다.
최재형은 안중근이 1908년 이범윤·이위종·엄인섭 등과 함께 동의회 의병부대를 조직해 국내 진공 작전을 펼칠 때 자금 지원을 도맡았다. 안중근은 거사를 앞두고 최재형의 집에서 지내며 그가 구해준 권총으로 사격 훈련을 했다. 최재형은 안중근과 그의 동료들이 붙잡혀 재판을 받을 때도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했다.
김구와의 인연
안중근 의사의 친동생 안정근과 안공근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는데 안공근은 백범 김구의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안정근의 딸 안미생은 김구의 장남 김인과 결혼했다. 김구가 19세 때 동학의 접주가 되어 동학군을 지휘할 때 안 의사 부친 안태훈 진사는 김구가 비범한 인재임을 파악하였다.
후에 안태훈 진사(사진)는 김구를 불러 자신의 집에서 공부하게 하여 김구는 안 의사 집안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김구는 우리 민족의 최고 악질 원수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를 평생 존경하고 안중근 의사를 독립운동의 표상으로 삼았다
경교장에서 안우생,안미생,김구,장우식 (좌로부터)
첫댓글 도마 안중근...<국가안위 노심초사>"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자료들 잘 보고 갑니다 ^_^ 룰루랄라~~~!!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