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느헤미야 8장 1절 – 18절) 8:1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2 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에 이르러 3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4 그 때에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고… 5 모든 백성…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6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7 레위 사람들은 백성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 그들에게… 8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다 깨닫게 하니 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10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11 하니 12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이 그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 앎이라 13 그 이튿날 뭇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사 에스라에게 모여서 14 율법에 기록된 바를 본즉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명령하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은 일곱째 달 절기에 초막에서 거할지니라… 15 한지라 16 백성이 이에 나가서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17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거하니… 이에 크게 기뻐하며 18 에스라는 첫날부터 끝날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무리가 이레 동안 절기를 지키고 여덟째 날에 규례를 따라 성회를 열었느니라 (개역개정) 오늘의 성경 본문은, 성벽 재건을 마친 백성들의 자발적인 요청으로 나팔절에 광장에서 펼쳐진 에스라의 율법 강독과 초막절 축제를 행하게 된 것에 관한 내용입니다. 1-7장까지가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관한 내용이었다면, 8-13장까지는 포로 귀환민이었던 이스라엘 자손들의 신앙 회복 운동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중에 8-10장은 에스라의 율법 강독에 따른 새 출애굽(바벨론) 백성으로서의 언약 갱신에 동참하는 영적 부흥의 사건을 소개하고 있고, 11-13장은 언약의 순종에 의한 새로운 선민 공동체로서의 회복을 위하여 백성들의 예루살렘 도성 재정착 작업(11장)과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가계 조사 작업과 예루살렘 성벽 봉헌식(12장) 그리고 느헤미야에 의한 개혁 운동(13장)의 내용이 소개됩니다. 어느 시대나 개혁은, 자신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말씀의 정신과 진리가 중심이 되어 통치하는 세상 질서의 비전으로부터 촉발되었습니다. 성경에서 율법은, 대부분 긍정적으로 표현되지만 부정적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마11:13,고전15:56,갈3:23). 그것은 종교 지도자들이나 신앙인들이, 율법을 어떤 의도와 용도로 쓰고자 했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결과를 빚어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율법을 거부하거나 반대하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5:17)고 일깨우시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을 정죄하거나 억압하는 수단과 도구가 되지 않게 할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오늘날도 다들 성경을 중요시하지만, 문자적 해석의 틀에 가두어 사람들을 억압하고 정죄하는 도구로 쓰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문자적 해석의 바탕 위에서 그 말씀이 나타내고자 했던 본질적인 정신을 추구하는 진리를 통하여 사람들을 구원하고 회복하는 통로가 되게 하는 이들로 나뉩니다. 한 사람은 ‘종교 국가’를 지향한다면, 또 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지향합니다. 사람들을 나와 우리 종교 조직에 속박하게 할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사람들로 자유하게 할 것입니까? 이 차이를 분별하는 이들이 복됩니다. 1. 이스라엘 백성이 갈구한 것은 무엇입니까? 당시 포로 귀환민들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서 그동안 수없이 많았던 어려운 난관을 딛고 민족의 오랜 숙원사업인 예루살렘 도성 재건을 마쳤다는 감격과 기쁨이 컸습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선민 공동체라는 정체성 회복을 원했습니다. 백성들은 에스라에게 무엇을 요청했습니까? “이스라엘 자손이…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8:1). 당시 포로 귀환민들은 다수가 남유다 왕국 사람들이었지만, 자신들을 “이스라엘 자손”으로 호칭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 공동체인 이스라엘 민족으로의 정체성 회복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 저들은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 책을 가져오기를 청하”였습니다. 도대체 저들은 “모세의 율법 책”을 가지고 무엇을 했습니까? 느헤미야는 이 상황을 “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 책을 가지고, 회중 앞…에 이르러,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 책에 귀를 기울였는데”(8:2-3)라는 놀라운 증언을 합니다. 느헤미야나 에스라의 강요와 명령이 아닌 백성들 스스로의 선택이었습니다. 과거부터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율법 책”은 “남자”들만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 곧 성경 말씀을 듣는 이들이 “남자”뿐만이 아니라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이었습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함께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귀를 기울였”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의 역사요, 영적 각성과 부흥의 역사였습니다. “학사 에스라”가, 아니 “제사장 에스라”가 이 일을 흔쾌히 허락하고, 그 모든 사람들을 나오게 하고 말씀을 들려주었다는 것 역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에스라”를, 두 직분을 겸임한 “학사 겸 제사장”(스7:11,개역)으로 소개했다는 점에서, 오늘 성경 본문에서 “학사 에스라”와 “제사장 에스라”라는 두 가지 호칭으로 소개된 이유입니다. “학사”는 ‘서기관’이라는 뜻으로 바사(페르시아) 제국의 직함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훗날 이로 인하여 유대 사회에 ‘서기관’들이 출현하게 된 배경이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그가 “율법 책”을 낭송했다는 점에서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스7:6)였지만, 본래 “학사”는 바사 왕국의 직책이었고 당시 유대 사회의 공식적 직함으로는 “제사장”이어야 했기에 “제사장 에스라”로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성벽 재건 공사에는 “에스라”라는 이름이 없었는데, 왜 갑자기 그의 이름이 나왔느냐 입니다. 또 그가 총독의 권한을 가졌었던 상황(스7:25-26)에서, 느헤미야 총독과 어떻게 양립할 수 있었느냐 입니다. 정확한 것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추정하기는, 느헤미야가 부임하면서 성벽 재건 공사 기간에 그는 바사 왕실에 다녀왔던 것이 아닌가라고 보며, 또 “학사”가 바사 정부의 공식적인 관리로서 파견 받은 직책이었다는 점에서 느헤미야가 부임하기까지 총독의 권한을 대행했던 것이 아닌가 보이기도 합니다. 에스라가 백성들 앞에서 “율법 책”을 낭송한 때를 “일곱째 달 초하루”라고 했는데, 이 “일곱째 달”이 유대 종교력으로는 ‘티스리 월’이지만, 유대 민간력으로는 새해가 시작되기에 나팔을 불어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축제의 절기인 ‘나팔절’이었습니다(레23:24). 유대 종교력은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는 유월절과 무교절을 한 해의 시작(출12:2)으로 삼는 것이자, 본래 아브라함이 살던 문화권이었던 바벨론의 달력에 근거한다면, 유대 민간력은 비가 내리면서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인 우기의 시작점을 중시하는 가나안의 농경문화에 근거한 달력입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 재건 공사가 끝난 때를 “성벽 역사가 오십이 일 만인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6:15)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엘룰월”은 유대력으로 6번째 달로 6월 25일인 셈입니다. 양력으로는 “엘룰월”이 8월 중순에서 9월 중순이라는 점에서 9월 10일경 정도가 됩니다. 이때로부터 “일곱째 달 초하루”면 성벽 재건 공사가 끝나고 불과 5일 후에, 그 감격과 기쁨을 가지고 새로운 생명의 계절이 시작되는 것을 알리는 ‘나팔절’에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모두가 모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말씀을 듣는 백성들의 태도가 어떠합니까? 당시 백성들이 모인 “수문 앞 광장”(8:1)은 “하나님의 전 앞 광장”(스10:9)을 가리키며, 공개된 장소에서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8:2) 말씀을 선포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낭독한 “율법 책”이, 모세오경 전체는 아니고 신명기서의 한 부분이 아니었을까 추정합니다. 혼자서 “광장”에 모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계속 큰 소리로 “율법 책”을 낭송할 수는 없었기에, 어떻게 했다고 증언합니까? “그 때에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고, 그의 곁 오른쪽에 선 자는 맛디댜와 스마와 아나야와 우리야와 힐기야와 마아세야요, 그의 왼쪽에 선 자는 브다야와 미사엘과 말기야와 하숨과 하스밧다나와 스가랴와 므술람이라”(8:4). “에스라”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높게 세운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섰습니다. 그리고 교대로 말씀을 낭독할 사람들을 “오른쪽”에 6명 “왼쪽”에 7명을 세워서, 총 14명이 성경인 “율법 책”을 낭독하게 했습니다. 이들은 제사장들이거나 레위 사람들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선민으로 살고자하는 열망에 가득한 백성들의 염원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에 귀를 기울”(8:1,3)이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의 귀가 그 책을 향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백성들이 그동안 갈급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傾聽)하고자 했던 열심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증언합니다. 말씀을 듣는 백성들의 갈급한 열망의 태도를 느헤미야는 어떻게 증언합니까? 첫째로,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8:5)고 증언합니다. 에스라가 “율법 책”을 낭독하는 첫 시작을 열어갑니다. 그럴 때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으로 모두가 일어났습니다. 둘째로,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8:6)고 증언합니다. 에스라는 말씀을 읽기 전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찬양으로 시작했습니다. 이에 백성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고백을 “아멘!”으로 화답했습니다. 이때 “손을 들고”는, 하나님 앞에 전적인 헌신과 순종의 자세에 대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최대한의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자세로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셋째로,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와 레위 사람들은, 백성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 그들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였는데,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8:7-9)고 증언합니다.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서 “율법 책”을 낭독하기는 했지만, 전체에게 들려지기는 무리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 백성들 중간 중간에 서있던 13명의 “레위 사람들”이 앞에서 “낭독”된 내용들을 자기 주변에 있는 백성들에게 다시 전달해 주면서, “그 뜻을 해석하여…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하였습니다. 여기서 “그 뜻을 해석하여”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었다는 의미와, 당시 포로 귀환자들이 성경 언어인 히브리어를 모르는 이들이 많았던 상황에서 바사 제국에서 쓰던 언어인 아람어로 통역해주었다는 의미가 함께 합니다. 느헤미야도 “유다 방언은 못하”(13:24)는 이들이 있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듣게 된 이들의 반응을 가리켜서,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8:9)고 증언합니다. 말씀 앞에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 것에 대한 북받쳐 오르는 감격과 기쁨의 표현이자, 자신들이 얼마나 많은 죄악을 저질렀던 백성들로 살아왔는가를 깨닫는 자성과 각성의 마음을 나타내는 회개의 표현이었습니다. 이러한 백성들의 모습 앞에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8:9)며 다독거렸다고 증언합니다. 넷째로, 따라서 느헤미야는 ‘나팔절’ 축제 절기를 어떻게 지킬 것을 당부합니까?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8:10). “살진 것을 먹고”는 고기를 먹는 잔치를 벌일 것과, “단 것을 마시되”는 포도주 같은 음료로 축제를 즐길 것을 권면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기들만이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노는 것이 아니라,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곧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 진정한 축제의 정신이자 의미임을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이 날만큼은 세상의 염려 걱정을 다 내려놓고 “근심하지 말라”며, 그래야 하는 이유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8:10)고 일깨워줍니다. 우리가 절기를 지키는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에벤에셀”(삼상7:12)의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놀라운 사랑의 은혜와 능력을 다시금 기억하고, “여호와 이레”(창22:14)가 되시는 하나님을 더욱 의지함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갈 우리의 “힘”이 되기 때문임을 깨닫고 고백하는 시간이 절기를 지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레위 사람들도 모든 백성을 정숙하게 하여 이르기를, ‘오늘은 성일이니, 마땅히 조용하고 근심하지 말라!’”(8:11)고 백성들을 권면했습니다. 이러한 권면의 말씀에 순종하여 백성들이 어떻게 했다고 증언합니까?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이 그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 앎이라”(8:12). 에스라를 통해 “그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 앎이라”고 했을 때, 펼쳐진 천국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11:9)고 선언하셨는데,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때 세상에 펼쳐질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꿈꾸고 열망하는 이들이 복됩니다. 3. 말씀을 통해 회복한 절기는 무엇입니까? 에스라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 책”을 낭독한 내용을 듣고 깨닫게 된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로 말미암아, 이제 예루살렘 성벽 재건과 함께 “이스라엘 자손”으로의 온전한 회복을 열망했던 포로 귀환민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42:1)라는 고백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더 알고 싶은 갈망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튿날, 뭇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사 에스라에게 모여서, 율법에 기록된 바를 본즉”(8:13-14)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튿날”이면 “일곱째 달 초하루”이자 ‘나팔절’ 축제를 치른 다음 날이었습니다. 백성들은 흩어져 각자의 처소로 돌아갔지만 사회적 종교적 지도자였던 “뭇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에스라에게 나아와서, 함께 “율법 책”을 펼쳐서 읽던 중에 새롭게 발견한 절기가 무엇이었으며, 어떻게 지키라고 했다고 증언합니까? “율법에 기록된 바를 본즉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명령하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은 일곱째 달 절기에 초막에서 거할지니라 하였고, 또 일렀으되 모든 성읍과 예루살렘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산에 가서 감람나무 가지와 들감람나무 가지와 화석류나무 가지와 종려나무 가지와 기타 무성한 나무 가지를 가져다가, 기록한 바를 따라 초막을 지으라 하라 한지라”(8:14-15). 이것은 초막절 절기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본문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성경 본문은 존재하지 않지만, 레위기서의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십오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지킬 것이라”(레23:34)는 내용과, “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칠 일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레23:40)는 내용을 인용하여 말씀한 것으로 보입니다. 초막절 절기를 지키라는 명령을 발견한 “뭇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이것을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야 된다는 생각에 “모든 성읍과 예루살렘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기록한 바를 따라 초막을 지으라 하라”(8:15)고 했다고 증언합니다. 백성들은 “나무 가지를 가져다가, 기록한 바를 따라 초막을 지으라”(8:15)고 하는 초막절 준수 명령에 어떻게 반응했다고 증언합니까? “백성이 이에 나가서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혹은 지붕 위에, 혹은 뜰 안에, 혹은 하나님의 전 뜰에, 혹은 수문 광장에, 혹은 에브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짓되,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중이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거하니”(8:16-17). 다들 흔쾌히 순종하여, 감람산에서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각자의 집 “지붕 위”와 “뜰 안”에 초막을 짓거나, 또는 “하나님의 전 뜰”과 “수문 광장”에 그리고 성전 가까이에 있는 “에브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지었습니다.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중”은 새로운 출애굽의 증인들이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하자, 하나님께서 40년간의 광야 생활 중에 먹이고 입히시고 인도하셨던 광야 방랑 생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을 초막절을 통해서 기념하며 영광을 돌렸던 것처럼, ‘제2의 출애굽’인 ‘출 바벨론’의 은혜를 기념하는 감사의 축제로 모두가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이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 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한 일이 없었으므로, 이에 크게 기뻐하며”(8:17)라고 증언합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서 가나안 입성과 정복 전쟁을 이끌었던 “여호수아” 때 지켜졌던 절기인데, 왜 그때로부터 “이같이 행한 일이 없었”다고 말한 것입니까? 초막절을 안 지켰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충분히 살리지 못했고 “나뭇가지를 가져다가…초막을 짓되…그 안에서 거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제1차 포로 귀환민들 역시도 예루살렘에 돌아오자 “기록된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켜”(스3:4) 행했습니다. 에스라는 7일간의 초막절 축제 기간 역시도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는 시간을 통해서, 말씀에 의한 영적 각성과 부흥의 시간으로 이끌었습니다. “에스라는 첫날부터 끝 날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무리가 이레 동안 절기를 지키고, 여덟째 날에 규례를 따라 성회를 열었느니라”(8:18). 초막절을 “여덟째 날에는 장엄한 대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일도 하지 말 것”(민29:35,레23:36)이라는 말씀을 따라서, “여덟째 날”의 “성회”를 통하여 다시금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고 자기반성과 성찰의 기회로 삼는 폐회예배로 마무리했다고 증언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 곧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8:13) 성경책을 가까이 하십니까? 우리의 시대 현상, 아니 교회 현상조차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분별력을 잃어버린 모습을 보인지 오래 되었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경계하기를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1-5)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 난무하는 사회적 혼란과, 사회를 향한 빛과 소금의 자정 능력을 상실한 한국 교회의 모습 앞에 우리는 어디로 돌아서야 합니까?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서 배우는 열정이 아니라 그 배움 자체도 우리를 왜곡시키기에, 사도 바울이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딤후3:7)고 한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자체를 붙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딤후3:15)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6-17)고 일깨웁니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마친 “이스라엘 자손”들의 영적 회복 역시, 에스라가 설교를 한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8:18)했고,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8:1,3)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혼탁한 시대에 하나님의 진실한 백성과 자녀로 서기 위해서, 주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순종하는 자각과 각성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