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심 내려놓은 것이 성불로 가는 길” /보성스님(1906∼1998)서둘 것도 욕심낼 것도 아닌 것이 수행이자한순간도 게으를 수 없는 것이 수행입니다현세의 지장이 되고 관음이 되길 서원하고그 원행을 실천하면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 중생이 중생이라고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모든 중생은 부처의 성품을 지니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중생도 부처입니다. 다만 부처의 성품으로 충만한 부처가 아니라 중생의 성품과 부처의 성품을 함께 갖추고 있어 더러는 중생이고 더러는 부처가 되는, 말하자면 덜 익은 부처가 중생이라는 것입니다.그런데 이것이 문제입니다. 부처인 것이 확실하되 중생의 성품이 구름처럼 들어찬 것이 중생인 것입니다.이 마음속 중생 성품을 비워내고 부처 성품을 채우는 것이 부처를 이루는 길, 즉 수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그러나 이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생의 목숨을 버려서도 오르기 힘든 자리이며 수 없는 생을 거듭거듭 정진 수행해야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성불의 자리입니다.그러니 서둘 것도 욕심낼 것도 아닌 것이 수행입니다. 그렇다고 한순간도 게으를 수 없는 것 또한 수행입니다.우리에게 들어찬 중생심을 버리는 일이 성불로 가는 길입니다.이 일은 어렵다면 어렵고 쉽다면 쉬운 것인데 저마다의 근기에 따라 한발 앞설 수도 있고 뒤쳐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깨달음의 그 자리는 이르는 시간을 둔 곳도 아니고 들어가는 방향이 정해진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다만 이르고 보면 시간도 공간도 없는 그저 여여한 자리라고 옛 조사들이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서둘 것도 욕심낼 것도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진정한 정각의 자리는 여여한 것이어서 말이나 행위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말 없는 곳에서 말 없는 곳으로 이른다’ 는 말도 있지만 그 말 역시 허망한 말일뿐입니다. 그러니 묵묵히 부처의 성품을 키워 가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연꽃을 들어 보이신 부처님과 웃음만 지어 보인 가섭존자의 이심전심을 선방 수좌들의 화두로 삼는 것도 그런 까닭이 아니겠습니까.그저 우물에 빠지는 아이를 구하러 달려가는 심정을 잃지 말고 정진해 나가자는 것인데 정진의 궁극은 계(戒)·정(定)·혜(慧) 삼학으로 삼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삼학은 수행과 구경열반을 아우르는 도리입니다.‘계’를 지키는 것은 스스로를 구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견성을 향한 모든 행위를 자유롭게 하는 열린 틀입니다.‘정’이란 그 열린 틀 속에서 그야말로 청정무구한 자성, 즉 부처의 성품을 보는데 필요한 닦음의 과정입니다. 그 닦음을 통해 부처성품을 보는 지혜의 몸을 갖추는 것이 ‘혜’입니다.이 세 가지는 따로따로 이뤄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자리에서 같이 이뤄 나가는 것입니다.그릇이 하나 있고 그 안에 물이 차 있으며 그 물에는 달이 비치고 있는데 이것이 삼학입니다.그릇이 일그러지면 물도 일그러지고 물이 일그러지면 비친 달도 일그러집니다. 또 그릇은 온전한데 물이 일렁이면 그 안에 비친 달도 일렁입니다. 반듯한 그릇에 흔들림 없이 맑은 물, 그리고 그 속에 온전히 비치어 빛을 발하는 달, 이것이 삼학이니 자신의 그릇은 얼마나 반듯한지, 그리고 그릇 속의 물과 거기 비친 자신의 달은 어떤 모양인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물에 빠진 아이 구하는 마음을 삼학으로 승화시켜 그치지 않고 간직하는 것이 바로 성불의 길입니다.조금씩 부처의 성품을 늘려 가는 일을 묵묵히 하는 가운데 삼학이 닦여지는 것이니 그리 어렵게 여기고 겁낼 일은 아닙니다.자주자주 1분 부처가 되도록 노력하자는 것입니다. 그 짧은 시간에 부처를 이루는 방법은 염불이어도 좋고 참선이어도 좋을 것입니다. 다만 어느 방편을 택하던지 제대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건성건성 해서 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목에서 피가 나고 소리가 안 나올 정도로 극진히 염불하는 가운데 중생심은 사라지는 것입니다.참선도 선지식의 지도를 받으며 매몰차게 하다보면 청정한 소식이 올 것입니다.참선을 하되 선지식의 지도를 받으라는 것은 자칫 혼자 공부하다가 잘못된 자리에 이르러 ‘나는 깨쳤다’라고 오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먼저 가 본 사람이 길을 잘 안내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말고도 재가불자들이 할 수 있는 수행방편은 너무 많습니다.승속에 수행 방법이 다를 수야 없겠지만 요즘 같이 복잡한 시대에 세간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찾아 행하는 것이 불자의 바른 자세일 것입니다.세간의 불자가 삶 속에서 해야할 수행, 그것은 다름 아닌 ‘공덕 베풀기’입니다.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것도 큰 수행인 것입니다. 베푸는 마음 속에 부처가 들어 있습니다.그 부처를 오래오래 자기화 하는 것이 염불 참선으로 성불하는 것과 다를 수는 없습니다.베푸는 마음 속에 부처가 들어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이 관세음보살이고 지장보살인 것입니다.이 자리가 지옥이고 이 자리가 극락인데 어디에서 부처를 만나겠습니까. 중생의 마음은 지옥이고 부처의 마음이 극락인데 부처의 마음을 키워 가는 자비희사의 보살행을 게을리 할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경전에 기록된, 법당에 모셔진 지장보살 관음보살에 얽매이지 말고 스스로가 현세의 지장이 되고 관음이 되길 서원하고 그 원행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내생에 극락에 나길 기원하는 것보다 현세에서 보살도를 실행해 보살의 공덕을 쌓는 것이 더 큰 성불의 씨앗이 아니겠습니까.우리 마음에 부처와 중생이 함께 있다면 항상 밝게 살아야 합니다. 즐겁고 밝은 마음이 부처 마음이며 내 얼굴이 기쁘고 즐거우면 남도 좋게 봅니다.거룩하고 자애로운 부처님 모습에서 고달픈 중생의 시름이 봄눈 같이 녹듯이 말입니다. 내 마음의 부처를 드러내 남의 마음속 부처를 일깨우는 일도 큰 보시행입니다.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너무 표정이 어둡습니다. 사람들의 표정이 흐리면 그 세상도 흐린 것이고 그 흐린 곳은 지옥에 가까운 곳입니다.나 한사람이 밝은 모습을 지으면 내가 선 자리가 극락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이 역시 수행이요 성불로 가는 길임을 의심하지 말자는 것입니다.한번 웃는 사이만큼 부처 성품이 밝은 등불이 되어 이 세상을 비추는데 왜 서로 으르렁거리며 굳은 표정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베푸는 것은 물질만이 아니고 좋은 말, 좋은 표정, 좋은 생각까지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함께 살며 함께 부처가 될 인연을 가지고 있습니다.모든 중생이 부처가 되는 여로에서 일탈된 행위로 지옥의 땅을 넓혀 버리는 악행을 저지르지 말아야 합니다.불자들은 자만하지 말고 오늘 1분 부처가 되고 내일 2분 부처가 되도록 노력할 때 자성의 청정한 모습이 보여 질 것이니 베풀고 정진하며 자신을 잘 지켜나가야 하겠습니다. 보성스님(1906∼1998).... ·1906년 함경남도 이원 출생. ·1917년 강원도 건봉사에서 김보련 스님을 은사로 득도.·1928년 건봉사 보안강원 대교과 졸업.·1931년 중앙불교전문학교 졸업.·1931년 박한영스님을 계사로 비구계 및 보살계 수지.·1940년 동경 일본대 종교과 졸업.·1943년 일본대 사학과 졸업.·1959년 숙명여대 문리대학장 취임.·1961년 동국대 총장 취임.·1962년 광동학원 이사장 취임.·1979년 태고종 제12세 종정 역임.·1994년 태고종 제15세 종정 역임.·1998년 서울 봉원사에서 세수 92세, 법랍 79세로 입적.
출처: 불교미술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보디삿트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