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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9. 묵상글 들 ( 연중 제 4주일. - 행복 레슨. 등 )
* * * 정신철 요한 세례자 주교 (인천교구장 / 한국카리타스인터내셔널 이사장) 님의 cpbc TV. 매일미사.
강론 영상 맨 아래에 게시 안내합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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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9. 연중 제 4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행복 레슨
오늘 복음은 행복 선언인데 그 시작 부분을 언뜻 보면 이해가 잘되지 않습니다.
군중이 있는 곳에서 가르침을 주시지 않고, 굳이 산으로 올라가 거기까지
따라온 제자들에게만 행복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그런데 이것은 제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행복 lesson을 배제하신 겁니까?
이는 어떤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피아노 레슨을 해주는데
돈 많은 집 아이들만 제자 삼아 피아노 레슨을 해주고
가난한 집 아이들은 제자로 삼지 않는 것과 같은 겁니까?
그러니까 일반 군중은 놔두고 제자들만 데리고 올라가 행복을 가르치신 것이고,
결과적으로 제자가 아닌 군중에게는 ‘행복 배제’와 ‘행복 차별’을 하신 것입니까?
우리의 주님은 그럴 분이 아니라고 우리가 믿는다면
하늘나라의 행복을 얻으려는 사람은 산 위로 올라오라는 뜻이고,
그런 열정이 있는 사람만이 힘들어도 산 위까지 올라와
주님의 행복 레슨을 받는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제가 옛날에 저희 형제들에게 오르간 레슨을 해준 적이 있고,
저의 레슨을 받은 형제가 100명을 넘는데 배우고픈 열망이 커,
저에게 끝까지 배우고, 지금까지 오르간을 치는 형제는 10명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행복 레슨도 이처럼 배우고픈 열망이 커야지만 배우는 것인데
주님의 행복 레슨은 이 세상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 행복이기에
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을 만나는 산까지 올라야 배울 자격이 있다는 뜻입니다.
성무일도 초대송 시편 중에, “주님의 산에 오를 이 누구인가?” 이런 시편이 있는데
복음에서 산은 하느님 계신 산이요 하느님 나라의 행복 레슨이 이뤄지는 곳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이 세상 나라의 행복과 다릅니다.
부자가 행복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며,
가난도 물질적 가난이나 마음의 가난이 아니라
영으로 가난한 사람이라야 참으로 행복합니다.
(현재 우리의 번역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잘못 번역되어 있음)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욕심이 없는 사람 정도인데,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가난은
욕심이 없는 가난 정도가 아니라 영으로 가난한 것입니다.
왜냐면 영으로 가난해야지만 하느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고,
하느님 나라를 소유해야지만 물질이 아니라 영으로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성령 충만하면 그것이 참 행복이고,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행복이라는 말입니다.
가난뿐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의 행복 조건은 이 세상 나라의 행복 조건과 다릅니다.
이 세상에서는 슬픔이 없고, 고통이 없고, 박해가 없는 것이 행복 조건인데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이런 것들을 오히려 감수하고 감당할 수 있어야
영으로 행복할 수 있는데 이런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얻으려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얻고자 하느님의 산으로 오를 제자가 얼마나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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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9. 연중 제 4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참된 행복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참된 행복의 원천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체험에서 비롯됩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마음으로 자기일에 헌신하고 사람들에게 헌신할 줄 안다면 거의 어떤 환경에서든 행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참된 행복의 원천인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면 성 보나벤뚜라의 표현대로 어쩔줄 모르는 행복, 다시말해서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성 프란치코가 체험한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가 우리 일상의 찬미가 됩니다. 바로 하느님으로터 흘러나오는 감미로움, 아름다움, 기쁨, 온화, 관대 등이 우리 영혼안에 충만할 때 행복을 느끼며 자연히 하느님께 대한 찬미로 이어집니다.
행복의 원천인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침묵의 요구됩니다. 행복은 검증할 수 없는 신비스런 영역으로부터 오는 것이므로 침묵의 광야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깊은 침묵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는데, 이때 영혼 깊은 곳에서 기쁨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이 기쁨은 바로 참된 평화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행복은 침묵안에서 하느님 사랑으로 비롯된 기쁨과 평화의 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하느님 사랑의 체험인 완덕을 이룸으로써 진정한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성서에서 하느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완전함이란 인간이 완전무결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의 선물을 받아들이고 이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덕의 본질을 사랑이고 이 사랑이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하느님과 인간을 사랑하는데에 그 본질과 목적이 있습니다.
사랑이 시작될 때 행복이 시작되고 사랑이 커져갈 때 행복이 커지고 사랑이 완성될 때 행복이 완성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완덕은 내적 삶의 바탕에서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는 실천입니다.
그러므로 행복은 진심으로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능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카리스마를 초월하고 예언보다 더 귀중한 것은 사랑입니다. 가장 완전하고 가장 행복한 구원의 길은 사랑의 길입니다.
행복의 원천인 하느님과 이웃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합니다. 자기를 끊어 버림은 자신의 본성에 나오는 사악한 성향들인 시기심 질투, 교만, 욕망 등을 제어하는 힘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도움으로만이 가능합니다.
십자가의 신비는 하느님의 사랑이 핵심입니다. 사랑이 없는 희생, 고통, 포기는 사랑이 없는 십자가로서 그것은 한갖 나무라는 물질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있어서 성 보나벤뚜라는 “그리스도를 위해 죽음을 원하는 것, 그리스도를 위해 죽음과 직면하는 것과 죽음의 전투에서 기뻐하는 것은 애덕의 완전한 행위이다”라고 말합니다.
참된 행복을 맛보는 하느님 사랑의 체험을 위해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은총을 주님께 청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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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일요일 성체의 날✝️
당신은 하루에 얼마나 많이 하느님의 이름을 부릅니까?
기도는 단순한 것이 좋다. 가장 단순한 기도는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이다. 그냥 단순하고 간절하게 ‘예수님 사랑’하고 마음으로 되뇔 때,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 있게 된다. 그분의 현존을 의식하게 된다. 기도할 때, 많은 말을 하는 것은 오히려 두뇌를 피곤하게 만들고 계속해서 정신을 사용하기에 자기 착각에 빠질 수 있게 된다. 여러분들은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를 알고 있을 것이다.
이 기도는 호흡과 함께 ‘구세주 예수여 불쌍한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하고 계속 반복하는 것이다. 아주 단순한 이 기도를 되풀이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정신이 하느님께 집중되고 하느님과 하나됨을 체험하게 된다. 기도 중에 가장 쉽고 빠르게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기도는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이다.
야훼 하느님, 마라나타, 예수 사랑, 예수 평화, 압빠 하느님 등 하느님의 이름을 호흡과 함께 매일 같이 계속적으로 불러 보라. 여러분은 금방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 기도를 통해서 여러분의 감정이 치유됨을 발견할 것이고, 하느님에 대한 여러분의 신앙이 깊어짐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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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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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9. 연중 제 4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 5,3)
우리는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행복하기를 바란다.
...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갈망한다 해도 유일한 목표는 행복이다.”
그런데 진정한 ‘참 행복’은 무엇일까?
사실, 우리는 ‘행복은 더 많이 소유하고 더 값지고 좋은 것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미국 자본주의 개척자라 할 수 있는 록펠러는 ‘무엇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느냐?’는 질문에 “1달러라도 더 가지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욕망과 애착을 채우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 될까요??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첫 번째 참 행복’을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 5,3)
한편, 삶에는 결핍과 슬픔이나 고통이 끝없이 전개됩니다. 그러나 행복의 반대는 이러한 결핍이나 슬픔이나 고통이 아니라 생기 없는 무기력함과 무감각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결핍과 슬픔과 고통은 오히려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깨우쳐주기도 합니다.
그러니 ‘행복한 삶’은 생기 있는 생명력으로 충만하게 살아있을 때 일 것입니다. ‘충만하게 살아있다.’는 것은 자아의 깊은 곳을 살아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자신이 자신일 수 있는 자리요, 존재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영혼을 살아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행복선언’으로, 비록 지금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어도,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행복하다는 하늘나라의 성취에 대한 예언자적 선언이며 축복입니다.
사실, 당시의 유대교는 재물을 가진 자, 배부른 자, 웃는 자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자이고, 가난한 이, 굶주리는 이, 우는 이는 하느님이 버린 결과로 비참하게 된 이들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재물이 많고 적음, 배부름과 배고픔, 기쁨과 슬픔을 넘어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이 우리에게는 “참된 행복”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정 우리가 가난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비록 우리가 가난하지만 이미 그분을 차지한 까닭에 부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 슬퍼할 줄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죄를 슬퍼하되 이미 자비 안에서 위로받고 기쁘기 때문이요,
우리가 진정 온유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있어야 할 하느님 품 안에 있기에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감미로움에 빠진 까닭입니다.
우리가 진정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야하는 이유는
주님을 극단적으로 필요로 하는 일 외에는 결코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기에그분 외에는 결코 아무 것에도 목마르지 않기 때문이요,
우리가 진정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주님의 마음을 품은 까닭입니다.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그분의 손길에 매만져진 까닭이요,
진정 우리가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하는 이유는
그분의 영에 끌려 다스림을 받기 때문이요,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인 까닭입니다.
그러니 ‘기뻐하고 즐거워 할 일입니다.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이란 필요한 한 가지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다.
삶 안에서 가장 필요한 것을 찾아내기만 하면 나머지 것들은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
바로 이때 필요한 한 가지는 물론 다른 모든 것이 주어진다.”
그렇다면, ‘필요한 한 가지’는 무엇인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 내용은 같을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신을 실현하는 것, 곧 하느님이 바라시는 모습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행복하여라. ~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12)
주님!
가난을 살게 하소서. 당신을 이미 차지한 까닭에 더 이상 아무 것도 차지할 것이 없게 하소서.
슬퍼할 줄을 알게 하소서. 가엾이 여기는 당신의 마음에 제 가슴이 찔리게 하소서.
온유해 지게 하소서. 당신의 품에 안겨 다독거려지게 하소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말라하게 하소서. 참된 음료인 당신께 맛 들어지게 하소서.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측은히 여기는 당신의 마음을 선사받게 하소서.
제 마음을 깨끗하게 하소서. 당신의 손길에 매만져지게 하소서.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당신 손이 저를 이끌게 하소서.
의로움 때문에 모욕을 받으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 제가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주님의 것이 되게 하소서.
이 복된 삶이 제게는 참된 행복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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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9. 연중 제 4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을 모심으로써 행복하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한 주간 행복하셨습니까? 날이 많이 춥습니다. 마음만은 따뜻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행복에로 초대하십니다. 이 시간 참된 행복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행복에 행복을 더하시기 바랍니다.
‘로또 복권에 당첨 430억원, 건강과 바꿀 수만 있다면’이라는 제목의 뉴스가 있었습니다. 많은 돈을 얻는 행운을 쥐었지만, 건강을 잃었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았고, 기쁘지도 않았으며 감사의 마음을 지니지 못했습니다. “돈은 나에게 슬픔만 가져다주었다. 내 인생을 파괴했다.” 고 말한 뒤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많은 재물을 소유했다 할지라도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전주의 87세된 김소관 할머니는 시장에서 잡곡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십니다. 하루 벌이가 1만원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중에 3,000원을 꼬박꼬박 ‘자선남비’에 넣었다고 합니다. “늙은 나이지만 일을 해서 나보다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게 행복”이랍니다.
많은 사람이 더 많은 소유와 지배를 통해서 행복을 찾습니다. 그러나 참된 행복은 거기서 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행복은 어디서 옵니까? 참된 행복은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데서 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은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라고 말합니다. “행복한 사람이란 하느님에 대한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신 사람입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하느님을 모시고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행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행복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인간 내면의 욕구 충족 상태, 만족한 삶입니다. 우리는 소유, 지배, 사랑 중 어느 것에 만족을 추구해야 할까요? 사랑입니다.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덟가지 행복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간략하게 묵상해 보겠습니다.
1.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 이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희망을 두기에 그분께 온전히 의탁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고, 베푸는 마음입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도 또 주고 싶은데 더 줄 것이 없어 안타까워하는 마음의 상태가 마음의 가난입니다.
여러분은 가족을 위해 또 이웃을 위해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 경제적인 능력도 없고 건강도 없어서 줄 것이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건강이 없다고 하더라도 줄 수 있습니다. 기도로 도움을 줄 수도 있습니다. 봉쇄수도원에서 일생 기도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사느냐가 문제입니다. 줄 것이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남의 도움 없이 살 만큼 큰 부자도 없습니다. 마지막 장례를 스스로 치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2.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고 했습니다.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하고 공명할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 그 이면에 있는 사랑을 생각하며 나도 그러한 마음으로 이웃의 아픔에 동참할 줄 아는 사람, 그리고 자기의 죄에 애통해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3. 온유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온유는 흔들림이 없는 상태입니다. 단순한 부드러움이나 따뜻함이 아닙니다. 어떤 처지나 상황 여건에도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하느님 편에서 평상심을 유지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그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얘기를 해보면 금방 압니다. 마음 안에 주님을 제대로 모시면, 외풍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누구누구 때문에 상처받지 않습니다.
성당에도 그룹을 형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위 ‘파’가 있습니다. 바오로파 아폴로파, 대파, 실파, 양파, 쪽파....있듯이 신부파, 수녀파, 회장파...사람을 따라가며 끼리끼리 뭉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주님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4. 의로움에 주린 사람은 행복합니다. 진선미를 갈망하며 천상 것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순명하고, 금식을 통해 마음을 비우며 욕망의 절제로 재물을 이웃과 나누는 실천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성경의 요셉의 삶에서 드러납니다. 약혼자 마리아의 임신 소식을 듣고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당시의 법대로 하면 마리아는 돌팔매질로 죽음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를 사랑으로 배려했습니다. 그리고 천사의 메시지를 따라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였습니다.
5. 자비로운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자비는 사랑의 구체적 표현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잘못이 무엇이든 기꺼이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도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고 이웃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용서하는 행위야말로 자비로움의 절정입니다. 요한사도는 말로나 혀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6.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완전한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고 하셨습니다. 거룩함을 지니고 홀로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며 혹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곧 용서를 청하는 이는 행복합니다. 죄에 물들지 않은 맑은 영혼을 지닌 사람은 행복합니다.
7.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평화는 단순히 평온한 상태를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릅니다. 많은 순교성인 성녀들은 박해와 죽음 앞에서 마음이 시끄러웠을까요? 혼란스러웠을까요? 그들은 평화로웠습니다. 목숨을 잃는 것이 두렵지 않고 오히려 주님을 증거하는 도구로 쓰임 받는다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차지했기 때문에 육신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평화를 누렸습니다. 내 마음의 욕망과 무질서, 불의와 미움을 거두고 화해를 전해주며 갈라진 사람을 맺어주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8.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진리를 증거 하다 보면 기득권의 반대에 부딪히고 미움을 사게 됩니다. 그러나 끝까지 진리 안에 머물게 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지금의 순간을 모면하려고 하면 더 큰 것을 놓치게 됩니다.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며 끝까지 참고 기다리며 주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선한 일을 하는데 불구하고 시기와 질투, 모욕과 중상이 있기 마련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 때문에 모욕을 당하는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기뻐하였습니다(사도5,41). 어떠한 처지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의로움은 단순히 정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의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입니다. 그러므로 정의는 사랑을 포용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정의를 포용합니다. 따라서 사랑 안에서 나오지 않은 정의는 진리가 아닙니다.
저에게는 조카들이 있는데 큰 조카는 서울의 유명대학에서 공부하였습니다. 그가 학과 대표직을 맡고 정의구현에 앞장섰던 때가 있습니다. 그는 데모하는 학생들의 앞에 섰습니다. 그것도 몽둥이를 들고. 어깨도 다쳤습니다. 결국은 유치장 신세를 져야 했고 저는 삼촌으로서 그에게 반성문을 요구하고 그것을 가지고 판사를 찾아가 사정하며 제가 교육을 잘하겠다고 해서 옥살이를 면했습니다.
정의를 부르짖으며 몽둥이를 들었으니 폭력이지, 어찌 정의구현을 하겠습니까? 의로운 방법으로 의로움을 구해야지 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어찌 의로움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의로움은 사랑 안에서 나온 상대를 위한 배려입니다. 사랑은 정의를 포용하지만, 정의는 사랑을 포용하지 못합니다.
우리 삶의 여정에 알게 모르게 많은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기치 않은 시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더 주님께 매달리고 의탁하여 행복을 지켜야 합니다. 역경 속에서도 주님을 차지하면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하늘의 큰 상이 우리의 것입니다. 한 주간 예수님을 마음에 모심으로써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5,12). “항상 행복하십시오.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정진석 추기경).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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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9. 연중 제 4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엠이 부부모임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입니까? 그에 대한 나의 느낌은?’이라는 주제로 나눔을 하였습니다. 함께 했을 때의 기억들을 많이 나누었습니다. 여행을 갔을 때, 식구들과 한 침대에서 누워있을 때, 손자가 태어났을 때와 같이 작고 소소한 것들에서 행복을 느꼈다고 하였습니다. 예전에 ‘행복과 행운’의 차이를 읽었습니다. 4잎 클로버는 행운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행운은 쉽게 찾지 못하고, 얻을 수 없습니다. 마치 복권을 사지만 당첨될 확률이 적은 것과 같습니다. 3잎 클로버는 행복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돌아보면 행복은 쉽게 찾을 수 있고, 얻을 수 있습니다. 마치 숨을 쉴 수 있는 공기와 같고, 목마르면 마실 수 있는 물과 같습니다. 저 자신을 돌아보면 ‘행운’은 많지 않았습니다. 외모와 체격이 크게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선천적으로 운동신경이 발달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술적인 감각도 별로 없습니다. 디지털 시대에 거의 문맹과 같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행복’은 늘 가까이 있었습니다. 4년 전에 이곳 뉴욕으로 왔는데 다정한 친구처럼 따뜻하게 대해주는 동료사제들이 있습니다. 새해 첫날에는 은경축을 맞이하는 신부님과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갈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무덤 성당과 부활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축복도 있었습니다. 매일 새벽에 조배하러 가니 수사님이 배려해 주었습니다. 이 또한 행복입니다. 매주 부르클린 한인 공동체에 가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기쁨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3달만 도와주려고 했는데 어느덧 3년이 되었습니다. 도움을 주려고 했는데, 지금은 제가 더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팬데믹의 긴 터널을 교우들과 함께 나올 수 있었습니다. 물고기는 물속에 있을 때 자유롭듯이, 사제는 신자들과 함께 어울려 미사를 봉헌할 때가 행복합니다. 언제나 자리를 지켜주는 직원이 있어서 든든합니다. 매주 새로운 지면을 만드는 것은 때로 전쟁과 같습니다. 직원들이 함께 하기에 부족한 제가 잘 지낼 수 있습니다.
행복은 무엇인가를 채워서는 얻을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의 욕망은 마치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채우면 채울수록 갈증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참된 행복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아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행복한 것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닮은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살아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루가 복음 19장을 보면 예리코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께서 세리 자캐오를 만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리 자캐오는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런데도 늘 허전하였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캐오를 무시하였고 돈만 아는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캐오를 부르셨고, 자캐오의 집에서 하루 지내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던 자캐오는 자신의 가진 재물의 반을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합니다. 또 자신이 부당하게 이득을 취한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아 주겠다고 합니다. 자캐오가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무도 세리 자캐오를 기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 때문에 변화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자캐오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가난하고 소외되어 있고 불쌍한 이들을 보살펴 주고 도와주며 그들과 하나 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그들과 우리의 마음을 함께 나누는 것은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의무이며, 그와 같은 삶은 바로 하느님 나라에로 우리를 초대한다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참된 행복을 얻는 것은 지위, 능력, 가문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지혜이십니다. 그분 덕택으로 우리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고, 해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신앙을 통해서 무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자캐오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참된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참된 행복에 이르는 길을 알게 되었습니다. 길을 가다 우리가 원하는 목적지의 이정표를 보면 안심하고 갈 수 있듯이, 우리들의 이정표인 주님을 바라보며 행복의 길, 하느님을 만나는 길을 충실하게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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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9. 연중 제 4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많은 사람이 하는 것이지만 저는 전혀 하지 못하는 것이 꽤 많습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저이지만 스키도 또 골프도 이제까지 해 본 적이 없어서 전혀 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을 부러워할까요? 굳이 하고 싶은 마음이 없기에 부러움도 없고, 못한다고 해서 부끄럽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전혀 하지 못하지만, 꼭 해 보고 싶은 것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토바이 타는 것입니다.
특히 쿠바 혁명가인 체 게바라가 젊은 날 오토바이를 타고 남미 대륙을 여행했었다는 글을 읽으며 나도 한번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만 가지고 있었지, 오토바이 위에는 단 한 번도 올라가 본 적도 없습니다.
전에 살았던 강화도에서는 종종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들의 행렬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들을 보며 어렸을 때의 소망이 떠오르면서 부럽기도 하면서 또 그들이 너무나 멋져 보였습니다. 하지만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그들과 나란히 신호대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실망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똑같은 차림새였습니다. 오토바이 타는 한 사람을 볼 때는 멋있었는데, 똑같은 차림새에 개성이 전혀 보이지 않아 실망한 것이지요.
남만큼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남을 쫓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멋져 보이지 않습니다. 그보다 자기 개성을 드러내며 자기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이 훨씬 더 멋져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를 모두 다르게 창조하신 하느님 뜻에 어떤 삶이 맞을지를 묵상해 보십시오. 어렵고 힘들어도 나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남들과 비교하면서 그들처럼 사는 삶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남들만큼은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삶 역시 옳지 않습니다. 자기 고유의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만이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의 삶, 행복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행복 선언’을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굶주리는 사람, 주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행복해 보이지 않지만, 주님만을 바라보며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과 함께하며 자기만의 삶을 살고 있기에 행복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들만이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고 하십니다. 특히 주님께서는 세상의 관점에서 벗어나,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과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1코린 1,27 참조). 그렇다면 우리 역시 세상의 관점이 아닌 주님의 관점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은 해외 원조 주일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향한 관심을 기울이는 날입니다. 자기만을 생각하는 세상의 관점에서 벗어나, 가난한 이들과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우리가 될 것을 다짐하고 또 할 수 있는 것을 실천하는 날입니다. 과연 주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를 다시금 묵상하면서 사랑하며 사는 나만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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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연민은 사치가 아니라 필수다. 사랑과 연민이 없으면 인류는 생존할 수 없다(달라이 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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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9. 연중 제 4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행복한 성인들
“찾으라, 회개하라, 행복하라”
-선택, 훈련, 습관-
새벽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제 첫시집 ‘하늘과 산’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러니까 1997년 손수 제본하여 만든 것이니 26년전 작품입니다. 모두 제가 지금도 아끼는 시이고 그중 ‘하늘과 산’은 자주 인용했고 지금도 여전히 좋아하는 시입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2
불암산 기슭, 요셉 수도원에 정주하기 35년 동안 가장 많이, 하루에도 수없이 바라본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과 하늘입니다. 바로 하늘과 불암산의 관계를 주님과 나의 관계로 빗댄 시입니다. 정말 날로 주님과의 관계, 형제들과의 관계가 깊어졌으면 소원이겠습니다.
혼자서는 못삽니다. 혼자의 구원이 아니라 더불어의 구원입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있습니다. 오늘은 연중 제4주일이자 해외 원조 주일입니다. 한국천주교회는 2003년부터 매해 1월 마지막 주일을 해외 원조 주일로 정해 이날 특별헌금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세계 여러 나라들을 돕는데 쓰고 있습니다. 이 또한 더불어 삶의 사랑 실천입니다.
어제 오랜만에 9명의 소규모 젊은 남녀들의 피정팀에게 ‘명상기도’방법을 가르치고 실습도 했습니다. 모두가 신자인줄 알았는데 후에 알고보니 천주교, 개신교, 원불교등 다양한 구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강의로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명상기도 방법을 택하여 청했던 것 같습니다. 좌우간 이분들에게 강조한 것도 영성생활에서 선택과 훈련, 습관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참 좋은 선택을 하셨으니 아름다운 수도원에 피정을 온 것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행복도 선택입니다. 좋은 선택 또한 은총입니다. 명상기도 참 좋은 선택입니다. 선택에 이어 한결같은 훈련입니다. 도대체 수행생활에서 훈련아닌 것이 없습니다. 명상기도를 부단한 훈련하여 습관화하십시오. 성격이 바뀌고 운명이 바뀝니다. 부정적 비관적 수동적 인생관에서 긍정적 낙관적 적극적 인생관으로 바뀝니다.”
요지의 내용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오늘 강론 주제는 참행복입니다. 참행복 역시 은총에 이어 우리의 선택과 훈련, 습관에 달렸습니다. 세 구체적 방법을 나눕니다.
첫째, 찾으십시오.
무엇보다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삶의 궁극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중심이자 의미입니다. 주님과 나의 탐구는 함께 갑니다. 주님을 찾으며 주님과의 관계도 날로 깊어집니다. 이렇게 주님과의 관계가 우리 영적 삶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제1독서의 스바니야 예언자의 권고가 고맙습니다.
“주님을 찾아라. 그분의 법규를 실천하는, 이 땅의 모든 겸손한 이들아! 의로움을 찾아라. 겸손함을 찾아라. 그러면 주님의 분노의 날에, 너희가 화를 피할 수 있으리라.”
참으로 주님을 찾는 이들은 구체적으로 의로움을, 겸손함을 찾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주님을 찾는 이들은 의롭고 겸손합니다. 수도자를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라 정의합니다. 수도원은 하느님의 집이요, 수도자는 하느님을 찾는 하느님의 사람이라 합니다. 어찌 수도자뿐이겠습니까? 마음 깊이에서는 누구나 진리이신 하느님을 찾는 수도자입니다. 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 애송시 중 한연이 생각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緩慢)하게 또 격류(激流)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이 고백에서처럼 하루 이틀이 아닌 죽을 때까지 하루하루 날마다 하느님을 찾으며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사랑의 맑은 강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래야 방황하지 않습니다. 일일시호일, 늘 좋은 날에 늘 새로운 날입니다. 이래야 안주가 아닌 정주의 삶입니다. 주님을 찾는 일 역시 우선적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회개하십시오.
회개 또한 참 좋은 날마다의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이 살아계시기에 회개입니다. 하느님 거울에 날 들여다 보는 회개입니다. 회개를 통해 참나의 발견이요 제자리에서 제대로 제정신으로 살 수 있습니다. 회개에 따른 참 겸손입니다. 자기를 아는 겸손이요 지혜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겸손한 고백은 그대로 회개의 열매입니다. 회개를 통한 이런 깨달음이 겸손이요 이런 겸손이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다음의 고백은 얼마나 겸손하며 삶의 진실을 직시하고 있는지요! 꼭 저를 두고 하는 말씀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역설의 진리를 통해 일하십니다. 신의 한 수는 이토록 오묘합니다. 굽은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듯이 참으로 보잘 것 없는 무명의 이들이 교회를, 수도원을, 세상을 지킵니다. 참으로 회개로 겸손한 이들만이 이렇게 일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셋째, 행복하십시오.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참행복의 비결을 보여주십니다. 죽을 때까지 끝없는 노력의 훈련을 요하는 결코 완성이 없는 미래로 활짝 열려 있는 수행의 참행복입니다. 바로 성인이 되는 길은 이 참행복의 길뿐입니다.
십계명은 너무 소극적입니다. 금령만 지키다 보며 거기서 끝나지 이웃과의 적극적 사랑의 관계는 맺을 수 없습니다. 모세의 한계입니다. 모세도 예수님의 이런 경지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모세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새삼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모세를 격하하자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진상을 제대로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십계명을 지켜서는 좋은 신자가 될수는 있어도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신자. 자비로운 신자, 온전한 신자가 되기는 불가능합니다. 결코 참행복도 없고 성인도 될 수 없습니다. 이웃에 열려 있는 삶이 아니라 자기 안에 닫혀진 이기적 삶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십계명을 전제로 하고 적극적 자기개방의 나눔과 사랑이 절대적이요, 바로 오늘 산상설교중 진복팔단 참행복이 의도하는 바입니다.
“1.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2.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3.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4.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5.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6.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7.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8.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이런 삶자체가 참행복이니 바로 하느님이 직접적 배경이, 보상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인도의 성자 간디, 불가의 성철 큰 스님은 물론 종파를 초월하여 대영성가들이 공감하며 극찬한 참행복의 내용들입니다. 영원히 하느님의 나라로 열려 있는, 완성이 없는 영원한 현재 진행형의 참행복입니다.
아무리 오르고 올라도 저 멀리 높이 있는 하늘처럼 느껴지는 참행복의 수행들입니다. 참으로 끝까지 한결같은 열정으로 참행복을 위해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이들이 성인입니다. 마지막 말씀이 우리의 분투의 노력에 불을 붙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자신의 성덕 점수가 어떻게 되는지 한번 계산해 보시기 바랍니다. 100점 만점에 20점은 기본으로 하고 8개 항목을 각자 10점 만점으로 계산해 보는 것입니다. 영원히 미완성의 참행복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이 참행복의 절정에 하느님 곁에 계신 예수님이요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 성인이 되는 유일한 참행복의 길이겠습니다.
참행복한 성인이 되고 싶습니까? 선택과 훈련, 그리고 습관화하는 분투의 노력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부단히 주님을 찾는, 부단히 회개하는, 부단히 참행복을 추구하는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화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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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9. 연중 제 4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당신은 행복합니다. 그리고 더욱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늘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기쁨과 희망, 치유와 위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그 위로의 정점을 말합니다.
지금은 아프고, 지치고, 힘들고, 괴롭지만 주님과 함께한다면 당신은 행복할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이라는 선물을 받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그 말씀을 경청하고 실천한다면 그대는 행복할 것입니다. 하늘에 그대의 상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누가 이 말씀을 바라지 않을까요? 어떤 누가 이 위로의 말씀을 마다할 수 있을까요?
모든 사람에게는 위로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지위가 높은 사람도, 아무리 부유한 사람이어도 위로와 격려는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위로와 격려는 삶의 희망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삶의 희망이 없다면 지위와 재산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대는 행복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대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행복할 것입니다. 그대가 하느님 말씀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지우개
“눈물로 가득 찬 설레는 이 가슴에,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세요. 사랑을 쓰다가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야 하니까….”
전영록 님의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의 한 부분입니다. 물론 이 노래의 주인공은 연필입니다. 그런데 저는 주인공이 지우개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연필로 썼다 하더라도 지우개가 없으면 다시금 새롭게 쓸 수 없을 테니까요.
우리 마음에도 지우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실수나 잘못을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쓰면 좋을 텐데요.
괜찮습니다. 우리는 오늘이라는 새로운 종이를 매일 선물 받으니까. 오늘 다시 써보세요. 하얀 종이에 새롭게 써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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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9. 연중 제 4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마음 안에 내가 있답니다>
마음 안에
내가 있답니다
탐욕이 없는
가난한 마음 안에
더불어 사는 하늘 나라가 있으니
하늘 나라를 사는 나 역시
가난한 마음 안에 있답니다
슬픈 이와 함께하는
슬퍼하는 마음 안에
따뜻한 위로가 깃드니
위로를 받는 나 역시
슬퍼하는 마음 안에 있답니다
작은이를 품는
온유한 마음 안에
어머니 품 같은 땅이 있으니
땅을 품는 나 역시
온유한 마음 안에 있답니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 안에
의로움이 차고 넘치니
의로움에 흡족한 나 역시
의로움을 갈망하는 마음 안에 있답니다
버려진 이를 보듬는
자비로운 마음 안에
살리는 자비가 있으니
자비를 입는 나 역시
자비로운 마음 안에 있답니다
위선을 씻어낸
깨끗한 마음 안에
선하신 하느님께서 계시니
하느님을 보는 나 역시
깨끗한 마음 안에 있답니다
차별과 배제를 거슬러
평화를 이루는 마음 안에
평화의 하느님께서 계시니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는 나 역시
평화를 이루는 마음 안에 있답니다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마음 안에
의로운 하늘 나라가 있으니
하늘 나라를 사는 나 역시
의로움으로 박해받는 마음 안에 있답니다
마음 안에
내가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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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9. 연중 제 4주일.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신약 성경에서 ‘행복하다’ 또는 ‘행복하여라’라는 표현과 함께 전해지는 말씀은 모두 행복 선언에 속합니다.
구약 성경에서도 이런 표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군중을 향하여 말씀하신 마태오 복음의 내용은 운문 형태로 전해지며 ‘참 행복’ 선언으로 불립니다.
문자로 기록하는 것이 쉽지 않아 대부분이 구전으로 전해지는 고대 사회에서 운문 형태는 기억을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참 행복 선언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였던 사람들에게 희망을 선물합니다.
복음서에서 참행복으로 불리는 본문은 두 가지입니다.
‘진복팔단’으로도 불리는 오늘 복음과 함께 루카 복음에서도 행복 선언을 찾을 수 있습니다(루카 6,20-23 참조).
두 행복 선언이 강조하는 점은 조금 다르지만 공통된 주제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굶주리고 (의로움에) 목마른 사람들과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마지막 주제는 공통적으로 행복 선언의 끝에 자리하면서 시대 배경을 잘 보여 줍니다.
행복 선언은 종말론적인 성격을 가집니다.
미래에 올 보상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하느님의 뜻을 찾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행복합니다.
그러므로 행복 선언은 위로의 말씀이면서 신앙인들을 향한 윤리적인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게 합니다.
만일 지금 그렇지 못하다면 현재의 모습을 바꾸어 가는 것도 신앙인들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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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9. 연중 제 4주일. cpbc TV. 매일미사.
해외 원조 주일 매일미사ㅣ정신철 요한 세례자 주교 집전
https://youtu.be/RZ407sFY-hU 50:22
cpbcTV가톨릭콘텐츠의모든것
2023. 1. 29.
정신철 요한 세례자 주교 (인천교구장 / 한국카리타스인터내셔널 이사장)
*** 주교님의 강론 16:18 ~ 25:22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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