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윤 칼럼(23-29)> 추상미술 선구자 김환기, 유영국, 이성자
4월 25일(화요일) 오후 서울에는 비가 약간 내렸다. 국립중앙박물관 정원에 모란(牡丹)은 활짝 피었고, 작약(芍藥)은 꽃 몽우리를 맺고 있었다. 오후 2시부터 중앙박물관 강당에서 2시간 동안 정하윤 박사(이화여대)의 <인물로 보는 한국미술 100년> 제4강 <김환기 유영국 이성자>을 내자와 함께 수강했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김환기(金煥基)는 1913년 2월 27일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도에서 출생하여 1974년 7월 25일 미국 뉴욕에서 별세했다. 김환기는 타고난 예술적 기질과 불굴의 도전정신으로 아방가르드(avant-garde, 전위 예술)와 추상미술(抽象美術, abstract art)의 선봉에 선 20세기 대한민국의 대표적이 화가이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김환기는 안좌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27년 서울의 중동중학교에 진학했다. 19세였던 1931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니시키시로중학교에 들어갔다. 1933년부터 1936년까지 니혼대학 미술부에서 공부하면서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에 참여했으며, 1937년 졸업 후 귀국했다. 귀국 후에도 1940년까지 계속해서 일본 최초의 추상미술 공모전이었던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작품을 출품하였다.
김환기는 1944년 김향안(본명 변동림)과 결혼했다. 변동림은 1916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경기여고를 졸업한 뒤 이화여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여성으로는 드물게 대학 교육까지 받은 엘리트였다. 변동림은 1937년 시인 이상(1910-1937)과 결혼했으나 남편이 일본에서 폐병으로 사망하여 짧은 결혼 생활을 마무리했다. 그 후 딸 셋을 둔 이혼남 김환기를 만나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했다.
변동림은 결혼 후 김환기의 성을 따라 김 씨로 바꾸고, 김환기의 아호였던 향안(鄕岸)을 이름으로 사용해 ‘김향안’이 됐다. 김환기는 서울대학교 예술학부 미술과 교수(1946-1949), 홍익대학교 교수(1952-1956)와 학장(1959-63)을 역임했다.
김환기는 파리에서 머문 4년(1956-59년) 동안 새로운 미술, 세계를 향한 비전을 구하려면 먼저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근본에서 출발해야 함을 깨닫는다. 이를 위해 선택한 화제(畫題)인 고국산천과 쪽빛 하늘, 매화(梅花)가지 사이로 떠오른 둥근 달, 백자(白磁)의 선과 목가구의 면 구성을 서양화의 재료와 기법을 사용해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화면으로 만들어갔다. 이는 서양화법을 차용하면서도 자신의 본질인 정체성을 지키려는 의지의 반영이었다.
김환기는 1959년 파리에서 돌아와 1963년 상파울로비엔날레에 참가하기까지 서정적인 추상화면으로 한국의 교유한 정서 표현에 주력하였다. 1963년 뉴욕에 도착한 이후 그는 다양한 재료와 기법실험들로 더욱 풍부해진 화면구성과 창작행로를 보여준다. 현대예술의 새로운 중심지 뉴욕은 김환기 예술세계의 완성의 장이었다. 마침내 도달한 점·선·면의 순수한 조형요소로 채워진 밀도 높은 추상화면은 서정성을 심화시켰다.
김환기는 1963년 상파올로비엔날레 한국 대표로 참가하여 명예상을 수상했으며 1974년까지 뉴욕에서 활동하다가 뇌졸중으로 별세했다. 예술적 파트너였던 김환기의 죽음은 김향안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남편의 죽음 이후 그림을 시작한 그녀는 서양화가로 화단에 등단했으며, 자신의 작품들로 1977년과 1988년에 뉴욕과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김환기는 1970년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작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 대상을 수상했다. 김환기는 전통과 현대, 한국성과 국제성을 한 화면에 조화시키고자 평생 노력했다.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그림을 딱 한 점만 꼽으려면 상당수 전문가들은 김환기가 무명천에 수없이 많은 점을 찍는 식으로 그린 전면점화(全面點畵) ‘우주’를 꼽는다. 국내 미술품 경매 최고가 기록(132억5천만원)도 전면점화가 갖고 있다.
1971년 작 ‘우주’는 김환기 예술세계의 정수를 보여주는 전면점화로, 유일하게 두 폭이 합쳐져 한 작물을 이룬 형태다. 두 작품을 합쳐 254x254cm(각 254x127cm)의 정사각형으로 김환기 작품 중 가장 큰 규모다. 작가는 유화 물감과 서예 붓을 함께 썼다. 수묵의 발목 기법과 같은 붓질로 무한한 깊이감과 웅장한 공간감을 더한 작품이다.
경상북도 울진군 두메산골에서 태어난 유영국(劉永國, 1916-2002)은 김환기(金煥基, 1913-1974)와 쌍벽을 이루는 우리나라 추상미술의 선구자이자 거장이다. 그는 “강렬한 색과 기하학적 구성의 울림으로 서사적(敍事的) 장대함과 서정적(抒情的) 아름다움을 표현했다”라고 평가받는다.
유영국은 1931년 경성제2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미술 교사인 사토 쿠니오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1935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문화학원 미술과에서 미술 공부를 이어나갔다. 2학년 때 제6회 독립미술협회전을 통해 데뷔한 뒤 일본의 전위적 추상미술단체 ‘자유미술가협회전’을 통해 작품을 발표했다.
1943년 귀국해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았다가, 1948년 서울대학교 응용미술학과 교수로 교단에 서기도 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고향인 울진으로 내려와 양조장을 운영하여 사업적으로 성공을 거둔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지속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1960년대에 들어서는 현대미술가연합 대표를 맡기도 했으며, 1966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활동했다. 예순둘에 시작된 병고는 뇌출혈 등으로 긴 투병 생활을 했으며, 2002년 서울에서 별세했다.
유영국은 산(山)을 주제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려 ‘산의 화가’로도 불린다. 산과 더불어 자연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도형으로 단순화해서 보여준다. 추상화된 형태에 강렬한 색채가 더해진 유영국의 산은 모든 관습과 허영을 걷어낸 산 그 자체의 본질과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유영국은 산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옮기는 작업에 전념했다.
이성자(李聖子, 1918-2009)는 전라남도 광양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의 창녕군수 부임으로 경상남도 창녕으로 이사하였다. 1935년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현 진주여고)를 졸업했으며, 1935년 일본 도쿄 짓센여자대학 가정과로 유학을 갔다. 1938년 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결혼을 했다. 1939년에 출산한 첫째 아들은 1940년에 사망했으며, 1941년 둘째 아들, 43년 셋째 아들 그리고 45년 넷째 아들을 출산했다. 1951년에 이혼했다.
이성자는 1951년 가족들과 헤어진 뒤 파리로 건너가서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하였다. 1953년 파리 그랑드 쇼미에르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회화와 조각을 배웠다. 이후 자연스럽게 추상미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56년 프랑스 오베르뉴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하였고, 1958년에는 파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1965년에 한국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김환기, 남관, 이용노와 함께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였다. 1992년 남프랑스의 투레트에 ‘은하수’라는 작업실을 지었고, 이곳에서 작품 활동을 하던 중 2009년에 타계하였다.
이성자는 구상과 추상이 어우러진 초장기 작업을 거쳐 1960년대 이후 생명의 근원, 음과 양의 세계 등을 기하학적인 상징물로 표현하였고, 말년에는 인간과 우주의 존재론적 성찰을 주제로 작업하였다. 이성자의 작품은 여성과 대지, 동양과 서양, 지구와 시간, 예술과 우주 등의 주제를 서정적이면서도 동양적인 이미지로 형상화하여 파리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1991년 프랑스 정부의 문화예술공로훈장을 받았으며, 2009년에는 프랑스의 BNP 파리바그룹이 후원하는 한불문화상과 대한민국 문화관광부의 문화훈장을 받았다. 2008년 고향 진주에 작품 300여 점이 기증되었고, 2011년 경남문화예술회관에서 작고 2주기를 맞아 유작전이 개최되었다.
<사진> (1) 김환기·김향안 부부(파리), 132억짜리 대작 ‘우주’, (2) 유영국과 작품, (3) 이성자와 작품, (4) 박물관 화원.
靑松 朴明潤 (서울대 保健學博士會 고문, AsiaN 논설위원), Facebook, 27 April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