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치하 어둠의 시대, 불씨를 되살리기 위한 움직임 1910년 경술국치로 국권을 상실하면서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만주, 연해주 등지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3.1 운동직후, 항일무장투쟁이 전무하던 시기에 이들 중에는 독립군을 조직하여 무장투쟁을 진행하려던 사람도 많았는데요, 그 결과 여러 독립군이 조직되게 됩니다. 이러한 시기에 청산리대첩의 주역으로 유명한 독립군인 북로군정서가 탄생하게 됩니다
서일의 중광단, 북로군정서로 이름을 바꿔 군단을 갖추다.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는 중국 만주 왕칭현(汪城縣)에서 조직된 독립군 부대입니다. 처음에는 1919년에 대종교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무장독립운동단체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출범하였는데 대종교 계열의 민족주의자들은 독립운동을 위한 조직인 중광단(重光團)을 조직, 이들을 중심으로 1919년 4월에 결성된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은 무장독립투쟁을 수행하기 위해 8월에 김좌진 등의 신민회(新民會) 계열의 민족주의자들과 힘을 합쳐 산하에 대한군정회(大韓軍政會)를 세우게 됩니다. 그 후,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는 10월에 하나로 통합해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로 개편되었는데, 12월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시로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명칭을 바꾸게 됩니다. 그런데 임시정부로부터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란 명칭을 받은 독립군부대도 있었기에, 이와 대비하여 대한군정서는 북로군정서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이로서 북로군정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산하 정식군단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죠.
북로군정서를 구성했던 쟁쟁한 인물들 북로군정서를 이끈 주요 간부들은 총재에 서일, 총사령관에 김좌진, 참모장에 이장녕, 사단장에 김규식, 여단장에 최해, 연대장 정훈, 연성대장 이범석, 길림분서고문 윤복영, 군기감독 양현 등으로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항일무장투쟁의 쟁쟁한 인물들 이었습니다. 또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생도들이 소대장 등의 지휘관으로 많이 합류하였는데요, 2013년 1월의 독립운동가 이민화 선생 역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서로군정서를 거쳐 북로군정서에 합류하였습니다. 북로군정서는 만주 왕칭현 일대의 삼림지대를 근거지로 그 곳에 8동의 병영을 지었습니다.독립군을 양성하여 무장투쟁의 기반을 다지다.북로군정서는 또한 자체적으로 독립군을 양성할 목적으로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신흥무관학교의 도움을 받아 , 북로군정서의 사령관인 김좌진 장군이 연성소장을 겸임하고, 교관 이범석 등과 함께 제2학도대 제2구대장을 맡은 이민화 등의 교관이 참여하여 청년들에게 6개월의 군사훈련을 실시합니다. 그리고 기초훈련을 마친 총 600명 가운데 300명이 다시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받는 등 체계적인 교육훈련을 실시하여 독립군을 양성합니다.1920년 8월에는 북로군정서의 총병력이 1,600명을 넘었고, 인근 주민과 국내 모금액으로 군자금을 마련하였습니다. 무기는 소총 1300정·권총 150정·기관총 7문 등으로 중무장했는데, 러시아 적백내전에 참여하였다가 철수하는 체코군으로부터 상당한 무기를 입수할 수 있었습니다.편제는 소·중·대대로 하고, 세력권 지역 내에 34개의 분국으로 구성된 치밀한 경신조직(警信組織)을 만들어 각 지역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한 연락 및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고, 군자금과 군수품을 조달하였습니다. 항일무장투쟁의 빛나는 업적 – 청산리대첩 일제는 이와 같이 독립군들이 점점 세력을 갖추게 된다는 소식을 알자마자 토벌을 위해 준비하고 있었고 이를 먼저 안 북로군정서는 산악지대로 옮겨 전투태세를 갖추게 됩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해 10월, 북로군정서는 대한독립군과 연계하여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의 수차례 전투에서에 싸워 승리하고, 일제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버렸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청산리 대첩’ 입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우리나라는 3.1운동과 더불어 독립운동에 대한 불씨를 제대로 살리게 됩니다.자유시참변, 너무나 허망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그 후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연해주로 이동하여 다른 10여 개 독립군 부대와 통합, 연해주에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합니다. 대한독립군단은 소련의 무장해제 요구에 반대한 김좌진 장군 등 일부 세력이 이탈하고, 1922년 자유시참변으로 와해되지만, 독립정신은 이후로도 이어져 만주에서 무장독립군을 다시 조직하는 시도가 이어지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 결성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광복군에 이르는 이후의 독립군은 충분한 인원을 확보하기 어려워서 본격적인 무장투쟁에 나서긴 힘들었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북로군정서는 서로군정서, 대한독립군 등 다른 만주의 독립군과 함께 일본군에 대항하고,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어 우리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그었던 것입니다.
첫댓글 북로군정서는 임시정부가 인정한 정예부대입니다
이범석장군의 우등불에도 백야장군과 본인이 주도 했다고 주장 학자들은 그책을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