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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기후 위기 시대의 자본론
사이토 고헤이, 김영현, 다다서재 2021
위 책에서 일부 발췌한 내용입니다. 자료 공유 측면도 있고 다시 생각해볼 내용도 있다고 여겨 올려둡니다.
기후 변화와 제국적 생활양식
노벨 경제학상의 죄
2018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예일대학교의 윌리엄 노드하우스는 기후 변화의 경제학을 전문 분야로 삼고 있다. 그런 인물이 노벨상을 수상했으니 기후 위기와 직면한 현대 사회에 바람직한 일이라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부 환경운동가들은 노드하우스의 수상을 강하게 비판했다. 왜 그랬을까? 비판하는 이들이 도마 위에 올린 것은 노드하우스가 1991년 발표한 논문이었다. 이 논문은 노드하우스가 노벨상을 받을 수 있게 해준 일련의 연구에 발단이 되었다.15
1991년은 냉전이 막 종결된 시기로, 세계화가 진행되어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급격히 증가하기 직전이었다. 당시 노드하우스는 누구보다 먼저 기후 변화 문제를 경제학에 끌어들였다. 그는 경제학자답게 탄소세 도입을 주창했고, 최적의 이산화탄소 삭감률을 정하기 위한 모델을 만들어내려고 했다.15
문제는 그가 이끌어낸 최적의 답이었다. 노드하우스는 말했다. 너무 높은 삭감률을 목표로 정하면 경제 성장이 둔화되고 만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그런데 노드하우스가 설정한 ‘균형’이란 너무나 경제 성장 쪽으로 치우친 것이었다. 노드하우스에 따르면 우리는 기후 변화를 지나치게 걱정하기보다 하던 대로 경제 성장을 계속하는 게 낫다. 경제가 성장하면 세상이 풍요로워지고 새로운 기술도 태어난다. 경제 성장을 계속해야 미래 세대가 고도의 기술을 이용해서 기후 변화에 대처할 수 있다. 경제 성장과 신기술 개발을 계속할 수 있으면 굳이 현재와 같은 수준의 자연환경을 미래 세대에게 남겨줄 필요가 없다. 노드하우스는 이렇게 주장했던 것이다.15-16
노드하우스가 제창한 이산화탄소 삭감률을 준수하면, 지구의 평균 기온은 2100년까지 무려 섭씨 3.5도나 올라가 버린다. 이 말은 경제학이 도출한 최적의 답은 ‘기후 변화에 실질적으로 아무런 대처도 하지 않는 것’이라는 뜻이다.16
2016년에 발효된 파리협정의 목표는 2100년의 기온이 산업혁명 이전과 비교해 2도 미만(가능하다면 1.5도 미만) 상승하도록 억제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과학자들은 파리협정의 2도 미만이라는 목표조차 대단히 위험하다고 경고한다.16
세계 전체의 GDP(국내총생산)에서 개발도상국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낮긴 하다. 또한 기온이 3.5도 상승하면 전 세계의 농업이 심각한 타격을 입을 텐데, 농업 역시 세계의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겨우’ 4퍼센트에 불과하다. ‘겨우 4퍼센트인데 괜찮지 않나? 아프리카와 아시아 사람들이야 피해를 입든 말든.’ 이런 발상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연구의 이면에 있는 것이다.16-17
환경경제학이 강조하는 것은 자연의 한계이자 자원의 희소성이다. 희소성과 한계를 고려하여 가장 적절한 분배를 계산하는 것이 경제학의 특기이다. 그래서 환경경제학이 도출해낸 최적의 답은 자연과 사회에 ‘윈-윈’인 해결책이라고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그 대가로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는 느슨한 기후 변화 대책이 정당화되고 있다.17
돌이킬 수 없는 지점
이쯤에서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기후 위기는 2050년 전후에 서서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위기는 이미 시작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100년에 한 번꼴’이라고 할 만한 이상 현상이 매년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다. 비가역적인 변화가 급격하게 일어나 더 이상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지점이 이미 코앞까지 닥쳐왔다.18
2020년 6월에는 시베리아의 기온이 38도까지 올랐다. 북극권 사상 최고 기온일 가능성이 있다. 영구동토가 녹으면 메탄가스가 대량으로 방출되어 기후 변화가 더욱 빠르게 진행된다. 영구동토에서 수은이 유출되거나 탄저균 같은 세균과 바이러스가 퍼져 나갈 위험성도 있다. 북극곰 역시 둥지를 잃을 것이다.18-19
파국을 피하기 위해서 과학자들은 이렇게 요구한다. 2100년의 평균 기온이 산업혁명 전과 비교해 1.5도 미만 상승하도록 억눌러야 한다고 말이다. 이미 산업혁명 전과 비교해 기온이 1도 상승했으니 1.5도 미만으로 억제하려면 지금 당장 행동에 나서야 한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2030년까지는 절반 가까이 줄이고, 2050년까지 순배출량(총배출량-총흡수량)을 0으로 해야 한다.20
지구온난화의 피해 예측
기온이 급격하게 상승하면 누구도 무사할 수 없다. 기온이 2도 상승하기만 해도 바닷속의 산호가 전멸하며 어업에 큰 피해가 일어난다. 여름의 폭염이 극심해져서 농작물도 막대한 영향을 받는다. 매년 각지에 깊은 흉터를 남기는 태풍 역시 한층 더 거대해질 것이다. 호우 피해도 커질 것이다. 남극의 빙하가 녹아서 해수면이 상승하는 것 역시 심각한 위기를 초래한다. 세계 규모로 예측해보면 억 단위의 사람들이 현재 거주지에서 이주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인류에게 필요한 식량 공급이 불가능해진다. 경제적 손실이 연간 27조 달러에 이른다는 계산도 있다. 이런 피해가 계속되는 것이다.21-22
대가속 시대
당연하지만 기후 변화에는 각국의 책임이 크다. 일본만 해도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세계 5위다. 이산화탄소 배출량 상위 5개국이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0퍼센트에 가깝다. 기후 변화가 후대에 미칠 영향이 얼마나 클지 고려하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무관심하게 있어서는 안 된다. 지금이야말로 ‘커다란 변화’를 추구하며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이 책이 최종적으로 말하고 싶은 ‘커다란 변화’란 자본주의 시스템 그 자체에 도전하는 것이다.22
다만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요구를 서둘러 외치기에 앞서 일단 기후 변화라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환경 위기의 원인을 똑바로 짚고 넘어가야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 활동이 급성장하며 그에 따라 환경 부하가 비약적으로 늘어난 시기를 ‘대가속 시대great acceleration’라고 부른다. 환경 부하의 가속은 냉전 체제가 무너진 후 더욱 빨라졌다. 그 이유를 밝히려면 우선 자본주의의 세계화와 환경 위기의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23
글로벌 사우스에서 반복되는 인재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는 자본주의의 세계화로 인해 피해를 입고 있는 지역과 그곳의 주민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이다. 사실 글로벌 사우스가 끌어안고 있는 문제들은 예전부터 ‘남북문제North-South Problem’라고 불려왔다. 자본주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선진국의 풍요로운 생활 이면에서는 남북문제를 포함하여 수많은 비극이 벌어졌다. 이른바 자본주의의 모순이 글로벌 사우스에 응축된 것이다.25
최근의 주요 사건을 예로 들면, 영국의 에너지 기업 BP사가 일으킨 멕시코만 원유 유출 사고, 다국적 농업 기업들이 난개발을 벌인 아마존 열대우림의 화재, 상선미쓰이가 운항하는 화물선이 모리셔스 앞바다에서 일으킨 중유 유출 사고 등 얼마든지 꼽을 수 있다.25
이런 사고들이 단순히 ‘불운한’ 일들일까? 아니, 그렇지 않다. 전문가, 노동자, 일대 주민들이 이미 수차례 사고 위험을 경고했었다. 그럼에도 정부와 기업은 경비 절감을 우선하여 유효한 대책을 세우지 않은 채 방치하기만 했다. 일어나리라 예견되었던 ‘인재’인 것이다.26
하지만 이 ‘인재’에는 우리 ‘선진국 사람들’도 분명히 가담해왔다. 자동차에 쓰이는 철, 가솔린, 옷을 만드는 섬유, 저녁 식탁의 소고기 등이 모두 그 지구 반대편에서 우리에게 온 것들이다. 글로벌 사우스에서 노동력을 착취하고 천연자원을 수탈하지 않으면 우리의 풍요로운 생활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26
희생에 기초한 제국적 생활양식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브란트와 마르쿠스 비센은 글로벌 사우스에서 자원과 에너지를 수탈함으로써 성립되는 선진국의 라이프 스타일을 ‘제국적 생활양식imperiale Lebensweise'이라고 불렀다. 제국적 생활양식이란 간단히 말해 글로벌 노스Global North의 대량 생산·대량 소비 사회를 가리키는 것이다. 제국적 생활양식은 선진국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풍요로운 생활을 실현해주기 때문에 보통 바람직하고 매력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글로벌 사우스의 사회집단과 지역에서 벌어지는 수탈, 나아가 우리가 누리는 풍요로운 생활의 대가를 글로벌 사우스에 떠넘기는 구조가 존재한다.27
문제는 수탈과 대가의 전가 없이는 제국적 생활양식이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글로벌 사우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 조건이 악화되는 것은 자본주의의 전제 조건이며, 남북 사이의 지배종속 관계는 예외적 사태가 아니라 ‘평상시 상태’인 것이다.27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우리 생활에 깊숙이 자리 잡은 패스트 패션의 옷을 만드는 이들은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는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이다. 2013년, 5개의 봉제공장이 입주해 있던 방글라데시의 빌딩 ‘라나 플라자’가 붕괴되어 1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방글라데시에서 생산되는 옷들의 원료인 목화를 재배하는 이들은 40도가 넘는 폭염 속에서 작업하는 인도의 가난한 농민들이다.27-28
비극은 제국적 생활양식의 생산과 소비에 기대고 있는 글로벌 사우스 역시 글로벌 자본주의의 구조적 이유 때문에 ‘평상시 상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방글라데시의 라나 플라자에 있던 봉제공장에서도 사고 전날 노동자들이 벽과 기둥에서 이상 징후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무시당했다. 인도의 농민들도 제초제가 인체와 자연에 유해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알면서도 갈수록 시장에 확대되는 전 세계 패션 업계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생산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희생이 늘어날수록 대기업의 수익 역시 늘어난다. 이것이 자본의 논리다.28-29
희생을 보이지 않게 하는 외부화 사회
이처럼 신랄한 지적은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이들이 말해왔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간의 돈을 기부하는 정도로 이런 일을 금세 잊어버리고 만다. 글로벌 사우스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우리 일상에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29
사회학자 슈테판 레시니히는 대가를 먼 곳으로 전가하여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 선진국 사회의 ‘풍요’를 지키기 위해 불가결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이를 ‘외부화 사회’라고 부르며 비판했다. 선진국은 글로벌 사우스를 희생시키며 ‘풍요’를 누리고 있다. 그리고 ‘오늘뿐 아니라 내일도, 미래에도’ 선진국이 이런 특권적 지위를 유지하려 한다고 레세니히는 죄를 묻는다. ‘외부화 사회’는 끊임없이 외부성을 만들어내며 그곳에 온갖 부담을 떠넘기고 있다. 우리 사회는 그렇게 해야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이다.29
노동자도 지구 환경도 착취하라
윌러스틴의 견해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중심부’와 ‘주변부’로 구성된다. 글로벌 사우스라는 주변부에서 저렴한 노동력을 착취하고 그 생산물을 마구 사들임으로써 중심부는 더욱더 큰 이윤을 올려왔다. 윌러스틴은 노동력의 ‘부등가 교환’에 의해 선진국의 ‘과잉 발전’과 주변부 국가들의 ‘과소 발전’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했다.30
그런데 자본주의의 세계화가 지구 구석구석까지 미치면서 새로운 수탈의 대상이 될 ‘미개척지’가 소멸해버렸다. 지금껏 작동한 이윤 획득 과정이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수익률이 저하된 결과, 자본 축적과 경제 성장이 어려워졌고 ‘자본주의의 종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되었다.30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더 나아간 이야기다. 윌러스틴이 주로 다룬 착취 대상은 인간의 노동력인데, 그래서는 자본주의의 한쪽 면만 살펴본 것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본질적 측면, 그것은 지구 환경이다. 자본주의가 착취하는 대상은 주변부의 노동력뿐 아니라 지구 환경 전체인 것이다. 선진국은 자원, 에너지, 식량 모두 ‘부등가 교환’을 하면서 글로벌 사우스에서 앗아가고 있다. 인간을 자본 축적 도구로 사용하는 자본주의는 자연 역시 약탈할 대상으로 여긴다. 이것은 이 책의 기본적인 주장 중 하나다.31
외부화되는 환경 부하
윌러스틴의 이론을 확장해보면, 중심부는 주변부의 자원을 약탈하는 동시에 경제 발전의 이면에 숨은 대가와 부담 등을 주변부에 떠넘겨왔다고 정리할 수 있다.31
우리 식생활에서 숨은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팜유는 저렴할 뿐만 아니라 쉽사리 산화되지 않기에 가공식품, 과자, 패스트푸드 등에 널리 쓰이고 있다. 이런 팜유의 주생산지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다. 팜유의 원료인 기름야자의 재배 면적은 21세기 들어 배 이상 넓어졌는데, 열대우림을 난개발하면서 밀림이 급속하게 파괴되고 있다. 팜유 생산이 급증하며 미치는 영향은 열대우림의 생태계 파괴에 그치지 않는다. 대규모 개발은 열대우림의 자연에 의존해 생활하던 사람들에게도 파괴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열대우림을 기름야자 농장으로 개간한 결과 토양침식이 일어났고 비료와 농약 등이 하천으로 흘러들어 물고기가 줄어들었다. 하천의 물고기로 단백질을 섭취하던 이 지역 사람들은 물고기가 줄어든 탓에 전보다 돈이 필요해졌다. 그래서 돈을 목적으로 야생동물, 그중에서도 오랑우탄과 호랑이 등 멸종위기종의 불법 거래에 발을 들이기도 한다.31-32
이처럼 중심부 사람들이 누리는 저렴하고 편리한 생활의 이면에 주변부에서 이뤄지는 노동력 착취만 있는 것은 아니다. 주변부 자원의 약탈과 그에 따른 환경 부하의 전가 역시 빠뜨려서는 안 된다. 바로 그렇기에 환경 위기로 지구상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피해를 입으며 괴로워한다고는 할 수 없다. 식량, 에너지, 원료의 생산‧소비가 연결된 환경 부하는 불평등하게 분배되고 있다. ‘외부화 사회’라는 개념으로 선진국을 규탄한 레세니히에 따르면, ‘어딘가 먼 곳’의 사람과 자연환경에 부담을 전가하고 그 진정한 비용은 떼어먹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누리는 풍요로운 생활의 전제 조건이다.32
가해자 의식의 부정과 뒤로 미루기의 응보
제국적 생활양식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그러나 그 폭력성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환경 위기라는 말을 듣고 많은 이들이 면죄부를 구하듯 에코백을 ‘구입’할 것이다. 하지만 그 에코백조차 디자인이 바뀌며 차례차례 신제품이 발매되고, 광고에 끌린 사람들은 이미 에코백이 있음에도 새로운 것을 구입해버린다. 그리고 면죄부가 안겨주는 만족감 때문에 에코백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멀리 떨어진 나라의 사람과 자연이 폭력에 노출된다는 사실에는 점점 무관심해진다. 자본의 속임수인 그린 워시는 바로 이렇게 사람들을 구워삶고 있다.33
선진국 사람들이 단순히 환경 부하의 ‘전가’에 대해 ‘무지’할 것을 강제당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을 풍요롭게 해주는 제국적 생활양식을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며 점점 적극적으로 내면화하고 있다. 사람들은 스스로 무지한 상태에 있길 욕망하며, 진실과 마주하길 겁내게 되었다. ‘몰라’에서 ‘알고 싶지 않아’로 변해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은연중에 내 풍요로운 삶이 누군가의 희생 위에 있다는 걸 알고 있지 않을까?33
오늘날 독일을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한 명인 마르쿠스 가브리엘이 말했듯, 사람들은 제국적 생활양식의 불공정을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 보지 않으려 하는 것”일 뿐이다. 진실을 견딜 수 없기에 “우리가 그 불공정을 일으키는 원인이라는 걸 알면서도 현재의 질서가 유지되길 내심 바라는 것이다.” 이렇게 제국적 생활양식은 한층 단단해졌고, 위기 대응은 나중으로 밀렸다. 우리 한 명 한 명이 불공정에 가담해온 것이다. 하지만 그 응보가 마침내 기후 위기라는 재앙으로 중심부에도 다가오고 있다.34
‘네덜란드의 오류’−선진국은 친환경적이다?
네덜란드 같은 선진국의 생활은 지구에 큰 부담을 지우고 있다. 그럼에도 이런 나라들의 대기오염과 수질오염은 비교적 심하지 않다. 반면 개발도상국은 대기오염, 수질오염, 쓰레기 처리 등 수많은 환경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사람들이 검소한 생활을 하는데도 말이다. 선진국의 환경오염이 개선된 것은 단순히 기술 발전에 의한 결과가 아니며, 자원 채굴과 쓰레기 처리 등 경제 발전에 따라오게 마련인 부정적 영향의 적지 않은 부분을 글로벌 사우스라는 외부로 떠넘긴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국제적인 전가를 무시한 채 선진국이 경제 성장과 기술 발전으로 환경 문제를 해결했다고 믿는 것이 바로 ‘네덜란드의 오류’다.35
외부를 모두 소진한 ‘인신세’
인류의 경제 활동이 전 지구를 뒤덮은 ‘인신세’란, 수탈과 전가를 하기 위한 ‘외부가 모두 소진된 시대’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간 자본은 석유, 토양 양분, 희소금속 등 쓸모가 있는 것이라면 죄다 쥐어짜왔다. 이런 ‘채굴주의’extractivism'는 지구에 큰 부담을 지울 수밖에 없다. 자본이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필요한 ‘저렴한 노동력’이라는 미개척지가 더 이상 없듯이, 채굴과 전가를 위해 필요한 ‘저렴한 자연’이라는 외부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35-36
이런 흐름에는 자본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한다. 자본은 무한한 가치 증식을 목표하지만 지구는 유한하기 때문이다. 외부를 모두 소진하면 지금껏 해왔던 방식이 통하지 않게 된다. 위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신세의 위기’의 본질이다.36
냉전 종결 이후 무의미하게 버린 시간
경제학자 케네스 볼딩은 일찍이 “유한한 세상에서 지수함수 같은 성장이 영원히 계속되리라 믿는 이는 정신 나간 사람이거나 경제학자, 둘 중 하나다.”라고 한 바 있다. 그로부터 반세기 넘게 시간이 흘러 환경 위기가 심각해졌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경제 성장만 좇으며 지구를 파괴하고 있다. 경제학자의 사고방식이 우리 일상에 그토록 깊게 뿌리를 내린 것이다. 우리는 “정신 나간 사람”일지도 모른다.36-37
어른과 달리 아이들은 이성을 유지하고 있다. 어른들이 은폐한 기후 변화 대책의 위선을 파헤친 사람은 바로 스웨덴 환경운동가 크레타 툰베리다. ‘학교 파업’으로 유명해진 크레타 툰베리는 고등학생이던 15세 때, 정치가들이 인기를 끌기 위해 ‘환경 친화적이며 영원히 계속되는 경제 성장만 말한다’고 엄중하게 비판했다.37
크레타 툰베리는 자본주의가 경제 성장을 우선하는 이상 기후변화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자본주의는 냉전 체제가 무너진 후 세계화와 금융시장의 규제 완화 덕에 생겨난 돈벌이 기회를 좇는 데 정신이 팔려서 기후 변화 대책을 세울 수 있었던 귀중한 30년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냈다.37
잠시 역사를 돌이켜보자. 1988년, NASA(미국항공우주국)의 연구자였던 제임스 핸슨은 “99퍼센트 확률로” 기후 변화가 인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미국 의회에서 경고했다. 게다가 그해에는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가 UNEP(유엔환경계획)와 WMO(세계기상기구)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 무렵에는 기후 변화 대책을 위한 국제협정이 체결될 희망이 있었다. 만약 그때부터 대책을 세우기 시작했다면,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매년 약 3퍼센트씩 천천히 줄이는 방식으로 기후 변화 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38
핸슨의 경고는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그 직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으며 나아가 소련이 붕괴하면서 미국형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를 뒤덮었기 때문이다. 구舊 공산권의 저렴한 노동력과 시장을 눈독 들인 자본주의는 새로운 미개척지를 향해 진격했다. 경제 활동이 점점 확대되면서 자원의 소비도 한층 가속했다. 인류가 지금껏 사용한 화석연료 중 약 절반이 1989년 냉전 종결 후에 소모되었을 정도다.38
크레타 툰베리가 그토록 격렬하게 어른들을 비판한 이유는 눈앞의 이익만 좇느라 귀중한 기회를 날려버린 무책임함에 분노했기 때문이다. “당신들이 과학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은 지금까지의 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 해결책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해결책은 더 이상 없다. 당신들, 어른들이 행동하지 않고 시간을 버렸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악화된 이상 지금의 시스템으로는 해결책이 나올 수 없으니 “시스템 그 자체를 바꿔야 한다”. 아이들의 주장에 부응하려면 우리 어른들은 우선 현재 시스템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다음 시스템을 준비해야 한다. 당연하지만, 크레타 툰베리가 대책 없는 시스템이라 한 것은 자본주의를 가리킨다.39-40
마르크스, 환경 위기를 예언하다
자본주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제 와서 국가와 대기업이 충분한 규모의 기후 변화 대책을 세울 것이라는 예상은 쉬이 들지 않는다. 그간 자본주의가 제공해온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 수탈과 부하의 외부화‧전가 같은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모순을 먼 곳으로 떠넘기고, 문제 해결을 나중으로 미루기만 한 것이다.40-41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자본주의는 내부의 모순을 다른 곳으로 전가하여 보이지 않게 한다. 그 전가로 인해 모순이 더욱 심각해지는 참상이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자본이 시도하는 전가는 최종적으로 파탄에 이른다. 이 결과가 자본에 있어 극복할 수 없는 한계가 될 것이라고 마르크스는 생각했던 것이다.41
기술적 전가−생태계 교란
첫 번째 전가 방법은 환경 위기를 기술 발전으로 뛰어넘겠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토양의 양분이 고갈되어 피폐해지는 농업의 문제를 다룬 바 있다. 농업이 지속 가능하려면 토양 양분이 순환해야 한다는 뜻이다. 자본주의가 발전하여 도시와 농촌 사이에 분업이 진행되면서, 도시에서 소비된 곡물에 흡수되었던 양분은 더 이상 원래의 토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도시 노동자들이 섭취하고 소화한 다음에는 수세식 화장실을 통해 하천으로 흘러갔기 때문이다.42
문제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이뤄지는 농업 경영에도 있었다. 단기적인 목표만 바라보는 농장 경영자는 지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땅을 묵히기보다 돈벌이를 위해 매년 경작을 하길 원한다. 땅을 기름지게 하는 관개시설에도 최소한만 투자한다. 자본주의에서는 단기적인 이윤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토양의 양분 순환에 ‘균열’이 생기고, 토양은 양분을 돌려받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빼앗기며 피폐해진다.42-43
이처럼 단기 이윤을 위해 지속 가능성을 포기하는 불합리한 농업 경영을 리비히는 ‘약탈농업’이라고 부르며 비판했다. 리비히가 경고한 대로 토양 피폐에 의한 문명의 위기는 찾아오지 않았다. 20세기 초반에 ‘하버·보수법’이라는 암모니아 합성법이 개발되면서 화학비료가 저렴하게 대량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하버·보슈법’이 개발되었다고 해서 순환의 ‘균열’이 회복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전가’되었을 뿐이라는 것이 핵심이다.43
현대 농업은 토양에 본래 있었던 양분 대신 또 다른 한정된 자원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암모니아 제조 과정에서도 이산화탄소가 대량 발생한다. 이것이 기술적 전가의 본질적인 모순이다. 게다가 막대한 화학비료를 사용하는 농업이 발전하면서 질소 화합물의 유출에 따른 지하수의 질산 오염과 부영양화에 의한 적조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한다. 식수와 어업까지 영향을 받는 것이다. 기술을 이용한 전가는 한 곳의 토지를 피폐하게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대규모 환경문제를 일으키기에 이르렀다.43-44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대량의 화학비료를 사용함으로써 토양 생태계에도 교란이 일어나고 있다. 흙이 수분을 보존하는 힘인 보수력이 저하되고, 식물과 동물 사이에 전염병이 유행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시장에서는 벌레 먹지 않아 깨끗하고 크기가 균일하며 저렴한 채소를 원한다. 그 때문에 현대 농업에서는 갈수록 화학비료, 농약, 항생물질이 불가결해지고 있다. 물론 농업에 쓰인 화학물질은 자연환경으로 흘러들어 생태계에 교란을 일으킨다.44
이런 상황에서도 생태계 교란에 원인을 제공한 기업은 자신들의 책임이라는 인과관계를 증명할 수 없다고 버티며 보상하지 않는다. 환경문제는 보상한다고 해도 원래대로 회복되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말이다. 기술의 전가는 환경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기술이 남용되면서 모순이 더욱 심각해질 뿐이다.44
공간적 전가−외부화와 생태제국주의
부하를 떠넘기는 두 번째 방법은 공간적 전가다. 마르크스는 이에 대해서도 토양의 문제를 중심으로 고찰했다. 아직 하버·보슈법이 개발되지 않았던 마르크스의 시대에 대체비료로 주목받았던 것은 구아노guano였다. 남아메리카 페루의 해안에는 무척 많은 바닷새가 서식했는데, 구아노란 그 바닷새들의 배설물이 퇴적되어 석화한 것이다. 페루에는 구아노가 마치 섬처럼 쌓여 있었다.45
구아노는 토양의 피폐를 해결해줄 구세주로 일약 스타가 되었고, 대량의 구아노가 남아메리카에서 미국과 유럽으로 수출되기 시작했다. 구아노 덕분에 영국과 미국의 지력이 유지되었고 도시의 노동자들에게 식량이 공급된 것이다.45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도 ‘균열’은 회복되지 않았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동원되어 구아노를 일방적으로 앗아간 것이다. 그 결과는 원주민을 향한 폭력적인 억압, 무자비하게 착취당한 9만여명의 중국인 쿨리, 그리고 바닷새의 격감에 따른 구아노의 급속한 고갈이었다. 심지어 고갈되는 자원을 둘러싸고 구아노 전쟁(1864~66년) 초석전쟁(1879~84년)이 발발하기도 했다.45-46
구아노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중심부에만 유리한 방식으로 모순을 해소하려 하는 전가는 ‘생태제국주의’로 나타난다. 생태제국주의는 주변부를 약탈하는 데 의존하는 동시에 모순을 주변부로 떠넘기는데, 그런 행위야말로 원주민의 생활과 생태계에 커다란 피해를 입히며 점점 모순을 심각하게 한다.46
시간적 전가−“대홍수여, 내가 죽은 뒤에 와라!”
마지막 세 번째 방법은 시간적 전가다. 마르크스는 삼림의 과잉 벌목 문제를 다루었는데, 실은 오늘날 시간적 전가가 가장 뚜렷이 이뤄지고 있는 분야가 기후 변화다. 화석연료의 대량 소비 때문에 기후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47
자본주의는 현재 있는 주주와 경영자의 의견은 반영하지만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 세대의 의견은 무시한다. 그럼으로써 부하를 미래로 전가하여 외부성을 만들어낸다. 현재가 번영하기 위해 미래를 희생시키는 것이다. 자본가가 부하를 전가하는 대가로 미래 세대는 자신들이 배출하지도 않은 이산화탄소 때문에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이러한 자본가의 태도를 마르크스는 “대홍수여, 내가 죽은 뒤에 와라!”라며 비꼬아 말한 바 있다.47
반론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적 전가가 반드시 부정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기술 개발에 시간을 벌어주지 않는가. 지나친 이산화탄소 삭감으로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기보다는 경제 성장을 계속해서 사회를 풍요롭게 하고 기술 개발을 추진하는 게 현명한 판단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언젠가 신기술이 개발된다고 해도, 그 기술이 사회 전체에 보급되는 데는 다시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귀중한 시간이 흘러가는 사이, 위기를 더욱 가속·악화시키는 작용(양의 되먹임positive feedback)이 강해져 환경 위기가 더더욱 심각해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신기술로도 대응하지 못할 수 있다. 기술이 전부 해결해주리라는 바람이 배신당하는 것이다.47-48
당연한 이야기지만 ‘양의 되먹임’이 큰 효과를 낼수록 경제 활동에도 막대한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환경이 악화되는 속도를 신기술이 따라잡지 못하면, 더 이상 인류에게는 손 쓸 방법이 없다. 즉 미래 세대는 어쩔 수 없이 극히 가혹한 환경에서 살아가야 하는 데다 경제적으로도 힘겨운 상황에 놓인다는 말이다. 그야말로 최악의 결과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기술에 의존해 겉으로 드러난 증상만 치료할 게 아니라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내 기후 변화를 멈춰야 한다.48
주변부의 2중 부담
자본은 지금까지 그랬듯이 앞으로도 온갖 수단을 이용해서 부정적인 결과를 끊임없이 주변부로 떠넘길 것이 틀림없다. 그 결과, 주변부는 2중 부담과 마주하게 된다. 예컨대, 남아메리카의 칠레에서는 유럽과 미국 사람들의 ‘건강한 식생활’을 위해서, 즉 제국적 생활양식을 위해서 수출용 아보카도를 재배해왔다. ‘숲의 버터’라 불리는 아보카도 재배에는 무척 많은 물이 필요하다. 또한 아보카도가 토양의 양분을 전부 빨아들이기 때문에 한번 아보카도를 기른 땅에서는 다른 작물을 재배하기가 어렵다. 칠레는 아보카도를 위해 자신들의 생활용수와 식량 생산을 희생해온 셈이다.49
그런 칠레에 최근 몇 년간 최악의 가뭄이 일어나 심각한 물 부족 사태가 벌어졌다. 이 가뭄 역시 기후 변화의 영향이라고 하는데, 기후 변화는 전가의 결과다. 칠레에서는 가뭄 탓에 귀해진 물이 코로나 전염 방지를 위한 손 씻기가 아니라 수출용 아보카도 재배에 쓰인다고 한다. 상수도가 민영화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에 따른 팬데믹과 유럽과 미국의 소비주의적 생활방식이 일으킨 기후 변화로 인한 피해에 가장 먼저 노출되는 것은 주변부다.49
자본주의보다 지구가 먼저 없어진다
위험과 기회는 전 세계에 매우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다. 중심부가 계속 승리하기 위해서는 주변부가 계속 패배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중심부 역시 자연 조건의 악화가 미치는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나마 전가 덕에 지금 당장은 자본주의가 붕괴할 만큼 치명적인 상처를 입지 않고 있을 뿐이다. 이를 뒤집어 보면, 선진국 사람들이 커다란 문제와 직면한 순간에는 이미 이 행성의 적지 않은 부분이 생태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태일 것이라는 뜻이 된다. 자본주의가 붕괴하는 것보다 앞서 지구에 인류가 거주할 곳이 사라진다는 말이다.50
미국을 대표하는 환경운동가 빌 맥키번은 자신의 책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이용 가능한 화석연료가 감소하는 것만이 우리가 직면한 한계가 아니다. 실제로 이는 가장 중요한 문제 조차 아니다. 석유가 없어지기 전에 지구가 없어져버리고 말 테니까.”50
드러나기 시작한 위기
단기적이며 표면적인 관점으로는 자본주의사회가 아직까지 호조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다. 중국과 브라질 등 그간 외부화의 대상이 되던 나라들까지 급속한 경제 발전을 해내면서 자본주의가 외부화와 전가를 할 여지는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모든 나라가 동시에 외부화를 하기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리고 외부를 잃은 ‘외부화 사회’는 치명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51
실제로 노동력을 저렴하게 제공할 나라들이 없어진 결과, 선진국 내부에서 수익률 저하를 만회하기 위해 노동자 착취가 극심해지고 있다. 그와 동시에 환경적 부담을 글로벌 사우스에 전가하거나 외부화 하는 것도 한계에 달하고 있기에 그 모순이 선진국에서도 드러나기 시작했다.51
문제는 지구가 하나밖에 없으며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외부화와 전가가 어려워지면 최종적으로 그 대가는 우리에게 돌아오게 마련이다. 그동안 바다로 흘려보내며 모른 척했던 플라스틱 쓰레기는 미세 플라스틱으로 어패류와 물에 섞여서 우리 생활로 되돌아오고 있다. 이미 우리는 매주 신용카드 한 장만큼 플라스틱을 먹고 있다고 한다. 이산화탄소 역시 기후 변화를 일으키고 있으며, 그 결과 우리는 매년 이상 고온과 초대형 태풍을 경험하고 있다.51-52
커다란 분기의 시대
외부가 모두 소진되면서 위기를 외면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더 이상 “대홍수여, 내가 죽은 뒤에 와라!” 하고 우아하게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대홍수’가 우리 ‘코앞’까지 닥쳐왔기 때문이다. 기후 위기는 인류에게 냉혹한 현실을 들이밀고 있다. 바로 채굴주의와 외부화에 기초한 제국적 생활양식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는 현실 말이다.53
그렇지만 전가가 더 이상은 어렵다는 사실이 판명되고 사람들 사이에 위기감과 불안이 싹트자, 배외주의적 운동이 세력을 넓히기 시작했다 우파 포퓰리즘은 기후 위기를 자신들의 선전에 이용하며 배외적인 국가주의를 선동할 것이다. 그렇게 사회에 분단이 일어나면 민주주의 역시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된다. 그 결과 권위주의적인 리더가 지배자의 자리에 앉으면 어떻게 될까? ‘기후 파시즘’이라고 할 만한 통치체제가 들어설지도 모른다.53
그렇지만 위기의 순간이야말로 기회가 있는 법이다. 기후 위기 때문에 선진국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불러일으킨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외부성이 소진되면서 마침내 자신들까지 피해자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회를 살리면 지금껏 했던 생활양식을 바로잡아서 더욱 공정한 사회를 만들자고 하는 요구와 행동이 광범위한 지지를 얻을 수도 있다.54
윌러스틴의 표현을 빌리면,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 시스템의 위기가 가져다준 ‘분기’라고 할 수 있다. 외부의 소진은 기존 시스템의 기능 부전을 일으키는 역사의 갈림길로 우리를 인도한 것이다. 외부화가 불가능해지면 지금까지처럼 자본을 축적할 수 없게 되고, 환경 위기 역시 심각해진다. 그 결과 자본주의 시스템의 정당성이 크게 흔들리며 기존 체제에 반대하는 운동도 거세게 일어날 것이다.54
그 때문에 외부가 소진된 지금이야말로 역사의 갈림길이라고 윌러스틴은 말한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붕괴되어 혼탁한 상태에 빠질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안정된 시스템으로 갈아 탈 것인가. 자본주의의 종언을 향한 ‘분기’가 바로 지금 시작되고 있다.54-55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하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경구가 21세기의 커다란 분기에서 다시금 현실성을 띠고 있다. ‘야만’을 막기 위해서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분명한 점은 단계적 개량으로는 도저히 제한 시간에 맞출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대담한 대책을 세울 수 있을까?55
*관련자료: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