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대 초반에 경남 ㅇㅅ에 있는
어느 보육원에서 보모일을 한적 있다.
그곳에서 자라 아이들을 돌보던 ㅇㅅ씨가
어릴때 헤어진 부모님을 찾는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 충동적으로 하게 된 일이었다
약간의 감상도 작용했지 싶다.
결코 녹록지 않은 일이었지만 나름 보람도 있었다
대다수의 아이들이 ㅇㅅ씨 처럼 미아가 되거나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버려지거나 맡겨진 경우라
아이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꼈고 아이들도 나를 잘
따랐다.
당시는 모두가 어려운 시절이기도 했지만
정부 지원금에 의존하는 원 의 형편으론 의식주
모두 열악했다
한창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이 부실한 끼니외엔
간식 구경을 못하다 보니 늘 허기져 했다 .
한밤중에 주방에서 음식물을 훔쳐먹다 들켜서
혼쭐이 난 아이들도 여럿이다
자기 아이들도 원에서 같이 키우면서 냉혹했던
그 찬모한테 항의 했다가 나는 불순분자로 낙인
찍혔다.
급여랄것도 없는 박봉을 털어 당시 인기있던 라면
과자를 박스체 사다놓고 밤중에 아이들과 먹다가
원장님 한테 주의를 듣기도 했다.
관계 부처에서 감사가 나오는 날이면 아이들의
입성과 중식이 달라졌다
나는 자선 단체의 관행과 이중성에 회의를 품었었다.
더러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켜 학부모 손에
끌려온 아이들도 있었다
그 책임은 고스란히 보모들 몫이 되어 항의와
질책을 받아야 했다.
저마다 사연을 간직한 아이들 이지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아이들이 있다.
어느날 아이들이 불러서 나가보니 남자아이 셋이
보퉁이를 하나씩 껴안고 담장아래 조르르 앉아
있었다
한눈에도 아이들 영양 상태가 불량해 보였다.
사무실로 데려 갔더니 큰아이가 쭈삣거리며
쪽지를 내밀었다
아버지가 데려다 주면서 주신거라고...
어려운 형편이라 염치불구 하고 맡긴다면서
나중에 꼭 데리러 오겠다는 내용이었다
큰 아이 말이 엄마는 집나가고 아버지는 고깃배를
타러 간다고 했단다.
아이들은 한동안 원 생활에 적응을 못했다
네살짜리 막내는 밤마다 울고 이불에 오줌을
싸서 침모들의 구박을 받았다.
나는 건강상의 이유로 원장님과 약속한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그곳을 떠나야 했다
흙먼지 풀썩이는 오리 시골길을 걸어 아이들이
줄줄이 터미널까지 따라 왔다.
엉엉 울면서..
우리는 한동안 편지를 주고 받았다
나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그들을
잊었다.
십여년전..
남편이 그 지방에서 일할때 그곳을 가봤었다
주변이 허허벌판 이었던 곳이 거대한 아파트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건물은 말끔하게 새단장
되 있었다.
마당에서 공놀이를 하고있는 아이들을 훔쳐보며
시대를 막론하고 끊임없이 버려지는 아이들은
우리 사회가 안고 가야할 숙제가 아닐까..
잠깐 생각 했었다.
ㅈㅅ. ㄷㄱ .ㄱㅎ.ㅊㄱ. 등등
이제는 나와같이 늙어갈 그때 그 아이들이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들 살고 있는지..
제 삶의 발자취 한자락 남기고 갑니다^^
첫댓글
해솔정님, 그런 착한 일을 하셨네요.
세상 물정 모르던 그 나이에
청춘의 꿈을 꾸던 시절에
버려진 아이,
부모의 정이 그리운 아이들에게
따뚯한 마음을 나누는 마음씨가
살아감에 그 덕목이 될 것입니다.
앞으로도 베품의 뜻이 함께 하여
건강하고 복된 삶을 이루어 가시길 바랍니다.
봉사 정신이 있어서가 아니고
당시에 현실 도피처가 필요했던터라 ㅎ
그곳을 가게 됐어요
마음아픈 일도 많았지만 좋은 경험 이었어요
콩꽃님 자상하신 말씀 감사합니다
편히 주무세요^^
예.
글 잘 쓰는군요.
삶에서 건져낸 글이기에 남은 흉내를 내지 못하겠지요.
6하원칙으로 글 써 보세요.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등으로.
더 나아가 8하원칙으로 확대해 보세요.
그 결과는? 그 뒤에는? 하고 계속 이어서 써 보세요.
앞으로는 '언제'인지를 숫자로 넣어 보세요.
자기의 경험, 의견, 생각 등은 이렇게 글(사진) 등으로 남기는 것이 가장 정확하지요.
소중한 기록이 되기에, 훗날 추억 꺼내기를 할 수 있으니까요.
글 다 쓰신 뒤에는 검색창에서 <한국어맞춤법 검사기' 문구를 입력하면 검사기가 뜹니다.
1회에 350자 정도를 대조하면, 오탈자 등 잘못된 곳이 표시되어 올바른 문구가 제시됩니다.
이를 근거로 원안에서 수정하면 글이 더욱 깔금하게 됩니다.
정확도는 85%.
나머지는 국어사전 등으로 더 세밀히 검색해야겠지요.
글맛 좋아서 엄지 척! 합니다.
댓글주셔 감사합니다
육하원칙은 갖췄지 싶은데
조언 참고 하겠습니다.^^
해솔정 님 글을 읽으며
해솔정 님이 어떤 분인가 생각해 봅니다.
천사같은 분.
전 그렇게 느껴집니다.
제가 해보고 싶었던 일이어서
해솔정 님의 글에 더 깊이 공감이 되네요.
버려진 아이들.
그 아이들의 상처를 보듬어 주신 분.
아이를 버려야 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 마음은 또 어떠했을까요.
마음 아프면서도
따뜻한 글, 잘 읽었습니다.
송구스럽습니다
젊어 한때 있었던 일이지요
지금은 적당히 이기적이고 속물
근성이 잔뜩배인 할줌씨 랍니다 ㅎ
이베리아님 결 고우신 분이란걸
틈틈히 느낍니다
다정하신 말씀 감사합니다 ^^
가슴 아프면서도
해솔정님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을 받습니다
마음이 여린 저는
지금도 TV에서 어린 가장들, 병든
어린이 얘기가 나오면
채널을 돌린답니다
불쌍한 어른도 많지만
가여운 어린이들 얘기는 더 마음이
아픈 것 같아요
자라나는 새싹들이
모두 다 행복했음 좋겠는데..
마음 따뜻하신 해솔정님도
항상 행복하시길 빕니다~**
그 마음 이해 합니다
저도 마음아픈 장면은 애써 외면하게 됩디다
내가 일상적으로 누리는게 사치라는
공연한 죄의식이 들거든요
마음여린 사람들의 공통점이지 싶어요
루루님 참 따뜻하신 분이라 사료됩니다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그 나이에 온정으로
버려진 아이를 대하셨네요.
참 장하십니다.
맞아요.국가가 아이들을 보살펴야 한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미혼모도 보호 대상이지요.
아이든 임산부든,정부 대응이
올해부터 많이 좋아지는 게 보입니다.
읽으면서 울컥하기도 하고
잘 읽었습니다.
지언님 올만에 뵙습니다
한참 안보이셔서 궁금 했어요
당시 상황에 밀려 생각잖게 하게된
일이었는데 좋은 경험이라 여깁니다
미혼모에 관한 정책이 좋아지는건
정말 다행입니다
뵙게되서 반가웠어요 편안한 시간 되셔요.
지금은 같이 나이들고 있을
그 아이들 가슴 한켠에 늘 고맙고
보고 싶은 분으로 자리하고 있을 겁니다.
배고픔보다 정이 더 그리웠을
그 아이들 곁에 누나나 언니처럼
계셔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쎄요..
생각이나 할런지요
보모들이 정들여놓고 가면
아이들이 상처를 많이 받는다고
원장님이 그러셨는데 상처나 안줬는지
모르겠어요
참 댓글이 살갑습니다^^
해솔정님 글을 보면서
문득 잊혀졌던 그 시절이 떠오릅니다.
국회의원 하시던 분이 원장님이셨는데
원아가 150명쯤 되었으니
규모가 적지는 않았던 **원.
베데스타집,사랑의집,희락의집
새싹의집,소망의집,믿음의집등등
각 집에 보모 한 명이 많은 아이를 돌보며
고락을 함께 했었지요.
식사중 단무지는 단골메뉴라서
배식할때 단무지를 안 받는 아이들도 있었구요.
자선사업~
말이 자선사업이지 운영의 이중성을 보면서
저도 환멸이 느껴졌었답니다.
그때는 주로 미국의 후원을 많이 받았고
감사 나오는 날엔 머리수 채우려고
외부인도 재웠구요.
명절에 과일같은 선물이 많이 들어오면
정작 원아들에게는 아주 조금 돌아가고
원장님 가족들의 호의호식이었지요.
아이들은 늘 배가 고파했었는데
축구를 좋아했던 *식이와
야뇨증으로 밤마다 이불을 적셨던 *경이등
아이들 얼굴이 떠오릅니다.
아이들이 떠주었던
덧버선도 신었었는데
저는 어찌 그때의 기억을 감쪽같이
잊고 있었을까요.
어떤 연유로 제라님이 그 세계를
접했는지 모르지만 현실을 직시 하셨네요
정도의 차이로 어디나 비리는 있었을겁니다
아무리 자선사업 이라지만 사람이 하는일인데
개인의 이익을 생각 안할수 없겠지요.
저도 이런저런 것들을 보고 실망도
했었는데 그래도 그런 단체가 있어서
버려진 아이들이 그나마 안정된 생활을
할수 있었을거라 생각해요
안그러면 거리를 떠돌며 더 비참하게
살았을수도요..
당시 제가 있던곳도 원생이 백명이 넘었는데
보모가 저까지 셋이어서 근무조건은 양호한
편이었네요
제가 괜히 제라님이 까맣게 잊고있었던
어둠의 세계를 떠올리게 했나봐요 ㅎ
저녁 맛있게 해서 드셔요
난 일이있어 종일 나갔다 왔더니
피곤해서 밥도 하기 싫네요 ㅎ
제가 있던 고아원에는 보모가 7명이었어요.
다들 보모선생님들은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고
희생정신도 있었지요.
저는 결혼도 아이 딸린 홀애비한테
가고 싶었던 철부지이기도 했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감상적이고
순수한 시기였던 것 같기도 해요.
테레사수녀처럼 살고싶어 했으니까요.
지금은 온갖 때가 다 묻어 이기적인
사람이 되었지만요.
원장님은 붓글씨를 쓴다고
밤중에 안채로 불러 먹을 갈게 했는데
너무 음흉하고
그 묵향이 참 싫었던 기억이 나요.
아이들과 함께 웃고 떠들고
아침에 함께 마당을 쓸고 국민체조를 하고
목욕도 함께하며 즐겁게 보냈던 시간들이
아련합니다.
아이들 등교 후에는
빨랫감을 이고 냇가에서
선생님들과 수다를 떨며 빨래를 하고
찬모를 도와 채소도 다듬고
늘 함께 하던 공동체 생활이었지요.
진짜
해솔정님 글 보기전까지
까마득히 잊고 살았는데
그래도 순수했던 그 때가
아련히 떠올라 행복한 마음도 듭니다.
@제라 제라님과 저짝 어디 구석방에
가서 단독회담 해야겠어요 ㅎ
생활상이 거의 비슷하네요
순수했던 시절이니 그런 생활을
감당 했겠지요. 고생은 돼도 나름
즐거움도 있었고..
저기 ㅇㅅ이란 사람이 정말 천사였어요
머리도 좋아 장학금으로 대학까지 나와서
얼마든지 좋은 직장에 갈수 있었는데 거기서
보모일을 했거든요
진심으로 아이들을 사랑한다는걸
그녀를 보면 느껴졌어요
지체 장애아가 한명 있었는데 먹이고 입히고
대소변 치다거리를 그녀가 도맡아 했지요.
제라님 글 예전부터 봐왔는데
어떤분일까..급 호기심이 생깁니다^^
그 당시의 보육원은
요즘의 유아원 유치원 이 아니었지요?
사명감 이 대단 하셨군요 !!
저도
지나가는 아기들만 봐도
이뻐 보이고 말 걸고....
이즈음엔
고아원 이란 단어도 찾기 힘드니..
고아원이었어요
고아아닌 고아들이 많았지만요
요즘은 고아원이란 말 안쓰지요
아기들은 다 이쁘지요
당시 저기는 네다섯살 짜리 몇명에
초등학생에서 고등학생 까지 있었어요
젊은날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향적님 들려주셔 감사합니다 ^^
힘든 처지의 아이들을 보면
누구나 마음이 아프지만
막상 현장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지요.
해솔정님
쉽지 않은 용기 대단하세요.
따뜻한 글 잘 읽었어요.
플로라님 반갑습니다
잘 지내시지요
멋모르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귀한경험 이었어요 보람도 있었구요.
들려주셔 감사해요 ^^
그때 아이들의 이름을 다 기억하고 계시군요
어디에선가 잘 살고 있을 그 아이들
해솔정님과 함께 잠시 지낸 그 아이들도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편지 주고받은 아이들 이름은 기억해요
같이찍은 사진도 있었는데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모르겠네요
글쎄요..잘살고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