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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7: 1. 높은 산에 올라가심 2. 그들 앞에서 변형되시다
제 17 장 : 변 화 산
1.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시다 ( 17: 1-13. 막 9: 2-13. 눅 9: 28-36 )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6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7 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13 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마 17: 1. 높은 산에 올라가심 -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
엿새 후라고 날짜를 꼽은 이유는 바로 앞부분의 예언대로 세 제자들이 주께서 그의 나라에 임하시는 영광을 미리 보았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1] 엿새 후에
이는 16: 13-28과 새로 전개될 사건을 연결시키기 위한 시간적 설명구이다.
즉 예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16: 16)과 그의 수난 예고(16: 21) 및 도래할 심판(16: 28)에 대한 설명이 있은 후, 며칠이 지난 후 예수께서는 자신의 부활 및 신적 광휘를 예고하고 계신다.
누가복음에는 같은 사건을 다루면서 '팔 일쯤 되어'라고 기록되어 있다.
* 눅 9: 28 -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마태가 예수께서 앞부분을 말씀하신 후의 기간의 첫째 날과 마지막 날을 빼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반해, 누가는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본 변형 사건 일을 모두 가산하였기 때문에 생겨난 차이일 것이다(Hendriksen).
누가는 '팔일 쯤'이라는 막연한 표현을 통해 대략적 시간 계산을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여하튼 이날은 16장의 사건이 있었던 후 만 6일, 곧 온전한 한 주간이 경과한 때를 가리킨다(Wyciffe).
예수께서는 그 한 주간이 완료하는 시점에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부활과 천국의 영광을 미리 맛보게 하셨다. (J. P. Lange).
이와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의 상징적 숫자 개념에 따라, '엿새'는 일상과 노동의 숫자로 볼 수 있다.
'엿새 후'는 곧 '이레(7)'로 승리의 완전수요, 안식과 하나님 나라의 숫자로 볼 수 있다(The Pulpit Commentry). 예수께서는 참 안식과 천국이라는 새 지평을 이제 열고 계신다.
2]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이 세 사람은 어부 출신들이다. (4: 18-22. 어부들을 제자로 선택하시다)
예수께서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구별하여 동행하던 제자들이다. 이들의 피택은 그들 자신의 탁월성에 근거하였다기보다 근본적으로 예수의 절대적인 선택 의지에 따른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영광스런 변화를 목격하는 특권을 허락하시는 동시에 그들 각자에게 당신의 영광을 세상에 전파할 책무(責務)를 맡기셨다.
* 마 26: 37 -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 막 5: 37 –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 막 13: 3 –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조용히 묻되
* 눅 5: 10 -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사로잡으리라). 하시니
* 눅 8: 51 - 그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두, 세 사람의 증거야말로 진실한 증언이 될 수 있다.
* 신 19: 15 -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 요 8: 17 -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 고후 13: 1 -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예수께서 증인의 인원을 3인으로 제한시킨 것은 발생하게 될 오해의 소지를 없애고 또한 아직은 침묵의 시간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9절).
이들 3인의 제자는 12제자 중에서도 핵심 구성원들이다. 예수의 십자가 부활을 준비하며, 예수 이후의 교회를 이끌어 갈 영광스런 책임 사역자가 되고 있다.
3]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따로(*, 카트이디안)의 뜻은 '따로 떨어져서', '개인적으로'(privately)이다. 이는 그들에 대해 예수의 영적이고 내밀한 친밀감을 암시한다.
높은 산은 교회의 전통에 의하면(Hieronius, Cyril of Jerusalem, Jerome) '다볼산'이나 가버나움과 지리적으로 근거리라는 점에서 '예벨에르묵'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W. Ewing).
최근에 와서는 가이사랴 빌립보와 근접성을(16: 13) 들어 일반적으로 '헬몬산'으로 추정한다(Wyliffe, Clarke, Carr).
이 산은 갈릴리 호수 북방 안티 레바논 산맥에 위치하며 스닐, 시룐 등으로 불리고 있다. 구약에서는 '시온산'으로, 베드로에 의해서는 '거룩한 산'으로 불리기도 했다.
* 신 3: 8-9 – 8 그 때에 우리가 요단강 이쪽 땅을 아르논 골짜기에서부터 헤르몬 산에까지 아모리 족속의 두 왕에게서 빼앗았으니 9 (헤르몬 산을 시돈 사람은 시룐이라 부르고, 아모리 족속은 스닐이라 불렀느니라.)
* 신 4: 48 - 그 얻은 땅은 아르논 골짜기 가장자리의 아로엘에서부터 시온 산 곧 헤르몬 산 까지요,
* 대상 5: 23 – 므낫세 반 지파 자손들이 그 땅에 거주하면서 그들이 번성하여 바산에서부터 바알헤르몬과 스닐과 헤르몬 산까지 다다랐으며
해발 약 2,850m로 산봉우리에는 항상 눈이 덮여있다. 이 산은 요단강을 통하여 이스라엘 지역에 물을 공급해 주는 산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 시 133: 3 -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 벧후 1: 18 -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오늘날에는 '족장의 산'이라는 뜻인 '예벨 에쉬 쉐이크'(Jebel esh Sheikh), 또는 '설산'이란 뜻인 '예벨 에트 탈'(Jebel eth Thalg)등으로 지칭된다.
사람이 사는 세상은 '조직 사회'다. 그러므로 백성과 최고 지도자와 중간 지도자가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목사와 성도가 있다. 회사에는 사장과 사원이 있다. 그 조직 속에는 언제나 최고 책임자가 있고, 그 책임자를 보좌하는 참모나 비서들이 있다.
그 비서들이나 참모 중에도 소위 측근이라고 불리는 핵심들이 있다. 어떤 때는 이들을 심복이라고 부르고 오른팔이라고도 부른다. 정치인들이나 경제인들에게 있고, 군인에게도 있다. 이처럼 핵심 참모들이 주님에게도 있다. 그 핵심 제자들이 '베드로, 요한, 야고보'다. 이들을 가리켜 수제자라고 부른다. 그들이 지금 예수님의 산행에 동행하였다.
이 세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중요한 사역의 현장에 늘 함께 있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린 현장에 그 아버지와 함께 입회하는 영광을 누렸다. 또한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에도 이들이 동행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영광중에서도 영광이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세 사람의 이름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았다. 후에 베드로는 전무후무한 하나님의 종이 되어 예루살렘교회를 설립했으며 야고보는 주님을 위해 첫 번째로 순교한 제자가 되었고, 요한은 밧모 섬에서 주님의 계시를 받아 요한계시록을 집필했다.
예수님이 모든 제자중에 세 제자와만 산에 올라가셨을까? 학자들의 견해를 보면 모든 제자들을 향하여 산에 올라가자고 했는데 세 제자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높은 산에 올라가기를 꺼려했다고 한다. 두려웠다. 그리고 그들은 바빴다. 그런데 이 세 제자는 만사를 제쳐두고 따라갔다. 그런데 역사는 바로 이들이 움직여 나갔다.
여러분, 이 땅에서 역사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합니까? 그러면 예수님과 함께 높은 산에 오르시기를 바란다. 변화 산에 오르시기를 바란다. 바다를 가르고 샘물을 내고 모세의 능력을 경험하고 싶습니까? 아니면 하늘 문을 여는 엘리야의 기도를 원합니까? 산에 오르기를 바란다.
누가 모세나 엘리야처럼 됩니까? 산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 산은 주의 산이라 하는데 산은 기도를 의미하고 능력을 의미한다. 주의 산에서 기도하면 엘리야의 능력도 모세의 능력도 얻을 수 있다.
그럼 왜 예수님이 높은 산에 오르셨을까?
(1) 은밀한 장소를 택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변형하시기 위해 은밀한 곳을 택하신 것이다.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가지려면 세상과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을 찾아야 한다. 저는 가끔 도봉산을 자주 올라갔다.
(2) 기도하시려고 가셨다.
예수님은 산에서 가르치고 산에서 기도하였으며 산에서 변형하셨다. 마지막으로 산에서 승천하셨다. 이처럼 산에서는 특별한 일들이 발생했다.
마 17: 2. 그들 앞에서 변형되시다 -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
예수께서는 그들 앞에서 변형되셔서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 그것은 그의 본래의 영광, 곧 그의 신성(神性)의 영광을 보이신 것이었다.
영광의 주이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의 본질을 취하셨고 그것도 연약하고 낮은 모습을 취하셨다. 이사야 53: 2에 보면,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예언했다.
사도 바울은 그에 대해 이 세상의 관원들이 그를 알지 못하여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했다(고전 2: 8).
1]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본래의 영광, 신성(神性)의 영광이다. 영광의 주께서 사람의 본질을 취하여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다. 그러나 본래의 모습은 영광스럽다.
* 사 53: 2 -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2]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예수님의 모습이 순식간에 변화되었다. 얼굴이 해같이 빛났다. 옷이 희어졌다고 했는데, 막 9: 3에서는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고 표현했다. 예수님의 신성이 속으로부터 발산되어 옷까지 변화된 사건이다. 이 내용이 눅 9: 29에서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기도하실 때에 변화의 사건이 일어났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변형되실 때, 기도 중에 변형되었다면 우리도 기도하므로 변화의 체험을 해야 한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 딤전 4: 5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고 했다. 우리 성도들은 말씀으로 거룩하게 변화되고 기도할 때 거룩하게 변화될 것이다. 누구든지 기도하는 사람은 변화가 된다.
창 36장을 보면 아버지와 형을 속인 사기꾼, 약탈자라는 별명을 가졌던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깊이 기도하다가 이스라엘로 변화되었다. 하나님과 겨뤄 이긴 사람, 승리자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누가 하나님을 이길 수가 있고, 누가 승리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이다.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여기 '변형되었다'는 말은 '변한다'는 말과 '형상'이란 말이 합해진 단어다. 변형이란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변하는 것인데 외관상의 변화가 아니라 본질상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변형되었다는 것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 다른 형태로 본질적으로 변화하셨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빌 2: 6-11을 보아야 한다.
* 빌 2: 6-11 –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은 본질에서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않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사람으로 오셨는데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고 했다. 그런데 본문에서 변형되셔서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인간이 되기 이전의 모습,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으로 돌아가셨다. 이 모습을 계1: 13-16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촛대 사이에 인자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이것이 바로 승천하신 예수님, 다시 오실 예수님, 천상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이 모습은 지금 베드로, 요한, 야고보에게 보여주시고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도 보여주신다.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영광과 거룩한 신성의 위엄을 보여주신 말씀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셨을까?
예수님의 변형되신 모습은 제자들이 지금까지 보아 왔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제자들은 지금까지 머리 둘 곳 없이 사는 초라하고, 고생하고, 연약한 육신을 가지신 모습만 보아 왔다. 그래서 너무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심히 놀랐을 것이다. 이는 제자들에게 부활 신앙을 심어 주시기 위함이다.
16: 21에서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한다'고 했을 때 베드로와 제자들은 크게 반발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항변했다. 예수님이 보실 때 이런 제자들의 근본 문제는 고난을 싫어해서라기보다 부활 신앙이 없기 때문임을 아셨다.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실패요, 가장 큰 비극이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지 못한 제자들로서는 도저히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예수님이 죽으시면 복음 역사도 망하고, 자기들의 인생도 망한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 앞에서 변형되심으로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 후에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영광스러운 승리와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보여주셨다. 이 사실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다. 시청각교육으로 예수님께서 친히 변형되심으로써 최후 승리와 영광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도록 미리 보여주셨다.
후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변형되신 모습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변화산 사건을 기억하면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의 서신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벧후 1: 16)
베드로는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의 권능을 알게 되었다. 또한 장차 크신 권능으로 재림하실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고 순교의 길을 갈 수 있었다.
3]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예수의 변화를 목격한 증인을 살펴보자
(1) 허다한 무리
주님의 공생애 활동중 예수를 따른 많은 부류가 있었다. 그중에 하나는 '허다한 무리' 즉 많은 군중들이다. 이들은 '각색병으로 고통당하는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과 그들을 데리고 온 가족들, 그리고 그들을 고치시는 예수를 보기 위하여 모여온 무리들이었다. (마 4: 23-25)
이 허다한 무리들은 그들의 육체적 질고와 정신적 질환으로부터 고침받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때로는 장정만 5천명, 그리고 4천명으로 나타났다. (마 14: 13-21. 마 15: 32-39)
(2) 5백여 형제들
이들은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자들로서 (고전 15: 6) 예수의 가르침에 심취하여 따라다니던 사람들이다. 예수께서 잡히셔서 재판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갈보리 언덕에서 돌아가셨으나 주님을 잊지 못하고 기다리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니 이들은 먹을 것이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예수를 사모한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 부류는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부류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도 섞여 있는, 그러한 신자의 무리라고 할 수 있다. 예수 믿는 것이 그저 좋아서 따라다닌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3) 120명의 성도들
이 120명의 사람은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한 사람들이다. 120명의 숫자는 부활을 목격한 500명의 신자들이 그 후 40일이 경과하는 동안 120명으로 줄어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40일간은 신앙의 회의가 엄습한 기간으로 베드로를 비롯한 7명의 제자들까지도 다시 어부로 돌아갔던 시기다. (요 21: 1-4) 그러므로 예수 부활에 대한 확실한 신앙이 없는 380여명은 사라졌다.
그러나 '성령세례'(행 1: 5)를 갈망하여 예수살렘 다락방을 떠나지 않고 기다리던 이들은 오순절날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 (행 2: 1-4)
이들은 모두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창설 멤버가 되었으며, 예수의 증인으로서의 일반적인 임무가 주어진 사람들이다. (행 1: 8) 이 부류는 오늘날 모든 교회의 직분을 받은 성도들로서 그냥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위하여 어떤 임무(직분)를 받아 봉사하는 사람들이다.
(4) 70인의 제자와 12인의 사도
70인의 제자는 예수께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임시적으로 선택하여 파송한 전도자다. (눅 10: 1-20) 그리고 12인의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영원한 기초로 선택한 제자들이다. (행 2: 20)
그러나 이 두 부류의 제자들은 그 임무 면에서는 같았다. 그들은 함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차이점은 임시적 선택과 영원한 선택, 임시적 임무와 영원한 임무, 그리고 세속적 직업을 가진 사람과 그것을 갖지 아니한 자라는 점일 것이며, 70인보다는 12인이 더 정선된 무리라고 할 수 있다.
(5)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12사도 중에서도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더 가까이 하셨다.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실 때에나(막 1: 29-30),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에도 (막 5: 37, 눅 5: 51),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시기 전날 밤 기도하실 때에도 (마 26: 36-37), 예수께서는 이 세 제자들만을 데리고 가셨다.
어느 조직이나 그 조직의 중심이 되는 대표적인 인물이 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었다.
베드로는 직선적이고 성질이 급하여 실패가 많았으나 반면에 그는 순수한 믿음의 사람이었으며, 권능과 행동의 사람이었다. 야고보와 요한은 세베대의 아들로서 형제간이었다. 이들 형제는 명예욕이 강했다. (막 10: 35-37)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하여 사도들 가운데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고(행 12: 1-2) 요한은 예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제자로서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 그리고 계시록 등을 기록한 심오한 진리의 해설자요 사랑의 사도였다.
예수를 따른 사람들은 허다한 무리들로부터 시작하여 5천명, 4천명, 5백명, 120명, 70명으로 축소되고, 그리고 12명의 사도와 그 중에서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으로 압축되었다. 이들 세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심점으로 하는 이들 조직의 핵심부에 위치하였다. 하나는 믿음과 권능의 사람으로, 하나는 탁월한 교회 행정가로 또 한 사람은 심오한 신학자로 예수의 유업을 승계한 위대한 사도들이었다. 모든 형태의 조직은 소수의 핵심 인물에 의하여 움직여 간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초석인 교회의 역사는 바로 이 세 제자를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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