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며 넘을 애미랑재
2017년 9월 2일, 들머리는 경북 울진의 답운치다. 해발 619.8m. 늘 안개가 끼어 있어 마치 구름을 밟고 넘는 듯한 고개여서 답운(踏雲) 고개다. 동쪽엔 통고산 자연휴양림이 있고, 서쪽에는 옥방천(玉房川)이 있다. 36번 국도가 동서로 관통한다. 오늘 산행이 18.7km라는데, 깃재까진지 아니면 신암분교까지 접속구간을 포함하는지 모른다. 통고산과 칠보산이 이번 구간의 큰 산이고, 그 사이에 애미랑재가 있다. 모두 이름이 범상찮은데, 낙동정맥은 이 곳에 어떤 사연을 품고 있을까. 오늘은 모처럼 천안에서도 6명이나 왔고, 20명이 산행에 나선다. 낙동 시작하고 최대인원이다.
10:35에 산행을 시작했다. 지난 번 3회차 때 어둠 속에서 뒷풀이를 하던 바로 그곳이다. 10분 쯤 지나 가파른 오르막 경사 위로 산불감시 초소가 보이는데, 그 뒤로 하늘이 사뭇 맑고 파랗다. 오늘은 지난 3회차와 달리 맑은 날씨에 쾌청한 산행을 즐기겠다. 조망이 좋으면 사진도 잘 나올 터....
천지아지님이 길을 내준다. 산이님이 싸리버섯을 따서 한 봉지 손에 들었다. 산행 말고도 무언가를 얻는 이가 부럽다. 조금씩 속도를 높이니 한참만에 훈련중님을 만났다. 한참을 같이 가다가 먼저 가라고 길을 내주신다. 빨리 가서 선두그룹에 붙자 하니, 자기 페이스로 가겠다면서도 참 잘 가신다.
통고산자얀휴양림 갈림길 지나고 정상 바로 아래에서 선두그룹을 만났다. 이 때가 12:05, 답운치 6km 지점이다. 가파른 길을 평균시속 4km 정도로 내달았으니, 변변치 못한 내 산행으론 준수한 편이다. 어여가자 대장님과 맥사이버님 그리고 오늘과내일님이 큰 나무 아래에서 버섯을 다루신다. 맥사이버님은 땅에서 자란 큰 버섯을 채취하여 소담하게고도 나무 위에 붙여놓는다. 나 같은 문외한은 영문도 모르고 그 버섯이 버젓이 나무에서 자란 줄 알 것이다. 님에게는 언제나 얼토당토 않은 생각과 화술에서 오는 유머가 압권이다. 동행은 언제나 즐겁고 행복하다. 하지만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트랭글 뱃지 획득으로 핸드폰이 요란하다. 아, 통고산이다. 모든 산이 그러하듯, 이 산도 사연이 있다. 고대국가 실직국의 이야기다. 안일왕이 다른 나라에게 쫓기게 되었다. 급히 이 산을 넘는데, 하도 재가 높아 그만 통곡하였단다. 패주의 경황 없는 도주와 산을 넘느라 힘에 부쳐 목놓아 통곡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하여, 통곡산(通谷山)이었는데, 후일에 통고산이 되었다고 한다. 산은 일국의 왕이라 할지라도 크게 실패할 수 있음을 가르치는 것이다. 하여, 통고산에 오르려면, 실직국 안일왕의 통곡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헬기장에 들어섰는데, 탁 트인 조망에 하늘이 너무 아름답다. 티없이 맑고 파란 바탕에 새하얀 뭉개구름~. 우리가 늘 바라는 가을하늘이다. 하늘을 보는 사이 무학님과 송학님이 치고 올라오시는데 안일왕의 모습은 분명 아니다. 반대로, 두 분은 영락없는 학의 모습이다. 그렇지, '학'자 돌림이지 않은가. 이렇게 좋은 곳을 놓치면 안 될 것 같아, 사진을 찍자고 졸랐다. 찍는대로 과연 명작이다. 정상석에서 사진을 찍고 헬기장으로 돌아나와 점심을 먹었다. 청명한 가을하늘 아래 옹기종기 모여앉아 함께 먹는 모습이 정겹고 분위기가 화목하다. 훈련중님도 나타나고 산이님과 일행도 올라선다. 천안팀과 대부분의 사람들도 다 올라온다. 모두들 너무 반갑다.
어? 대장님과 몇 분이 아니 보인다. 나는 길을 서둘렀다. 혼자서 길을 찾아 통고산을 내려가 임도에 닿으니 산에서 채취한 버섯을 사들이는 차량이 고개에 서있다. 임도를 질러 다시 산에 오르니 937.7봉이다. 애미랑재까지는 4km 남았다고 알려준다. 혼자서 고즈넉하게 길을 가는데, 맥사이버님이 바람처럼 나를 지나친다. 두리번거리고 나니 님은 순식간에 보이질 않는다. 어렵사리 길을 찾아 보이지 않는 님을 따르는데, 훈련중님이 앞서 가신다. 13km 지점에서, 가파르게 내려가 애미랑 고개에 닿았다. 고개마루는 아스팔트로 포장하였다. 좌틀하여 아스팔트길을 따라 한참을 진행하였다.
왜 애미랑재일까. 이 고개엔 무슨 사연이 있을까. 통고산 통곡의 주인공 안일왕은 울진 지역에서 에밀왕이라고도 불렸다. 왕을 뒤쫓은 것은 강릉 지역에 위치한 예나라였다. 철없는 아이가 울기라고 하면 사람들은 "예 나온다. 울음을 그쳐라!" 이렇게 겁을 주었다는 것이다. 예나라가 처들어와 에밀왕이 그리 도망하다 통곡을 하게 되었으니, 그 꼴 당하기 전에 울음을 그치라는 뜻이었다. 에밀왕을 보라. 예 나온다! 울음을 뚝 그치라. 여기가 바로 '애미뢍 고개'다! 지명은 여기에서 유래하였지만, 애미랑재는 코흘리게 아이들에게조차 웃음거리가 된 에밀왕(안일왕)의 애달픈 사연이 서린 고갯마루다. 패주의 서러운 울음소리가 아직도 아니 들리는가.
패주의 통곡을 마음으로 들으며 가파르게 오르는 길은 통고산보다도 훨씬 힘이 든다. 여길까 하고 오르면 다시 봉오리가 나타난다. 저길까 하고 다시 오르면 칠보산은 아직도 멀다. 훈련중님은 자기 페이스에 맞게 천천히 가겠다고 겸손을 보이지만, 잠시 한눈을 팔면 보이지 않을 만큼 저만치 앞서있다. 다시 한눈을 팔다가, 쓰러졌있는 굵은 나뭇가지에 정강이를 무릎까지 긁혔다. 진곤색 바지에 20cm 가량이나 긁힌 자국이 선명하다. 바지가랑이를 걷어보니, 정강이부터 무릎까지 바짓자국만큼이나 선홍색 상처가 분명하다. 20m도 못 가 다시 한눈팔다가 돌뿌리에 걸려 와장창 넘어졌다. 애미랑재~.... 초라한 패주의 모습을 보일까봐, 앞서가는 훈련중님께는 기척도 안 했다. 칠보산은 무슨... 팔보채만도 못하겠지! 아, 애미랑재~ 산을 원망하는 패주의 곡소리가 귀에 들린다.
3:15경, 4시간 반 걸려 칠보산(七寶山)에 닿았다. 더덕, 황기, 산삼, 멧돼지, 철, 구리, 돌옷(돌에 난 이끼 종류) 등 일곱가지의 동식물과 광물이 풍부해서 칠보산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칠보산은 북한 함경도, 충북 괴산, 전북 정읍, 수원, 경북 영덕군 창수면 등 여러 군데 있지만, 일곱 가지 보물이 같지는 않을 것이다. 산정에는 역시 어대장님과 맥사이버님, 그리고 오늘과내일님이 계신다. 급히 사진을 찍었다. 가시려는 분들을 시원한 포도로 잡았다. 물과 포도를 먹으며 한참을 쉬었다.
새신고개로 내려서니 어느새 송학님과 무학님이 붙는다. 사진을 찍고 어대장님이 일보시는 순간 두 분이 길을 나선다. 나는 자동으로 따른다. 대장님이 아니 계시니 시그널 표지 없이 감으로 길을 찾아야 한다. 헬기장을 지나고 멋진 금강송들이 군락으로 나타난다. 아무 것도 모르는 채, 햇볕을 받아 붉게 빛나는 멋진 나무를 하나 사진으로 찍었다. 나중에 보니 십지춘양목이다! 소경이 문꼬리를 잡았다 할까. 그 멋진 나무들의 껍질이 굵게 파였다. 일제가 송진을 채취한 흔적이 선명하다. 에밀왕의 설움도, 일제가 준 치욕도 다 여기에 있다.
조금 더 진행하여 원추리 대장님을 만났다. 놓치기 쉬운 깃재 위치를 알려주셔서, 좌틀하여 산을 내려왔다. 신암분교 앞 버스에 당도하니 5시 8분, 22.2km에 6시간 35분 소요다. 패주의 통곡과 경고를 까맣게 잊은 듯, 청명한 가을하늘 아래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즐겁게 하산했다. 그러나 명심하라. 애미랑재~ 언제 예나라가 처들어오고, 에밀왕처럼 신세가 처량해질도 모를 테니 말이다.
답운치-통고산-애미랑재-칠보산-새신고개-깃재-신양분교(22.2km)
첫댓글 진솔하게 올려주신 명품산행기,아름다운 사진들 감사합니다^^
애미랑재! 너무 예쁜 이름 아녜요? 이름 뒤에 애달픈 사연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또 한 구간이 모두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었네요~
읽을수록 읽을수록 무협지에 빠져드는 느낌은 뭔가요 ㅎㅎㅎ 산행기 너무 재밌어요!!!
사진 감사 드려요^^
아, 무학대사님! 아마도 긴 글 읽으시며 수양 끝에 스스로 득도하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