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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7: 3. 모세와 엘리야 4.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5. 홀연히 빛난 구름이 덮으며
마 17: 3.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말씀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였다.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율법을 직접 받은 인물이다(요 1: 17).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해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다”고 증언하셨다(민 12: 7-8).
엘리야는 선지자들 중에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산 채로 하늘로 올리운 특별한 인물이었다. 그 둘이 나타나 예수님과 함께 말씀하는 것은 예수께서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증언했다고 본다.
1]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선지자들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다. 엘리야는 선지자들 중에 하나님과 신실하게 동행하고 그의 능력을 체험한 자로써,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산 채로 하늘로 올리웠다.
그 두 분이 나타나 예수님과 함께 말씀하는 것은 예수께서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임을 증명한다고 본다.누가복음에 의하면 그들이 주께서 예루살렘에서 죽으실 것에 대해 말씀하였다. 메시아의 죽음은 성경 전체의 대 주제이다.
* 눅 9: 31 -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더불어 말씀하시는 것이 세 제자들에게 보였다. 어떤 학자는 이 모습을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 이렇게 삼자거두 회담이 거기서 있었다고 표현했다. 모세가 누구입니까? 종된 애굽에서 선민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명령받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광야교회를 이끌었던 사람이다.
그는 시내 산에서 선민 이스라엘이 지킬 율법을 받은 사람으로 그 율법을 받을 때 하나님의 영광 속에 싸여 있던 사람이다. 그 얼굴이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빛 때문에 백성 앞에서 수건으로 그 얼굴을 가리웠던 사람이다. 그는 분명히 율법의 대표자로 나타났다. 모세는 예수님보다 1500년 전에 이 땅에 와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홍해바다를 건너 40년 광야생활을 통과해 마침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모든 일들을 한 사람이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이고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을 대표한다.
엘리야는 누구입니까? 그는 모든 선지자(예언자)의 대표자였다. 크고 강한 바람 중에서와 지진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과 영광을 목도한 사람이다. 그는 장차 오실 이스라엘의 메시아를 예언하던 사람이다. 불 말들이 끄는 불 수레를 타고 죽음을 보지 않고 산채로 승천한 사람이다. 엘리야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승천한 사람입니다. 선지자, 예언자 중에 대표자다. 예수님보다 9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다. 이 두 사람은 구약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그들과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만났다.
왜? 그들이 나타났는가? 그들이 나타났다는 것은 그들이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세는 1500년 전에 엘리야는 900전의 사람이었지만 그들이 부활해서 살아있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보여줌으로 그들에게 다시 한번 신앙의 확신을 주신 것이다.
눅 9: 31을 보면 아주 눈길을 끄는 말씀이 있다.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신 것을 말씀할 새' 별세는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한다. 우리말 성경에는 별세로 번역되었으나 헬라어는 엑소도스, 출애굽이란 의미다. 그러니까 직역을 한다면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함께 장차 우리 예수님께서 출애굽할 것을 예언했다는 것이다. 즉 예수께서 육신의 장막을 벗으시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영광스런 출발을 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무슨 말인가? 십자가 사건으로 출애굽 사건과 연결되었다. 구약의 역사적인 사건을 꼽으라면 뭐니, 뭐니 해도 출애굽사건이다. 그런데 그것과 대응되는 신약의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다. 다시 말하면 출애굽 사건은 십자가 사건의 모형이다.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한 사건이 출애굽 사건이라면 십자가 사건은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 성도들을 죄악의 도성인 세상에서 구원하는 사건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단순한 죽으심이 아니라 선민 이스라엘, 영적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출애굽 사건의 완성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엘리야와 모세를 보내셔서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시는 것은 모세와 엘리야, 곧 율법과 선지자의 글에 기록된 예언의 성취임을 시청각적으로 확실하게 가르쳐 주시고자 그들을 변화산에 체험을 주신 것이다.
마 17: 4.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
베드로는 예수께 말하였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1]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기에서 '주'(*, 퀴리오스)란 '사람이나 사물을 소유, 통치하는 자', '결정권을 가진 자', '주인' 등을 의미한다.
이것은 종이 주인에게 존경과 영예의 칭호로써 일반적으로 부르는 존칭이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각각 이 말에 대하여 '랍비'(*, 선생, 막 9: 5) '에피스타테스'(*, 곁에 서 있는 사람, 감독하는 사람, 주인, 통치자, 눅 9: 33)로 묘사되었다.
* 막 9: 5 -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 눅 9: 33 -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이 이유는 3절의 '모세와 엘리야'의 기록 순서에 대한 이유 같다. 눅 9: 33에는 베드로의 요청과 관련하여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는 말씀이 있다.
베드로가 강제적 응답을 요구하지 않는 상태에서 단지 주위의 화려하고 위엄스러운 광경에 압도되어 자기도 모르게 즉흥적인 말을 한 것임을 암시한다.
베드로의 말은 그가 잘못 인식한 것임을 보여준다.
(1) 예수께서 당신의 사역을 이루시기 전,
인간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의를 위해 부활, 승천하시어 영광을 얻기 전에 그 영광을 얻고 그 영광 가운데 거하고자 했다.
* 히 2: 9-10 – 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2) 산 아래에는 아직도 고통당하는 영혼들이 많이 있어
그 영혼들을 구원해야 할 지대한 사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리 안식(安息)을 취하고자 했다(14-20절).
(3) 복음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온 세계에 전파된 다음에야 영광스러운 세계와 안식이 오는데 그 세계의 안식을 미리 구했다.
* 마 24: 14 -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 행 1: 8 -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2]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베드로는 자신의 요구를 절대시하지 않고 예수의 권위를 먼저 인정해 드렸다.
그의 요구는 육신적이요 인간적인 발상에 의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주님의 '원하심'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우리 인간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의를 위하여 3일 만에 다시 부활하시는 것이다.
* 마 16: 21-23 –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고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이 사실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임박한 수난과 대조되는 이 말을 한 것은 주의 뜻과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무지로 보인다.
'초막'(*, 스케나스)은 헬라어로 '장막', '천막'을 의미한다. 당시에는 존귀한 자가 왔을 때 존경과 예의의 표식으로 장막을 쳐주었다.
* 왕하 4: 9-10 – 9 여인이 그의 남편에게 이르되, 항상 우리를 지나가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아노니 10 청하건대 우리가 그를 위하여 작은 방을 담 위에 만들고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두사이다. 그가 우리에게 이르면 거기에 머물리이다 하였더라.
이런 관점에서 베드로가 초막치기를 제의했다면, 그는 산상에서 전개되는 놀라운 영광의 광휘와 영적 계시를 오래도록 지속하고 싶은 심정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걸음이 지체되거나 무산되기를 소원하는 잠재적인 바람에서 제안했을 것이다.
더불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유대인들의 전통적 명절인 장막 절기의 회상이다.
* 레 23: 42-43 – 42 너희는 이레 동안 초막에 거주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주할지니 43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주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이 절기는 종말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베드로는 예수의 변모에 감사하며, 메시야 시대의 임박한 개시를 인식하고 장막 짓기를 요구했다(CARSON).
3] 하나는 주님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모세와 엘리야를 영광스런 위치에서 예수와 동등한 취급을 암시한다. 베드로는 자신과 자신의 동료 제자들과는 견줄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들로서의 그 세 사람의 신분을 인정한다는 측면에서 이 같은 제안을 했다.
그는 자신이 그 세 분을 수종드는 자로도 과분하다고 생각했다. 베드로는 그 산 위에 초막 셋을 세워서 같이 살고 싶었다. 그러니까 신비에 머물러 살고 싶었다. 어차피 하나님과 우리의 만남은 신비하게 만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신비체험은 많이 할수록 좋지만, 신비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
베드로처럼 신비 체험한 장소에 머물려고 하는 것이 신비주의다. 신비 체험한 사람을 따라다니는 것이 신비주의에 빠지는 것이다. 누구에게 은혜 받았다고 그 사람에게 집착하면 안 된다. 주님께서 그 분을 통하여 은혜를 주신 것뿐이다. 그 곳에서 은혜 받았고 그 곳에서 병 고침을 받았다고 그 장소에 집착하여서는 안 된다. 은혜를 주시고 병 고침을 주신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에 주님만 보아야 한다.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그냥 그곳에 안주하고 싶다는 의미다. 또 이 말은 신앙 생활을 그냥 대충대충 하는 것이 좋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세상에 나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떻게 빛을 내고 소금의 사명을 감당할 것인가? 어떻게 우리가 섬기는 생활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말이다.
본문의 배경을 깃들인다면 산아래 아홉 제자들과 귀신들린 아이와 그 아버지의 애타는 심령 따위는 관심이 없다는 것으로 이 땅의 행복만을 탐내는 말이다. 천국도 천천히 갔으면 좋겠다는 의미다. 산밑에 가서 봉사하는 것도 힘드니까 사람들과 부딪혀야 되니까 싫고 그냥 여기 있으면 좋겠다는 소리다.
눅 9: 33을 참조해 보면,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짓자고 말하는데,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그러니까 베드로가 지금 헛소리를 하고 있다. 왜 그렇습니까? 눅 9: 32에 그 이유가 나온다.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우리는 신앙의 잠을 자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한다. 베드로는 육신의 잠만 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잠도 잤다. 베드로는 잠자는 것과 참 상관이 많다. 예수님의 마지막 철야 기도하실 때도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잠을 잤다.
그런 주제에 베드로의 본심이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여기는 산 위에, 엘리야와 모세와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신 곳이다. 이곳은 영광만이 있는 곳이다. 베드로는 이곳을 떠나기 싫었고, 이 순간이 영원히 붙잡고 싶었다. 산 아래로 내려가기 싫었다. 산 아래는 많은 고난과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다. 산 아래는 문제 많은 양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한다. 베드로는 그런 일은 생각만 해도 끔찍스러웠다. 생각하기도 싫었다. 베드로는 십자가 없이 예수와 영광을 누리기를 바랐다. 고난을 피하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인 것 같다. 우리 마음속에도 십자가는 덜 지고 영광은 많이 누리기를 바란다. 한국사람은 요행 심리가 많다. 그래서 한탕주의로 벼락부자가 되고 떼돈을 벌려고 하다가 사기를 당하는 사람들이 많다. 여러분, 분명한 것은 십자가가 없이는 영광의 면류관도 없다.
마 17: 5. 홀연히 빛난 구름이 덮으며 -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
그가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이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친 음성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하여 또한 후시대에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친 음성으로 아들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여 주셨다. 베드로는 후에 그의 두 번째 서신에서 이 사건을 회고하면서 예수님의 신성(神性)의 영광을 눈으로 보았고 귀로 들었으며 하나님께서 친 음성으로 주신 증언를 들었다고 말하였다.
* 벧후 1: 16-18 –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1]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친 음성의 증거이다.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하여 친 음성으로 아들에 대해 증언하여 주셨다.
이것이 제자들이 간혹 경험했던 예수 그리스도 신성의 영광이다. 그 영광은 육체에 가리워져 있었으나 때때로 이런 저런 증거들과 함께 나타났다.
* 요 1: 14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베드로 사도는 후에 그의 두 번째 서신에서 이 사건을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 벧후 1: 16-18 -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제자들은 예수님의 신성의 영광을 눈으로 보았고 귀로 들었다.
2]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이때 하늘에서 두 가지 음성이 들렸다. 하나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음성은 예수님이 두 번 들었다. 본문에서 한번,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이다.
그러니까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이 음성을 들으셨고, 이젠 십자가를 지려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이 음성을 들으신 것이다.
이 음성은 바로 하나님의 확인이다. '정말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이렇게 사랑하고 기뻐하는 내 아들을 너희를 위하여 지금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려고 한다.'는 뜻이다.
또 하나의 음성이 무엇인가?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지금 우리를 향하여도 주시는 말씀이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바로 듣기 바란다. 그리고 그 말씀을 의심하지 말고 순종하기를 바란다.
이 말씀은 특별히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수난을 예고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갈 때 도망가지 말라, 그분이 3일 후에 부활한다고 했을 때 그 말을 의심하지 말라. 그분이 다시 오신다고 했을 때 그것을 분명히 믿으라'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까지 믿지 못했다.
3] 산과 기독교
예수님은 산을 좋아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예수님과 산은 많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시험을 받으실 때에도 '지극히 높은 산'에 가셔서 시험을 받으셨으며(마 4: 8), 산에서 많은 기도와 설교를 하셨다.
* 마 14: 23 -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 눅 6: 12 -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그리고 본문에서의 변형도 역시 높은 산에서의 사건이었다. 예수의 변형사건은 기독교의 신비를 드러낸 사건으로 매우 깊은 영적 의미가 있다.
(1) 기독교는 산의 종교이다.
① 인류 역사의 시작과 종말
인류 역사의 시작은 에덴동산에서 시작했다. 노아 홍수 후 인류가 재출발한 곳도 아라랏 산에서부터이다.
* 창 8: 4 - 일곱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이삭을 헌납한 곳도 모리아 산이었으며, 그것은 나중에 솔로몬의 성전터로 이어져 신앙의 진원지가 되었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내겨주신 곳도 시내 산이었다. 여호와 종교가 위기에 처했을 때 엘리야가 참 종교를 증명한 곳도 갈멜 산이었다
* 왕상 18: 19-40 – 19 그런즉 사람을 보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아오게 하소서. 20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로 사람을 보내 선지자들을 갈멜산으로 모으니라. 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22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 23 그런즉 송아지 둘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그들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말며 나도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않고 24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하니라. 25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붙이지 말라. 26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27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28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29 이같이 하여 정오가 지났고, 그들이 미친 듯이 떠들어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르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 30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그에게 가까이 가매, 그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31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엘리야가 돌 열두 개를 취하니 이 야곱은 옛적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32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제단을 쌓고 제단을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스아를 둘 만한 도랑을 만들고 33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34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째로 그리하라. 하여 세 번째로 그리하니 35 물이 제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 찼더라. 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40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다윗이 이스라엘 왕국의 기초를 놓은 곳도 다윗 성, 즉 시온 산이다.
* 삼하 5: 7 –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 성이더라.
예수께서 구속 사역을 완성하신 곳도 갈보리 산이었으며, 재림하셔서 그리스도 왕국의 수도가 되어질 곳도 산이다.
* 사 2: 2-4 – 2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3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4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이처럼 산은 구약과 신약시대 전반을 통하여 기독교의 진원지 역할을 해 왔다.
② 산의 의미
산은 인간이 하나님과 만나는 접촉점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산은 지표에서 가장 높은 곳이며, 이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개념적 기저(基底)가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산에 올라가며,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이 만나게 되면 거기서 창조적인 새로운 일이 시작되었다.
산은 스스로 준비되지 아니한 모든 것의 접근을 불허하는 생리를 지니고 있다. 훈련과 장비를 준비하지 아니한 등반자의 접근을 산은 거부한다. 속세의 잡다한 상념을 떨쳐버리지 아니하고 산에 오른다는 것은 무용한 일이다.
산에 오른다 함은 세상 일을 잊는다 함이며, 그것은 '거룩'과 연관이 된다. '거룩하게 된 자' 또는 '거룩하게 되려고 갈망하는 자'가 아니면 산은 용납하지 아니한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산에서 '거룩'이 준비된 자를 만나신다. 또한 산은 문명을 배척한다. 문명의 특질은 다양하고 복잡한데 있고 산의 특징은 오직 정상, 즉 단일한 데 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며 진리는 단순하고 역시 하나다.
최고와 최선은 하나님의 속성이며 이것을 닮으려 하는 자가 산에 오른다. 이 세상의 최고와 최선의 것이 산에 오른 사람을 통하여 낮은 데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부여(附與)된다. 산은 높고, 거룩하고 홀로 존재하며 모든 것의 근원이다.
(2) 기독교는 신비의 종교다.
① 산에 가신 목적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산에 가신 목적을 누가는 기도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 눅 9: 28 -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그러나 기도는 어디서나 가능하다. 그런데 왜 높은 산까지 가셔서 기도하신 것일까? 거기에는 기도 이외에 변형된 모습을 가장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보여 주기 위함이라고 생각된다. 예수의 변형은 기독교의 신비를 드러내 보이시는 것으로 부활과 재림의 진리에 대한 확고한 증명이다.
그것은 예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도 해당되는 진리다. 이 진리가 개인에게 적용되는 것은 신비로운 체험을 통해서다. 기독교에서 신비를 제하면 철학으로 전락하고 만다.
② 기도 중에 변형되심
* 눅 9: 29 -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다가 변형되셨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이 만남에서 예수는 이 세상에서 영원한 세상으로 흡수되어 버린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존재로 변화되신 것이다.
1천5백여년 전의 모세와 9백여년전의 엘리야와 현재의 예수께서 자리를 함께 하셨다. 그것은 장차 주의 재림의 날에 있을 죽은 자 (모세-죽은 자의 대표)와 산 자의 부활과 변화를 계시하신 것이다.
과거와 미래가 현재 속에서 하나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시간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없다. 오직 영원한 시간만이 있을 뿐이다.
③ 산 위와 산 아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이 '영원'을 체험하였다. 얼마나 황홀하고 좋았던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초막 셋을 짓고 여기서 함께 살자고 했다.
* 눅 9: 33 -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그러나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없으셨다. 그리고 그 이튿날 예수의 일행은 산에서 내려왔다.
* 눅 9: 37 -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시니 큰 무리가 맞을새
산 위에 올라가서 하는 기도, 산 위에서 겪은 신비로운 체험, 그것은 산 아래에 있는 불쌍한 인간들을 위한 것이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다. 기독교는 '신비한 종교'이지 '신비의 종교'는 아니다.
'신비'가 수식어가 되어야지 주격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신비는 그것이 현실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삶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으로 적용되지 않는 한 무가치한 하나의 신비주의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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