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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徐福) or 서시(徐巿)
고대 중국 진(秦)의 방사(方士
기원전 255년에 제(齊)에서 출생
BC 221년 6국을 복속시키고 천하통일한.,진시황(秦始皇).
이후 불로장생을 위한 영약을 구하기 위해 신하들을 내보내
불로초를 구하러 사방으로 보냈으나 불로초를 구해오지 못했다.
경남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
금산(錦山) 기슭.,거북바위.
예로부터 서복이 새긴 것으로 알려진.,거북바위 암각문.
탁본을 1860년에 중국으로 가져가 금석학 전문가에게 감식.
결과 ‘서불과차(徐市過此, 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고 해석.
서복은 시황 28년(기원전 219년)에 진시황제의 허가를 받아
동남동녀 수천명과 불로초를 찾아 나섰지만 첫 출항은 실패.
전설에 따르면 서불은 그후 2차 대규모 선단을 거느리고 출항.
한국 남해 영악 보타산.
금산 산하 앵강만의 포구인
벽련포와 두모포에 기착하였다.
이들은 이곳을 중심으로 수년간 불로초를 찾다가
상륙지점에 암각문을 새긴 후 다음 목적지로 출발.
서복이 한국을 찾아왔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지만,
한국인들이 가장 알고 싶은 것은 삼신산이 어디냐는 사실.
서복이 삼신산으로 선단을 움직였을 것임은 자명한 사실인데
이에 대한 자료는 사마천 사기를 비롯해 여러 사료에 등장한다.
'사기' '회남 형산 열전'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서복으로 하여금 바다에 들어가 신선(神仙)에게
기이한 물건을 구하게 하니, 그는 돌아와 거짓으로
말하기를 “신이 바닷속의 대신(大神)을 만났는데
‘네가 서황(진시황)의 사자이냐?’ 묻기에 신(臣)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자 ‘너는 무엇을 구하느냐’
라고 묻기에 ‘수명을 연장시키는 약을 원합니다’ 대답.
그 신(神)은 ‘너는 진왕(秦王)의 예(禮)가 박하여
그 약을 볼 수는 있으나 얻어 취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고는 바로 신(臣)을 데리고 동남쪽 봉래산으로 갔다.
영지초(靈芝草)로 이루어진 궁궐이 보이고사자(使者)가 있었는데 구릿빛에 용의 형상.
그 광채가 하늘까지 비추었다. 그래서 신(臣)이
재배하고 ‘마땅히 어떤 예물을 바쳐야 합니까’라고
묻자 해신(海神)은 ‘양갓집 사내아이와 계집아이 그리고
백공(百工, 장인)들의 제품을 바치면 그것을 얻을 수 있다’
진시황이 크게 기뻐하며
동남동녀 3천명을 보내고
갖가지 오곡과 백공들의
제품을 가져가게 하였다.
그러나, 그후에 그로부터 서복은
평원(平原)과 넓은 곳을 얻어 그곳에
머물러 왕이 되고 돌아오지 않았다 한다.
서복은 남해를 거쳐
제주 '탐라국'을 거쳐
일본으로 갔다고 한다.
남해군.,노량해협
조선시대 - 남해도.,남해왜성 & 노량해협
.
.
남해도.
..........조선시대.,신시(神市)............
환웅이 세상을 다스린지 몇천세 지났다.
환웅은 버드나무 대궐과 쑥대 정자에서
순채를 먹고 살았고 머리털을 늘어뜨리고
소를 타고 다니며 세상을 평화롭게 다스렸다.
자연으로 되는 이치를 널리 펴 사람은
물론 모든 생명체들을 두루 보살펴 번성.
어느덧 나라의 기틀이 완전히 세워지고
인류의 큰 싸움이었던 탁록대전도 끝났다.
사람과 만물이 다시 즐겁게 어울려 살고
천하태평 하자, 환웅은 태백산으로 올랐다.
환인이 준 천부인 세 개를 연못가 신단수인
박달나무에 걸어두고, 신선이 되어 구름타고
하늘나라로 올라갔다. 후에 사람들이 이 연못을
조천지(朝天池)라 부르니, 바로 오늘날 백두산 천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
국내에서 기가 가장 강한 곳
'전국 제1의 생기처'.,참성단.
단군 이래로 임금들이
나라 번영을 위해 제를 올렸다.
참성단 밑은 둥글고 제단은 네모반듯.
제단 앞에는 성화를 보존하는 화로가 있다.
맑은 날엔 태양빛을 모으고,
흐린 날엔 부싯돌을 사용하여
불을 붙였다고 하는데 참성단은
천지와 백록담 한가운데에 위치.
백두산 천기와
한라산 지기가
모인다는 중심.
백두산 중심으로 신시(神市)라는 나라를 세운.,환웅.
산에 길과 굴이 없고 물에 배와 다리가 없었던.,첫 나라.
나무와 풀이 무성하고 짐승들은 무리지어 어울려 살았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쉬고,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물을 마시며
평화롭게 살았는데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환웅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큰 가르침을 세웠다고 전한다.
'자연의 이치를 따라 세상을
다스려 널리 이롭게 한다' -환웅
바로 홍익인간으로 '신시' 정치이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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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웅은 치우씨에게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치우씨는 신통력으로 산과 숲에 길을 만들었다.
벌레. 짐승. 물고기들은 저마다 자리잡고 살게했다.
그리고, 사람들을 해치지 못하게 하였다.
사람에게는 집짓고 사는 방법을 알려줬다.
칼 ・ 도끼 ・ 활 ・ 창 등 도구와 병기를 만들어
스스로를 지키게끔 가르쳤는데 그러자 비로소
다른 생명체와 사람들 사이에 질서가 생겨났다.
....한국의 창세 신화.....
환웅은 말로 전한 것들이
세월이 흐르면 사라지는 것을 염려.
신지씨를 불러 글자를 만들라 일렀는데
신지씨는 어떻게 글자를 만들까 고민을 거듭.
어느날, 그는 숲으로 사냥을 갔다가 덤불 속에서
암사슴이 튀어나오기에 잽싸게 활을 뽑아들었지만
시위를 당길 틈도 없이 암사슴은 산과 들을 지나 도망.
그가 어느 바닷가까지 쫓아갔는데도 암사슴을 잡지 못했다.
다만, 도망친 암사슴의 발자국만
수도 없이 모래밭에 찍혀 있을 뿐.
신지씨는 그곳 발자국을 여러모로
살피다가 문득 고개를 끄덕였다 한다.
"말을 적는 방법은 오직
이것 밖에는 없겠구나."
그리고 돌아와 수없이 생각한 끝에
글자를 만들어내니, 이것이 바로
우리 민족의 첫 글자이다.
사슴의 발자국에서 깨달음을 얻어
만들었다 하여.,녹도문자(鹿圖文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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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우리나라 북쪽 육진 땅과 선춘 땅 밖의 지방에 가면,
바위 위에 고대문자 글씨들이 새겨진 흔적이 발견된다 한다.
'경상도 남해현 낭하리' 암벽에도 신시시대의 고각이 있는데,
'신지씨가 만든 글자'라는데. 이 글자들을 '남해도각자'라 한다.
남해도· 창선도 2개 본섬. 남해읍 중심.,남해군( 357.52㎢)
특산물로 '치자· 유자· 비자'를 '남해 3자' 인구 45,865(2015).
남해군 별호는., 전산(轉山)·화전(化田)·윤산(輪山) 등 이었다.
2010.1.13 경남 남해군 창선면., 고인돌
청동기시대 고인돌이 산재해 있으며
삼국시대 신라의 전야산군(轉也山郡)
757년 남해군 개칭, 강주(康州, 진주) 속.
1358년 왜구침략이 심하여 주민들은
진주목 대야천부곡(大也川部曲)으로
피란했다가 1404년 복구했던 곳이다.
1414년 하동에 병합되어 하남현(河南縣)이라 했다가
다음해 분리되었으며, 그뒤 금양부곡과 합해.,해양현.
1417년 남해현으로 환원되었다. 1598년에 임진왜란 말,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함대가 노량 앞바다에서 왜군을
크게 물리쳤으나, 이곳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했다.
조선시대에는 유배지 가운데 하나.
많은 인물들의 자취가 있는.,남해군.
.........................남해도(南海島).........................
경남 남해군 주도(主島)로., 대한민국 5번째 섬(301㎢)
한려해상국립공원 일부로.,위치 동경 127°53′, 북위 34°49′.
남북 간의 길이는 약 30㎞이고, 동서 간의 길이는 약 26㎞.
창선도를 비롯한 크고 작은 13개 부속도서.,남해군.
북쪽은 노량수도(露梁水道) 건너 하동군과 사천시에,
동쪽은 남해해협을 끼고 통영시에, 서쪽은 여수만 넘어
전라남도 여수시에 접하며 남쪽은 대한해협에 면하고 있다.
지질상으로는 경상계 신라통에 속하며,
암석은 화강암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다.
남해도는 소백산의 최남단에 위치하며,
산세가 매우 험준하고 금산(錦山, 701m)·
원산(猿山, 627m)·망운산(望雲山, 785m) 등.
산지가 많고 평야가 협소해
농경지가 발달하지 못하였다.
기후는 난류의 영향으로 따뜻한데, 연평균기온은 14.5℃,
1월 평균기온 2.6℃, 8월 평균기온 25.6℃, 연강수량 1,730㎜.
2009년 기준 창선도의 인구를 포함하면
5만 557명(남자 2만 4157, 여자 2만 6400)
세대수 2만 2234 남해군에는 남해읍을 비롯.
9개 면 가운데 창선도는 창선면으로 구성되고,
나머지 1읍 8개 면이 본도(本島)인 남해도에 있다.
남해읍 인구 1만 3770명으로 많고,
상주면의 인구 규모가 가장 작다.
주요 농산물은 쌀·콩·마늘·고구마 등, 연안 일대에는
김·굴·도다리·광어·바지락 등 양식업이 발달해 있다.
해안선 출입이 심해 어항이 많고, '반농반어'가 많다.
밀감 및 밤나무 밭이 조성되어 있고, 한우 사육 등 활발.
.
바다가 얕아서 좋은 산란장을 이루는 까닭에
산란기 봄여름에는 난류성 어족 어획량이 많다.
총 어획고에서 멸치·갈치·고등어·감성돔 등 어류가
차지하는 비중이 80% 이상이고 나머지는 패류이다.
1973년 6월 남해대교의 개통으로 하동군과 연결되었으며,
1980년 6월 창선교가 개통되어 남해도와 창선도가 이어졌다.
2003년 4월 28일 '창선도~사천시' 3.4㎞ 창선-삼천포대교 개통.
이로 인해 남해도는 북쪽과 동쪽 모두 육지와 연결.
더 이상 섬이라 할 수 없는 만큼 교통이 편리해졌다.
국도 3호선, 19호선, 77호선이 남해도 연결.,해안일주.
특히, 한려해상국립공원., 남해도 금산 38경은 유명.
충렬사(忠烈祠)·용문사(龍門寺) 등 명승고적이 많다.
남해읍은 남해군 행정·산업·교통중심, 농산물 집산지.
노량은 해상교통 중추적 구실을 담당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전사한 곳이다.
....................................................
.
남해도 종주
남해 다랭이마을
..............남해 다랭이마을..................
다랭이는 협소한 농지를 뜻하는 우리말로,
이 마을 사람들은 ‘삿갓배미’라고 표현한다.
바닷가 해안절벽에 가파른 지형을 끼고 있어
배를 정박하기도 어려운이라 이 곳 사람들은
주위 척박한 산비탈을 개간해 농사짓기 시작.
하루는 어떤 농부가 종일 논을 갈다가
해가 저물어 집으로 돌아가기 전 자기의
논을 세어 보니 한 배미가 없어졌더랬다.
몇 번을 세어 보았지만 찾을 수 없어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벗어둔 삿갓을 들었더니
삿갓 아래 한 배미가 있었다는 다랭이논의 일화.
약 100층 대규모로 형성되어 있는.,다랭이논.
배후의 높은 산과 앞으로 펼쳐진 바다와 조화.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빼어난 경관을 드러낸다.
봄에 유채꽃 만발, 여름에 모내기
가을벼가 여물어 고개를 숙일때 등
이곳은 사시사철 그만의 색을 발하며
인간의 삶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2012년 CNN 선정.,다랭이마을.
대한민국 관광명소 3위에 랭크.
관광지로서의 가치를 인정한다.
오랜 시간 보물섬 내 숨겨졌던 원석처럼,
아름답지만 알려지지 않았던 다랭이마을.
요즘 TV와 인터넷 매체를 타고 소개되면서
누구나 한번쯤 가고 싶은 관광지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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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박집 순례
바다 전망이 좋은 집
SBS 땡큐 촬영 팀.,민박
다랭이마을., 옛 사진.
남해가 바라보이는.,팬션.
사천 삼천포~남해도
................남해 독일인마을..............
1960/70년대 간호사. 광부로 독일에 가서
살다가 노후에 귀국해 남해에 정착한 사람들.
고국산천 고향 땅을 그리워하다가 이곳에 정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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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금산 보리암
남해 금산
남해 금산 보리암.,해수관음상
금산 보리암
남해 금산
남해.,호도 & 조도
남해 힐튼 리조트
.................남해(南海)...................
동쪽은 대마도(對馬島), 서쪽은 흑산도,
남쪽은 제주도를 잇는 바다를 일컫지만,
보통 부산에서 전라남도 진도까지의 해역.
제주도 거제도 남해도 거문도 등 약 2,240개 섬
다도해로서, 전국 총도서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남해의 섬은 산맥이나 구릉이 침수되어 생긴 것으로
섬들의 방향이 비슷하며, 만과 반도 및 섬 등이 발달
해안선 드나듦이 매우 복잡한 리아스식 해안을 이룬다.
세계 어느 곳도 없는 수많은 섬 대한식해안(Korean Coast)
해안선 길이는 2,251km로 '해안의 직선거리 255km'의 8.8배
대부분 평균수심은 100m 대륙붕으로 수심이 얕다.
바다 조수의 차이는 동해와 서해의 중간 정도이다.
서쪽 전라남도 해안 일대의 넓은 간석지는 양식장.
대부분 평균수심은 100m 대륙붕으로 수심이 얕다.
바다 조수의 차이는 동해와 서해의 중간 정도이다.
서쪽 전라남도 해안 일대의 넓은 간석지는 양식장.
'해식애와 육계도 같은 암석해안의 경관들.'
난류에 의해 연중 수온이 일정하고
수심이 얕고 어류번식과 서식에 적합
사철 어로가 가능하여 3면의 바다 중
어획량이 가장 많고 어족이 풍부하다.
멸치는 진해만 중심으로 남해안 전역에서
3~12월에 많이 잡히는 대표적인 어종이다.
고등어·갈치·전갱이·삼치·도미·병어 등이 어획.
수산 양식업은 일본으로 수출하기 위해 본격적 시작
최근 경제가 향상되고 생선 수요 증가에 따라 급성장.
양식업은 간석지와 얕은 바다에서 이루어지며
굴 조개 홍합 등의 패류와 김 미역 다시마 등
굴은 통영 거제·진해에서 양식, 미국과 유럽에 수출.
김은 완도·고흥에서 양식, 겨울철 어민들 주요소득원.
옛부터 남해는 우리 민족의 대외교류 및 항쟁의 장소
삼국 시대에는 백제와 일본이 이곳을 통해 해외 교류.
통일신라 시대에는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
왜 당 해적을 무찔러 해상왕국을 세우고, 당과 교역.
고려시대에는 삼별초가 진도를 중심으로 활약했으며,
조선시대 왜구 침입에 대비, 경상도 전라도에 수영 설치.
임진왜란 때 충무공은 명량 노량 한산도에서 왜군을 대파.
해안 일대에는 동래 마산 등의 온천 휴양지와
해운대 송지 등의 해수욕장은 전국적인 피서지.
크고 작은 섬과 충무공 전적지 중심으로 바다경관이 수려
동쪽 거제도에서 여수에 이르는 곳곳이 한려해상 국립공원
서쪽 여수에서 신안군에 이르는 곳곳이 다도해 해상국립공원
..................................................................................
남해도.,금산.
남해도 금산은 한려해상 국립공원 내 있는 산.
규모는 작지만 국립공원 내 유일한.,산악 공원.
기암괴석 절경과 남해를 한눈에 굽어보고 있어
전망이 장쾌하고 한겨울에도 포근한., 등산 코스.
금강산을 빼어 닮았다 하여 소금강 혹은 남해 금강
이성계가 기도했다는 이씨기단(李氏祈壇)을 비롯하여
삼사기단(三師祈壇), 쌍룡문(雙龍門), 문장암(文章岩),
사자암(獅子岩), 촉대봉(燭臺峰), 향로봉(香爐峰), 음성굴
천태만상 암석과 울창한 숲이
눈 아래 바다와 절묘하게 조화
1974년 경남 기념물 18호로 지정.
금산의 옛 이름은 보광산이다.
여기에 한가지 일화가 전해온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왕조를 세울 당시
보광산 백일기도 후 거사를 도모하였고
그 일로 인하여 조선을 건국할 수 있었다.
남해도 금산 정상에 있는.,봉화대.
남해로 들어오는 왜구 침략에 대비.
'고려 말~ 조선 초'세워진듯 추정된다.
.......................
.......................
이성계는 기도처에서 뜻이 이루어지면
산을 비단으로 감싸겠다고 천신과 약속.
이를 지키려하자, 한 총명한 신하가 충언.
"큰산을 비단으로 감싼다는 것은 경제가 허락치 않고,
비단은 삭으니 빛나는 이름을 하사하는 것이 좋을 듯"
이성계가 이이를 받아들여 비단 금(錦)자 금산이라 명명.
금산은 동쪽으로., 기암괴석,
남쪽으로., 미조항, 송정,상주 해안과 섬들
서쪽으로., 서포 김만중 유배지 & 아기자기한 바위들.
금산 상사바위
옛날 어떤 고을에 곱게 자란 무남독녀를 가진 부자가
많은 하인들을 거느렸는데 그 하인들 중 '돌쇠'라는 이가
주인딸을 무척 사랑했지만 신분 차이로 인해 마음만 태웠다.
그것이 그만 병이 되어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되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 그 딸이 자고 있는 방 안으로
뱀 한마리가 들어 왔는데 죽은 돌쇠의 혼이 나타난 것.
뱀은 자고 있는 딸의 몸을 칭칭 감고 말았다.
딸의 부모는 굿도 하고 뱀을 죽이려고 하였다.
하지만 뱀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고 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염이 길게 난 노인이 나타나서
금산 벼랑에서 굿을 권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
그후 딸의 부모는 곧 금산에서 제일 높은 벼랑으로
딸을 데리고 가서 굿을 한참 동안 올렸는데 그 즈음
딸의 몸속 뱀이 풀어지며 벼랑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그후 사람들은 이 벼랑을
'상사바위'라 부르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전설이 전승되고 있다
이곳 상사바위에는
오늘날까지도 두 가지
색다른 전설이 전해온다.
................'안방마님과 돌쇠'.,전설...............................
조선 숙종 때 전남 돌산에 사는 청년이 남해로 머슴 살러왔다.
돌쇠는 자태가 고운 안방마님을 흠모하다가 상사병에 걸렸다.
예나 지금이나 약도 없는 상사병에 청년은 시름시름 죽어갔다.
.
이를 보다 못한 과수댁 안방마님은 금산으로 돌쇠를 불러냈다.
금산에서 돌쇠는 상사병을 낳게 되었고,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훗날, 상사바위라 했고 상사풀이 할 때 뒷물로 썼다는 구정암.
금산 38 경 중 28경 구정암은 엉덩이 크기 9 개 홈이 물확 같다.
숙종 때 남해로 귀양왔던 약천 남구만은 구정암을 보고 감탄한다.
'도대체, 몇 해 동안에 아홉 샘이 패인걸까?'
안방 마님과 돌쇠는 백년해로하며 그곳에서 잘살았다고 한다.
그곳 파인 웅덩이마다 빗물이 고여 '운우의 정'을 실감나게 한다.
27경 상사암은 금산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조망이 아름다운 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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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雨之情(운우의 정) - 김삿갓.
爲爲不厭更爲爲(위위불염갱위위)
不爲不爲更爲爲(불위불위갱위위)
해도 해도 싫지 않아 다시 하고 또 하고
안 한다 안 한다 하면서도 다시 또 하고..
.
이곳에 오면
약천 남구만 시조가
절로 떠오르는 전설의 고향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 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어났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주인 따님과 돌쇠., 전설........................
금산 상사암에 무남독녀를 가진 부자와 수많은 하인들이 살았다.
그중 돌쇠는 부자의 무남독녀와의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상사병.
감히, 주인의 딸을 사랑한다는 말도 못하고 가슴속에서 애만 태웠다.
돌쇠는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혼이 뱀으로 환생.
사랑하는 그녀가 잠자는 방으로 들어가 몸을 칭칭감고 풀어주지 않았다.
돌쇠는 그녀와 이승에서 못다한 원을 풀려고 죽어 다시 찾아온 것이었다.
그녀의 부모는 굿을 하는 등
별 수단을 다 동원해 보았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어 수심에 잠겼다.
그러던 어느날, 홀연히 나타난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
"금산에 있는 높은 벼랑으로 가서 굿을 한번 해 보시오"
그녀의 부모는 뱀을 감고 있는 딸을 데리고 금산으로 갔다.
그곳 벼랑 위에서 굿을 하자 뱀은 벼랑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하여, 지금도 상사병 총각의 넋과 마음을 달래어 주는 상사바위.
.....................................................................................
상사바위 구정암.
금산은 기암 38경이 유명하고
한려수도와 여수를 내려보는 곳.
남해 부소암 상사바위에서 본.,남해.
부소암은 '진시황의 아들' 부소가 이곳에 유배되어
살다가 갔다는 전설과 단군의 셋째아들 부소가 방황하다
이곳에 앉아 천일을 기도 하였다는 전설의 고향이기도 하다.
아울러, 산행, 여행, 해수욕, 낚시, 레져를 함께 즐길 수 있는 곳.
금산 38경 중 1경 망대에는 고려 시대부터의 최남단 봉수대가 있다.
7경 태조기단은 이성계가 100 일 기도를 올려 조선을 창건했다는 곳.
29경 감로수는 조선 숙종이 병을 고친 샘(상사암 남쪽 아래).
34경 부소암은 진시황 아들 부소가 유배되었다는 전설의 바위.
35경 상주리 석각은 서불이 500 동자를 거느리고 와서 남긴 흔적.
.
남해도 금산 38경 일출봉은
다도해 일출을 감상하는 명소.
...........
보리암.
...........
주봉인 망대(701m)를 중심으로 왼편에 문장봉, 대장봉,
형사암, 오른편에 삼불암, 천구암 등 암봉이 솟아 있다.
탑대(고제암)를 중심으로 가사굴, 쌍홍문등 명소가 많다.
38 절경 중 쌍홍문, 사선대, 상사암, 암불암이 대표적
쌍홍문은 해골에 두 눈이 뻥 뚫린 듯한 높이 7~8m 쌍굴.
온화한 미소의 해수관음상이 있는 쌍계사의 말사 보리암.
545년전 조선시대 이륙이 쓴 유두류록.
천왕봉 아래 암법주굴에서 바라본 남해.
다도해 풍경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
이성계굴.
.
지리산 법주사 뒤에 있는.,암법주굴(이성계굴)
'지금은 공해 때문에 남해까지 보이지는 않지만.'
조선시대까지 만 해도 지리산은.,' 남해안 전망대'.
남명 조식의 유두류록에도 나타난다.
'수백척 왜구들의 배가 보였을 만큼..'
낙산사 홍련암,
강화도 보문사와 함께
보리암은 우리나라 3대 기도처.
보리암을 지나 조금 오르면 좌우로 갈라지는 갈림길.
왼쪽이 상사암이고 정상에 오르면 한눈에 다도해 풍경
특히, 이곳 일출은 금산 38경 중 제 38 경으로 황홀경이다.
신라 신문왕 3년에 원효 대사가 세웠다는 고찰
전국 불자들의 발길이 끊일 줄 모르는 곳이다.
금산 보리암은 금산 38경과 망망대해 전망대.
경내에는 인도에서 허황후가 가져왔다는 3층 석탑.
제주도, 남해도를 거쳐 김해 망산도에 입도한 허황후.
남방불교가 한반도에 직접 도래한 경로를 대변하여 준다.
또한, '원효대사가
이곳에 안치하였다.'
는 전설도 전하여온다.
1977년 세워진 보리암.,해수 관음보살상.
보리암 돌집.
...................남해도 금산 봉수대..................
봉수(俸燧)는 높은 산에 올라 밤에는 횃불[俸]로,
낮에는 연기[燧]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통신 제도.
외적의 침입을 알리는 군사적 목적에서 실시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록상 고려 중기(12,3세기)에
이 제도가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실시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우리나라에서 봉수제가 체계적으로
정비된 때는 왜구의 침입이 금심했던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 이후였다.
봉수대는 각각 일정한 거리를 둔 산꼭대기
중에서도 시야가 확 트인 곳에 설치하였다.
평상시 불꽃이나 연기를 한 번 올리지만[一炬 또는 一煙],
적이 바다에 나타나면 두 번, 적이 해안에 근접해 오면 세 번,
바다에서 접전이 이루어지면 네 번, 육지에 상륙했을때 다섯 번.
봉수대에 불꽃이나
연기를 피워 올렸다.
이곳 금산 봉수대는 고려
의종(1147~1170 재위) 때 설치,
그후 조선시대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이 봉수대는 조선시대 다섯 곳의 중심 봉수로(烽燧路) 가운데서
동래(東萊)에서 서울로 연결되는 제 2봉수로에 속한 최남단 봉수.
이곳에서 점화된 봉수는
창선 대방산을 통해 사천(四川),
진주(晉州)등을 거쳐 서울에 전달되었다.
금산봉수대는 해발 681m인 금산에 자리잡고 있고
둘레는 26m의 네모난 형태이며, 높이는 4.5m이다.
......................................................................
남해 금산은
일명 소금강(小金剛) 또는
남해금강(南海錦江)이라고 한다.
또는 금강산을
개골산(皆骨山)이라 하는데
비유하여 금산을.,"개암산(皆岩山)".
.
본래 신라 원효대사(元曉大師)의 기도처로서.,보광산(普光山).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등극하기 전에 이 산에서 수도하면서
기원한 결과 그 이상을 달성하여 왕좌에 오르게 되자 은혜를 갚기 위해
비단 ‘錦(금)’자를 써서 ‘普光山(보광산)’에서 ‘錦山(금산)’으로 바꿔 불렀다.
............
...............
전설에 의하면.,금산은
"이성계가 조선의 창업을
구상했다."는., '백일 기도처.'
조선창업 이후에
왜구의 침공에 대비
금산에 봉수대를 설치.
봉수대 운영 계획을 수립.
조선시대 금산 보리암은
봉수대 지킴이.,승병 사찰.
금산 보리암.,위치.
남해도
.
남해도.
탈해가 남해왕의 사위가 된 다음
삼국유사 탈해니사금의 이야기다.
......................석탈해 설화.......................
하루는 토해(吐解)가 동악(東岳)에 올라갔다가
오는 길에 백의(白衣)를 시켜 물을 구해오라 하매,
백의가 물을 떠가지고 오다가 도중에 먼저 맛보고
드리려하니 그 물 잔이 입에 붙어 떨어지지 아니하였다.
백의를 꾸짖으니 백의가 맹세하기를,
“이후에는 가깝거나 멀거나 감히 먼저
맛보지 않겠습니다.” 그제야 떨어진 그릇.
지금 동악에 우물 하나가 있어 사람들이
요내정(遙乃井)이라 하니 바로 이것이다.
이 대목은 탈해가 일종의 신통력을 가지고 있음을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탈해의 다른 이름이 토해(吐解)인데,탈해와 음이 유사하다.
동악은 토함산을 말하는데, 토함과 토해의 발음이 또한 비슷하다.
토함산은 신라 동악, 뒷날 불국사와 석굴암이 만들어진 소중한 산.
탈해왕이 "동악의 신이 되었다." 하니, 탈해와 토함산은 깊은 인연.
신라 오악(五岳)
삼국통일 전
동악은 토함산,
서악은 선도산(仙桃山),
남악은 남산(南山),
북은 북악(北岳),
중앙은 부악(釜岳).
그리고 통일 후에는
국토가 넓어짐에 따라
신라의 동서남북을 대표하는
산악을 다시 지정하였는데,
동악에는 토함산(吐含山),
서악에는 계룡산(鷄龍山),
남악에는 지리산(智異山),
북악에는 태백산(太伯山),
중악에는 부악(팔공산 :八公山).
오악은 통일신라의 상징적인 존재의 하나로서
나라의 진산(鎭山)으로서 국가의 제사를 받았다.
오악에 대하여,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로 구분
국가적 제사 가운데 중사의 예로 나라의 평안과 발전을 기원.
노례왕이 서거하매 광무제(光武帝) 중원(中元) 2년
정사(丁巳)(57년) 6월 탈해는 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성을 석씨(昔氏)라 하였다. 까치로 인해 궤를 열게 되어
작자(鵲字)에서 조자(鳥字)를 떼고 성을 '석씨'라고 했고,
궤를 열고 알에서 벗어져 나왔으므로 이름을 탈해라 하였다.
재위 23년 건초(建初) 4년
기묘(己卯)(79)에 돌아가니
소천구(疏川丘)에 장사지냈다.
그 몸의 뼈 길이가 9척 7촌이나
되는데 엉키어 하나가 된 듯하고
뼈마디가 모두 연결된 역사(力士).
27대 문무왕 때인,
당 고종(唐高宗) 조로(調露)2년(680)
3월 15일 밤,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탈해인데 내 뼈를 소천구에서 파내어
소상(塑像)을 만들어 토함산에 봉안하라” 하였다.
왕이 그 말을 좇았다. 탈해는 곧 동악신이라 한다.
소천구를 삼국유사 왕력에 소정구(疏井丘)라 하였다.
이상 탈해임금 행적을 보건대, 지모와 신통이 있었으며,
동남아든 일본북부에서든 해상에서 경주로 온 세력이다.
골격이 크고 튼튼했다는 기록은 한국인이 아니라는 의미.
그가 하나의 세력권인 사실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도 나온다.
수로왕 즉위 초,
어린 탈해가 나라를
뺏으러 왔는데, 술법으로
겨루어 지자 서라벌로 패주.
탈해 임금의 이야기에는 바다가 많이 나온다.
탈해가 온 아진포와 해척, 일본의 동북쪽 천리라는
다파나국, 용성국과 용에 관한 이야기 등이 그것이다.
그의 출신지가 일본의 동북쪽으로
천리 가량 된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지금의 북해도 또는 캄차카 반도 출신.
당시 일본 중심지가 나라 또는 교토.
이곳에서 동북방 1000리는.,홋카이도.
대보 벼슬을 지낸 호공도 왜인이라 했는데
여러 정황으로 탈해 역시 왜인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탈해와 호공은 신라 최초의 귀화인
'삼국유사' 탈해 탄강지(계림동 하서지촌 아진포)
1845년에 나라에서 탄강지에 하마비와 땅을 하사.
석씨 문중에서 이곳에 유허비와 비각을 건립했다.
현재, 이 비가 있는 곳은 '양남면 나아리'이다.
여하튼 탈해임금의 연원을 볼 때,
신라에는 해양계통의 강력한 세력.
...............................................
석탈해는 한반도 최초로 왕이 된 귀화인이 아니었을까?
신라 4대왕으로 재위 기간은 AD.57년에서 80년까지이다.
석씨 시조인 탈해는 혁거세와 마찬가지로 알에서 태어났다.
다파나국(多婆那國) 왕이 여인국(女人國) 왕녀에게 장가들어
7년 만에 태기가 있어 큰알을 낳았는데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왕이 그 큰알을 버리라고 했는데 왕비는 차마 그러지 못하였다.
비단으로 알을 싸고 보물과 궤짝에 넣어 바닷에 띄웠다.
그 궤짝이 처음 금관국 해변에 밀려들었으나 그곳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그냥 보내니 '양남면 나아리' 아진포에 닿았다.
때마침 해변에 살던 아진의선이라는 노파가 배를 당겨
궤짝을 열었더니 작은 아이가 있어 이를 데려다 길렀다.
장성하자 키가 9자요 인물이 수려하고 아는 것이 많았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이 아이의 성씨는 알 수 없으나,
처음 떠내려 올 때 까치가 울며 따랐으니
까치 ‘작(鵲)’자에서 새 ‘조(鳥)’자를 떼어
‘석(昔)’자로 성을 삼고, 궤짝을 풀고 나왔으니
이름을 ‘탈해(脫解)’라 하여야 한다.”
서기 8년에 남해 차차웅의 사위가 된.,석탈해.
서기 10년에 대보(大輔)로 등용되어 정사를 맡았고
서기 43년부터는 손윗처남 유리 이사금의 대리청정을 맡았다.
57년 유리 이사금의 유언에 따라 남해왕이 된.,석탈해(BC 19~86).
신라 제4대 국왕(재위: 57년~80년)으로
성(姓)은 석(昔)이고, 뤼는 탈해(脫解)이다.
65년, 시림(始林)에서 김알지(金閼智)를 얻고
시림을 계림으로 개칭후, 계림을 국호로 삼았다.
왜 동북쪽 1000리에 위치한 티파니국 출생.,석탈해.
그 나라 용성국왕과 여왕국 왕녀 사이에서
7개월만에 알로 태어나 버려졌다는.,석탈해.
'다파나국'이 어디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탈해설화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사에
약간 차이가 있는데, 탄생국도 기록이 틀리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이사금조 -
"탈해는 본시 다파나국 출생으로 그 나라는
왜국의 동북 1,000리 되는 곳에 있었다."는 기록.
〈삼국유사〉 기이 제4탈해왕조에는
"그가 용성국의 왕인 함달파의 아들로
그곳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 기록.
이처럼 두 나라의 명칭이 다르지만,
〈삼국유사〉 주석에 용성국을 정명국
·완하국·화하국이라고도 하며, 용성이 왜
동북 1,000리에 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명칭만 다를 뿐 같은 나라일 것으로 보인다.
..........................용성국(龍成國)..........................
석씨(昔氏)의 시조이며 왕인 탈해(脫解)가 태어난 나라이다.
삼국유사에는 정명국(正明國)ㆍ완하국(琓夏國)ㆍ화하국(花廈國).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다파나국(多婆那國)으로 기록되어 있다.
용성국 함달파왕(含達婆王)이 적녀국(積女國) 왕녀를
왕비로 맞았는데, 오랫동안 아이가 없다가 큰 알을 낳으니,
그것을 궤에 넣어 칠보와 노비와 함께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웠다.
알에서 깬 탈해는먼저 김해 지역에 상륙.
거기에 정착하지 못하고 신라로 들어갔다.
용성국 위치는 '왜국의 동북쪽 일천리'.
이에 관해 대체로 다음과 같은 3가지 설.
첫째, 용성국은 동해에 있었다는 주장.
이에 대한 근거로는 『삼국지』동옥저전
'순녀국(純女國)'을 '적녀국'으로 해석한다.
둘째, 다파나국은 서역(西域)의 소국.
함달파는 불교의 음악신이므로
용성국은 서역에 있었다 한다.
탈해와 관련있는 수장(水葬) 풍속
동남아시아 7 쓰촨성[四川省],
그리고, 서역지역에 퍼져
있음은 이 학설을 뒷받침.
셋째, 해류의 흐름으로 보아 용성국은
중국 남부 해안지역에 있었다고 한다.
탈해신화 속에는 북방적인 야장설화(冶匠說話)와
남방적인 난생설화(卵生說話)가 모두 들어 있는데,
두 요소가 들어올 수 있는 경유지가 중국 중남부 해안.
다만, 오늘날 왜의 소재지가 확실치 않아
용성국이 동해안에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렇게 되면 용성국은 서역으로부터
중국 중남부 해안지역을 경유하여 해도로
신라에 도달하기까지의 어느 지역에
위치한 소국으로 추정할 수 있다.
............................................
다파나국은 '탐라국 또는 용성국'.,설(說)
일부에서는 인도 타밀인 촐라 왕국 출신 설.
그가 캄차카 반도 러시아 민족 출신이라는 설.
캄차카반도 원주민
칭기즈칸 후예를 자처하는 유목민 부리야트族
바이칼호수(샤먼의 바다) 주변., 브리야트 族
러시아 내 소수민족
캄차카반도에 버려진 선박들
클루쳅스카야 활화산
블라디보스톡.,극동함대
신라 4대 왕으로 듣극할 만큼
신라에 선진 철기문명을 전수한듯.
아울러, 강력한 동아시아 해상무역 세력.
김수로왕이 이끈 가야연맹체.,6국
200여척 함단과의 해전에서는 패전.
그후, 신라 6촌장 구 세력과 연합한듯.
철이 금보다 귀하고 비싸던.,시절.
신라에서는 '마이더스의 손' 석탈해.
하여, 그의 세력을 신라에서 영입한듯.
신라 왕조에 큰 영향을 끼친.,탈해왕.
'탈해왕 양자'.,'신라김씨 시조' 김알지.
김알지의 7대손으로부터 신라왕이 된다.
신라 김씨왕조 출범과 관련이 깊은.,남해도.
..............................남해도 연혁...................................
통일신라 때인 690년(신문왕 10)에 전야산군(轉也山郡)을 설치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고려 현종 때 현령을 두었다.
고려 말, 공민왕 때 왜구의 침입으로 무인도가 되었다.
조선 태종 때 하동과 합쳐서 하남현(河南縣)이 되었다가
세종 때 남해현으로 개칭하고, 고종 때 남해군이 되어.,현재.
동경 127°53′, 북위 34°49′에 위치,
동쪽 창선도까지를 남해도에 통합.
남북 간의 길이는 약 30㎞이고,
동서 간의 길이는 약 26㎞이다.
표주박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남해군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이다.
면적은 355.12㎢, 해안선 길이는 302㎞.
창선도를 비롯한 13개 부속도서.,남해군
북쪽은 '노량수도' 건너 하동군과 사천시.
동쪽은 남해해협을 끼고 통영시,
서쪽 여수해만 넘어 전남 여수시.
남쪽은 대한해협에 면하고 있다.
남해도는 소백산 최남단에 위치하며, 산세가 매우 험준.
금산(錦山, 701m)·원산(猿山, 627m)·망운산(望雲山, 785m)
평야가 협소하여 농경 발달이 어렵고, 해안선의 출입이 심하다.
표주박형의 양쪽에 각각 만이 하나씩이 있다.
주변 해역은 연근해 어업의 전진기지로서 역할.
연평균기온은 14.5℃, 1월 평균기온은 2.6℃,
8월 평균기온 25.6℃, 연강수량은 약 1,730㎜.
2009년 인구.,5만 557명, 세대수 2만 2234 세대.
남해군에는 남해읍을 비롯하여 9개의 면이 있다.
창선도는 창선면이고, 나머지 1읍 8개면이 남해도.
토지 현황은 논 47.72㎢, 밭 31.30㎢, 임야 240.55㎢.
주요 농산물은 쌀·콩·마늘·고구마 등이고, 연안 일대에
김· 굴· 도다리· 광어· 바지락 등의 양식업이 발달하였다.
해안선 출입이 심하여 어항이 많고,
반농반어. 밀감 및 밤나무 밭이 조성.
바다가 얕아서 좋은 산란장을 이루는 까닭에
산란기인 봄과 여름에는 난류성 어족이 많다.
멸치·갈치·고등어·감성돔 등 80%, 나머지 패류.
1973년 6월에 남해대교의 개통으로 하동군과 연결
1980년 6월 창선교로 남해도와 창선도가 이어졌다.
2003년 4월 남해 3.4㎞의 '창선~삼천포대교'가 개통.
남해도는 북쪽과 동쪽이 모두 육지와 연결됨으로써
더는 섬이라 할 수 없는 정도로 교통이 편리해졌다.
이로 인해 3, 19, 77 해안일주 국도가 남해도를 연결.
...................................................................
.
남해도~ 삼천포.
한려해상국립공원 가운데
경상남도 하동군에 포함된
관광지 노량수도(露梁水道).
.....................노량수도........................
노량수도는 폭이 좁아 조수의 흐름이 빠르고
맑아 청정 해역으로 이름난 '울둘목' 일대이다.
노량수도 북쪽에 솟은 금오산(849m)에서
바라본 노량수도 일대의 경관은 장관이다.
노량해협은 또한 해상 교통의 요지로 여수,
통영, 부산 간을 잇는 쾌속선이 지나다니는 길목.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이 전사한 곳.
하동군 일대의 맞은편에 남해 노량에는
충무공을 기리는 충렬사(忠烈祠)가 있다.
노량해협의 주요 관광 자원은., 남해대교.
하동군과 남해군을 잇는 연육교로
1968년에 착공하여 1973년에 준공.
..............................................
임진왜란 7년 전쟁 끝 무렵
죽음의 바다였던.,노량 해협.
정유재란 최후의 격전장이었다.
1592년(임진년, 선조 25) 조선을 침략.
1598년(선조 31)까지 이어진., 임진왜란.
동북아시아 3국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제1차 침략.,임진왜란.
1597년 제2차 침략을.,'정유재란'으로 정의.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년 8월 임진왜란의 정전회담이 결렬됨에 따라
이듬해인 1598년 연말까지 지속된 전쟁이.,정유재란.
일본은 고요제이 천황 연호를 따서.,경장의 역.
왜군은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명과 화의에 나섰다.
명도 벽제관 전투에서 패한 후.,화의 교섭.
조선은 화의를 반대하여 교섭에서 제외.
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조선 조정은
군사제도를 능률이 많이 나게 개편하고
의병을 관군으로 편입시키는 등 방비 강화.
왜군은 남해안으로 철군하여 축조한 왜성에 주둔.
명(明)과 왜는 서로 자국이 유리한 화의 조건을 주장.
일본군은 명 황녀를 일본 후비(後妃)로 삼을 것,
한반도 남부 4도를 내주고 감합 무역을 부활할 것,
조선 왕자와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을 것을 명에 요구.
일본군 요구는 대부분 수용되지 않았고
3년에 걸친 화의 교섭은 결국 결렬되었다.
협상 과정에서 볼모가 된 조선의 두 왕자.
일본군 측이 조선 왕실에 돌려주었으나
임해군의 두 자녀는 돌려주지 않았다.
남해안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은
1597년 다시 전쟁을 시작하였다.
일본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들을 전멸시켰고
일본 육군은 보급로를 탄탄하려고 전라도 점령 후 한양공격.
일본 수군은 이순신의 파직과 원균의 칠천량 해전 대패.
남해안 재해권을 장악, 일본 육군은 1597년 음 8월 15일.
음 8월 19일 남원 전투, 전주성에서 조명 연합군을 대파.
남원과 전주를 함락시킨 일본 육군은 전라도를 점령.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하여 명군과 대치하기에 이른다.
또한, 왜군은 전공을 증명하고자
조선인들의 코를 베어 전리품으로
일본에 보냈고 남녀노소를 불분하고
마구 잡아 포르투칼 노예상에게 매각.
조선인 목을 잘라 가져가려니
부피가 너무 커서 코를 자른 것.
아직도 그때 조선인의 코를 잘라 가져간 일본 도쿄
도요쿠니 신사 앞에는 '조선인 귀무덤' 이총이 있다.
조선인을 죽인 증거로 코를 한되 이상 잘라오면 포상.
조선땅의 조선인을 닥치는 대로 죽여야
왜인들이 건너와 살 수 있다는 이유였다.
왜군은 조선인 10만명을 포로로 끌고 가서.
도자기 굽는 재주나 쓸만한 기술을 가진자는
특기를 살려 일을 시켰고 그 나머지 포로들은
악명 높은 포르투칼 노예 상인들에게 팔았던 것.
'일본군 종군 승려' 케이넨.,'조선일기'기록.
조선인 포로로 잡으려 광분하는 일본군을 묘사.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죽인다.
산사람은 새끼줄과 대나무통으로 목을 묶어 끌고 간다.
'어버이들은 자식들의 걱정에 탄식하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 헤매는 비참한 모습.
들도 산도 불지르는데.,혈안이 된 무사들.
마치 아수라장을 방불케하는 비참한 광경.’
'또, 조선 아이들은 잡아 묶고, 그 부모들은
쳐죽여 갈라 놓으니, 다시는 볼 수가 없게 된다.
남은 부모자식의 공포와 탄식은 마치 지옥의 귀신이
공격해오는 때와 같이 공포와 서러움 속에서 몸을 떤다.
애처롭다. 네 마리 새 어미와 이별하며 둥지를 날아갈 때.
그 심정이 이와 같은 것일까? 떨어지는 모자의 탄식을.,(중략)
포로 조선인들의 공포와 두려움
그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였다.
일본에서의 포로들의 생활 또한 비참.
남원과 전주를 함락한 일본 육군은
전라도 점령 후,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
후에 충청도 직산에서 명군과 대치하여 몇 차례 전투.
조선 이순신 수군이 명량 해전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
보급선이 끊겨 일본 육군은 충청도 직산에서 머물렀다.
이후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과 일본 육군의 공수가 바뀐다.
'1597년 12월 말~1598년 1월 초' 조명연합군은 울산왜성을 공격.
함락시키지 못하였고 일본 육군은 군량이 부족하여 고군분투하였다.
'1598년 9월 말~10월 초'
조명연합군은 서로군, 중로군,
동로군을 편성하여 수군이 이를 받치는
형태의 '사로 병진 작전을 개시'하여 총공격.
이는 서쪽에서 순천왜성(고니시군),
사천왜성(시마즈군), 울산왜성(가토군)을
동시에 공격하는 태세였으나., 왜교성 전투,
제2차 울산성 전투, 사천 전투에서 패하였다.
이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왜군은 결국 이를 극비에 부치고
왜 본국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이순신은 노량에서 철수하는 왜군을 쫓아
함대를 대파하여 승리했으나 전투 중에 전사.
왜군은 전투에는 패배했으나 본국 철수에는 성공.
고니시 유키나가를 위시한 주요 지휘관
무사히 본국으로 귀환하였다는 의미이고
일반 병졸은 철수에 실패한 인원도 많았다.
민간인 포함한 조선 측 사망자
약 18만~백만 명으로 추정된다.
또한, 경작지 중에서 66%가 파괴.
............................................
충무공이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최후의 결전.
그 유혼이 깃든 그 거룩한 바다는 여명의 빛에도
물들지 않은채 쟂빛 침묵으로 그날을 대변하는듯.
"한놈도 살려서는 돌려보내지 마라."
태양이 바다에서 치솟아 하늘로 떠오르고나서야
노량만은 붉은 햇살 아래로., 제 모습을 드러낸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그의 영광도 그러 하였으리라.
마치, 그의 비문 앞에
뒤늦게나마 놓여야 했던
이미 때가 늦었던.,월계관.
영화.,명랑
충무공과 그를 따르던 수군과 의병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내었던.,삼천리 금수강산.
그 선조들이 일군 영광이 박동하는.,최후의 바다.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장군은 불사조가 되어
우리들 영혼 속에 살아있기에
결코, 적에게 알리지 않을 것입니다."
............노량해전...............
이순신이 전사한 마지막 싸움,
임진왜란 당시 바다에서 벌어진
최후의 대규모 격전지였던.,노량.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1차 침입에 이어
1597년 2차 침략 2차 정유재란을 일으킨 일본
그해 9월 명량해전 패배 후, 지상전에서도 고전.
그 다음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순천 등지로 집결하며 점차 후퇴.
이 사실을 알게 된.,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명나라 수사제독 진린이 이끈 연합군과 함께
고금도 수군진영을 떠나 노량 앞바다에 이르렀다.
이어 명나라 육군장 유정(劉綎)과 수륙합동작전을 수행.
왜교(倭橋)에 진을 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를 공격.
고니시는 진린에게 뇌물을 주고 후퇴할 수 있도록 도와주길 간청.
진린은 이를 받아들여 고니시 통신선 1척을 방조.
이순신은 적을 너무 쉽게 놓아주었음을 알고 분노.
이순신은 고니시가 이 통신선을 이용하여
사천(泗川) 등지에 나가 있는 시마쓰와 남해,
부산 등지에 있는 소오[宗調信]에게 연락하여
조·명 연합군을 협동 공격하며 퇴각할 계획을 간파.
이순신은 조·명 연합함대의 진영을.,재정비
왜군이 쳐들어올 것에 미리 대비하고 있었다.
과연, 11월 18일 500여 척의 왜선이 노량수로와
왜교 등지에 집결하여 공격할 자세를 갖추었다.
200여 척 조·명 연합수군 밖에 보유 못하였던 이순신은
배 넘는 왜 함대 앞에 굴하지 않고, 전투 진영을 갖추었다.
이순신은 곧 적선 50여 척을 격파후 왜군 200여 명을 사살.
왜군 함대는 이순신 대장선을 포위하여 집중 공격.
이때 진린의 명군 함대가 와서 왜군 함대를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200여 척의 왜군 함대가 격파되고나자
왜군은 패잔선 50여 척만이 관음포 방면으로 달아났다.
이순신은 관음포로 마지막 도주하는 왜군의 퇴로를 차단.
왜적을 격파하느라 포위된 진린을 구해내기도 했다.
이어 남해 방면으로 계속 도주하던 적을 추격하다가
흉탄에 맞고 자신의 죽음이 전쟁과정에 미칠 영향을 염려.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당부.
노량해전 승리 후에야 그 사실이 알려졌다.
이 해전에서 이순신 이외에도 명나라 장수 등자룡.
가리포 첨사 이영남(李英男), 낙안군수 방덕룡(方德龍),
홍양현감 고득장(高得藏) 등 많은 명장들이 전사하였다.
한편, 순천 왜교에서 퇴로를 봉쇄 당하였던
고니시 군사들은 남해도 남쪽을 거쳐 퇴각하여
시마쓰 군사들과 함께 부산에 집결 후 철수하였다.
노량해전의 승리는
정유재란을 끝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다하였다.
.................................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왜군들이 축성한 왜성.
서쪽 순천왜성으로 부터 동쪽 울산왜성까지 축성.
그중 전라도에는 순천왜성이 유일하고
나머지는 경남,부산,울산에 분포되어 있다.
이순신장군에 밀려 수송로 확보와
일본군이 내륙에서 후퇴한 뒤에 축성.
전세를 유리하게 전개하기 위해 쌓았던 것.
거제,웅천,김해,부산에 축성한 왜성들이 대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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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지역에 있는 부산포왜성,자성대왜성,
동래왜성,구포왜성,동삼동왜성,기장왜성 등.
부산포왜성과 자성대왜성을 제외하면
왜성과 왜성 사이가 멀리 떨어져 있다.
정유재란 당시 축성한 마산왜성,고성왜성,
선진리왜성(사천왜성), 남해왜성, 순천왜성,
양산왜성,울산왜성 등은 간격이 떨어져 있다.
임진왜란 당시에 조성한 왜성을 보면
부산에 축성한 왜성들은 직선거리로 멀다.
또 낙동강을 끼고 축성한 구포왜성,호포왜성,
죽도왜성,신답왜성,마사왜성은 거리가 더 멀다.
.............................
.............................
그런데 웅천땅과 거제 북부에 축성한 왜성들은
거리가 가까우며 총 9개의 왜성들이 몰려져 있다.
그러니까 이순신함대가 오는 길목에
왜성을 축성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제 땅에 3개의 왜성을 축성하였고
웅천 땅에 6개의 왜성을 축성하였다.
웅천은 임진왜란 이전에
왜구들이 먼저 오는 지역.
조선의 입장에서는 가장 최전방인 곳이 웅천.
임진왜란 왜군들이 웅천 땅을 점령하고 나서는
이순신함대를 방어하는 가장 최전방이 바로 웅천.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이나 왜군의
가장 최전방이 웅천이었던 것이다.
웅천현 좌측 웅천읍성을 중심으로
웅천왜성,자마왜성,명동왜성을 축성.
이곳 왜성 거리가 반경 3km내에 있다.
왜군 입장에서는 반드시 지켜야할 곳.,웅천.
그 웅천지역 중 가장 최전방인 곳이 명동왜성.
명동왜성은 소 요시토시에 의해 1593년에 축성.
진해 명동왜성.,삼포마을.
웅포해전이 있었던 1593년 2월 10일부터 3월 6일(음력)
당시 이순신 함대가 하루밤 숙영을 한 곳이 명동왜성 선소.
만약 명동왜성이 축성되었다면 이순신 함대 숙영이 어려웠을 것.
하여, 명동왜성 축성은 1593년 여름 이후로 추정된다.
즉, 왜군은 웅포해전 이후 명동왜성을 축성한듯 하다.
일단 조선군이 공격을 한다면
육지에서는 창원에서 출발하여 웅천.
웅천을 들어서면, 명동왜성이 공격 루트.
이 경우 낮은 산이 가로 막혀 공격이 어렵다.
산중턱 명동왜성은 공격이 쉽지 않을 것이고
인근 '웅천,자마,안골' 왜성 주둔 왜군들이 협공.
울산왜성은 5만 조명연합군 공격에도 난공불락.
왜성 4곳이 뭉쳐있는 웅천지역은 공격이 힘든 여건.
그러나, 수군을 통한 웅천 공격은 육로 공격보다 용이.
육군보다는 수군이 점령하기가 쉬운.,구조.
왜군 함정들을 파괴하는 것은 가능한.,웅천.
그러나, 수군이 명동왜성 진입은 어려운 여건.
그 옆 지성은 선소를 관리하고, 조선수군 방어 용도.
이렇게 본성에서 떨어져 나온 지성의 경우
서생포왜성에도 있고 영등포 왜성에도 있다.
명동왜성의 지성은 본성까지 거리가 약 450m.
이 정도라면 30분 이내 지원이 가능한 여건이다.
조선수군 방어용 지성은 본성에서 지원하는 구조.
.
명동왜성이 있는 곳 앞이.,음지도.
명동왜성의 지성과 본성이 보이고
조선군 진입을 감시하는 석루 & 선소.
선소는 동섬과 음지도에 막혀
일본군 왜선이 몇 척이 있는지
파악하기 어려운 천혜의 자연조건.
일본군이 정유재란 당시
어떤 목적으로 선소를 만들었고
명동왜성을 축성하였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여건인 당시 상황으로 볼 때.
남해도 남해왜성은 난공불락 요새지.
그 좌우에 순천왜성과 사천왜성이 포진.
앞으로는.,노량해협 '울둘목'의 거센 조류.
남해도 해역은 왜군 함대 총집결지로 최적지.
현재, 복원되어 있는.,순천왜성 & 사천왜성.
육지에 접해 있어 규모는 남해왜성보다 크다.
그러나, 남해왜성은 섬에 있어 방어 용도로 적지.
그리하여, 정유재란 막바지 왜군은
남해왜성에 총 집결하여 후퇴한 것.
남해도.,남해왜성 & 노량.
................남해왜성(南海倭城)..,..................
선조30年(1597) 정유재란 때 왜군 협판안치 등이 축조.
이순신 함대가 오는 길목에 방어 목적으로 왜성을 축성.
정유재란 막바지에 안전하게 퇴각하기 위하여 축성한 왜성.
정유재란 때 남해왜성에 주둔한 무장.,소 요시토시.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1568년 ~ 1615년 1월 31일)는
'아즈치모모야마시대~ 에도시대 전기' 무장 겸 다이묘.
소(宗) 가문 20대 당주이며
쓰시마 후추 번의.,초대 번주.
이 무렵,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조선복속 하명.
소 요시토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신종하였으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 주군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
일본과 조선 간 중계무역 요충지.,대마도.
일본과 조선이 화평해야만 중계무역도 가능.
소 요시시게,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시마이 소시쓰 등은 조선과 교섭에 힘썼다.
덴쇼 18년(1590년) 조선에서 일본을 방문한
사절단인 조선 첨지중추부사 황윤길(黃允吉),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 수행무관 황진 등을
복속사로 사칭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알현시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이 복속한 것으로 알고
조선에 명나라 정복의 선도역을 맡을 것을 명하였다.
하지만, 조선사절단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생각과 달리,
전국 통일에 대한 축하사절이었고, 이는 소 요시토시가
조선에 축하사절 거짓 요청으로 일본에 내방한 사절이었다.
조선은 건국 이래 명나라의 책봉국이라
도요토미 히데요시 명에 따를 리 없었다.
궁지에 몰린 소 요시토시는 조선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 대신에
명나라로 가는 길을 빌려달라. 요청.
그러나, 이것도 실현되지 않았다.
조선과의 교섭은 결과적으로 실패.
덴쇼 20년(1592년)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
제1대에 속해 일본군 최선봉으로서 싸웠다.
덴쇼 20년(1592년) 음력 4월 12일 소 요시토시는
5,000 군사를 이끌고 대마도 북단 '오우라'를 출항.
부산에 상륙하여 13일 공격을 시작으로, 14일에 동래,
15일에 기장, 좌수영, 16일에 양산, 17일에 밀양, 그 후에
대구, 인동, 선산, 26일에 경상도순변사 이일을 상주에서 격파.
27일에 경상도를 넘어 충청도로 진군,
탄금대 신립 조선군을 괴멸, 충주를 공략.
또, 경기도로 나아가 음력 5월 1일에 여주 공략 후,
2일에 용진을 거쳐 한성 흥인지문 앞에 도착한 후,
3일에 한성 입성 후, 여러 장수들과 한성회의 개최.
음력 5월 11일에 소 요시토시는 북쪽을 향해 진격해,
18일에 임진강에서 김명원(金命元)등의 조선군을 격파.
27일에 개성 공략, 황해도의 서흥, 평산, 황주, 중화를 공략.
평안도로 나아가 음력 6월 8일에
대동강까지 도달, 16일에 평양 공략.
음력 7월 16일, 명의 요동 부총병 조승훈.
평양을 공격해 왔지만 격퇴하고 명군을 추격.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명군장수
사유, 천총, 장국충(張國忠), 마세륭 등을 사살했다.
29일, 이원익(李元翼)의 조선군
평양 탈환을 시도하자 이도 격퇴.
분로쿠 2년(1593년) 음력 1월 7일,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의 약 4만의 명군과
김명원의 1만명의 조선군을 가세하여 평양을 공격하였다.
명군이 평양성 성문을 돌파하자
일본군은 북부 구릉지대 진지로 퇴각.
"퇴로를 열테니 성을 양도하라"- 이여송 -
일본군은 이것을 수락하고 남쪽을 향해 철퇴.
하지만, 조명연합군의 추격도 있어 어려운 퇴피.
한성을 목표로 해 진격하는 명군에 대항하며
일본군은 한성 결집 후, 조명연합군을 무찔렀다.
벽제관 전투에서 패한 명나라 군사들은 위축되었다.
일본군도 병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강화교섭 이후, 부산 주변까지 철퇴.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명측의 '강화 담당자'·심유경과 평화교섭.
쌍방은 서로 요구하는 조건과는 달라,
명측 강화 담당자 심유경의 부족한 됨됨이와
이런 기만행위를 동반한 교섭은 아무 성과 없이,
각국에 혼란만 야기시켰고, 평화교섭은 결렬되었다.
......................
......................
게이초 2년(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소 요시토시는 일본 좌군에 속해 참진하였다.
우선 서쪽으로 진격해, 음력 8월 13일
남원성 공략 개시한 4일째에 성을 함락.
다음 전라도 중심 전주를 점령하고. 전라도를 제압.
그후, 겨울을 앞두고 후퇴한후 남해왜성에 머물렀다.
게이초 3년(1598년) 음력 8월 18일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조선 파견 왜군에게 음력 10월 15일부로 귀국명령이 하달.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창선도에서 만나 함께 귀국할 예정.
이때 순천왜성에 주둔하고 있던.,5제장.
'고니시, 마쓰라, 아리마, 오무라, 고토'
이순신 진린 연합군에 의해 퇴각로 저지.
순천에 갇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이것을 본 소 요시토시는, 시마즈 요시히로
다치바나 무네시게. 다카하시 무네마스(高橋統増),
데라자와 마사시게 등과 순천에 갇힌 일본군 구원 출진.
이때 노량해협에서 매복한 조명 연합수군과 교전.
그 틈을 이용해 고니시 유키나가 등 5 왜장은 탈출.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부산을 거쳐 귀국.
이로써 7년 전쟁은
노량해전으로 종식.
세키가하라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 따라
'소 요시시게'는서군에 속해 후시미 성 공격에 참진.
당시일본은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 병사 후,
세키카 하라 내전에서 대승을 거둔 도쿠가와 이에야스.
덕천가강(德川家康)이 일본천하통일을 위한 내전이었다.
오쓰 성 공략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소 요시시게'가 가신을 대신 출진시켰다.
그러나 세키가하라에서 동군이 승리하였고,
서군 다이묘 대부분 영지몰수, 죽임을 당했다.
특히 서군 소속 다이묘들 중
고니시 유키나가가 참수형에
조리돌림 형벌까지 받았는데
그가 '소 요시토시'의 장인어른.
하지만, 소 요시토시는 세키가하라 전투 후,
평소 임진왜란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던
자신의 행동과 악화된 조선과의 국교회복을 원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죄가 사면되어 영지를 보전.
하여, 쓰시마 후추 번의 초대 번주가 되었던 것.
이후, 고니시 유키나가 딸'고니시 마리아와 이혼.
말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임진왜란으로 악화된 조선과의
관계수복 명을 받은.,소 요시토시,
게이초 14년(1609년) 조선과 기유약조,
국교 회복 공적을 인정받은.,대마도 소 가문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로부터 독립한 기관으로
조선과 대마도간 독점적 무역권리를 인정받게 되었다.
게이초 20년(1615년) 음력 1월 3일 향년 48세.,운명
대마도주 후계는 장남 소 요시나리(宗義成)가 이었다.
소 요시토시가 조선과의 전쟁을 회피하려 한 이유는,
무역 이해관계 외에도 쓰시마 섬이 전쟁의 중간기착지.
대마도 번주 입장에서 임진왜란을 반대한 것은 극히 당연.
에도시대 조선과 조약으로 소 가문의 대마도는 번영.
2대 번주 소 요시나리 대에 와서 국서위조가 발각되어
소 가문은 막부로부터 단절될 위기에 몰리기도 하였다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 영향을 받아 천주교로 개종.
조선 일본군 사제.,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
"신중한 젊은이로, 지식인에 훌륭한 인격자."로 평가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의.,소 요시토시.
임진왜란 당시 맨 먼저 조선 땅을 밟은 장본인.
그의 이혼을 거론하며 간사하고 음흉한 자로 묘사.
.
"만력 28년 덕천가강(도쿠가와 이에야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어린 아들을 끼고 싸워
서해도(西海島)의 대명휘원(大明輝元)을 내치고,
휘원이 친근하게 신임하는 장관 소서행장과
석전삼성 등 8∼9명을 모두 살해하여 죽이고
일본 평정 후,제도를 호령하게 되었다." -(중략) -
선조 163권, 36년(1603년)
6월 9일(갑오) 7번째 기사.
일본에서는 만력(萬曆) 31년.
....................
....................
'대한제국 고종의 막내 딸'인 덕혜옹주와
정략결혼한., 37대 대마도주.,소 다케유키.
'그의 정략결혼 생활은 행복할 수 있었을까?'
임진왜란때 조선을 침략한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 사위이자
부장인 소 요시토시 의 직계 후손이며
작위는 백작이고 영어학자, 시인이며 화가.
우리나라의 삼국시대
동아시아 지도 속.,일본.
'북부여' 소서노가 주몽을 도와.,고구려를 건국.
그후, 소서노가 '비류, 온조' 두 아들과 백제를 건국.
그후, 일본을 건국하여 삼국을 건국하였다는.,여제 소서노.
'고구려 신라, 백제'.,삼국시대.
제4국이었다는.,한반도의 가야연맹.
신라와 합병 후 가야 유민들이 진출한.,왜.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한 이후
고구려 유민들이 세웠다는.,발해.
패망 발해 유민들이 진출했다는.,왜.
조선 건국 후
고려 유민들이
건너갔다는.,왜.
고조선 영역 내 민족들이
시대 별 국제 정세 변화에 따라
이동을 하면서 새로운 나라를 건국한듯.
고조선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면
나라와 국경을 떠나서 모두 한핏줄.
..............................
..............................
그런데,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끌려갔던
4~5만 조선인들은 그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포루투칼 노예상인은 조선인을 어디에 팔았을까?
그당시 일본 규슈에는 나가사키,히라도에 커다란 노예시장.
그당시 서양인들이 그곳에서 노예를 많이 사들였다고 전한다.
'1608년 루벤스 그림 속 조선인 복장을 한 청년.'
1608년 루벤스는 고국 벨기에를 떠나 로마 유학 중.
그렇다면, 당시 로마에서 조선 청년을 만났다는 증거.
1608년, 조선 청년이 어떻게 로마까지 갈 수 있었을까?
임진왜란 때 조선 땅에서 일본으로 끌려간 4∼5만 포로.
그들 대부분 규슈로 끌려갔는데, 바로 그 당시 규슈에는
'나가사키, 히라도'에 세계적인 노예시장이 있었던 것이다.
그당시 세계적인 노예시장을 살펴보면
인도 고아, 포르투갈 라고스, 중국 마카오,
그리고, 그무렵 유럽에서 막 발견된 남미 등.
나가사키가 막 세계적인 노예시장으로 떠오른 것은
바로 임진왜란 때 끌고 온 포로가 넘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유럽의 노예상인들은 노예를 사기 위해
대선단을 이끌고 전 세계를 돌다가 일본까지 온 것.
유럽의 노예상인에게 팔려, 유럽으로 간.,조선인 소년.
그가 1608년 그린 루벤스
그림 속 주인공이었던 것.
그림 속 주인공은 규슈 어느 노예시장에서 팔려나갔을까?
당시 규슈 관내 유럽 상인들이 몰려 살던.,히라도 & 나가사키.
그림 속 조선인 소년은 이탈리아 알비 마을에 뿌리를 내렸던 것.
안토니오 꼬레아는 임진왜란 4~5만 포로의 무리 속에 섞여
조선 남해안, 부산, 대마도, 일지섬을 거쳐 사가현 나고야 성.
그리고나서, 나고야 성에서 전리품으로 분리 또는 분류된 증거.
조선인 포로는 자신들을 붙잡아온
일본인 장수를 따라 흩어지게 된 것.
즉, 도공은 최상급 노예로 분류되어
가고시마 성주나 마쓰우라 성주, 혹은
히젠 성주를 따라 그곳으로 갔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유명한 일본 도자기 명인., 심수관.
임진왜란때 가고시마 성주에게 끌려가 그곳에 정착.
오늘날 일본 최고로 칭송 받는.,아리타 도자기.
조선에서 끌려온 도공, 이삼평에 의해 시작된 것.
또 '마쓰우라'로 끌려간 도공은 이마리 도자기 원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일본 도자기를 대표하는.,5 본향.
그 모두가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 도공에 의해 시작된 것.
그렇다면, 도공이 아닌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집안 하인으로 쓰였든지, 아니면 노예시장에 팔린 것.
그러니까, '안토니오 꼬레아'는 노예시장에 끌려나온 것.
그런데, 1608년 그림 속 인물은 정말 조선인 일까?
'이탈리아 피렌체 노예상인.' 프란치스코 카를레티.
그가 쓴 <나의 세계일주기>에 한줄을 써놓은 기록.
자신이 일본에서 노예를 샀는데,
그 중의 하나를 이탈리아 로마까지
데리고 왔고 이름은.,안토니오 꼬레아.
안토니오 꼬레아를 산 곳.,'나가사키'
비록, '안토니오 꼬레아' 하나 밖에 자료는 없지만.
아직도 모르는 수많은 조상들이.,노예로 끌려갔던 것.
이 같이, 앞으로 더 많은 사실을 밝혀내야 하지 않을까?
정유재란때 주둔하였던 일본군들이
남해 일대에 축성하였던.,32곳 왜성.
방어 外 어떤 용도로 쓰인 왜성일까?
.............충무공 죽음에 관한 사료..................
충무공은 1598년 11월 19일 노량 바다에서 죽었고.
고향인 충남 아산으로 옮겨져 다음해 2월 11일 장례
그후 15년이 지난 1614년에 600km 떨어진 곳에 이장.
충무공 전사소식은 11월 23일에 선조에게 보고되는데
이 때는 전쟁이 끝난 후이며 장례비도 국가에서 지급.
장례를 늦출 이유가 없는데도 80일이 지나 치룬 장례.
사후 15년이 지난 후에 이장한 것은 더 더욱 이상하다.
450년전 4월 28일은 충무공 탄신일.
...............................................
조선시대 노령대첩에서 이순신 장군 사망 직후
그 시신을 안고 방 안으로 바로 들어갔기 때문에
그 시신을 모신..'김, 희. 완,' 가족 세 사람만 알뿐.
이순신은 정말 전사한 것일까?
아니면, 어디로 은둔한 것일까?
그당시, 그 죽음을 둘러싼.,논란.
.
'예기치 못한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다.'는.,순국론
'노량해전 출정때 스스로 갑옷을 벗었다.'는.,자살론
노량해전에서 죽지 않고 일흔살까지 살았다는.,은둔론.
임진왜란 때 선조는조정 대신들의 뜻에 따라
이순신의 억울함을 알면서도 형벌을 가하였고
정유재란 때는 "白衣從軍(백의종군) 하라" 명령.
그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던.,진린.
...........명 황제에게 올린.,진린서신............
명 도독., 진린이 본.,이순신 모습이 담긴 편지.
"황제 폐하!
조선에서 전란이 끝나면
조선왕에게 명을 내리시어
'조선국의 통제사' 이순신을
요동으로 올 수 있게 하소서.
신(臣)이 본 이순신은
그지략이 튀어날뿐만 아니라
장수로 지녀야할 성품과 품덕을 지닌 자.
만일 조선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께서 귀히 여기신다면
우리 명(明)의 화근인 저 오랑케(청)를 견제할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저 오랑케 땅 모두를 우리 명(明)국으로 귀속시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혹여 황제 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의 장수됨을 걱정하신다면
신(臣)이 간청하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은
전란이 일어나고 수년간 수십차례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음에도
조선 국왕은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며
조정 대신들 또한 이순신의 공적에 질투하여
아무 죄 없는 그에 관해 이간질과 모함을 하였으며,
급기야는 통제사의 충의를 의심하여
결국 그를 조선수군통제사 지위를 빼앗아
이순신에게 백의종군까지 임하게 하였나이다.
허나 통제사 이순신은
모함과 멸시에도 굴하지 않고
조선왕에게 충의(忠義)를 보였나이다.
이 어찌 장수가 지녀야 할 가장 큰
덕목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나이까.
조선왕은 원균에게 지휘권
'조선통제사' 벼슬을 주었으나
원균이 자신의 자만심으로 인하여
수백 함대 전멸후 단 10척만 남았으메.
당황한 조선왕은 이순신을 다시 불러
'조선 수군통제사' 지휘권을 넘겼으나,
이순신은 단 한번 불평없이 충의를 보여
10척 함대로 수백 왜선을 격파하였나이다.
허나, 조선의 국왕과 조정대신들은
아직도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또 다시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 여기고 있나이다.
만일 전란이 끝난다면
통제사 이순신 그 목숨은
바로 풍전등화가 될 것이 뻔하며,
조정대신과 왕은 그를 해할 것입니다.
황제 폐하 바라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의 목숨을
반드시 구명해 주시옵소서.
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 신하로 두소서.
황제폐하께서 이순신에게 덕을 베푸신다면
분명, 목숨 다할 날까지 충을 다 할 것입니다.
부디, 통제사 이순신을 거두시어
북쪽 오랑케(청)를 견제케 하소서.
..............................................
노량해전에서 충무공과 연합작전을 폈던 명나라 장수.
충무공이 전사하자 아까운 인재를 잃었다고 통곡했다.
진린의 손자는 명나라가 망하자 고금도(완도)로 망명
이들 가족은 다시 해남도로 갔는데
현재 그곳의 진씨들은 진린의 후손.
광동 진씨는 수군도독 진린 장군의 후예들.
임진왜란 후 명나라는 청나라에 의해 멸망.
진린의 손자 영소는 명나라에 대한 충절을 지켜
청나라를 섬기지 않고 배를 타고 조선으로 망명.
영소는 진린이 싸웠던 고금도(완도)를 찾아 칩거하다가
해남으로 와서 결혼해 아들 석문(碩文)을 낳고 정착한다.
진린 장군의 증손자인 석문은 여러 곳을 떠돌다
34세 되던 무렵에 황조리에 터를 잡고 정착한다.
.......................................
명의 사신 '운덕'이 본.,충무공.
..........................................
.
"하루는 어두운밤 눈이 몹시 내리고
그바람이 칼날 같아서 살결을 찢는듯하니,
감히 밖으로 나서지 못하겠더라..
그러한데, 그 속을 통제사 영감이 홀로 지나가니,
무슨 까닭으로 이 어둡고 추운바람 속으로 거닐까?
궁금하던 차에 한번 따라가보니
통제사 영감이 가고 있던 곳은
바로 왜놈이 잡혀있는 현장 아닌가?
.....더욱이 이상하여 더 밟아보니
통제사 영감 손에는 한권의 책이 있더라...
밖에서 보니 통제사 영감은 그 왜군에게
명심보감 중 효행 편을 읽어주고 있는 것...
다음날 알아보니 그 왜군 나이는 15세더라.
..10살 어린 나이에 병사가 되어 왔음에
아이 포로를 딱히 여겨 별도로 감싸준 것..
10살에 포로가 되었으니 5년이 지났고
그동안 왜군의 아이는 조선말을 배웠으며
간간히 통제사 영감에게도 책을 읽어주었다.
서로 죽이고 죽이는 전쟁이지만,
저 두사람을 어찌 원수라 하겠는가...
내가 본 저 두사람은 한 아버지와 그 아들로 보였으니..
그의 백성을 아끼는 마음 무엇으로 나타낼 수 있겠는가
...............................
정유재란 & 조선인 포로
................................
“일본에서 온갖 상인들이 조선으로 왔다.
그중 사람을 사고파는 노예상인도 있었다.
왜군 본진을 뒤따라다니며 사들인.,남녀노소.
새끼로 목을 묶어 여럿을 줄줄이 옭아매 가는데,
잘 걸어가지 못하면 뒤에서 몽둥이로 두들겨 팼다.
지옥의 아방(阿房)이 죄인을 잡아들여 괴롭히는 것이
이와 같을 것이다.”(‘朝鮮日日記’, 1597년 11월 19일)
왜군의 종군의승(從軍醫僧)인 게이넨(慶念)은
조선인들을 원숭이처럼 묶은 뒤 우마를 끌게 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게 하면서 볶아대는 일본 상인들의
잔인무도한 행태들을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다고 기록했다.
정유재란 발발 첫해 초겨울, 호남을 비롯한
대부분의 남부 지방이 왜군 수중에 떨어진 때.
조선은 당시 일본 노예상인들에게는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의 시장.
왜군을 따라 조선에 들어온 상인들은 군량과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한편 인신매매까지 손댔다.
특히, 노예상인들의 사람장사는 최고 이문이 남았다.
상인들에게 조선인을 파는 주체는 왜군.
전쟁전 왜구들이 조선 해안지역을 침탈해
조선인을 잡아 억지로 일본으로 데리고가서
강제노역을 시키던 것과는 전혀 성격이 달랐다.
왜군은 조선인을 잡으면 현지에서
일본인 인신매매상에게 팔아넘기거나
일본으로 끌고가 평생 노비로 부려먹었다.
이 때문에 '임진왜란~정유재란' 7년 전쟁 동안
전쟁도시 나고야성은 조선인 포로들로 넘쳐났다.
정유재란 때 칠산도에서 왜군에게 붙들려간 정희득.
“귀국 도중에 들른 나고야성에서 마주치는 사람 중에
반 이상이 조선인이었다”(‘月峯海上錄’)고 기록했다.
일본 규슈 서북단 사가(佐賀)현 가라쓰(唐津)시 나고야성.
(아이치 현의 나고야성과 구별, 히젠나고야성이라고도 함).
가라쓰는 왜인이 중국을 가리키는 표현인 ‘당(唐)’으로 가는
‘나루(津)’라는 뜻으로, 예전부터 대륙을 오가는 항구였다.
이곳에서 부산까지 해로 278km.
임진왜란 왜군의 출병 거점지이자
전선 사령부 나고야성이 세워진 배경.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불과 5개월 만에 이 성을 완성했다.
면적 17만 m². 히데요시 평생역작으로 오사카성 다음 가는 크기.
그는 임진왜란 초기에 나고야성 천수각에 머물면서 명령을 내렸다.
성 주변 반경 3km 내는 일본 각지에서 차출된
다이묘(大名·영주)들의 진영으로 북적거렸다.
다이묘들은 이곳에서
당시 휘하 부대원들을 이끌고
조선을 치러 가고, 이곳으로 귀환.
임진왜란 정유재란 20만 병력이
나고야성에서 조선으로 출병했다.
지금도 당시의 진영 터에는
성벽과 토루 등이 양호한 상태.
나고야성에서 나고야포(만)로 이어지는 바다까지의 들판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인구 10만이 넘는 군사도시가 형성.
조선에서 비참한 살육과 납치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 히데요시는
황금다실에서 금으로 된 찻잔에 따른 차와 함께 유흥을 즐겼다.
성내에서 일본 전통의 가면극 노(能).
노래 렌가(連歌)가 공연되는 등 불야성.
나고야성으로 끌려온 조선인 포로들은
일본 내 각 다이묘들의 영지로 끌려가거나,
무역항 나가사키로 옮겨져 노예로 팔려나갔다.
일부 다이묘들은 처음부터 조선인을 노예로 팔 요량으로
나고야성 남쪽의 나가사키 항으로 곧장 입항하기도 했다.
조선인을 노예로 파는데는 당시 포르투갈인들이 적극 개입.
당시 전세계 노예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포르투갈 노예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사냥으로 악명이 높았다.
포르투갈 노예상 사주를 받은
일본인 왜군들은 조선인 납치를
일확천금의 기회로서 생각했던 것.
“전진(戰陣)의 (왜군) 제장(諸將) 가운데
약삭빠른 자는 처음부터 인신매매를 목적으로
조선인들을 대량 노략질해오기도 했다.
(노예시장으로 흥성했던 나가사키) 일부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붙잡아오기 위해 조선으로 도항하기 위해 노력.
그들은 조선 남부 등 각지를 찾아다니며 남녀를 막론하고
조선인을 사들여 나가사키 등지로 끌고가 포르투갈 상인에게
철포(조총) 비단을 받고 팔았다.”(‘耶蘇會宣敎師の朝鮮俘擄救濟敎化’)
심지어는 포르투갈 상인이 조선에 들어와
직접 거래했다고 볼 수 있는 자료도 있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왜군이 조선 남부 지방에
주둔하고 있을 때 인매선(노예매매선)을 보내
조선 포로를 직접 수용했다는 기록(1598년 9월 4일)
日本耶蘇會 宣敎聖職者會 報告)과, 전쟁이 끝난 후
조선의 비변사가 심문한 포로들 중에 포르투갈 상인
조앙 멘드스, 남만계 흑인 1명 등도 있었다
(1604년 6월 22일, ‘등록유초’)는 공초 기록.
일본의 국제무역항인
나가사키(長崎)와 히라도(平戶)
등지에서 매매된 조선인들은 홍콩, 마카오,
마닐라를 비롯해 인도, 유럽에까지 팔려나갔다.
“놀라울 만큼 많은
조선 포로가 일본으로 송치
주로 나가사키 방면에서 팔렸다.
포르투갈 상인은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耶蘇會宣敎師の朝鮮俘擄救濟敎化’)
인신매매에는 기리시단(가톨릭)
다이묘들도 적극 개입돼 있었다.
당시 유럽 선교사들이 인신매매에 개입한
가톨릭 다이묘들의 파문을 결정할 정도로
대규모로 행해지고 있었다.
다이묘와 병사들 할 것 없이
조선인 노예 획득과 매매에 열을 올렸으니
정유재란은 노예전쟁이기도 했다.
(‘壬辰·丁酉倭亂時 朝鮮俘虜奴隸問題’)
넘쳐나는 조선인 노예들로 인해
전계 노예시장의 가격이
하락할 정도였다.
조선인 부녀자와 아이의 경우 한 명 가격이
당시 일본의 화폐 단위로 약 2∼3문 정도였다.
조총 1정 값은 120문이었다.
1598년 3월경 당시 나가사키에 머물렀던
이탈리아 상인 프란치스코 카를레티는
“조선에서 남자와 여자, 소년과 소녀 등
나이를 가리지 않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붙잡혀 왔다.
이들은 모두 극히 헐값에
노예로 팔려나갔다”고 기록.
(‘나의 세계 일주기’)
카를레티는 12스쿠도(scudo·포르투갈
옛 화폐단위·일본 화폐로는 약 30엔)를
지불하고 조선인 5명을 사들였다.
카를레티는 이들을 나가사키의 예수회 교회에서
세례를 받도록 한 뒤 인도로 데려가 4명을 풀어주고,
나머지 한 명은 이탈리아 플로렌스(피렌체)까지
데려가 자유인으로 방면했다.
카를레티는 그 한 명이 로마에 있을 것이며,
이름이 ‘안토니오’로 알려져 있다고 기록했다.
이후 안토니오는 로마에 정주하면서 교회 일에 종사.
화가 루벤스 눈에 띄어., Man in Korean Costume’
‘한복 입은 남자'의 그림 모델이 되었다고 전한다.
조선에서는 왜군에게
끌려간 민간인들을
피로인(被虜人)
이라고 불렀다.
‘사로잡힘을 당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왜군은 피로인을 병력 보충용으로도 이용.
주로 남자아이나 젊은 청년이 그 대상이었다.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간 이들은
모국 군사들과 싸울 정예병으로 길러졌다.
“임진·계사(壬辰·癸巳·1592-1593년)에
우리나라의 어린아이들이 많이 잡혀가서
이제 장성한 나이가 돼 정용(情勇)하고
강한(强悍)하기가 본시 일본군보다 나은데,
정유(丁酉·1597년) 재침 때 이들 중에
적을 따라 온 자가 무척 많았다.
그런데 본국(조선)으로 도망해 오는 자는 적고
적국(일본)으로 도로 도망간 사람이 많았다.
또한 조선 남자로서 전후에 잡아온 자가
포 쏘기도 익히고, 칼 쓰기도 익히며,
배 부리는 것도 익히고, 달리기도 익혀서,
강장(强壯)하고 용맹하기가
진짜 왜놈보다 낫다.”(‘月峯海上錄’)
1597년 왜장인 가토 기요마사 진영을
탐정(探偵)한 사명대사는 “가토의 진영에
15∼16세 되는 나이 젊고 정예한 자는 조선 사람으로
군세가 종전에 온 적과는 다르다”고 하며 “일본 대군이
들어오기 직전에 결전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선조실록’)
정유재란 시기에도 어린아이들이 많이 잡혀갔다.
그중에는 1597년 8월 남원성 전투에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장군의 아들도 있었다.
전라병마절도사 이복남의 셋째아들
이성현(李聖賢·우계이씨 족보에는
慶寶로 표기)의 경우다. 이성현은
당시 7세의 나이에 왜군에게
붙잡혀 끌려갔다. 이후 그는
‘리노이에 모토히로(李家元宥)’로 개명하고
일본 여자와 결혼해 3남 4녀를 두었다고 한다.
리노이에 가문은 에도시대 이후 조선이씨(朝鮮李氏)로
불리면서 이복남의 혈통을 이어갔다.(‘羽溪李氏 族譜’)
일본 아사히신문 출판국장과 아사히학생신문사 사장
등을 역임한 리노이에 마사후미(李家正文·1998년 작고) 씨가
바로 리노이에 가문의 후손이다. 오랫동안 자신의 뿌리를 찾던
그는 1982년 한국을 찾아 선조들의 사적지와 묘소를 참배하고 돌아갔다.
여성 피로인들은 주로 장기적이고
안정적 노동인력 확보수단으로 이용.
조선에서는 곡물 운송을 하거나 면화나
화곡을 거두어들이는 단순 노동에 투입.
일본으로 끌려가서는 다이묘의 집안 노비나
하녀가 돼 죽을 때까지 비참한 생활을 했다.
미모와 재능이 출중하거나 신분이 높은 여성의 경우,
지배층의 부인(夫人)이나 첩(妾)이 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에 납치된 조선인의 일본 생활’)
정유재란 시기 조선인 납치 규모는 어마어마하다.
한국 학계에서는 10만 명 규모로 보는 반면,
일본 측은 처음에는 5만∼6만 명으로 추정하다가
현재는 2만∼3만 명 수준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본 측 주장은
역사적 기록에 비춰 터무니없이
축소된 것으로 여겨진다.
(정유재란 당시 조선 내 있었던 각 왜성마다)
(포루투칼 상인들의 인신매매 거래처 였을까?)
(동래, 초량, 영도에 억류 되었다가 끌려갔을듯..)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조선인 포로., 이동 경로.
대부분 '부산에서 나가사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