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늘 유년에 머물고 있어 해를 더하며 지난날을 뒤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진다.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면서
음악카페 필하모니에서 흘러나오는 비틀즈의 예스터데이를 듣고 있다.
지난날 멀리 떠나보내야 했던 여인을 그리며
자성(自省)의 목소리로 ‘그녀를 왜 떠나보내야 했는지 모르겠어, 내가 뭔가 안 될 말이라도 했나?
난 지금 옛날이 그리워 아쉬움과 부끄러움에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초라해 피난처를 찾고 싶다’는 노랫말처럼
지난날의 아쉬움을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다.
아무래도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이 노랫말처럼 아쉬움과 부끄러움에 숨을 곳을 찾고 싶지만
지난날에는 때 묻지 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기에 나 역시 그날이 그립고 아름답기만 하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많았다.
8ㆍ15해방 후 일제가 물러가고 충주사범학교가 설립되면서
부속국민학교에 입학했던 때는 모든 것이 어수선했던 시절이었다.
툭하면 지각이고 수업할 시간에 석태라는 친구와 어울려
들판에서 자연학습(?)하며 도시락 까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가하면
숙제를 한다고 학교 건물 일부분을 부수는 엄청난 일까지 했다.
2학년 겨울방학이 끝나고 새 학년이 시작되는 첫 날인 것 같다.
그날도 지각이었다.
친구들은 ‘장우는 의례 그러려니~~’ 하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교단에는 처음으로 부임하는 선생님이 미소 지으며 서 계셨고,
한글로 풀이하면 이름이 돌비(石雨)라는 선생님이셨는데 음악을 좋아하셨다.
그래서 선생님의 음악교육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나뿐만 아니고 우리들의 정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전란중임에도 축음기를 가지고 와 베토벤의 ‘월광곡(月光曲)’, 하이든의 ‘장난감교향곡’ 등을 들려 주셨다.
계명으로 노래를 부르게도 하였는데
그 시절 문구점에서도 살 수 없는 트라이앵글을 준비해 오라는 숙제를 내 주는 등
요구가 많으셔서 가끔 우리를 힘들게 했다.
선생님께서 내어주신 박자 맞추기에 쓰는 트라이앵글을 대신해서 쓸 수 있는 것을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숙제는 해야 하는데 집 주위를 아무리 살펴봐도 이것을 대신할 예쁜 소리가 나는 물건을
도저히 마련할 방법이 없었다.
난감한 일이었다.
학교에서 이리저리 살펴보기로 했다.
측백나무로 이어진 담장을 끼고 강당 뒤로 돌아가 보니 트라이앵글로 알맞은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학교 교사(校舍)는 일본사람이 지은 목조단층으로 강당은 2층높이에 가까운 핑크빛이 도는 황토색을 띠고 있었다.
화강석으로 기단(基壇)을 이루는 등 중세풍의 제법 잘 지어진 건물이었다.
강당 뒤 지붕에서 연결되어 내려온 미음(ㅁ)자 모양의 물받이 연결고리의 앵글이 튼튼하고 제법 쓸만해보였다.
두드려보니 울리는 소리가 맑고 산뜻했다.
‘바로 이것이다. 떼어가야지.’ 생각하며 전교생이 하교하기를 기다렸다.
멀리 북쪽으로 보이는 교사 끝 느티나무 아래 더위를 피하려는 듯
몇 안 되는 아이들이 보일 뿐 운동장엔 아무도 없었다.
마음을 졸이며 강당 뒤로 돌아가 큼지막한 돌로 사각 진 물받이를 감싸 안고 있는 연결고리 하나를 떼어 내려는 순간
돌비선생님이 다가오고 있었다.
학교 건물을 부수고 있었기 때문에 진땀이 났다.
고개를 푸욱 숙이고 어쩔 줄 몰랐다.
한참을 내려다보시던 선생님은 의외로 나무라지도 않고 알 수 없는 미소만 남기고 떠나셨다.
어린 나이였지만 물받이 고리를 부수고 있는 일보다
당신이 낸 숙제에 대한 노력의 값어치를 더 주시는구나 하는 영악한 판단도 나는 했다.
선생님과 나는 이미 공범이 되어 있었다.
해는 탄금대 뒷산에 석류 빛 노을로 물들이고 있었다.
선생님의 미소에 힘을 얻은 나는 땀으로 뒤범벅이 된 채로 끝내 물받이 고리를 떼어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의 뜻을 읽어주시고 나무라지도 않고 말없이 웃어 주시던 선생님의 모습은
지금껏 살아오면서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가장 아름다운 미소였다.
선생님은 이런 사실을 기억이나 하실까?
모두가 잠든 밤,
모니터에서 울려나오는 비틀즈의 예스터데이의 음률과 함께
지금도 그 영롱한 트라이앵글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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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초등학교 은사님이 아직도 살아 계시기에 동심으로 돌아가
선생님께 드린 편지를 글로 만들어 보았습니다.문우들로 부터
옛 스러운 글을 쓰고,글이 진부 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제는 동화 같은 글을 써보고 싶습니다.글 쓴이가,....
..
옛 이야기는 동화 같아 좋습니다
일기 같아 좋고요
그 시절을 되돌리는 필름처럼요
류장우 작가님의 악동 기질이 다분히 보이시네요
비틀즈를 특히 좋아하시나 봐요
다시 와서 볼게요
세살 버릇 여든 간다고 역씨나 울 선생님 보는 눈이 정확합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헌 갓쟁이'란 말을 아시는지요.파락호,..
조혼시절 엄마 15에 아부지 17에 결혼 하셔 용천바위 에 빌어 15년
만에 날 낳으시니 때를 쓰면 다 들어 주어야 울음을 그치니 나를 헌 갓쟁이라
불렀습니다.그리고 믿음을 주셨습니다.그 믿음이 한다면 해야 한다는 아이로
키워 주셨는 것 같습니다.지금도 '헌 갓쟁이,악동' 맞습니다.
클 났네요. 어찌하다 악동을 만나셨군요.ㅎㅎㅎㅎ.
예스터 데이 즐겨 부르는 노래입니다.
너무나 오래된 이야기를 어떻게 이렇게 까지나
세세하게 기억하실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역시나 오래 전에 작성한 원고 바탕이 되었군요
이 방에 게시된 류장우님의 몇 편의 작품을 읽어 보면서
엄청 많이 놀랐습니다.
글을 읽어 보면 저보다 훨씬 연세가 많으신데도
어찌 이렇게 여전히 낭만적이시고
물흐르듯이 글을 엮어 나가시는 지요?
좋은 글에 잘 머물다 갑니다
늘 즐필하시고
청안하시길 빕니다
청운님 고맙습니다.글 쓰기가 어렵다는 것,안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늦깍이로 글을 쓴다고 덤벼들어 몇 편의 글을 쓰고난 다음 '이제 부터는
글을 쓰라고 하면 더는 못 쓰겠다.'고 항복을 했었습니다.
고뇌의 산물 입니다.글을 쓴다고 생각만 해도 몸살을 앓아야 합니다.
이 건 이래서 안 되고,이래서 싫고 허둥댑니다.유연한 청운님의 글에서
연륜을 느꼈습니다. 격려의 말씀으로 새기며 힘들어도 써야 하겠습니다.
저 역시 등단한 작가는 아니지만
글쓰는 작업이 어렵다는 것은 확실하게 인정합니다
가끔 넋두리를 낙서 비슷하게 남기는데
그나마도 이렇게 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만 같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몇 줄 끄적이게 되는 것 같습니다.
풍부한 경험과 연륜이 쌓여 인간미가 물씬 풍기는 선생님의 글 너무 멋지십니다
자주 뵐 수 있기를 간청하오며 늘 청안하십시오
요즘 문예지에서경영을 위하여 다투어 시인,작가들을 만들어 내어 지탄을 받지만
등단은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마음의 자세가 달라 집니다.많이 써야 합니다.막상
등단을 하고 철이 들면 글 쓰기가 두려워 글을 못 쓰게 됨을 경험하게 됩니다.
저는 엉터리 등단을 거쳤기에 절실하게 느낍니다.고맙습니다.
저도 등단의 요청을 받은 지는 상당히 오래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최근에는 문단이나 출판사가 경영을 위하여 무작위로
등단을 시켜주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것 같아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한 번 등단을 하게 되면 닉처럼 평생을 따라다니는 것이 현실이지요
전 본업이 작가도 아니고
인쇄나 활자의 매력에 휘감겨서 쓰는 글도 아니고
당면한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 쓰는 글도 더욱 아닙니다.
좋은 글을 많이 쓰고 싶지만 당면한 현실에서는 많은 한계가 있는 것 같고
아직은 그럴 필요성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인 것 같습니다
가르침 고맙습니다
인터넷이 발달되고 LED 광고가 확산되는 이 즈음 태그나 색상에도 많은 변화가 왔네요
작품을 게제할 때 무태그보다는 영상과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여지는 지금
선생님의 트라이앵글 무척 유의미합니다
처음 이 작품을 만났을 때 참 이색적이고 특이하고 특별하다 느꼈습니다
감사하며 제 카페와 제 블로그로 모셔 갑니다
선생님 늘 고맙습니다
행복하시고 기운 업 업 하세요~
잘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