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의 목마와 권력의 용광로:
비애감을 넘어 깨어있는 시민으로
얼마 전 영화 《오디세이》를 보고 느낀 깊은 소감을 블로그에 남겼다. 트로이 전쟁의 승리가 안겨준 그 찬란한 명분 뒤편에 얼마나 잔혹한 약탈과 '반-크세니아(환대 거부)'의 비극이 숨어 있었는지, 그리고 인간의 삶이란 선과 악의 선택이 아니라 두 개의 악 사이에서 '차악'을 찾아 신음하는 여정임을 나눴다.
그런데 영화가 던진 화두는 스크린 속에만 머물지 않았다. 최근 내가 목도하고 있는 정치 현장 역시 영화 속 트로이의 폐허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1. 칭찬과 권력이라는 시험대, '도끼마조(δοκιμάζω)'
얼마 전까지 국가적 위기와 내란의 혼란 속에서 용기를 내고 헌신했던 정치인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그들의 행동이 대의와 양심에 따른 정의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대표 선거를 앞두고 둘로 갈라서서 서로를 향해 거친 비방을 쏟아내는 모습을 보며 가슴 깊은 곳에서 서글픈 비애감이 밀려왔다. '그들 역시 결국 대의라는 탈 뒤에 욕망을 숨기고 있었던가?'
이 모습을 보며 헬라어 동사 ‘도끼마조(δοκιμάζω)’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금이나 은을 불에 달구어 그것이 진짜(진품)인지 가짜(도금)인지를 검증한다는 뜻이다.
거대한 악에 맞설 때는 누구나 쉽게 정의의 옷을 입을 수 있다. 그때의 정의는 아직 불에 달구어지기 전이다. 그러나 위기가 지나고 권력과 이익이라는 진짜 시험대가 찾아올 때, 비로소 그가 붙들던 정의가 진짜 금(δόκιμος)이었는지 아니면 권력을 향한 도금된 욕망이었는지가 적나라하게 검증(δοκιμάζω)된다.
"도가니로 은을, 용광로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검증)하느라"
— 잠언 27장 21절
큰 성과에 따른 국민적 칭찬과 눈앞에 다가온 권력은, 인간의 가장 깊은 본성과 위선을 파헤쳐 드러내는 무서운 용광로 역할을 한다.
2. 승리자라는 왕관 뒤에 숨은 '반-크세니아'의 비극
영화 《오디세이》에서 트로이를 무너뜨린 오디세우스와 그리스 연합군은 승전가를 불렀다. 그러나 승리 직후 그들은 나그네를 대접하는 제우스의 법인 '크세니아(환대)'를 어기고 무자비한 약탈자로 변질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10년간의 처절한 방랑과 신들의 심판이었다.
정치 현장도 마찬가지다. '정의의 승리자'라는 왕관을 쓰자마자 스스로 권력의 늪으로 걸어 들어가는 비극이 반복된다.
우리는 흔히 '내가 지지하는 집단은 절대적 선(善)이고, 상대는 악(惡)'이라는 이분법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권력의 속성 자체가 이미 타락의 씨앗을 품고 있다. 정치인이라는 존재 역시 두 개의 악 사이에서 고민하는 한계 속 인간일 뿐이다.
3. 환멸을 넘어: 깨어있는 시민의 '키(Rudder)'를 잡고
그렇다면 우리는 이 정치적 파산과 분열 앞에서 그저 환멸을 느끼고 절망해야 할까?
아니다. 이 비애감이야말로 우리를 '맹목적 팬덤'에서 '깨어있는 양심의 파수꾼'으로 바로 세우는 거룩한 가시가 되어야 한다.
우상화의 종말과 냉정한 감시:
어떤 정치인이나 정당도 완벽한 구원자가 될 수 없음을 깨달을 때, 비로소 시민은 맹목적 지지를 거두고 냉철한 감시자로 바로 선다.
진짜(δόκιμος)를 가려내는 안목:
권력을 향해 으르렁거리는 소음 속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이익이 아닌 '시민을 향한 환대와 절제'를 지키는 진짜 정치인이 누구인지 가려내는 눈이 비로소 열린다.
영화 속 거센 풍랑과 절망 속에서 동료들이 신들에게 맹목적으로 절규할 때, 오디세우스는 자신이 붙든 배의 키를 끝까지 놓지 않았다.
정치인들이 보여주는 도덕적 파산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가 끝까지 붙들어야 할 키는 바로 "우리의 양심과 인문학적·성경적 기준"이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들 것인가?"
이 고귀한 질문을 정치인들의 손에 전적으로 위임할 수 없음을 재확인한다. 권력의 용광로 속에서 가짜들이 떨어져 나갈 때, 끝까지 키를 잡고 파도를 헤쳐 나가는 것은 바로 깨어있는 우리 시민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