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기 중엽, 장수왕의 고구려와 개로왕의 백제는 비옥한 한강 유역을 두고 명운을 건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장수왕은 427년 남진정책을 펴며 백제를 압박했다. 백제는 국가의 중심축인 한강 유역을 상실하면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되므로, 신라와 동맹을 강화하는 한편 중국의 북위에 고구려를 협공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 대한 공세를 취할 여력이 없었던 북위는 백제의 제안을 거부한다. 화난 개로왕은 북위와의 외교관계를 끊는 악수를 두었다. 고구려로서는 배후의 북위나 송이 위협이 되지 않자 마음 놓고 백제 공략에 나섰다. 그러나 재위 60년이 넘은 장수왕은 노련했다. 그는 당장 군사를 일으키는 것보다 백제의 국력을 약화시킬 공작에 먼저 착수한다. 그리고는 공작을 담당할 간첩을 구했다. 이때 등장한 스파이가 고구려 승려 도림이었다.
< 개로왕을 노린 간첩 승려, 도림 >
도림은 승려였음에도 스파이로서 이렇게 출사표를 던졌다.
“소승은 전부터 도는 알지 못하므로 나라의 은혜나 갚으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신을 불초하게 여기지 마시고 저에게 지시하여 시키신다면 기필코 임금님의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장수왕은 기뻐하며 도림을 백제를 속일 공작원으로 은밀히 파견했다. 도림은 박제상과 마찬가지로 고구려에 죄를 짓고 피신하는 척하며 백제로 들어갔다. 도림은 이미 개로왕의 성향을 탐지하고 있었다. 개로왕은 바로 장기와 바둑을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림은 백제의 대궐 수문장에게 부탁했다.
“신은 젊을 때부터 바둑을 배워서 자못 묘수(妙手)가 되었는데 왕에게 아뢰어주기 바랍니다.”
이런 몇 마디 말을 들어줄 수문장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도림은 수문장에게 뇌물을 썼을 것이다. 개로왕이 도림을 불러 바둑을 둬보니 과연 국수의 실력이었다. 바둑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했던가.
개로왕은 일개 승려에 불과한 도림을 높여 상객(上客)으로 삼고는 수시로 대국했다. 개로왕은 도림을 뒤늦게 만난 것을 한탄할 정도로 그에게 빠져들었다. 이제 도림은 바둑친구만이 아니라 개로왕의 신임을 받는 측근의 위치에까지 도달했다. 요즘 접대 골프로 출세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처럼 접대 대국으로 왕의 측근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바둑의 마력은 오늘날의 골프에 못지 않았던 듯하다.
어느날 도림은 개로왕과 독대하여 조용히 말했다.
“신은 다른 나라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임금께서는 소외하지 않으셨고, 은혜가 매우 후하셨는데, 저는 다만 한 가지 기능만으로 섬겼을 뿐이요, 일찍이 조그만 이익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지금 한 말씀 드릴까 하온데 임금의 의사가 어떠실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자 도림에 빠져 있던 개로왕은 흔쾌히 말했다.
“다만 말만 하오. 만약 나라에 이익이 있다면 이는 법사에게 바라는 바이오.”
이제 도림이 회심의 일타를 날릴 차례였다.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악과 하해(河海)이니, 이것은 하늘이 만든 험지이며 사람의 힘으로 된 형승지(形勝地)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방의 나라들이 감히 엿볼 생각을 둘 수 없사오며, 다만 받들어 섬기기를 원하기에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왕은 마땅히 숭고한 형세와 부유한 실적으로써 다른 사람의 눈·귀를 움직이게 할 것인데도 궁실을 수리하지 않고, 선왕의 해골은 임시로 땅 위에 모셔 놓았으며, 백성들의 가옥은 여러 번 하류(河流)에 무너졌으니 신은 감히 대왕을 위하여 찬성할 수 없습니다.”
개로왕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옳소. 내가 장차 이 일을 할 것이오.”
< 백성 징발해 대규모 토목공사 벌이게 해 >
개로왕은 나랏사람들을 모두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 그 안에 궁실과 누각·정자를 웅장하고 화려하게 세웠다. 거석을 욱리하에서 가져다가 곽을 만들어 아버지의 유골을 장사지냈다. 또한 강물을 따라 거대한 제방을 세우는 토목공사를 벌였다. 대규모 공사를 벌이느라 국고는 텅 비고 인민은 곤궁해져 국력은 피폐해졌다.
‘간사모략.’ 간첩을 파견해 최고권력자에게 한껏 아첨을 떨어 판단을 흐리게 하는 계책에 개로왕은 당했던 것이다. 일생의 취미인 바둑 친구가 되어 달콤하기 그지없는 ‘충언’을 읊조리니, 성질 급하고 과시하기 좋아하는 개로왕으로서는 안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것도 진심으로 백제와 개로왕을 위하는 듯한 모양새를 띠고 있으니 그 속마음을 알아차리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스파이로서 간신의 전형적 행태를 훌륭하게 연기한 도림은 백제의 국력이 피폐해진 것을 확인하고는 고구려로 탈출했다. 장수왕은 도림의 보고를 받고 크게 기뻐하면서 곧 출정을 준비했다.
개로왕은 도림의 탈출과 고구려군의 침략 소식을 듣고 아들 문주왕에게 통한의 말을 남긴다.
“내가 어리석고 밝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듣고 이 지경에 이르렀다. 백성은 쇠잔하고 군사는 약하니 비록 위태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누가 즐거이 나를 위하여 힘을 다해 싸워주겠느냐? 나는 마땅히 나라를 위하여 죽겠지만, 너는 이곳에 있어 함께 죽으면 나라에 이익이 없을 것이니 어찌 난을 피하여 나라의 계통을 계승하지 않겠느냐?”
개로왕은 아들 문주왕을 신라로 보내고 자신은 장수왕이 이끄는 3만 명의 고구려군을 맞아 싸웠다. 그러나 중과부적. 이레 만에 성을 내주고는 탈출을 기도하다 포로가 된 뒤 죽음을 당했다. 이때 백제 사람 8천명이 포로로 끌려갔다. 비록 아들 문주가 신라의 구원병을 이끌고와 멸망을 면했지만 백제는 고구려의 침략을 피해 수도를 웅진(공주)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오랜 세월 백제의 터전이었던 한강 유역도 고구려의 몫이 되었다. 개로왕의 ‘간신탐닉’에 백제는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셈이다. 475년에 일어난 일이었다.
< 고구려 멸망 불러온 내부 간신 >
그러나 도림과 같은 ‘공작원 간신’(물론 고구려 입장에서 도림은 대단한 충신이다)보다 무서운 것은 역시 내부의 간신이다. 비록 도림 때문에 궤멸적 타격을 입었지만 백제는 뼈저린 반성을 하고 다시 국력을 추슬러 그 뒤에도 2백년을 더 영위했다. 외부의 간신이기 때문에 안으로 곪아 부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조직은 외부의 영향보다도 내부의 분열과 부패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된다. 외부의 공세는 단지 계기적 요인에 불과할 때가 많다.
이런 점에서 고구려 멸망의 원인을 짚어볼 수 있다. 잘 알다시피 고구려는 11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왔던 수나라를 수차례 완전 격퇴했다. 또 연개소문 시절에는 ‘정관의 치’로 유명한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당나라 최고의 실력을 갖춘 황제인 당태종이 이끄는 30만 명의 강력한 군대를 패퇴시킨 것이다.
당태종은 아예 고구려 정벌 중지와 앞으로도 침략에 나서지 말 것을 아들 고종에게 유언으로 남기기도 했다. 그럼에도 당 고종은 고구려 침공을 단행했고, 그 결과는 고구려의 멸망이었다. 공교롭게도 당 고종 이치는 유약하기 그지없는 인물이었고, 황후인 측천무후의 치마폭에 싸여 살았다. 재미있는 것은 측천무후는 고구려 공격에 소극적인 데 반해 유약한 당고종은 이때만큼은 자신이 주도적으로 나섰다는 사실이다. 그래서였는지 일본의 중국계 역사소설가 진순신은 당고종의 고구려 침공 성공을 ‘역사의 아이러니’라고까지 평한 바 있다.
“천군만마(千軍萬馬)의 태종이 해결하지 못한 고구려 평정이 그가 미더워하지 않았던 심약한 고종(高宗) 이치(李治)의 시대에 뜻밖에 잘 해결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당태종도 공략에 실패했던 고구려가 유약한 고종에게 당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혹자는 고구려의 강성일변도 외교에 그 원인을 두기도 하고 나당연합군 결성으로 당나라의 군수품 보급이 수월해졌던 것으로 꼽기도 한다.
하지만 필자는 666년 사망한 연개소문의 삼형제, 남생·남건·남산의 분열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막리지가 되어 1인자로 권력을 승계한 장남 남생이 있었지만 동생들과의 역할 분담이 불명확했다. 남생이 막리지가 되어 처음으로 지방의 여러 성을 순시할 때 수도에서의 뒷일을 부탁받은 남건·남산 형제 사이에서 어떤 자가 이간질을 했다.
“남생이 두 아우가 자기를 핍박하는 걸 싫어해서 제거하려고 생각하고 있으니 먼저 계획하는 것만 못합니다.”
두 아우는 이간질하는 이 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남생에게도 이간질을 하는 자가 있었다.
“두 아우는 형이 그 권력을 빼앗을까 두려워하여, 형을 막아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남생은 의심이 들었다. 남생은 친한 사람을 평양에 몰래 보내 상황을 엿보게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 이들 정탐꾼이 잡혔다. 이에 보장왕은 남생을 소환했다. 남생은 감히 돌아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남건은 스스로 막리지가 된 뒤 군사를 내어 왕명을 거역한 남생 토벌에 나섰다. 남생은 아들 헌성이 있는 국내성으로 도망간 뒤 헌성을 당나라에 들여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 권력 내부 분열 노린 간신 모략 >
이 상황에서 고구려와 당의 싸움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국력을 다 바쳐 싸워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권력의 핵심에서 일어난 분란은 그만큼 치명적이었다. 막리지로서 고급 정보와 자체 군사력을 보유했던 남생과 그 아들 헌성은 당나라 군대의 길잡이가 되어 고구려 침공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662년, 연개소문 때 당의 백주자사 방효태가 이끄는 당군을 전멸시켰던 고구려의 군사력도 분열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고구려 멸망의 첫 단추는 연개소문의 3형제를 이간질한 자들에 의해 끼워졌던 것이다. 그런데 이간질하던 이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삼국사기>는 이들을 일러 간첩이라고 하지 않았다. 추측컨대 그들은 아마도 권력을 분점하고 있던 연씨 형제 사이에 끼어들어 한몫 잡으려 들었던 자들이었을 것이다. 통상 군사적 모략에서는 적의 내부를 이간질시키는 간첩술을 쓴다. 항우의 책사였던 범증이 유방 측의 이간술에 휘말려 항우 진영을 떠나야 했던 것이 대표적이다. 지략가가 사라진 항우가 열세에 처하게 된 건 당연했다.
그런데 고구려의 경우는 상대방의 전술이 아니라 권세를 탐하는 내부 간신들의 이간질 때문에 굳건한 방비태세에 결정적 틈이 생기고 말았다. 백제 역시 왕자인 부여풍과 부여융의 분열이 패망의 한 원인이었다. 충신인 성충 대신 간신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 의자왕의 간신 탐닉이 결정적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흔히 ‘측근’이니 ‘가신’이니 하며 권력의 단맛을 취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조그만 권력을 지키기 위해 조직에 암적인 ‘이간질세포’를 증식시킨다. 아무리 잘 나가는 기업이든 나라든 이간질하는 간신을 제어하지 못하면 한순간에 망한다. 조직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은 외부가 아니 내부적 요인 때문에 발생한다. 그래서 이간질을 획책하는 경쟁조직의 공작보다 내부의 이간질이 조직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치명상이다. 부지런한 간신의 부식을 어떻게 막아야 할 것인가? 끊임없는 자기 부정과 커뮤니케이션의 활성화가 항암제 역할을 하지 않을까?최용범/ 역사작가 gaji1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