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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1일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아침기도
7월 31일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저녁기도
7월 31일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저녁기도 후 끝기도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
1491년 스페인 로욜라에서 태어났다. 처음에 궁정과 군대에서 생활하다가 하느님께 헌신했다. 파리에서 신학 공부를 마치고 자기 주위에 동료들을 모아 그들과 함께 로마에 가서 예수회를 창립했다. 저술과 제자 교육으로 훌륭한 사도직을 수행하였으며, 그 제자들은 교회 개혁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1556년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다.
여러분의 영이 과연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시험해 보십시오
이냐시오는 유명한 사람들의 비상한 행적을 기록한 저속하고 공상적인 책을 즐겨 읽었다. 병세가 많이 호전되었다고 느꼈을 때 무료한 시간을 달래고자 그런 책을 갖다 달라고 했다. 그러나 요양하고 있던 집에는 그런 책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 모국어로 된 [그리스도의 생애]라는 책과 [성인들의 꽃]이라는 책을 그에게 주었다.
이 두 권의 책을 자주 읽으면서 그 책에 담긴 내용에 어떤 공감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 책에서 마음을 떼어 전에 늘 읽던 그런 저속한 이야기로 생각을 돌리고 또 어떤 때는 그 생각에다 마음까지 돌리곤 했다. 마음속에 이런 무절제한 생각들이 나타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는 가까이 있었다. 그는 자기가 최근에 읽은 책의 영향으로 이런 생각들을 지금의 생각에다 굴복시켰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생애를 읽으면서 자주 자신에게 말하며 이렇게 생각했다. "복된 프란치스꼬와 도미니꼬가 한 것을 나도 한다면?" 그의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오랫동안 맴돌았다. 이런 생각은 얼마 동안 지속되었지만 다른 것들이 끼어 들어와 이전의 저속하고 공상적인 생각들이 되살아나곤 하여 그것들도 오래 지속되었다. 이렇게 꽤 오랫동안 두 가지 생각이 그의 마음속에서 교차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생각 사이에는 하나의 차이점이 있었다. 그가 저속한 생각을 가지고 즐기는 동안 그 순간에는 큰 기쁨을 느꼈지만 그 생각에 싫증을 느껴 흘려 버리고 나면 슬픔과 공허를 느꼈다. 한편 성인들이 실천했던 고행의 생활을 생각할 때 느낀 기쁨은 생각하는 중에만이 아니라 생각을 마친 후에도 계속 남아 있었다. 이냐시오는 이 차이점을 보기는 했지만 그에 대해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마침 어느 날 영혼의 눈이 활짝 열려 이 차이점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체험에서 어떤 생각들은 슬픔을 주고 또 다른 생각들은 기쁨을 준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이 그가 하느님의 것에 관해 도달한 첫 중요한 결론이었다. 훗날 자신이 '영신 수련'을 할 때 이 체험은 자기 제자들에게 준 '영의 식별력'이라는 가르침의 출발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44. 수도회 창설자편 (5) 성 이냐시오(상)
기사의 검 성모마리아께 봉헌
『영혼의 영원한 복락을 위한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이 주는 중요성은 지난 3세기 동안 증명되었으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의 증거, 다시 말해서 짧은 시간에 고행의 길과 경건함의 실행을 스스로 구분할 수 있게 되는 증거에서 증명되었습니다』(교황 레오 13세).
「예수회」 창설자이면서 그리스도교 영성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영신수련」 저술을 통해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성의 깊이를 심화시켜 주고 있는 영신수련의 수호성인 로욜라의 이냐시오(1491∼1556).
무엇보다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은 예수회 영성의 유산인 동시에 기도의 지침서 역할을 해왔으며 회원들은 이를 통해 구세사의 신비를 보다 깊이 꿰뚫어 볼 수 있는 식견을 지니면서 세상의 사도로 살아가는 능력을 키울 수 있었다.
예수회의 사도직은 이러한 「영신수련」의 정신과 함께 「활동하는 가운데 관상하는」(Contemplativus in actione) 성소에 힘입어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활동중 관상」이라는 그의 영성은 교회안에서 평신도들의 역할이 점차 커지고 있는 시대적 상황에서 신앙과 생활을 통합시켜 줄 수 있는 평신도 영성의 중요한 포인트로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이냐시오는 1491년 스페인 키푸스코아 지방의 아스페이티아읍 위쪽 로욜라 성에서 벨드란 이바네즈와 마리나 사에즈의 막내로 태어났다.
로욜라 가문은 바스크 지역의 귀푸즈콰 지방의 부농들 중 하나로서14세기 이래로 귀족의 계급에 올라 있었다. 당시 귀족들이 카스틸리엔 왕가에서 공을 쌓아 부와 명예를 넓혀가려 힘썼던 상황에서 바스크 지역 출신이고 카스틸리엔 궁중 기사 출신이라는 그의 성장 배경은 훗날 수도회 총장으로 사는 삶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역사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즉 예수회의 이념을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라고 설정한 그의 이상은 「좀 더 높고 위대한 큰 일들」을 추구했던 기사도 정신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13세 되던해 아버지를 여의고 당시 궁정 재무를 담당했던 친척 돈 후안 벨라즈퀘즈 드 궤라의 집으로 가게 됐던 이냐시오는 그의 아이들과 함께 교육을 받으며 궁정 기사로서의 소양을 익혔고 또 왕가 문서국에서 일하기 위한 자질을 익혔다.
이 시기에 이냐시오는 세속적인 것과 영성적인 것의 극단의 다른 두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데 그 하나는 프란치스코수도회 정신에 따른 전통과 직접적 관계를 맺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르네상스의 정신을 대면하게 된 것이다. 이냐시오는 후에 이때부터 방탕하고 무절제한 생활을 했다고 고백했는데 그런 고백만큼 그는 최신 유행 헤어스타일과 새로운 의상을 즐겼으며 격투기 같은 것에도 큰 관심을 보였고 궁중내 수많은 여성들과도 염문을 뿌렸다.
이냐시오가 이러한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은 벨라즈퀘즈 데 궤라 가문이 몰락하고 1517년 군에 입대하게 되면서다.
날아든 포탄 파편으로 한쪽 다리에 큰 상처를 입었던 그는 수술후 회복기를 갖는 동안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책을 고르다 신심 깊은 형수가 지니고 있었던 루돌프 폰 삭센의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인전」을 접하게 됐다.
기사들의 영웅담이나 연애 소설에 길들여져 있던 이냐시오에게 이러한 신심 서적은 아주 낯설은 것이었으나 내용을 접할수록 그 깊이에 빠져 들었고 마침내 자신의 삶의 방향을 심각하게 생각하게 됐다.
기사로서의 공상들은 자신을 황폐하게 만들 뿐이며 아무런 대가도 만족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됐고 성인들의 모범을 따르는 삶만이 기쁨과 평화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됐다. 또 앞의 것은 세상에 속한 것이었고 후자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느끼게 됐다.
이런 즈음에 그는 아기 예수님를 안고 계신 성모 마리아의 환시를 체험했으며 지난 날의 생활에 대한 심한 혐오감을 느꼈다. 이에 커다란 위안을 얻은 이냐시오는 마침내 성인들이 살아간 것처럼 채소만 먹고 엄격한 고행을 하면서 맨발로 예루살렘을 순례하기로 결정했다. 회심의 길로 들어선 것이었다.
이후부터 이냐시오의 내면 세계는 점차 변해갔다. 예루살렘 순례를 위해 조금씩 준비를 해나갔고 기도 독서와 함께 예수의 생애와 성인들의 삶을 따라가는데 필요한 중요한 것들을 세심하게 기록해 나갔다.
1522년 로욜라 성을 떠난 이냐시오는 당시 중요 성지 순례지중 하나였던 「몽세라」에서 총 고해성사를 했으며 자신이 입고 있던 기사의 갑옷과 무장을 거지에게 주고 대신 포대로 짠 두루마기를 걸쳤다. 그리고 기사의 상징인 장검과 단검을 성모마리아께 봉헌했다.
[가톨릭신문, 2005년 1월 16일, 이주연 기자]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46. 수도회 창설자편 (5) 성 이냐시오(하)
이냐시오와 동료들은 자신들을 「예수회」라고 불렀으며, 「예수회 기본법」을 작성해 1539년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잠정 인가를 받았다.
영혼 돕기 위한 영적활동 펼쳐 뜻맞는 이들과 예수회 설립
1522년 3월 25일 몽세라에서 약 15km 떨어진 만레사(Mannresa) 마을 근처의 동굴로 거처를 옮긴 이냐시오는 이때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신한다. 기도와 극기와 명상에 몰입하였으며 구걸로 생계를 꾸려갔다.
거친 음식으로 연명하며 미사와 성무일도를 드리는 것 외에는 하루에 7시간 동안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생활을 했던 그는 자신의 지난 죄들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면서 고행을 했고 그러한 경험들은 「영신수련」을 저술하는 기본적 토대가 되었다.
이듬해 2월 이냐시오는 예루살렘을 향해 길을 떠났다. 여러 차례의 폭풍을 만나야 했고 전쟁과 페스트가 난무한 지역들을 통과해야 하는 등 1년여 이상의 노력을 들이는 어려운 과정이었다.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는 것 자체가 무모한 일로 여겨졌던 당시 상황에서 이를 감행한 내적 동기에 대해 이냐시오는 『나를 위해 인간이 되신 예수를 알아 그를 사랑하고 따르고자 한 것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예루살렘에 계속 남아 사람들의 영혼을 돕고자 했으나 전쟁으로 인한 위험한 상황 때문에 성지 관리를 담당하고 있던 교회 장상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요청했고 말을 듣지 않으면 파문에 처하겠다는 위협을 가해오자 이냐시오는 팔레스티나에 영원히 머물면서 사람들의 영혼을 돕고자 했던 뜻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예루살렘을 떠나며 이냐시오가 결심한 것은 「영혼들을 돕기 위해 일정 기간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 바르셀로나에서 라틴어 공부를 시작으로 연학(硏學)에 돌입한 이냐시오는 이후 알칼라 대학, 살라망카 대학을 거쳐 파리에서 학교를 다니는 등 11년 동안의 공부 기간을 가졌다.
공부에 대한 열망과 함께 가난한 사도로서 사는 삶을 동경했던 이냐시오는 만레사에서 영적 상담을 시작했는데 무엇보다 자신이 체험한 것으로써 다른 사람을 도우려는 시도였다.
이냐시오의 그러한 활동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고 종교 재판관들의 오해를 불러일으켜 살라망카 파리 베네치아 로마 등에서 수차례 구속 심문 재판을 받는 과정이 이어졌다.
알칼라에서는 두달간 감옥 생활을 했고 또 동료와 함께 사슬로 발이 묶인채 감옥에 갖히는 일도 있었다. 파리에서는 성 바르나바 대학의 학장에게 공개적으로 매질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오히려 이냐시오를 더욱 굳건히 단련시켜 주는 계기를 만들었다.
한편 이냐시오는 공부를 하는 동안 여러 동료들과 함께 단체를 설립하는데 관심을 가졌다. 뜻이 맞는 동료들끼리 서로 도우며 활동하게 되면 영혼들을 돕는데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확신을 지니게 됐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동료가 된 사람은 사보옌 출신의 페테르 파베르와 나바라 출신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였다. 그리고 포르투칼 출신의 시몬 로드리게즈와 스페인 출신의 디에고 라이네츠 등이 합류했다.
1537년 6월 24일 동료들과 함께 베네치아에서 사제품을 받은 이냐시오는 그해 겨울 동료들과 함께 교황을 만나기 위해 로마로 갔는데 이때 로마 근교 라 스토르타(La Storta)라는 마을 경당에서 환시를 체험했다. 성부께서 이냐시오를 예수 그리스도와 한자리에 있게 해주시고 「내가 로마에서 너희에게 호의를 보여주리라」는 내용이었다.
이냐시오와 동료들이 자신들을 「예수회」(Compania de Jesus, 예수의 동반자)로 부르는 가운데 「예수회 기본법」을 작성한 이냐시오는 1539년 9월 3일 교황으로부터 잠정 허가를 받는 한편 1540년 9월 27일에는 예수회 창립을 확인하는 교황 교서가 발표됐다.
그 이듬해 4월 초대 총장으로 선출된 이냐시오는 4월 22일 동료들과 함께 로마 바오로 대성전에서 장엄 서원을 했다.
1541년부터 이냐시오가 선종하던 해인 1566년까지 예수회는 사도적 활동에서 많은 열매를 맺었고, 회원수는 이미 1000명에 육박하는 왕성한 성장세를 보였다.
이냐시오는 총장 선출후 많은 편지를 썼던 것으로 알려진다.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는 6000여통의 편지들은 수도회내의 내 외적 성장과 관련된 사항들을 비롯 교회 쇄신에 관한 것들이 많았다. 수신자들은 당시 시대를 이끌어 가던 사람들, 추기경들 그리고 주교들이었으며 무엇보다 각지에 흩어져 사도적 활동과 영적 생활에 전념하고 있던 동료들이 주 대상이었다.
1556년 7월 31일 로마에서 열병으로 세상을 떠난 이냐시오는 1609년 12월 3일 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해 시복됐고 1622년 3월 12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해 시성됐다.
그가 설립한 예수회는 현재 최대 규모의 수도회로서 2만여명 회원들이 127개국에서 활동중이다. 회원들중 복자 성인품에 오른 이들도 많아 2005년 현재 복자가 146명, 성인이 48명이다.
[가톨릭신문, 2005년 1월 23일, 이주연 기자]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생애
16세기의 유럽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무척 혼란했고 교회 역시 신음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종교개혁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될 역사적 시기에 있었다.
당시 이니고 로페즈 데 로욜라로 알려졌던 성 이냐시오는 스페인의 명문 귀족 바스크 가문에서 태어난 11남매 가운데 막내였다. 26살 때까지 그는 세속적인 허영에 몰두했고, 또 허무한 열망을 가지고 세상의 명예를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에 당시 나바르라 태수인 나헤라 공작의 군대에 입대하였다. 이 지역은 프랑스의 침공에 위협을 받고 있었으며, 1521년에 프랑스 군대가 스페인 국경선을 넘어 빰쁠로나로 침입해 들어 오자, 그는 성(城)을 사수하기 위하여 공격해 오는 프랑스 군대에 맞서 싸우다가 다리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 그의 용감함에 탄복한 프랑스 군인들은 이냐시오를 자신의 고향 로욜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이냐시오의 고통스러운 상처가 차츰 회복되면서, 그는 평소에 즐겨 읽던 무협소설 대신에 당시에 많이 읽혀지던 두 권의 영성 서적, 곧 '성인열전'과 '그리스도의 생애'를 읽고 지금까지 세상에서 헛된 명예와 영달을 얻기 위해 몸부림쳤던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고자 하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도를 위한 사랑에 불타 올라 그분께 일생을 바쳐 그리스도 교회를 위한 성실한 봉사자가 될 것을 결심한다.
그가 31세 되던 해에 그리스도께 봉사하고자 하는 강렬한 충동을 느끼면서 로욜라 성을 떠난다. 그 후 몽세라트의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머물고 있던 중, 1522년 3월 24일 밤중에, 그는 몰래 가난한 사람을 찾아가,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주고 그토록 입고 싶었던 순례자의 의복을 입었고, 자신의 검과 단도는 순례 성모성당에 있는 유명한 검은 성모제단에 봉헌하였다. 그 때부터 그는 전적으로 하느님에게 봉사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느님은 이냐시오 마음의 중심이었으며 그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상 생활의 사소한 일까지도 하느님을 위한 봉사로 바치고자 했다.
그 사건 이후 이냐시오는 몽세라트를 떠나 만레사에서 머물면서, 까르도넬 강가가 굽어보이는 동굴 안에서 기도와 극기로 1523년 2월까지 1년간의 세월을 보낸다. 또한 그는 고행과 문전 걸식을 하며 가시 돋힌 띠를 두르고 연일 단식을 하며 그리스도의 길을 체험해 갔다. 그는 영혼의 어두움 때문에 매우 우울하게 수 개월을 보내기도 하면서, 심지어 어떤 때는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암흑의 밤이 지나간 뒤에 그가 체험한 것은 영(靈)들의 다양성에 관한 것이었다. 이것을 체험한 이냐시오는 그가 말한데로 전혀 딴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먼저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의 첫 걸음으로 다른 사람을 돕기로 결심하였고, 이러한 그의 사도적 열성이 자신의 내부에서 강렬하게 불타 올랐다. 그리하여 그는 이 작은 도시 만레사를 떠나서, 하느님께 봉사하고 사람들을 돕는 일에 그의 사도직의 본질적 요소로 삼게 되었으며,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더 잘 봉사하기 위하여 그는 건전한 학문의 지식을 보충해야 할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나이 33살 때 되던 해에, 바르셀로나 고등학교에 들어가 자기보다 나이가 훨씬 어린 소년들과 함께 라틴어를 배운 후, 알칼라 대학에서 힘든 과목을 공부하는데 몰두하였다. 이 공부기간 동안에도 그는 만레사에서 체험한 '영신수련'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영적 도움을 주는데 헌신했다. 또한 1526년 대림시기부터 1527년 6월까지 키메네스 대학에서 인문학 공부를 할 때도 다른 이를 돕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1527년 6월 그는 알칼라를 떠나 살라망카로 갔다. 거기서 이냐시오는 아주 열렬한 복음주의자 였던 까닭에 종교 심문관은 그의 생활방법과 설교, 신학을 문제삼아, 여러번 그를 투옥하고 심문하였다. 살라망카에서도 그가 다른 이를 돕는 일이 금지되어 결국 그는 공부를 계속할 것을 결심하고 1528년 2월 파리로 갔다. 그가 42세 때까지 인문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1533년 3월 13일 문학 강의 자격에 합격한다.
그 당시 그는 파브로, 사비에르, 살메론, 라이네스, 보바딜랴, 로드리게스, 재이, 브로잇, 코르르들과 친분을 갖게 되어 그들을 영신수련을 통해 지도했다.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은 예수회 영성의 유산인 동시에 기도의 지침서이며, 구세사의 신비를 보다 깊이 꿰뚫어 볼 수 있도록 눈을 열어 주고, 우리가 세상의 사도로서 살아가도록 길러준다. 이러한 기도와 사도직의 지침서인 '영신수련'으로부터, '활동하는 가운데 관상하는' (Contemplativus in actione) 성소에 힘입어, 예수회의 사도직이 등장하는 것이다.
1534년 이냐시오는 파리에서 그의 동료들과 더불어 가난, 정결의 첫 허원을 했다. 1535년 4월 그는 대학공부를 끝내고 파리를 떠나 1537년 46세의 나이로 사제서품을 받았다. 1537년 그가 파브로와 라이네즈와 함께 로마로 가는 도중 라스토르타의 성당에서 환시를 보았기 때문에 그의 단체를 '예수의 동반자' (Compainions of Jesus) 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1539년 3월, 이냐시오와 그의 동반자들은 새로운 사도적 수도 단체 설립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들은 교황 바오로 3세에게 예수회 첫 회헌을 제출하여 약간의 수정이 가해진 후, 1546년 9월 27일 인가를 받았다. 이냐시오는 교황이 지시하면 무슨 일이든지 실천하며, 어느 곳에라도 갈 수 있는 기동성과 융통성을 가진 준비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1541년 4월 8일 초대 총장으로 이냐시오가 선출되었으며, 1556년 이냐시오가 돌아가실 때는 예수회원이 거의 1,000명에 이르렀고, 4대륙에 걸쳐 사도들이 파견되어 갔다.
[예수회 한국관구 홈페이지에서]
피정과 영신수련의 수호성인 성 이냐시오
예수회 설립자인 로욜라의 이냐시오(Ignatius) 성인은 1491년 스페인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군인으로서 명성과 행복을 누리고 있을 때인 1521년 전투에서 포탄에 맞아 다리를 다쳤다. 회복기에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인전을 읽으면서 큰 감명을 받고 자신을 그리스도께 봉헌하기로 결심하였다.
베네딕토 수도원을 순례하고, 기적이 일어났다는 성모 마리아의 상본 앞에 무릎을 꿇고 하룻밤을 기도로 지새운 다음 만레사 시에 가까운 동굴에서 고행의 복장으로 10개월 동안 기도와 명상, 극기의 생활을 하였다. 이 시기에 ‘영신 수련’을 저술하였다.
로마와 예루살렘을 탁발 여행하고 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한 그는 30대 중반에 어린 학생들에게 문법을 배우고 유럽의 여러 대학을 다니며 공부하였다. 1540년 9월에 설립한 예수회가 정식으로 인가된 뒤 교황의 명으로 15년 동안 총장직에 이다가 1556년 7월 31일 로마에서 덕행으로 장식된 영혼을 하느님께 바쳤다.
예수회는 교육사업과 성사의 중요성에 대한 재인식과 이교지역의 복음화를 통해 종교개혁으로 타격받은 가톨릭교회를 안으로부터 개혁하고 회복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영성생활은 예수회의 좌우명인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로 집약된다.
1622년에 시성되었고, 피정과 영성수련의 수호자인 동시에 군인과 만학도들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경향잡지, 2004년 11월호] |
독서기도 : http://info.catholic.or.kr/divine_office/default.asp?sunseo=1&gomonth=2014-07-31&type=re
삼시경 : http://info.catholic.or.kr/divine_office/default.asp?sunseo=1&gomonth=2014-07-31&type=mi1
육시경 : http://info.catholic.or.kr/divine_office/default.asp?sunseo=1&gomonth=2014-07-31&ype=mi2
구시경 : http://info.catholic.or.kr/divine_office/default.asp?sunseo=1&gomonth=2014-07-31&ype=mi3
다미아노 : http://cafe.daum.net/bbadaking/8Rf2/27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