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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막걸리 잔 마상배 馬上杯. 전쟁터나 주둔지에서 기마 생활을 하던 군인들이 말 위에서 술을 마실 때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
양은 대접부터 유리잔까지, 인정을 마시고 흥에 취하다
술잔은 맛과 향을 돋우면서 그 술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도구다. 소주는 소주잔에, 와인은 와인글라스에 마셔야 제격이다. 소주와 와인은 물론 청주, 맥주, 양주도 모두 제 잔을 가지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막걸리만 제 잔이 없다. 양은 대접도 좋고, ‘스뎅’ 그릇도 좋으며, 플라스틱도 괜찮고, 옹기나 백자 사발에 마셔도 좋다. 심지어 가정에서는 밥그릇이나 국그릇을 잔으로 쓴다.
막걸리가 제2의 전성기를 맞은 지금, 막걸리는 과연 어떤 잔에 마셔야 좋을까? ‘마구 거른 술’이란 이름에서 느껴지는 순박함처럼 정형화되지 않은 술, 막걸리는 담는 잔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1 신라 시대 토기 잔. 2, 3 고려 시대 청자 막걸리 잔인 흑백상감기사명팔각잔. 4 조선 시대 초엽에 사용하던 막걸리 잔. 5 막걸리 잔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양은 주전자와 잔. 6, 7, 8 막걸리 표준 잔 공모전에서 선정된 작품들. 9 고급 양식과 한식에도 어울리도록 고안한 ‘젠 ZEN 한국’의 만찬용 막걸리 건배 잔. 양은 대접부터 유리잔까지, 인정을 마시고 흥에 취하다. |
양은 주전자와 잔은 ‘정 情’이다
막걸리 전성기이던 1950~60년대에 유년기를 보낸 사람 중에는 술 받아 오는 심부름을 하다 자연스레 막걸리 맛을 익힌 이가 많다. 두 되들이 양은 주전자를 가득 채운 막걸리가 ‘무거워서’ 또는 아버지가 즐겨 마시는 막걸리 맛이 ‘궁금해서’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봤더니 ‘순하고 부드럽게 넘어갈뿐더러 뒷맛이 달콤해 자꾸 마시다 보니 결국 거나하게 취해 집에도 못 가고 논두렁에서 잠드는 바람에 어머니에게 야단맞았다는 레퍼토리가 흔하다. 커다란 양은 주전자와 막걸리는 찰떡궁합이다.
노란 양은 주전자에 그득 담긴 막걸리를 두고 함민복 시인은 그의 에세이집 <길들은 다 일가친척이다>에서 “막걸리는 무거워서 아랫사람한테 따를 때도 두 손으로 따라야 하는 술이여. 예의 바른 아니, 예의 가르치는 술이란 말이여”라고 말했다. 마을 잔치에서, 혹은 들일 나간 농부들이 새참을 먹은 뒤 한 사발씩 들이켜던 그 양은 주전자의 막걸리 속에는 사람에 대한 배려와 넉넉한 인심이 담겨 있었다.
‘스뎅’ 잔은 마음의 위안이다
우리나라 대폿집과 양조장을 돌아다니며 각 지방의 독특한 막걸리를 일일이 마셔본 뒤 그 맛과 정서를 기록해 일본에서 <맛코리노 다비>란 책을 출간한 출판 기획자 야마시타 다쓰오 씨(작가는 정은숙 씨로 우리나라에서는 <막걸리 기행>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그는 MBC의 <시사 매거진 2580>에서 “식당에서 혼자 대폿잔을 기울이는 어떤 아저씨의 모습이 너무 매력적이었어요. 좀 슬픈 느낌도 있고, 외로운 느낌도 있고. 저도 따라 해봤지만 그런 모습은 50대 이상이 아니면 안 되는 것 같더라고요”라는 말을 했다. 화면에는 어느 허름한 식당에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 ‘스뎅’ 잔을 기울이는 중년 남성의 모습이 비춰졌다. 야마시타 다쓰오 씨가 본 아저씨처럼 홀로 앉아 ‘스뎅’ 잔을 기울이던 남자는 막걸리 한잔에 위안을 얻고 있지 않았을까.
냉면 사발은 젊음이다
지금은 많이 사라진 전통, 고려대학교의 사발식에선 막걸리 잔으로 세숫대야만 한 냉면 사발이 동원되곤 했다고 한다. 사발에 막걸리를 들이붓고 선배가 먼저 시범을 보인 후, 후배들이 돌아가면서 한 사발씩 마시고 나면 “마셔도 고대답게 막걸리를 마셔라/ 맥주는 싱거우니 신촌골로 돌려라/ 부어라 마셔라 막걸리 취하도록/ 너도 먹고 나도 먹고 다 같이 마시자/ 고려대학교 막걸리 대학교/ 아! 고려대학교 막걸리 대학교/ 막걸리를 마셔도 고대답게 마셔라~”로 이어지는 ‘막걸리 찬가’를 우렁차게 불러 젖힐 수 있었다. 그때의 막걸리 사발은 어느 대학보다 견고한 결속력을 다지는 도구가 되었다.
농림수산식품부 주최 막걸리 표준 잔 공모전에서 선정된 작품 호월배. 잔에 술이 차오르면 초승달에서 보름달 모양으로 변한다. |
전용 잔 디자인으로 막걸리의 ‘격’을 높이다
21세기,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막걸리가 잔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특히 일본 시장에서 ‘막걸리는 유산균이 풍부해 미용에 좋으며 맛은 부드럽고 순하다’는 세련된 이미지가 굳어지면서 막걸리를 담는 잔과 병의 디자인도 변화하는 추세다.
다른 술과 달리 ‘잔’에 대한 연구 개발이 없던 막걸리를 위해 농림수산식품부에서 개최한 ‘막걸리 표준 잔 디자인 공모전’에서 당선된 8종의 잔은 백자, 청자, 유리 등 다양한 소재와 디자인을 자랑했다.